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개요
New York Philharmonic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세계 3대 관현악단' 이라 언급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실제로 이런 얘기를 했다가는 음악의 문외한이라는 소리를 듣기 쉽상이다. 사실 지휘자의 특성, 연주되는 음악과 재정적 여건 등에 따라 오케스트라 악단의 부침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큰 의미가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빅5는 미국인들이 스스로 만들어내어 오랫동안 통용된 용어임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근래에 서부의 LA필,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등이 떠오르면서 미국 빅5라는 말은 과거만큼 많이 쓰이고 있지는 않는다. 미국 내에서 빅 5라고 불리는 오케스트라가 등장한 배경은 오케스트라에 대한 재정적 풍요가 확보되고 단원의 실력을 인정해주면서부터이다. 하지만 미국의 경제적 상황이 도시에 따라 변화가 생기면서 그러한 수사는 현재 많이 쓰이고 있지 않다. 뉴욕 필의 특징적인 점은 일년 내내 모든 연주가 여전히 만원 관중을 모으는 핫한 오케스트라라는 점이다. 미국에서는 뉴욕 필과 함께 시카고 심포니, 클리블랜드, 보스턴 심포니, 필라델피아, 샌프란스시코 심포니, LA 필 등이 오랜 동안 좋은 평가를 받아왔으나 어느 오케스트라가 좋고 나쁨은 평자들의 선호와 시기에 따라 변화된다. 뉴욕 필이 세계3대 오케스트라까지 불리게 된 배경은 20세기 미국이라는 초 강대국 제일 도시의 오케스트라라는 점과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오케스트라이며 단원들의 높은 연주 실력이라는 점 등인 듯하다. 오랜 옛날 한때나마 뉴욕 필의 기량이 뛰어난 시절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다만 지휘자의 역량이 오케스트라의 평가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면에서 현 뉴욕 필은 예전과 같은 좋은 평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현실과는 별개로 세계 금융중심지인 뉴욕의 갑부들로부터 많은 후원을 받고 있기 때문에 재정적으로는 풍족함을 유지하고 있으며, 상임지휘자와 단원 연봉은 시카고 심포니와 함께 세계 최고를 다투고 있다.
2 역사
2.1 초기의 역사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관현악단으로 여겨지는데, 서양 음악사에서도 보기 드물게 극장이나 귀족에 예속되지 않은 연주회 전문 독립 악단이라는 점에서도 빈 필과 함께 중요하게 취급된다. 게다가 유럽도 아니고 아직 독립한지 오래되지 않아 '식민지 깡촌' 취급받던 미국에서 행해진 시도였기 때문에, 나름대로 음악적 자부심도 키워준 모양.
1842년에 유렐리 코렐리 힐이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뉴욕 시를 거점으로 한 '필하모닉 협회' 를 결성했는데, 이것이 시초로 여겨지고 있다. 첫 공연은 같은 해 12월에 아폴로 룸즈라는 소규모 공연장에서 개최되었는데, 빈 필보다는 좀 늦은 셈이었다. 동시에 힐이 지휘자로 전직해 1847년까지 악단의 기초를 닦아놨고, 뒤이어 테오도어 아이스펠트, 칼 버그만, 레오폴트 댐로슈 등의 독일계 지휘자들이 자리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독립 악단의 특성상 열악한 재정 형편으로 인해 단원들의 봉급도 상당히 적었고, 그것을 충당하기 위해 너무 빡빡한 연주 일정에 시달린 나머지 퇴단하는 단원들도 속출했다. 이러한 막장 상황에서 벗어난 것은 시어도어 토머스가 지휘자로 부임한 1877년에야 가서였는데,[1] 이 때부터 외부 기금을 적극적으로 끌어모으고 단원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등의 시도가 행해졌다.
