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monteverdi.jpg
Claudio Monteverdi
1567년 5월 9일 ~ 1643년 11월 29일

1 소개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는 르네상스 후기와 바로크 초기에 활약했던 음악가로서 당대뿐만 아니라 유럽 음악사 전체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널리 쓰이는 표현은 아니지만 '오페라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당대의 가장 진취적인 작곡가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바로크음악, 특히 오페라의 개척자로 유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르네상스) 양식을 무시하거나 버리지 않고 그 장점을 절묘하게 취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다성음악으로 대표되는 르네상스 양식과 통주저음으로 대표되는 바로크 양식이 공존하고 있으며 작곡된 시기별로 양식의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한마디로 전통과 혁신이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음악가로 볼 수 있다.

현존하는 3개의 오페라를 비롯하여 그가 남긴 많은 작품들은 400여년이 지난 현재에도 연주자들의 중요한 레파토리로 자리잡고 있다.

2 생애

2.1 초기

몬테베르디는 1567년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지역의 크레모나(Cremona)에서 5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발타자르 몬테베르디(Baldassare Monteverdi)는 약초상이자 종종 수술도 했던 아마추어 의사였다. 집안사정이 괜찮았던 그는 당시 크레모나 성당의 악장(maestro di cappella)으로 있던 마르크 안토니오 인제네리(Marc' Antonio Ingegneri)에게 음악을 배우는 한편 크레모나에 있던 대학에서도 공부를 했다.[1]

어렸을 때부터 연주와 작곡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이미 15세 때인 1582년에 모테트와 종교 마드리갈로 구성된 교회합창곡집을 출판하였고 이듬해에도 교회합창곡집을 출판하였다. 1584년에는 세속 가곡집인 3성의 칸초네타(Canzonetta)를 출판했는데, 소년작곡가로 나름 지역에서 유명해진 그는 이 시기를 전후하여 전업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20세가 되던 1587년에는 최초의 중요한 작품집인 세속마드리갈 1집이 출판되었다. 이 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음악가로서 안정적인 직장을 찾기 위해 구직활동을 한 것 같은데, 1589년에는 밀라노에 가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했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그러던 1590년 몬테베르디는 드디어 만토바(Mantua)의 영주였던 곤자가의 빈센초 1세(Vincenzo I of Gonzaga)의 궁정에 가수이자 비올주자로 취직되었다. 빈센초 1세는 음악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 당시 만토바가 작은 공국이었음에도 상당한 규모의 악단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몬테베르디 입장에서는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펼치기 알맞은 곳이었다. 다만 월급이 너무 적어서 당시 기준으로도 심한 박봉이었는데, 그래도 그는 만토바의 음악환경에 만족했는지 빈센초 1세가 죽을 때까지 22년 가까이 이 곳에서 일했다.[2]

2.2 마드리갈 5집과 오르페오

만토바 궁정에 취직한 몬테베르디는 능력을 인정받아 곧 지휘자가 되었으며 1592년에는 세속마드리갈 2집을 출판했다. 1599년에는 만토바 궁정의 여가수였던 클라우디아 카타네오(Claudia Cattaneo)와 결혼했으며 둘 사이에 2남 1녀가 생겼다.[3]1602년에는 능력과 성실성을 인장받아 악장으로 취임하였다.
1600년대 초반은 그의 음악의 중요한 전환기가 되었는데, 1605년에 출판된 그의 마드리갈 5집에서 르네상스식 폴리포니(Polyphony)양식 대신 바로크를 예견하는 음악수법을 본격적으로 도입한다. 자세한 것은 아래 작품 항목 참조.

한편 1600년에 몬테베르디는 빈센초 1세가 프랑스왕 앙리 4세(Henry IV)와 메디치 가문의 마리아(Maria di Medici)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플랑드르로 떠날 때 그과 함께 플랑드르벨기에 지역을 여행하였다. 이 때 빈센초 1세는 결혼식 연회에서 야코포 페리(Jacopo Peri)의 악극인 에우리디체(Euridice)를 보았는데, 그는 자신의 궁정에서도 이 새로운 음악장르를 공연해보겠다는 생각을 품고 만토바로 돌아간다. 원래 연극에 관심이 많았던 빈센초 1세는 플랑드르 이전부터 몬테베르디에게 종종 연극이나 발레등의 공연에 사용할 음악을 맡겼는데, 몬테베르디는 여기서 얻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1607년에 본인 최초의 악극을 만토바 축제기간에 상연하였다. 이 악극이 바로 오페라의 실질적인 효시로 인정받고 있는 명작 오르페오(L'Orfeo)인데 자세한 것은 역시 아래 작품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 오르페오는 초연에서 절찬을 받았으며 이후 숱한 모방작을 낳았다. 그는 이 오르페오의 성공에 고무되어 이듬해에 두 번째 오페라 아리안나(L’Arianna)를 작곡하여 역시 큰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하필 이 기념비적인 작품이 상연되던 1607년에 자신의 아내 클라우디아가 사망하였다(사망 이유는 불명확하다). 크게 상심한 몬테베르디는 그 충격 탓인지 이 시기부터 평생 고질병으로 따라다닌 편두통이 생겼다. 게다가 좁은 만토바에 머물러 있기에는 이미 그의 명성과 눈높이가 너무 높아져 있었음에도 경제적으로는 계속 쪼들렸는데, 악장이 되도 박봉을 면하지 못한데다 그나마도 제때 월급을 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1610년 몬테베르디는 휴가 기간에 몰래 로마를 방문하여 당시 교황 바오로 5세(Paul V)를 만나 자신이 작곡한 성처녀의 저녁 기도(Vespro della Beata Vergine) 등을 연주할 기회를 얻으려고 했다. 그는 이렇게 교황의 환심을 산 후 자신과 자기 맏아들 프란체스코의 취직을 부탁하려고 했는데, 바오로 5세와의 만남이 성사되지 않는 바람에 결국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2.3 베네치아에 정착

