데이메이 황후

貞明皇后
1884년 6월 25일 ~ 1951년 5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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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이쇼 덴노의 황후이자 대마왕 쇼와 덴노의 어머니. 결혼 전 이름은 쿠죠 사다코(九條節子). 데이메이(貞明)라는 칭호는 사후에 정한 시호이기 때문에, 생전에는 사용한 적이 없다. 생전에는 사다코 사다코가 아니다.(…) 맏며느리에게라면 몰라도 황후, 사다코 태후로 불렸다.

2 출생과 친정 가문

1884년 6월 25일, 쿠죠 미치타카(九條道孝) 공작과 측실 노마 이쿠코(野馬幾子)의 4녀로 태어났다. 쿠죠 가문은 고셋케(五攝家)[1] 중 하나로, 데이메이 황후 외에도 에이쇼 황후(英昭皇后)[2]를 배출한 바 있다. 또한 데이메이 황후의 동복 언니 노리코(範子)는 방계 황족 야마시나노미야 키쿠마로(山階宮菊麿) 왕의 비가 되었다. 올케인 쿠죠 다케코(九條武子)는 '다이쇼 시대 3대 미인'[3] 중 하나이자 문학가이며, 불교미션스쿨인 교토여자대학[4][5]의 설립자이다. 오빠 미치자네(道實)는 덕혜옹주의 전남편인 소 다케유키의 후견인이다.[6]

3 성장

화족 사회의 관습에 따라, 갓 태어난 사다코는 학령이 될 때까지 다른 가정에 맡겨졌다. 도쿄 근교에 있었던 그 집은 농가였고, 어린 사다코는 농촌에서 뛰어놀면서 활달하고 씩씩하게 자라났다. '쿠죠 가문의 쿠로히메(黑姬)'라는 별명은, 그녀의 어린 시절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온종일 밖을 돌아다니며 새카맣게 그을릴 때까지 뛰어놀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 먹성도 좋아서, 식사 때 반찬으로 나온 생선은 내장까지 모두 먹어치울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건강함과 활달한 성격은 요시히토 황태자의 병약함과 대조되는 것이었고, 사다코가 황태자비로 간택되는 요인이 되었다.

1890년부터는 화족 여학교[7]에 입학하여 공부를 시작했다. 학창 시절에는 시모다 우타코(下田歌子), 이시이 후데코(石井筆子), 쓰다 우메코(津田梅子)[8] 등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4 황태자비 간택

1900년 2월 11일에 사다코는 만 15세의 나이로 5년 연상인 요시히토 황태자와 약혼하였고, 동년 5월 10일에 결혼식을 올려 황태자비가 되었다.

사다코 황태자비는 병약하고 유약하여 바보 취급을 받던 남편 요시히토 황태자를 직접 돌보아서 상태를 호전시켰으며, 부부 사이도 원만했다.

또한 오랫동안 정실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측실 소생으로 계승되어 오던 황실의 전통을 깨고, 건강한 아들을 4명이나 낳았다. 만 16세이던 1901년 4월 29일에 장남 미치노미야 히로히토 친왕을 낳았으며, 이후 3명의 아들을 더 낳았다. 그래서 요시히토 황태자는 굳이 측실을 둘 필요가 없었고, 아들을 4명이나 낳은 그녀의 입지는 굳건해졌다.

5 황후 시절

1912년 7월 30일에 시아버지 메이지 덴노가 사망하고, 남편 요시히토 황태자가 새 덴노로 즉위하면서 사다코 황태자비도 황후가 되었다. 1915년 11월 10일 교토에서 즉위식이 치러졌으나, 사다코 황후는 넷째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결석하였다.

사다코 황후는 신토 의식 등의 전통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근대 여성교육자 및 신여성들을 자주 궁중에 부르기도 했으며, 시어머니 쇼켄황후(昭憲皇后)[9]의 뒤를 이어 양잠 사업을 장려하였고, 나병 구제 사업에도 힘썼다.

즉위 이전부터 상태가 썩 좋지 않았던 다이쇼 덴노는 병으로 나랏일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었고, 1921년 11월 25일부터 장남 히로히토 황태자가 섭정을 맡게 되었다. 사다코 황후는 남편을 돌보는 한편, 어린 장남의 배후에서 황실과 나랏일을 장악하며 거물급의 대신들과 맞섰다.[10] 1923년 관동 대지진 때는 이재민들을 위문하기도 했다.

6 태후 시절

1926년 12월 25일, 다이쇼 덴노는 하야마(葉山)에 있는 황실 별저에서 생모인 야나기하라 나루코(柳原愛子)[11]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했다. 그리고 장남 히로히토 황태자가 쇼와 덴노로 즉위함에 따라, 사다코 황후는 태후가 되었다.