토머스의 후임이었던 안톤 자이들도 바그너나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을 각각 미국 초연/세계 초연하는 등 곡목을 당대 최신곡까지 확장시켰고, 이 때부터 미국을 대표하는 관현악단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2.2 말러
1909년에는 구스타프 말러가 뉴욕 필의 상임지휘자에 취임하였다. 빈 필과 빈 국립 오페라의 지휘자로 있던 말러를 뉴욕 필이 거액으로 스카웃해 온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지만, 실상은 당시에 말러가 처음 계약을 맺은 것은 뉴욕 필이 아닌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였다. 말러가 뉴욕으로 간것은 메트로폴리탄의 금전적인 대우가 좋아서라기보다, 빈에서 각종 언론 및 비평가들 등과의 갈등에 지쳐서 빈을 떠나고자 했던 말러의 욕구가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1907년부터 말러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지휘자로 뉴욕에 체류하자 인근에 있던 뉴욕 필이 말러에게 접근했던 것. 하지만 말러는 처음엔 미온적이었이었다. 말러가 맡기 전 뉴욕 필은 일종의 슬럼프 시기로 재정적으로나 음악적으로 훌륭하다고 할 수 없는 악단인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말러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관계도 삐거덕거리기 시작했고, 뉴욕 필 단원들이 의외로 말러에 잘 따르면서 말러는 결국 뉴욕 필의 상임지휘자까지 맡게 되었다. 당시 뉴욕 필은 상태가 그리 좋은 악단은 아니었다. 당시 말러의 편지를 보면 뉴욕 필의 단원은 50명 정도에 불과했고 재정적으로도 좋지는 않았다고 한다. 말러는 특유의 엄격한 지도력과 함께 단원 증원/재임용과 운영진 재조정 등 행정 개혁까지 단행하면서 체질 개선을 시도했다. 뉴욕 필은 초기에 말러의 이러한 개혁과 엄격한 연습에 생각보다는 잘 따라와 준 것으로 보인다. 유럽에 비해 일찍 산업화가 되면서 노조의 힘이 강했던 뉴욕에서는 오케스트라 리허설 시간에 지휘자가 정해진 연습시간을 1분이라도 넘기면 단원들이 그자리에서 악보를 덮고 일어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말러가 오고 나서는 연습시간을 30분 이상 초과해도 아무도 일어서는 사람이 없었다고. 어쨋거나 말러의 짧은 재임기간 동안 뉴욕 필은 단기간 안에 체질을 개선하고 객석 점유율을 높이는 등의 성과를 보였다.
2.3 토스카니니
1920년대 후반에는 세계 대공황 크리로 빌빌대던 경쟁 악단들인 내셔널 교향악단과 뉴욕 교향악 협회 두 단체를 인수합병해 뉴욕 시의 유일한 콘서트 전문 관현악단으로 등극했고, 악단 명칭도 '뉴욕 필하모닉 교향악단(Philharmonic-Symphony Orchestra of New York)' 으로 고쳤다. 지휘자 복도 이 때 제대로 터졌는데,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에서 각각 불러온 빌럼 멩엘베르흐(멩겔베르크)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라는 지랄맞은 거장 지휘자들 밑에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특히 토스카니니는 창단 이래 이 악단을 처음으로 유럽에 끌고 가 순회 공연을 펼치면서 '클래식 천조대륙' 에 충공깽을 선사했다.[2]
2.4 토스카니니와 번스타인 사이의 시대
토스카니니가 은퇴를 선언하며 사임하자[3], 운영진들이 독일의 본좌 지휘자였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나치와의 갈등으로 버로우한 것을 보고 재빨리 컨택을 시도했다. 하지만 푸르트벵글러는 과거 뉴욕 필을 객원지휘했을 때 미국 청중들에게 크게 실망했었기 때문에 뉴욕 필의 제안이 들어오자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계약금의 절반 이하를 주고 영국에서 존 바비롤리라는 젊은 지휘자를 불러왔다.
하지만 바비롤리는 운영진과 후원자들이 듣보잡으로 여기는 바람에 1941년에 물러나 돌아갔다. 뉴욕 생활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가던 바비롤리가 홀가분한 마음을 표했을 정도.
2년 뒤 후임으로 임명된 아르투르 로진스키는 멩겔베르크나 토스카니니 이상으로 악단을 갈궈대는 마왕 기질의 소유자였던 탓인지 1947년에 악단과 다투다가 불명예 퇴진하고 말았다.