1612년 음악 애호가 빈센초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프란체스코(Francesco of Gonzaga)가 만투아 공작으로 즉위하였다. 프란체스코는 아버지와 달리 음악에 큰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아버지가 예술에 투자한다고 많은 돈을 낭비한 탓에 즉위 당시에 상당한 재정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즉위하자마자 몬테베르디를 비롯한 궁정 음악가들을 대거 해고했는데, 22년이나 가문에 봉사한 몬테베르디에게 두둑한 위로금이나 퇴직금은 고사하고 여비수준도 안되는 푼돈만 주고 내쫓았다. 갑자기 직장을 잃은 그는 거의 1년 가까이 일정한 수입이 없이 악보를 팔거나 일용직을 전전하면서 만투아에서 구직활동을 해야 했다.

다행히 이듬해인 1613년 베네치아산 마르코 성당(San Marco Cathedral)에서 자신들의 성가대와 연주자들의 기강을 잡고 능력을 향상시켜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성당의 전임 악장이었던 줄리오 마르티넹고(Giulio Cesare Martinengo)는 몸이 약해서 제대로 교육과 연주활동을 하지 못했으며 재정운영도 방만하게 한데다 횡령까지 저질렀기 때문에 성가대와 연주자들의 기강이나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당시 베네치아에서는 몬테베르디의 명성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성당 관계자들은 후임 악장으로 당시 실직상태인 그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드디어 병약한 마르티넹고가 저 세상으로 가자 이구동성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많은 기대를 받고 후임 악장으로 부임한 몬테베르디는 기대치에 걸맞게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이에 성 마르코 성당 소속 음악가들의 음악수준은 금세 몇단계 뛰어 올랐다. 몬테베르디 입장에서도 성 마르코 성당 악장직은 만토바 시절보다 훨씬 급여가 높고 제때 지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인 취급을 받던 만토바와 달리 1급의 음악가로 존경받았기 때문에 여러모로 만족스러웠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이 악장직을 유지하였다.

이처럼 새로운 직장에서 정신적, 경제적 안정을 찾은 몬테베르디는 베네치아에서 직업에 걸맞게 많은 종교음악을 작곡하였다. 또한 그를 내쫓은 만토바에서 주기적으로 오페라를 작곡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으며 이외에도 여러 곳에서 발레음악이나 행사 음악등의 의뢰를 받았다.[4] 한동안 중단되었던 마드리갈집 출판도 재개되어서 세속 마드리갈 6집(1614), 7집(1619)이 출판되었다.

2.4 말년

이처럼 몬테베르디는 베네치아에서 바쁘면서도 행복한 삶을 살았으나, 1631년 베네치아에 페스트가 창궐하게 되고 이 와중에 산 마르코 성당의 성가대로 활동하고 있던 맏아들 프란체스코를 전염병으로 잃는다. 이 때의 충격 때문인지 그는 한동안 작곡과 악장으로서의 활동을 중단하였으며 이듬해인 1632년 사제 서품을 받고 정식 성직자가 된다. 당시 그는 이미 60을 한참 넘긴 나이인데다 아들을 잃은 충격 때문에 건강을 해쳐서 자주 앓아 누웠는데, 다행히 창작활동을 완전히 중단하지는 않아서 이후에도 중요한 작품들을 남겼다.

