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laus Tennstedt (1926.06.06 ~ 1998.01.11 )
1 개요
독일의 지휘자. 1926년 메르제부르크에서 태어나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전공했다. 동독에서 지휘자로 활동하다 탈출하여 북미에 데뷔한 후 유명세를 떨쳤고, 특히 그의 말러 해석은 20세기 최고 중 하나로 꼽힌다[1].
2 상세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공부한 후 전쟁 중에는 군역을 면제받으려고 바로크 오케스트라에 입단하기도 한다. 전후에는, 1948년부터 영국 할레 시립 극장 오케스트라의 콘서트마스터로 활동을 시작했으나 손가락 부상으로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경력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손가락 부상 이후 할레 시립 극장에서 성악가들의 코치 역을 하다가 지휘를 접하게 되고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에 따라 1958년부터는 드레스덴 오페라의 음악감독을, 1962년부터는 슈베린 슈타츠오퍼와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역임한다.
그러던 중 1971년, 동독에서 탈출하였고, 스웨덴에서 난민 심사를 받아 난민이 되었다. 이후 스웨덴에서 괴테보르 괴텐베르크 오페라와 스톡홀름의 스웨덴 방송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된다. 1972년부터는 독일에서도 지휘를 시작해 북독일의 키엘 오페라단의 상임 지휘자를, 1979년부터 1982년까지는 함부르크의 북독일 방송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동시기 미네소타 심포니에서 수석 객원 지휘자를 맡게 된다.
1974년에는 토론토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북미 지역에서 데뷔하였다. 같은 해 12월 13일에는 브람스로만 구성된 연주 프로그램으로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미국에서 데뷔하였고, 얼마 후 안톤 브루크너의 교향곡 8번을 지휘하여 서방 세계 음악계에 큰 충격과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2]. 특히 '보스턴 글로브'에서는 "일생에 한번 만날까 말까 한 공연"이라며 극찬했다. 이 덕분에 1976년 탱글우드 페스티벌에서 객원 지휘하게 되었고 이후 1983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로 미국에서 오페라 데뷔하였다. 참고로 이 시절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텐슈테트가 지휘하던 말러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후 텐슈테트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을 객원지휘하기도 하고 유럽에서 바이에른 라디오 심포니,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을 객원지휘하기도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무대 중 하나였던 영국에서는 1976년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데뷔하였다. 이어서 1980년 런던 교향악단의 수석 객원지휘자가 되었고 1983년부터는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1987년, 식도암에 걸려 상임 지휘자에서 물러났고, 계관 지휘자로 임명된다. 이후 1991년, 말러 교향곡 6번을 지휘하여 런던 필하모닉에 돌아왔으나, 의사들의 조언에 의해 1994년 은퇴한다.
노먼 레브레히트에 따르면 성격이 강하지 않아 힘들 때는 술에 의존하던 텐슈테트였고, 1970년대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성공 때문에 신경쇠약에 걸렸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필라델피아에서 지휘할 때는 리허설 도중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고. 결국 말러에 감정이입을 하였고 그의 아찔한 감정이 이입되어 훌륭한 말러 해석이 나온다고 말한다.
텐슈테트가 지휘한 말러 교향곡 8번의 2부 피날레 영상이다.
3 음반
두말 할 것도 없이 첫번째로 손꼽히는 음반은 말러 교향곡 전집이다. 말러 교향곡 전집에 수록된 말러 교향곡 외에도 1986년에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지휘한 말러 교향곡 8번이 시카고에서 지휘한 교향곡 1번과 함께 수록된 영상이 있고 1991년과 1993년에 런던 필하모닉에 돌아와 지휘한 말러 교향곡 6번와 교향곡 7번 음반도 있다.
이 외에도 루치아 포프와 함께 녹음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네개의 마지막 노래, 나이젤 케네디와 함께한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브루크너 교향곡 7번 등이 명반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