이후 브루노 발터가 음악 고문이라는 다소 밍숭맹숭한 포지션으로 잠시 재직했고,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와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가 2인 동시 상임 체제를 취하기도 했다.
2.5 번스타인
뉴욕 필이 토스카니니 시절에 이어 두번째이자 마지막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레너드 번스타인이 재임하던 시기(1957~1969)다. 번스타인은 커티스 음악원 졸업 후 불안정한 백수생활을 하며 자살까지 생각하기도 하던 차에 로진스키에게 발탁되어 뉴욕 필의 부지휘자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개월 후에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브루노 발터의 대타로 극적으로 지휘자로 데뷔를 했다. 그러나 데뷔 이후에도 번스타인은 고정된 직장을 얻는데 실패했다. 미국에서 일자리가 여의치 않자 해외로 눈을 돌려 유럽에서 몇몇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도 했는데, 클래식 불모지 미국에서 온 애송이 지휘자를 단원들이 무시하기도 했고 번스타인 본인도 젊은 시절의 지랄맞은 성격으로 대응한 탓에 더 이상 객원지휘 초청을 받지 못하고 결국 미국으로 돌아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매카시즘의 영향으로 공산주의자로 지목되면서 몇년 동안 지휘활동을 사실상 접었다. 매카시즘 광풍이 수그러든 1950년대 중반, TV방송의 한 음악프로그램에 출현하게 되었는데 수려한 외모와 말빨, 호소력 있는 목소리와 고상한 동부 액센트를 갖춘 번스타인의 프로는 예상 외의 큰 호응을 얻었고 단숨에 전국에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이 방송에 출연한지 불과 몇 개월 후인 1957년, 실질적인 지휘 경험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번스타인은 불과 몇 개월 후인 미트풀로스와 함께 뉴욕 필의 공동 상임지휘자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단독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번스타인이 이처럼 단시간에 뉴욕 필의 상임지휘자가 된 것은 자국 출신의 지휘자에 대한 미국인들의 갈망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 미국 음악계는 독일을 비롯한 유럽 이민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 이끌면서 세계 최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하던 미국은 음악분야에서도 유럽에 대한 종속과 열등의식을 끊어버릴 필요가 있었는데, 그 적임자로 지목된 것이 번스타인이었다. 시어도어 토머스 이래 두 번째로 미국 본토 출신 지휘자로 뉴욕 필의 음악 감독이 된 레너드 번스타인은, 취임 직후 부터 전속사인 CBS(현재 소니 클래시컬)에 상당히 많은 녹음을 남기고 새로운 대중 매체였던 텔레비전의 파급 효과를 적극 활용해 '청소년 음악회' 라는 강의식 콘서트를 마련하는 등 미국의 클래식 향유층을 급속도로 증가시켰다. 이 때를 두 번째 전성기로 볼 수 있고, 대외적인 명칭도 '오케스트라' 를 뺀 현재의 축약형 명칭으로 확정되었다.[4] 번스타인이 뉴욕 필에 공헌한 점 중 하나는 말러 교향곡 전곡 녹음이었다. 당시에는 생소한 레퍼토리였던 말러를 적극적으로 연주, 소개하여 미국에서 말러 붐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5].