1634년에는 자신의 작곡 방법과 음악철학에 대해 서술한 저서 멜로디아(melodia)가 간행되었는데 이 저서는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1638년에는 세속 마드리갈 7집이 출판된지 거의 20년만에 8집이 출판되었는데 '전쟁과 사랑의 마드리갈(Madrigali guerrieri, et amorosi)'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으며, 몬테베르디 특유의 소위 격앙양식(stile concitato, agitated style)으로 작곡되었으며(자세한 것은 아래 작품 항목 참조),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에게 헌정되었다.[5]

1637년 몬테베르디가 살고 있는 베네치아에 유럽 최초의 대중 오페라극장인 산 카시아노(San Cassiano)가 건립되었다. 그간 오페라는 주로 귀족과 부자들을 위한 여흥거리였지만 이 오페라극장의 건립으로 일반 시민들도 당대의 고급문화인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몬테베르디 역시 이 극장에서 상연을 위한 작품을 여럿 남겼는데, 1639년 베네치아 축제 기간에 오페라 오딧세이의 귀향( Il ritorno d'Ulisse in patria)이 상연되었고 그가 죽기 1년 전인 1642년에는 오르페오 못지 않게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오페라 포페아의 대관식(L'incoronazione di Poppea)이 상연되었다.

1643년 11월, 몬테베르디는 7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유해는 베네치아에서 가장 큰 성당인 프라리(Frari) 성당에 안치되었다.

3 작품

그는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장수한 나이인 76세까지 살았으며 죽기 직전까지도 작품을 썼기 때문에 다방면에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이 중에서도 오늘날까지 유명하고 중요하게 여겨지는 작품은 역시 9편의 마드리갈곡집과 현존하는 3개의 오페라이다. 이 외에 종교음악도 많이 남겼는데 이 중 전술한 '성처녀의 저녁기도'는 오늘날에도 자주 연주되는 걸작이다.

3.1 세속 마드리갈 곡집

몬테베르디의 9편의 마드리갈곡집은 베토벤의 32개의 피아노 소나타에 비견할 수 있는데, 음악가로 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죽기 직전까지 일생동안 씌어졌다는 점(중간에 종종 공백기가 있긴 했지만)과 작곡가의 시기별 음악성향과 변화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점 등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 마드리갈 곡집은 음악사료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작품성 자체도 매우 뛰어나서 제대로만 연주하면 오늘날에도 시대의 격차를 느끼기 힘들 정도이다.

마드리갈 SV.316을 한 번 들어보자. 듣고 있노라면 내가 지금 무슨 재즈를 듣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 50초부터는 청중들도 웃기 시작한다.(....)

마드리갈 1집(1587) - 5성부
마드리갈 2집(1590) - 5성부
마드리갈 3집(1592) - 5성부
마드리갈 4집(1603) - 5성부
마드리갈 5집(1605) - 5성부, 최초로 기악반주가 포함된다.
마드리갈 6집(1614) - 5성부
마드리갈 7집(1619) - 콘체르토(Concerto)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마드리갈 8집(1638) - 전쟁과 사랑의 마드리갈( Madrigali guerrieri, et amorosi)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마드리갈 9집(1651) - 몬테베르디 사후 그의 작품을 모아 출판된 유고집이다.

이중 가장 눈여겨봐야할 곡집은 5집과 8집이다.

몬테베르디의 마드리갈 4집이 출판된 후 당시 작곡가이자 음악이론가였던 조반니 아르투지(Giovanni Artusi)는 이 4집이 기계적인 대위법으로 작곡된 무미건조한 작품이라고 비판했다. 기본적으로 아르투시는 기쁨, 슬픔, 탄식, 놀라움 등의 감정을 다양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대위법적인 규칙을 고수하기 보다는 파격적인 전개가 필요하다고 역설한 이론가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비판을 가한 것인데[6] 이 비판이 나름 몬테베르디에게는 자극이 되었다. 그는 이 비판을 상당히 의식했는지 이후 출판된 세속마드리갈 5집의 서문에 자신의 작곡취지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아르투시의 비판에 대한 일종의 답문을 작성하였다.

이 5집은 2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는 대위법을 엄격하게 준수하고 다섯 성부 각각에 동등한 비중을 두는 전통적인 르네상스 다성양식으로 작곡하였고 2부는 좀더 극적인 표현을 위해 대위법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있으며 5성부 가운데 소프라노와 베이스파트에 높은 비중을 두어 주 선율의 전달이 용이하도록 처리하였다. 또한 하프시코드, 저음 현악기와 오르간으로 구성된, 이후 바로크 시대를 지배한 콘티누오 반주가 마드리갈 최초로 등장한다.

이와 같은 파격은 몬테베르디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아르투시의 철학에 맞추어 음악을 만들 수도 있다는 자신의 능력을 뽐내려는 의도로 시도한 것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시도는 음악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성취가 되었다. 몬테베르디 본인도 이 실험에 만족했는지 6집부터는 이 새로운 작법을 적극 활용하였다.