남편이 죽은 후로 사다코 태후는 남편의 영정이 안치된 방에서 시간을 보냈으며,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대하며 시중드는 것처럼 행동하였다고 한다. 한편 나병 구제 사업도 계속하여, 1931년에는 사다코 태후의 하사금으로 나병예방협회가 설립되었다. 사다코 태후의 생일 전후는 '나병 예방의 날'로 지정되었으며, 나중에는 '나병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주간'이라고 개칭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도쿄에까지 폭격이 한창일 때도 황실은 피난하지 않았는데, 이는 황실의 가장 큰 어른인 사다코 태후가 피난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다코 태후와 친분이 있었던 야마모토 겐뽀(山本玄峰)라는 승려는 "태후께서는 전쟁으로 국민들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아 괴로워하십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패전 뒤에는 시즈오카의 황실 별장에서 보냈다.

7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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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모습. 장손 아키히토 황태자와 함께.

  • 차남 아츠노미야 야스히토(淳宮雍仁) 친왕(1902-1953) : 만 20세가 되던 1922년, 지치부노미야(秩父宮)라는 궁호를 받았다. 1928년, 아이즈 번의 마지막 영주인 마츠다이라 가타모리의 손녀 세츠코(勢津子)[12]와 결혼했다. 세츠코 비는 한 차례 임신했으나 2.26 사건 당시 유산되었고, 이후 자녀를 낳지 못했다.

8 시어머니로서의 모습

맏며느리 고준황후(나가코)에게 있어서는 매우 메이데이어려운 시어머니였다고 한다. 사다코 태후는 화족 가문의 서녀(庶女)였지만, 나가코 황후는 방계 황족 가문의 적녀(嫡女)여서 출신 신분이 더 높았다. 또한 농촌에서 뛰어놀며 자라나 활달하고 씩씩한 성격이었던 사다코 태후와, 다소 차분한 성격이었던 나가코 황후의 성격 차이도 있었다. 나가코 황후의 친정 구니노미야 가문이 외척임을 믿고 방약무인하게 굴어 사다코 태후의 미움을 샀던 이유도 있으며, 나가코 황후가 결혼 후 공주만 줄줄이 4명을 낳았던 것도 시집살이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사다코 태후는 맏며느리를 꾸짖을 때, 좀처럼 직접 대놓고 꾸짖지 않고 늘 시녀를 통하여 전달하곤 했다. 그러나 그러한 방침을 깨뜨린 적도 있었다. 다이쇼 덴노가 아직 살아있던 시절, 황태자 부부는 하야마(葉山)에서 요양 중이던 다이쇼 덴노를 문병했다. 나가코 황태자비시어머니의 앞에서 긴장한 나머지 장갑을 낀 채로 물수건을 짜는 실수를 저질렀고, 사다코 황후는 시종들도 있는 앞에서 "너는 무엇을 해도 못나게 구는구나!!"라고 꾸짖었다. 나가코 황태자비는 무어라고 대꾸할 수도 없어서 고개를 숙인 채 시어머니의 꾸중을 듣고만 있었고, 이 사건은 시종들의 앞에서 고부갈등을 드러낸 꼴이 되고 말았다.[16]

그러나 그 아래의 며느리들은 귀여워하여, 종종 불러 식사나 다과를 함께 하였다고 한다. 특히 둘째며느리 세츠코 비를 귀여워하였는데, 세츠코 비는 매년 히나마쓰리 때마다 시집올 적에 친정에서 가져온 인형들을 장식하였고, 그것을 시어머니 사다코 태후와 함께 감상하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세츠코 비는 이후 회고록에서 "아들만 네 분이시니, 말년의 낙으로 삼으셨다."고 언급했다.

9 사망

1951년 5월 17일, 협심증으로 사망했다. 사다코 태후는 황태자비 시절 잠깐 장티푸스에 걸렸던 것을 제외하고는 병을 앓은 적이 없이 건강했고, 이날도 공무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급사하였다고 한다. 사후의 시호 '데이메이'는 "일월(日月)의 길은 정명(貞明)한 것이다"라는 《역경(易經)》의 구절에서 따왔다.