다만 번스타인은 음악의 표현력을 극도로 중요시하는 지휘자로, 정확성을 추구하는 유형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뉴욕 필의 기량에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평도 있다. 번스타인 퇴임 직후 1970년대에 뉴욕 필이 빠른 속도로 추락하게 된 원인이 바로 번스타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2.6 불레즈
번스타인이 1969년에 작곡 활동에 전념하고 싶다는 이유로 사임한 이후 뉴욕 필은 제대로 망 테크를 타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번스타인의 사임 직후 조지 셀이 브루노 발터 시절처럼 음악 고문으로 잠시 공백을 메꾸다가 프랑스 출신 현대음악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당시에는 듣보잡 피에르 불레즈가 음악 감독 자리를 이어받았다. 현대음악 작곡가로서는 다소 인지도가 있었지만 지휘자로서는 무명에 가까웠지만 야심가였던 불레즈는 현대음악을 적극 소개하는데 앞장섰고, 유명한 작품을 파격적인 해석으로 지휘해 자신의 입지를 높이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현대음악 위주의 레퍼토리는 관중들로부터 외면을 받았고 고전주의 음악의 파격적인 해석도 흥미는 끌었지만 음악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결국 뉴욕 필에 자금줄을 대고 있던 후원자들도 하나둘씩 등을 돌렸다. 또 번스타인 시절 대량으로 음반을 녹음하면서 단원들이 고정급 보다 많은 부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는데, 불레즈 시절 녹음 스케줄이 대폭 줄면서 단원들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불레즈는 인기가 많았던 전임자 번스타인을 의식해서 그가 뉴욕 필을 지휘하는 것을 막았고 이 때문에 번스타인과 감정이 상하기도 했다. 뉴욕 필의 계관지휘자였던 번스타인은 뉴욕 필 상임지휘자직을 사임한 후에도 객원지휘자 자격으로 자주 뉴욕 필을 지휘하길 원했지만, 불레즈의 방해로 이것이 어려워지자 매우 분노했고 결국 유럽으로 진출을 모색하게 되었다. 불레즈는 결국 1977년 강판되었다.
2.7 메타
불레즈 시절부터 그 동안의 명성이 무너지고 있다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왔지만, 뉴욕 필의 하락세가 제대로 고착된 것은 인도 출신의 주빈 메타가 불레즈 후임으로 들어오고 나서였다. 메타는 뉴욕 필을 맡기 전에는 장래가 기대되는 차세대 유망주 지휘자들의 대표주자였다. 60년대초에는 동문수학했던 클라우디오 아바도보다 훨씬 더 잘 나가던 지휘자였다. 특히 클렘페러, 발터를 비롯해 누가 와도 안 되던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을 고퀄리티로 끌어올려서 오케스트라 트레이너로써의 능력도 인정받았다. 메타가 뉴욕 필의 상임지휘자로 선임되자, 네임밸류가 약간 부족한 감이 있었지만 유망주로써 기대감이 커서 여론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뉴욕 필에 취임한 이후 메타는 젊은 시절 보여줬던 포텐을 터트리긴 커녕 오히려 젊은 시절보다 재능이 쇠퇴하고 있다는 비난이 나올 정도로 이도저도 아닌 밍밍한 활동상을 보여주어 말년병장화 되었다고 까이기 시작했다.
2.8 마주어
뉴욕 필은 메타의 후임으로 런던 심포니와 빈 국립 오페라를 맡고 있던 클라오디오 아바도를 지목하여 협상을 진행했다. 그러나 거의 협상 성사단계까지 갔다가 아바도가 갑자기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로 지명되는 바람에 물건너가버리고 말았다. 결국 1991년 메타의 후임으로 동독 출신의 쿠르트 마주어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동독으로 대표하는 거장이었던 마주어의 취임으로 뉴욕필은 재도약을 기대했다. 마주어는 독일 정통 레퍼토리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뉴욕 필을 기본부터 다시 다지는데 주력했다. 정통 독일계 주류 레퍼토리 위주로 운영되었고 마주어의 해석도 상당히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뉴욕 현지 뿐만아니라 해외 음악계에서도 반응은 좋은 편이었고 뉴욕 필의 평가도 다소 반등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마주어의 임기가 흘러가면서 뉴욕 필은 마주어 취임 초기의 기대만큼 향상된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다. 뉴욕 필에서 후원자들 접대 등 음악 외적인 부분에서 시달림 당하는 것을 싫어했던 마주어는 결국 뉴욕 필 연봉의 절반 밖에 되지 않던 런던 필로 떠나 버리고 말았다.
2.9 마젤
2002년 마주어가 사임한 이후 로린 마젤이 자리를 이어받았다. 마젤은 이미 고령이었고 단원들 사이에서도 종종 트러블이 발생하는 등 순탄치 않은 재임 기간을 보냈다.