백문이 불여일청, 마드리갈 5집 1부에 속한 Cruda Amarilli와 2부에 속한 Ahi, come un vago sol을 비교해서 들어보자. 얼핏 들으면 차이가 잘 느껴지지 않겠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Cruda Amarilli는 대위법에 의거하여 각 성부에 거의 동등한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에 주선율을 파악하기 어렵고 성부간의 조화에 주력하고 있어서 가사도 명확하게 들리지 않는다.어차피 이태리어니까 못알아듣는다 반면 Ahi, come un vago sol에서는 상대적으로 주선율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가사와 감정을 확실하게 전달하기 위해 좀더 레치타티보(recitativo)에 가깝게 진행된다. 한편으로 후자에는 통주저음 반주가 추가되어 있다.

전쟁과 사랑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마드리갈 8집은 5집 처럼 2부로 나누어 1부는 전쟁, 2부는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을 수록하였다. 특히 이 작품은 몬테베르디 스스로 창안한 격앙양식(stile concitato)이 제대로 드러나고 있는데, 이 곡집의 긴 서문에서 이 격앙양식에 대한 철학과 실제 음악으로 구현하는 방법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7]

이 격앙양식에 대해 간략하게만 서술하면 몬테베르디는 음악적 표현 방법을 격앙양식(Stile concitato), 온화한 양식(Stile temperato), 부드러운 양식(Stile molle) 셋으로 나누면서 지금까지 음악에서 격앙양식이 사용되지 않았는데, 인간의 분노, 격정, 공포, 놀라움 등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 격앙양식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구체적으로 '격앙된' 감정은 1개의 온음표(semibrevis)를 16분음표(semiquaver)로 나누어 연속적으로 진행시키면서 격앙된 감정을 드러내는 가사와 결합할 때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하였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면 다음 곡을 들어보자. 8집 1부에 수록된 탄크레디와 클로린다의 싸움(Il Combattimento di Tancredi e Clorinda)의 일부분인데 후반부, 특히 6분 30초 이후부터 16분음표로 나누어진 같은 음정을 반복시켜서 격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격앙양식의 기법이 제대로 드러난다.

3.2 오페라

기록상으로 몬테베르디가 작곡한 오페라로 이름이 전해지는 작품은 미완성작을 포함 9개이다. 이 중 현재 악보가 온전히 전해지는 작품은 3개뿐이며 오페라 아리안나는 아리아 하나만 남아 있다. 하필 최초의 작품과 최후의 작품군만 남아 있고 중간에 작곡된 작품들이 모두 소실된 탓에 그의 오페라에 나타나는 양식상의 변화나 발전과정을 제대로 연구할수가 없게 되었는데,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현존하는 오페라

오르페오(L'Orfeo, 1607)
아리안나(L'Arianna, 1608) - 유일하게 아리아 아리안나의 탄식(Lamento di Arianna)만 남아 있다.[8]
오딧세이의 귀환(Il ritorno d'Ulisse in patria, 1639-1640)
포페아의 대관식(L'incoronazione di Poppea, 1642)

실전된 오페라[9]

테티스의 결혼(Le nozze di Tetide, Mantua, 1616–17)
안드로메다(Andromeda, Mantua, 1618–20)
리코리의 바보 흉내(La finta pazza Licori, Mantua, 1627–28)
버려진 아르미다(Armida abbandonata, Mantua, 1627–28)
프로세피나의 겁탈(Proserpina rapita, Venice, 1630)[10]
에네아스와 라비니아의 결혼(Le nozze d'Enea con Lavinia, Venice, 1641)

3.2.1 오르페오

오르페오 이전에도 오페라의 원형으로 불릴만한 작품들이 여럿 있었으나 오르페오는 역사상 '제대로 된' 최초의 오페라로 평가받고 있다.[11] 이탈리아의 귀족들은 행사나 잔치에서 연극을 자주 공연하였는데, 무대장치를 바꾸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노래나 음악을 수반하는 춤(발레) 등을 공연하였다. 그것을 인터메디오(Intermedio) 또는 인터메쪼(Intermezzo)라고 불렀는데, 점차 연극 자체에도 노래와 음악을 도입하려는 시도가 행해졌으며 이 시도가 나름 성공을 거두면서 연극에서 음악의 비중이 점차 높아졌다. 나중에는 연극에서 음악이 필수요소로 자리잡았고 종종 대사보다 노래의 더 비중이 큰 연극이 공연되기도 했는데, 이런 분위기에서 아예 음악만으로 구성된 악극(樂劇)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악극형식을 최초로 시도한 사람은 야코포 페리(Jacopo Peri)로서 1597년(또는 1598년)음악만으로 구성된 '다프네(Dafne)'를 공연하였다. 이 작품은 현재 악보 대부분이 사라져서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1600년을 기점으로 이 양식으로 된 작품이 대거 나온 것을 보면 당대의 음악가들에게 이 다프네의 음악적 실험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현재 남아 있는 오르페오 이전에 작곡된 소위 초기 오페라들로 야코포 페리의 에우리디체(Euridice), 줄리오 카치니(Giulio Caccini)의 에우리디체(Euridice), 에밀로 데 카발리에리(Emillo de' Cavalieri)의 영혼과 육체의 상징(Rappresentatione di Anima et di Corpo) 등이 있는데, 여기 열거된 작곡가들은 모두 16세기 말에 피렌체에서 결성된 이탈리아의 예술동호회 카메라타(Camerata)의 회원이었다.