데이메이 황후는 일본의 역대 황후들 중 최초로 간토 땅에 묻힌 황후이다. 또한 패전 이후 새로 제정된 헌법의 황실전범(皇室典範)에 따라 묻힌 최초의 황족이기도 하다.
  1. 후지와라 씨의 혈통을 이은 5개의 가문으로 이치죠(一條), 니죠(二條), 쿠죠(九條), 고노에(近衛), 다카쓰카사(鷹司).
  2. 고메이 덴노의 정실로 이름은 아사코(夙子). 쿠죠 미치타카의 누나이니, 데이메이 황후에게는 고모이자 시할머니가 된다. 두 딸 요리코(順子) 내친왕과 후키노미야(富貴宮) 내친왕을 낳았으나 일찍 죽었고(각각 2살과 1살), 고메이 덴노의 측실 나카야마 요시코(中山慶子)가 낳은 아들인 사치노미야 무쓰히토 친왕을 양자로 입양했다.
  3. 쿠죠 다케코, 야나기하라 뱌쿠렌, 에기 긴킨(江木欣々). 에기 긴킨 대신 하야시 키무코(林きむ子)를 꼽기도 한다.
  4. 여성교육을 위해, 또한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그리스도교미션스쿨들이 많이 설립되는 것을 보고 전통 종교인 불교계 학교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불교계 여학교를 설립했다고 한다.
  5. 하얀거탑의 작가인 유명 소설가 야마사키 도요코가 이 대학 국문과 출신이다.
  6. 소 다케유키는 일찍 양친을 모두 잃어, 미치자네가 다케유키의 후견인이 되어주었다.
  7. 이후 가쿠슈인에 통합되어 가쿠슈인 여학부가 되었다. 가쿠슈인 여학부는 교사(校舍)가 화재로 불타버려 새로 건물을 지어 이전하게 된 것을 계기로 여자 가쿠슈인으로 개편되었고, 패전 후인 1947년에는 가쿠슈인으로 다시 통합되어 오늘날의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 여자 고등과, 여자대학교가 되었다.
  8. 일본 여성 최초로 미국유학을 다녀온 인물 중 하나. 1871년 8살의 어린 나이로 다른 소녀 4명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영어, 신학문, 그리스도교 등을 배웠다. 귀국 후 영어교육 및 여성교육에 힘썼으며, 쓰다주쿠(津田塾) 여대를 설립했다.
  9. 메이지 덴노의 정실. 이치죠 가문의 딸로, 본래 이름은 마사코(勝子)였으나 결혼하면서 하루코(美子)로 개명했다. 자녀는 낳지 못했다.
  10. 그러한 사례 중 하나로 궁중모중대사건이 있다. 당시 일본 정계의 실력자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황태자비 후보로 화족 가문의 딸인 이치죠 도키코(一條朝子)를 지지했으나, 사다코 황후는 자신의 남편을 무시하며 함부로 굴던 야마가타가 지지하는 규수를 며느리로 삼고 싶지 않았다. 방계 황족 가문의 딸인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을 지지하던 쪽에서는 그 점을 알고 은밀하게 사다코 황후에게 접근했으며, 사다코 황후는 그들과 연합하여 야마가타 일파와 물 밑 싸움을 벌여, 결국 나가코 여왕이 황태자비가 되었다. 자세한 것은 나가코 여왕 항목을 참조.
  11. 메이지 덴노의 측실들 중 하나. 그러나 다이쇼 덴노는 꽤 오랫동안, 쇼켄황후가 자신의 생모인 줄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야나기하라 뱌쿠렌에게는 고모가 된다.
  12. 이방자 비의 이종사촌 여동생. 본래 세츠코의 한자는 節子였으나, 시어머니의 이름과 한자가 같았기 때문에 한자를 勢津子로 바꾸었다. 이세신궁이 있는 등 일본 황실과 인연이 깊은 땅인 이세(伊勢)에서 勢를, 친정 마츠다이라 가문의 본거지인 아이즈(會津)에서 津을 따왔다고 한다. 세츠코 비의 친정어머니 마츠다이라 노부코(松平信子)는 1959년 아키히토 황태자와 평민 쇼다 미치코가 결혼할 때 반대운동의 중심이었고, 이후로도 미치코 황태자비를 괴롭힌 것으로 악명이 높다.
  13. 노부히토 친왕과 키쿠코 비 내외도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조카며느리 미치코 황태자비를 멸시했다. 자세한 것은 미치코 황후/갖가지 시집살이 에피소드 항목을 참조.
  14. 패전 이후 신적강하로 신분과 재산을 잃는 등 어려움을 겪다가, 1948년에 자살했다.
  15. 유리코 비의 외삼촌 이리에 스게마사(入江相政)는 야나기하라 뱌쿠렌의 언니 이리에 노부코(入江信子)의 아들로, 쇼와 덴노의 시종장을 지낸 바 있다. 이때 스게마사가 궁중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일기가 유명하다.
  16. 이후 나가코 황후가해자가 된 피해자의 길을 걸어 미치코 황태자비에게 몹시 맵게 시집살이를 시켰고, 미치코 황후도 맏며느리 마사코 황태자비가 아들을 못 낳는다며 고달픈 시집살이를 시켰다고 하니, 사다코 → 나가코 → 미치코 → 마사코까지 고부갈등의 대물림이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