2.10 길버트
불레즈 이후 '미국 5대 관현악단'에서도 탈락될 정도로 암담한 시기를 보내던 뉴욕 필은 2009년에 마젤이 사임하자, 빅 네임 지휘자가 뒤를 이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듣보 산타페 오페라(Santa Fe Opera)의 음악감독이었던 41세의 듣보잡 앨런 길버트를 혈연 지연으로 후임으로 임명함으로써 재기의 희망을 완전히 접은 듯 했다.
뉴욕 필 선임 시점 무명에 가까운 인지도로 우려를 자아냈던 길버트는 '무난함'과 예상 밖의 '안정감'을 무기로 극도의 지휘자난을 겪고 있는 현 클래식 시장에서 자기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듯 하다. 최근에는 뉴욕 필의 상임지휘자라는 강력한 간판을 무기로 유럽 진출도 꽤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베를린 필을 객원지휘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의외로 인지도가 별로 없는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80년대 영국을 중심으로 음악계를 휩쓴 원전 연주 붐의 영향으로 최근 젊은 지휘자들은 가볍고 빠른 톤을 선호하거나 오히려 과거 독일 낭만주의 거장들을 흉내내 과도한 템포 루바토를 구하사는 경우가 많은데, 길버트의 지휘는 이에 비해 정공법적인 해석을 취하고 있다. 연륜이 쌓이면서 어떻게 발전할지 귀추가 주목되는 지휘자다.
길버트에 평은 아직도 오락가락하는 편이고 실제로도 레퍼토리에 따라 기복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뉴욕 필이 아닌 다른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을 때 더 좋은 연주가 나오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뉴욕 현지에서는 예상 외로 앨런 길버트의 평가는 상당히 높은 편이고 현재 뉴욕 필의 연주력도 꽤 좋아졌다는 평도 있으나 해외 평론지의 오케스트라 순위에서 뉴욕 필의 순위는 여전히 좋지 못하다.
길버트 본인이 장기 집권을 원치 않기에 만년병장 오케스트라 뉴욕 필을 떠나고 싶어 2017년 계약 종류 후 떠나겠다고 밝혔다. 악단은 후임 지휘자를 물색하고 있다.
3 역대 음악 감독
음악 고문 직책으로 활동한 지휘자는 기울임체로 표기했다.
- 유렐리 코렐리 힐 (Ureli Corelli Hill, 재임 기간 1842-1847)[6]
- 테오도어 아이스펠트 (Theodore Eisfeld, 재임 기간 1848-1855, 1856-1858, 1859-1865)
- 헨리 팀 (Henry Timm, 재임 기간 1854-1855)
- 칼 버그만 (Carl Bergmann, 재임 기간 1855-1856, 1858-1876)
- 레오폴트 댐로슈 (Leopold Damrosch, 재임 기간 1876-1877)
- 시어도어 토머스 (Theodore Thomas, 재임 기간 1877-1878, 1879-1891)
- 아돌프 노이엔도르프 (Adolf Neuendorff, 재임 기간 1878-1879)
- 안톤 자이들 (Anton Seidl, 재임 기간 1891-1898)
- 에밀 파우어 (Emil Paur, 재임 기간 1898-1902)
- 월터 댐로슈 (Walter Damrosch, 재임 기간 1902-1903)
- 바실리 사포노프 (Василий Сафонов, Vassily Safonoff, 재임 기간 1906-1909)
- 구스타프 말러 (Gustav Mahler, 재임 기간 1909-1911)
- 요제프 스트란스키 (Josef Stránský, 재임 기간 1911-1923)
- 빌럼 멩엘베르흐 (Willem Mengelberg, 재임 기간 1922-1930)
-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Arturo Toscanini, 재임 기간 1928-1936)
- 존 바비롤리 (John Barbirolli, 재임 기간 1936-1941)
- 아르투르 로진스키 (Artur Rodziński, 재임 기간 1943-1947)
- 브루노 발터 (Bruno Walter, 재임 기간 1947-1949. 음악 고문)
-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Leopold Stokowski, 재임 기간 1949-1950)
-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Dimitri Mitropoulos, 재임 기간 1949-1958)
- 레너드 번스타인 (Leonard Bernstein, 재임 기간 1958-1969. 퇴임 후 계관 지휘자 호칭 수여)
- 조지 셀 (George Szell, 재임 기간 1969-1970. 음악 고문)
- 피에르 불레즈 (Pierre Boulez, 재임 기간 1971-1977)
- 주빈 메타 (Zubin Mehta, 재임 기간 1978-1991)
- 쿠르트 마주어 (Kurt Masur, 재임 기간 1991-2002. 퇴임 후 계관 지휘자 호칭 수여)
- 로린 마젤 (Lorin Maazel, 재임 기간 2002-2009)
- 앨런 길버트 (Alan Gilbert, 재임 기간 2009-)
4 특징
항목 첫머리와 역사 란에 쓴 대로 20세기 초중반 까지는 세계구 급으로 쩔어주게 유명한 악단이었지만, 지금은 많이 처진 상태다. 물론 몇몇 자뻑 미국 애호가들은 아직도 건재하다고 하지만,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비롯한 구 빅5나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등에 비하면 개말년 모드에서 헤어나질 못한다고 보는 것이 대체적인 평.