이 카메라타 소속의 음악가들은 가사와 감정의 전달이 어렵고 형식적이라는 이유로 르네상스의 다성양식을 배격하고 모노디(monody) 작법을 사용하였는데, 말과 선율을 일치시키고 자연스럽게 말하는 억양에 최대한 맞추어 선율을 만들고 여기에 간단한 반주를 곁들여 가사와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려고 하였다. 쉽게 말하면 가락과 운율이 있는 낭송형식을 추구했던 것.[12]
한편으로 이 카메라타의 멤버들은 당시 지나치에 오락과 볼거리에 치중하고 있는 당시의 공연관행을 비판하고 연극은 통일된 구성과 깊이 있고 일관된 스토리를 갖추어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는데, 전술한 초기 오페라들은 바로 이런 음악/공연철학에서 나온 작품들이다. 따라서 카메라타의 초기 오페라는 대체로 연극의 대사를 모노디로 구현하고 대사중간중간 짧은 파사지(passage, 기악음악)또는 춤곡을 삽입한 형태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모노디는 몇분 이내의 짧은 곡에 적용할 때는 상당히 효과적이었지만 오페라처럼 긴 작품에서 초지일관 단선율로 일관하게 되자 극 전체가 너무 단조로워지는 문제가 생겼다. 게다가 극의 통일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발레, 화려한 아리아, 다성합창 등의 볼거리/들을거리도 거의 배제하였으니 이 모노디 악극은 더더욱 지루해질 수밖에 없었다.

1609년 베네치아에서 출판된 오르페오 악보 표지

카메라타 회원은 아니었지만 몬테베르디 역시 그간 극음악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오르페오를 공연하기 10년쯤 전에 만토바궁에서 조반니 바티스타 과리니(Giovanni Battista Guarini)의 연극인 Il pastor fido(충성스런 양치기)의 부수음악을 작곡한 적이 있었으며 1604년 만토바궁전 축제를 위해 발레극 디아네와 엔디모네의 사랑(Gli amori di Diane ed Endimone)을 작곡하기도 했다.

몬테베르디는 이처럼 그간 극음악을 다루었던 경험을 살려 카메라타의 음악철학을 나름 수용하면서도 기존의 공연요소들를 버리지 않고 이를 극음악에 흡수시켜 완전히 새로운 분위기의 악극을 창조하였는데, 이 악극이 바로 오늘날 진정한 오페라의 효시로 인정받고 있는 오르페오(l'Orfeo)이다. 이 오르페오에는 칸쪼네, 아리아, 레치타티보, 발레, 다성 합창, 막간음악(기악곡) 등 기존의 공연요소가 모두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이 요소들이 따로 놀지 않고 대단히 절묘하게 융합되어 있다. 예를 들면 아리아와 레치타티보를 교대로 배치하여 단조로움을 없앴으며 리토르넬로(ritornello, 주제 선율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것)로 곡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하였다. 또한 종종 등장하는 르네상스 다성양식의 합창은 엄숙하고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이처럼 오르페오는 기존에 이미 존재하는 양식들을 모아서 만들어진 '새로운' 음악으로, 온고이지신의 대표적인 예제로 삼을만한 작품이다.

또한 오르페오 공연에는 당시로서는 매우 큰 규모인 40여명의 관현악단을 동원하였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현, 금관악기, 콘티누오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기타, 하프, 과 같은 악기도 포함된다. 이처럼 오르페오는 대규모 관현악을 편성한 덕분인지 기악음악의 비중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13]

오르페오의 대본은 당시 외교관이자 작가였던 알레산드로 스트리지오(Alessandro Striggio: 1573-1630)가 작성한 것이다. 이 대본의 스토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오 이야기와 거의 같은데, 다만 축제를 위한 작품에 걸맞게 비극으로 끝나는 원래 신화의 결말부분을 해피엔딩에 가깝게 바꾸었다. 이 스트리지오의 대본은 1607년 만토바에서 발간되었으며 몬테베르디의 악보는 2년 후인 1609년 베네치아에서 발간되었는데, 스트리지오의 대본에는 맨 마지막에 오르페오가 연회를 열면서 끝나도록 되어 있으나 몬테베르디가 수정한 대본에는 아폴로가 슬픔에 빠진 오르페오를 구원하여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애초에 스트리지오도 막판에 아폴로를 등장시켜 오르페오를 하늘로 올려 보내려고 구상했으나 초연 당시 만투아 공작궁의 무대의 공간이 좁아 오르페오가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기계장치를 설치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엔딩으로 대체했던 것인데, 악보를 출판할 때에는 그런 문제를 신경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원래의 구상대로 끝나게 했던 것이다.