그래도 쇼미더머니 파워가 먹어주는 나라의 악단 특성상, 아직까지 재정 문제로 크게 골치를 썩는 일은 없는 것 같다. 재정적 측면에서는 미국에서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가장 풍족하고 단원 연봉도 쎈 오케스트라로 알려졌다. 단원들 개개인의 기량도 상당히 뛰어난 편인데, 왜 합주력은 제자리 걸음인지(...). 특히 나이가 먹을수록 원숙해지기 보다는 밋밋해진다고 까이는 메타와 마젤이 망쳐놨다고 까는 사람들이 많다. 지휘자의 말년 모드가 관현악단에 전이됐다는 주장.
이빨 빠진 호랑이 취급을 받기는 해도, 기본적으로는 재기의 여지가 충분히 남아 있고 길버트라는 젊은 지휘자가 급히 수혈됐으니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도 지켜볼 가치가 있다. 미국에서 최고로 오래된 악단 답게 그 상징성을 부각시켜 해외 공연도 많이 진행하고 있고, 한국을 가장 많이 방문한 미국 관현악단으로도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2008년에는 북한의 평양에 있는 동평양대극장에서 공연하는 진기록도 남겼는데, 북한이 그토록 까잡수고 싶어하는 적성국 관현악단의 첫 방북이라 전세계에 생중계된 것은 물론이고 DVD/BD까지 발매되었다. 물론 역사적 상징성이 대단히 큰 이벤트였지만, 일각에서는 한국의 어느 계층에서 흔히 쓰는 '대북 퍼주기', '테러지원국에 굽실굽실' 드립 등의 비판도 제기되었다. 그리고 공연 자체도 곳곳에서 삑싸리와 뒤엉킨 합주력을 보여주는 등 '아직 멀었군' 이라는 한숨을 자아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악단 상주 공연장은 미국 최대의 복합 공연장 시설인 링컨 센터의 콘서트 전용 공연장인 에이버리 피셔 홀이다. 이전에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브루클린 음악 아카데미 강당, 카네기홀 등을 상주 공연장으로 썼는데, 카네기홀의 경우 에이버리 피셔 홀의 음향이 막장이라고 한창 까일 때 상주 공연장 자격을 복권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지금은 쏙 들어간 상태. 참고로 피셔 홀은 2010년에 또 한 차례 더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갔다. 그러길래 지을 때 신경 좀 쓰지
5 음반/영상물
역사가 상당히 오래된 악단 답게 꽤 많은 편이다. 첫 녹음은 1917년에 음악 감독이었던 스트란스키의 지휘로 취입했고, 1920년대 중반 전기 녹음 방식이 도입되면서 멩엘베르흐와 토스카니니가 빅터(이후의 RCA)에 본격적인 음반 취입을 시작했다. 바비롤리는 컬럼비아(이후 CBS, 현 소니 클래시컬)에서 녹음 활동을 했고, 발터도 같은 음반사에서 취입했다.
하지만 가장 많고 또 중요한 음반들은 번스타인 재임기에 CBS를 통해 우수수 쏟아져 나왔는데, 라이벌이었던 카라얀 지휘의 베를린 필에 버금가는 광범위한 곡목을 자랑한다. 특히 말러 교향곡 전집은 세계 최초로 시도된 것으로 유명하고, 이후 전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는 말러 붐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번스타인 자신이 작곡가였던 만큼 미국 작곡가들의 작품도 많이 녹음됐는데, 자작곡 외에도 코플랜드나 아이브스, 거슈인, 바버 등의 작품들이 적극적으로 음반화 되었다. 영상물도 번스타인 지휘의 것이 많은데, 특히 청소년 음악회 시리즈의 경우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만큼 전부 녹화되어 비디오 테이프-LD-DVD 순으로 계속 제작되고 있다.[7]
번스타인 이후에는 악단 수장들이었던 불레즈, 메타, 마주어, 마젤 등이 계속 음반 작업을 이어받았다. 불레즈는 논쟁이 극과 극으로 갈리는 음반으로 지금도 유명한데, 베토벤의 지독히도 유명한 교향곡 5번을 새롭게 비판적으로 편집한 악보로 연주한 것은 당시 기준으로 꽤 충격적이었다고 한다. 쇤베르크, 베베른, 베르크 등 '신 빈 악파' 의 관현악곡 시리즈를 비롯한 현대음악 레코드들도 나름대로 명반으로 손꼽힌다.
불레즈 이후에 만들어진 음반들은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고 있는데, 다만 번스타인이 말년에 객원 지휘자로 복귀해 차이콥스키의 후기 교향곡과 미국 관현악 작품들을 지휘해 도이체 그라모폰에 취입한 음반들은 나름대로 괜찮다는 평을 받는다. 비록 극단적으로 느려진 템포 때문에 종종 까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2000년대 초반에 마젤이 취입한 존 애덤스의 'On the Transmigration of Souls' 라는 작품이 든 음반은 그래미상을 수상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8]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는 매출이 하락세를 보이고 있는 음반 시장보다 더 직접적으로 인터넷 세대들을 겨냥할 수 있는 MP3 다운로드나 실시간 스트리밍 서비스로 판로를 넓히고 있다.
- ↑ 참고로 창단 이후 최초의 미국 본토 출신 음악 감독이었다.
- ↑ 당시만 해도 미국 음악계는 유럽에 비하면 현시창이라고 까는 것이 일반적인 여론이었다. 하지만 뉴욕 필이 다녀간 후로는 이런 시각도 많이 바뀌게 되었다고.
- ↑ 물론 알려진대로 토스카니니는 뉴욕 필을 사임하고 은퇴한지 불과 몇개월 만에 NBC 방송국의 간절한 요청을 받아들여 NBC 교향악단의 지휘자로 금방 현역 복귀하였다.
- ↑ 다만 공식 명칭은 1920년대의 타 악단 인수 때와 비슷하게 '뉴욕 필하모닉 교향악 협회' 라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부르는 사람은 악단 내에서도 거의 없다.
- ↑ 물론 번스타인 이전에도 다른 교향악단에 비해 뉴욕 필은 말러를 자주 연주하는 편이었고, 특히 번스타인의 전임자인 미트로풀로스도 말러 교향곡 6번을 미국 초연하는 등 말러의 보급에 기여했다.
- ↑ 이외에 위키피디아 영어판에는 6명의 지휘자가 더 기입되어 있는데, 악단 태동기였고 지휘자 선정 문제가 복잡했던 만큼 창립자이자 중심적 역할을 한 힐만 적었다.
- ↑ 한국에서는 EBS가 방영해 널리 알려졌다. 물론 DVD로도 발매.
- ↑ 9.11 테러 희생자를 위한 추모곡이었다. 다만 그래미상이라는 것 자체가 음악성이나 예술성 보다는 상업성과 보편성을 중시하는 상이라, 애국주의가 지나치게 강했던 당시의 상황이 반영되었다고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