3.2.2 포페아의 대관식

포페아의 대관식(L'incoronazione di Poppea)은 율리우스의 귀환(Il ritorno d'Ulisse in partita)과 더불어 베네치아에서 작곡한 그의 마지막 오페라이다. 3막으로 구성되어 있고,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의 연대기(Annals) 13~15권과 수에토니우스의 12명의 황제열전, 디오 카시우스의 로마사를 기초로 조반니 프란체스코 부제넬로가 대본을 썼으며 1642년에 베네치아의 테아트로 산조반니 에 파올로에서 초연했다.

그의 최초의 작품이었던 오르페오와 비교했을 때 이 포페아의 대관식은 관현악의 규모도 축소되어 있고 발레나 다성양식의 합창등도 없기 때문에 화려함과 볼거리는 상대적으로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오르페오 못지 않게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오르페오와는 또 다른 독창적인 요소들이 많이 추가되어 있기 때문이다.

포페아의 대관식은 기존에 신화나 미화된 영웅담의 주인공을 소재로 했던 오페라와 달리 역사적 인물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마저도 주인공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이다. 게다가 내용도 기존의 도덕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데, 사악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포페아가 네로의 첫 아내이자 정숙한 여인인 옥타비아를 몰아내고 황후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권선징악이 아니라 오히려 권악징선(勸惡懲善)에 더 가깝다.[14]

이와 같은 소재상의 파격 외에도 음악 자체도 대단히 뛰어나다. 애초에 부제넬로의 대본이 상당히 뛰어났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이 각자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있는데, 몬테베르디는 이 대본의 수준에 걸맞게 등장인물들의 성격묘사와 감정표현을 음악적으로 훌륭하게 처리하고 있다. 이런 인간의 감정 표현에 있어서는 오르페오를 뛰어넘는 수작이다. 이 오페라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역사상 최초의 성격 오페라 또는 사실주의 오페라라고 할 수 있다.[15] 한편으로는 일전의 카메라타의 음악가들이 이상으로 삼았지만 본인들이 구현하지는 못했던 '극과 음악의 일치'라는 이상이 이 포페아의 대관식에서 비로소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이 포페아의 대관식은 바로크 시대의 오페라를 통틀어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으며, 이와 같은 음악적 성취는 이전에는 당연히 없었고 심지어 몬테베르디 이후에도 한동안 찾아보기 힘들었다. 특히 바로크 후기에 접어들면서 오페라의 양식화가 고착되고 매너리즘 경향이 강해지면서 천편일률적인 스토리에 무대에는 개성이 없는 평면적인 인물들 위주로 채워졌으며, 카스트라토 가수들이 득세하면서 오페라 음악도 인물의 감정과 심리를 표현하는 것 보다 화려한 가창력을 선보이는게 주목적이 되어버렸다. 그런 탓에 이 포페아의 대관식에서 구현된 음악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글루크모차르트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한편 이 포페아의 대관식의 악보는 몬테베르디 사후인 1650년대에 간행되었으며 현재 이 때 간행된 두개의 출판본이 남아 있다. 두 출판본은 사소한 차이를 제외하면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판본으로 인해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이보다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악보 여기저기에 다른 음악가들이 작곡한 악절(passage)이 포함되어 있으며[16] 양식상으로 몬테베르디보다 후대의 것이 명백한 악절이 종종 드러난다는 점이다. 특히 오페라 맨 마지막에 네로와 포페아가 부르는 이중창은 몬테베르디가 작곡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래서 현존하는 이 오페라의 악보에서 몬테베르디가 순수하게 창작한 부분이 얼마나 되는지 논란이 되고 있는데, 많은 전문가들은 이 작품을 몬테베르디 혼자 창작한 것이 아니라 여러 작곡가들이 공동으로 참여하여 만든 작품이라는데 동의하고 있다. 당시 몬테베르디가 고령인데다 건강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혼자 장편의 오페라를 책임지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런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오페라의 제작에 참여한 작곡가들로 프란체스코 사크라티 외에 베네데토 페라리(Benedetto Ferrari), 프란체스코 카발리(Francesco Cavalli) 등이 거론되고 있다. 다만 이들이 자신들이 창작한 작품에서 포페아의 대관식과 같은 음악성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작곡의 중심역할을 몬테베르디가 맡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3.3 종교음악

  • 성처녀의 저녁기도(Vespro della Beata Vergine, 1610)
  • 추수감사절 미사(1631)
  • 종교음악곡집 '도덕적이고 영적인 숲'(Selva morale e spirituale, 1640)
  • 4성부의 미사와 시편(1650, 사후 출판됨)

몬테베르디는 생애 후반부에 성당 악장으로 재직했기 때문에 다수의 미사, 모테트, 마니피카트, 종교 마드리갈 등의 종교음악을 남겼다.[17] 그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종교음악도 르네상스 다성양식과 단선율/통주저음의 바로크양식이 모두 드러나고 있다.

그의 종교음악 중 가장 유명한 것이 1610년에 작곡한 성처녀의 저녁기도이다. 대단히 규모가 큰 작품으로 연주시간이 대략 90분이나 되고 편성도 엄청나게 커서 몇몇 곡은 성악 파트가 10성부, 기악파트가 7성부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작품의 구성은 서주 후에 모테트과 시편송(Psalm)이 번갈아가면서 낭창되다가 2부로 구성된 마니피카트로 끝을 맺는다.[18]

몬테베르디가 이 작품을 작곡한 동기는 아직까지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며 생전에 실제로 연주되었는지도 불확실하다. 대략적인 견해는 구직할 때 일종의 오디션을 받기 위해 쓴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1610년 베네치아에서 출판되었는데, 이 당시 몬테베르디는 만토바를 벗어나기 위해 로마/베네치아/피렌체 등지에 지원서를 보내면서 구직활동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때 실제로 연주할 목적보다는 구인 담당자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과시할 목적으로 이 성처녀의 저녁기도를 작곡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규모를 가진 작품이 되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몬테베르디는 이런 역작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취직자리를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남긴 인상 덕분인지 3년 후에 베네치아에서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3.4 작품목록

슈타트쿠스(Manfred H. Stattkus)가 작품 종류별 및 알파벹순으로 정리한 슈타트쿠스 번호(Stattkus-Verzeichnis)(SV로 약칭)가 있다.#

3.4.1 칸초네타들(CANZONETTE)

  • SV 1-21

3.4.2 아리안나의 탄식(Lamento d'Arianna)

  • SV 22

3.4.3 마드리갈들(MADRIGALI) I

  • SV 23-39

3.4.4 마드리갈들(MADRIGALI) II

  • SV 40-59

3.4.5 마드리갈들(MADRIGALI) III

  • SV 70-74

3.4.6 마드리갈들(MADRIGALI) IV

  • SV 75-93

3.4.7 마드리갈들(MADRIGALI) V

  • SV 94-106

3.4.8 마드리갈들(MADRIGALI) VI

  • SV 107-116

3.4.9 마드리갈들(MADRIGALI) VII

  • SV 117-145

3.4.10 마드리갈들(MADRIGALI) VIII

3.4.10.1 사랑의 노래들(Canti amorosi)

  • SV 146-154

3.4.10.2 전쟁의 노래들(Canti guerrieri)

  • SV 155-167

3.4.11 마드리갈들(MADRIGALI) IX

  • SV 168-178

3.4.12 미사곡과 시편(MESSA ET SALMI)

  • SV 190-204

3.4.13 미사 및 저녁기도들(MISSA AC VESPERAE)

  • SV 205-206a

3.4.14 聖小曲들(SACRAE CANTIUNCULAE)

  • SV 207-229

3.4.15 음악적 유희들(SCHERZI MUSICALI) I

  • SV 230-245

3.4.16 음악적 유희들(SCHERZI MUSICALI) II

  • SV 246-251

3.4.17 도덕적 및 영적 선집(SELVA MORALE E SPIRITUALE)

  • SV 252-288

3.4.18 그 밖의 작품들

SV제목기타
289Adoramus te Christe
290Ahi che si partì il mio bel sol adorno
291L'Arianna
292Cantate domino canticum novum a 2
293Cantate domino canticum novum a 6
294Christe adoramus te
295Confitebor tibi domine a 4
296Confitebor tibi domine a 1
297Currite populi, psallite timpanis
298Domine ne in furore tuo
299Ecce sacrum paratum convivium
299aEcce sacrum paratum convivium
300Ego dormio et cor meum vigilat
301Ego flos campi
302En gratulemur hodie
303Exulta filia Sion
304Exultent caeli et gaudeant angeli
305Fuge anima mea mundum
307Gloria a 8
308포페아의 대관식L'Incoronazione di Poppea
309Io ardo sì, ma'l foco è di tal sorte
310La mia Turca che d'Amor non ha fè
311Laudate pueri dominum a 6
312O beatae viae
313O bone Jesu, o piissime Jesu
314Occhi miei se mirar più non debb' io
315O come vaghi, o come cari sono Lidia
316Ohimè ch'io cado
317O quam pulchra es amica mea
318오르페오L'Orfeo
320Perchè se m'odiavi
321Più lieto il guardo
322Prima vedrò ch'in questi prati nascano
324Quante son stelle in ciel
325오딧세이의 귀환Il Ritorno d'Ulisse in patria
326Salve o Regina
327Salve Regina
328Sancta Maria succurre miseris
331Se non mi date aita
332달콤한 고통Sì dolce è'l tormento
333Su le penne de' venti
334Taci Armelin, deh taci
335Venite sitientes ad aquas dominii
336Venite videte martirem
337Voglio di vita uscir
A1Ballo
A2Lamento di Olimpia
  1. 당시 크레모나 성당의 성가대나 연주자 명단에는 몬테베르디의 이름이 없다. 따라서 그는 성당에서 정식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인제네리에게 개인 수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2. 많은 음악가들처럼 그도 작품을 출판하거나 개인교습, 연주 알바 등으로 부수입을 올렸다.
  3. 딸을 하나 더 낳았는데 이름을 짓기도 전에 사망했다.
  4. 이 시기에 그가 작곡한 오페라는 후술하다시피 모두 실전되었고 다른 작품들도 대부분 전해지지 않는다. 그나마 이 시기의 음악으로 발레극 (티르시와 클로리 Tirsi et Clori, 1616)와 소(小) 오라토리오 탄크레디와 클로린다의 싸움(Il combattimento di Tancredi et Clorinda,1624) 두 작품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두 작품의 높은 완성도를 감안했을 때 이 시기 작품들이 유실되어버린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5. 원래는 페르디난트 2세에게 헌정될 예정이었지만 곡을 다듬으면서 출판이 미뤄지는 동안 페르디난트 2세가 사망하는 바람에 후임으로 황제에 즉위한 아들에게 헌정되었다.
  6. 그런데 정작 아르투시 본인이 남긴 작품에서는 이런 파격성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게다가 남아 있는 작품 수도 매우 적고 수준도 높지 않은데, 기본적으로 아르투시는 이론가이지 전문작곡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7. 이 서문은 일반적인 의미의 서문이 아니라 사실상 논문이다. 그가 쓴 음악이론서인 멜로디아가 실전된 상황이기 때문에 이 8집의 서문은 수록된 작품 못지 않게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8. 몬테베르디 당대부터 이 아리아는 매우 유명했으며 바로크시대 내내 자주 연주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오페라 악보가 소실되었어도 이 아리아의 악보는 보존될 수 있었다.
  9. 실전된 오페라 중 만투아궁을 위해 작곡된 작품들은 만투아 계승전쟁(1638~1631)의 와중에 소실된 것으로 보고 있다.
  10. 이 작품에 나오는 아리아를 바탕으로 한 짧은 곡이 세속마드리갈 9집에 포함되어 있다.
  11. 참고로 오르페와 같은 음악극을 오페라라고 부르게 된 것은 몬테베르디가 사망한 후에도 한참이 더 지나서부터이다. 그 전까지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는데 몬테베르디는 자신이 작곡한 오르페오를 음악적 우화(favola in musica)라고 불렀다.
  12. 후에 오페라에 흡수된 레치타티보(recitativo)가 바로 이 카메라타가 남긴 유산이다.
  13. 다만 몬테베르디는 당시의 관행대로 악보에 정확하게 악기를 지정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반주에 동원되는 악기는 공연 담당자의 재량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14. 역사적으로 포페아는 왕비가 된 이후 임신 상태에서 네로에게 배를 걷어차여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오페라는 포페아가 왕비자리를 차지하는 부분에서 끝을 맺는다.
  15. 다만 실제 역사를 소재로 하긴 했지만 오페라의 내용 자체가 완전히 합리주의적 사실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몬테베르디는 오페라에서 추상화된 덕목을 의인화정확하게는 의신화(疑神化)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이 포페아의 대관식에서도 라 포르투나(행운의 신), 아모레(사랑의 신, 큐피드), 베네레(지혜의 신) 등이 등장한다.
  16. 예를 들어 프란체스코 사크라티(Francesco Sacrati)의 오페라 미친 흉내(La Finta Pazza)에 있는 악절이 포페아의 대관식에 포함되어 있다.
  17. 1607년 아퀼리노 코피니(Aquilino Coppini)라는 작곡가는 당시 5집까지 발간된 몬테베르디의 세속마드리갈곡집의 음악을 바탕으로 세속가사를 종교적인 라틴어 가사로 바꾸어 종교마드리갈 곡집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18. 다만 이 작품에 포함된 4개의 모테트, 즉 비록 내가 검지만(Nigra Sum), 나의 사랑(Pulchra es), 서로 말하는데(Duo Seraphim), 하늘이여 들으소서(Audi Coelum)는 원래 이 작품에 속한 것이 아니라 독립된 성가곡이었다는 의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