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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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mens Wenzel Lothar von Metternich
(클레멘스 벤첼 로타르 폰 메테르니히)
1773년 5월 15일 ~ 1859년 6월 11일

1 개요

오스트리아외교관, 정치가.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등장 이전에, 19세기 전반기 유럽의 국제 질서를 정립한 주인공.

역사적으로 볼 때는 보수 반동적인 빈 체제를 구상해 낸 인물이지만, 국제 정치학에서는 수많은 전쟁으로 점철된 나폴레옹 시대 이후, 국가간 '협력'과 '세력 균형'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관점에서는 '강대국들의 야합'이겠지만 을 통해 보다 평화롭고 안정적인 유럽 질서를 창출하여 외교사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인물로 뽑히는 등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2 생애

코블렌츠에서 태어났다. 1795년, 마리아 테레지아 시절 오스트리아 재상(Staatskanzler)이었던 카우니츠의 손녀 엘레오노레와 결혼한다. 오스트리아 역사상 국가재상직은 카우니츠와 메테르니히가 유이하다.[1] 그는 상당히 높은 교양을 갖추고 여러 나라의 언어도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본인 스스로를 세계시민적 귀족주의자라고 생각했다.

1806년, 나폴레옹 통치하의 주(駐) 프랑스 오스트리아 대사를 역임한 후, 1809년부터 오스트리아 외무장관으로서 1810년의 마리 루이즈와 나폴레옹의 결혼 실현에 힘썼다. 그 후 1813년 이후 러시아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고 나폴레옹 체제 타도에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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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15년의 빈 회의를 주재하고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 질서를 열강 간의 세력 균형에 기초하여 재건했다. 위 그림 가운데의 인물이 메테르니히다.

그는 근본적으로 모든 개혁과 혁명이 안정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죽어가는 구체제를 다시금 살리려 하였다. 그러므로 외교관으로서 그의 목표는 전시대의 정치유산인 국가간 견제와 균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패전국인 프랑스에 대해서 그리 가혹하게 대하지 않았고 그 결과만 보면 프랑스는 전범취급은 당했지만 아주 큰 손해는 보지 않은 편이었다.[2][3]

덧붙여 말하자면 이 회의에서 오스트리아는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를 획득하고 달마티아 지방의 라구사도 차지하여 이탈리아에서 실리를 챙기고 대신에 부유하지만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있던 벨기에네덜란드에 넘겼다. 또한 옛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들을 정리하여 38개의 영방국가를 모아 독일 연방을 창설하고. 연방의 의장은 오스트리아 황제가 맡으며 남독일을 포기하는 댓가로 티롤과 잘츠부르크를 회복하고, 이탈리아 중북부의 토스카나와 모데나 등 합스부르크의 방계집안이 북이탈리아 지역에 다시 복귀하여 위성국이 되었으므로 사실상 북이탈리아 지역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권이 되었고 이것은 메테르니히의 수완이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또한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 국내의 검열제도, 국경에서의 엄격한 출입국관리, 마인츠에 거점을 둔 국외 정보망으로 이루어지는 정보조작 시스템을 만들어내어 제국에 속한 여러민족들의 독립주장을 힘으로 누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메테르니히가 구축한 빈 체제는 벨기에와 그리스의 독립으로 균열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고, 정치적인 억압에 대한 반발은 1848년 혁명으로 폭발했다. 그 여파로 메테르니히 자신은 빈의 3월 혁명으로 실각하고 영국으로 망명했다. 혁명 후인 1851년, 메테르니히는 빈으로 돌아와 오스트리아의 국내 정치에서는 일정한 정치력을 유지하였다. 이후 1859년에 노환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였는데, 80세를 넘겨 당시로서는 상당히 장수하였다.

3 기타

나폴레옹 시대를 종결짓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사람답게, 나폴레옹의 아들이었던 나폴레옹 2세를 몹시 괴롭혔다.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 2세가 아버지처럼 프랑스의 황제가 될 것을 걱정하여 그가 프랑스어를 사용하거나 프랑스 책을 읽는 것을 엄금하였으며 독일어를 사용할 것을 강요하였다. 어린 나이부터 메테르니히에게 시달린 나폴레옹 2세는 우울한 소년시절을 보내다가 20세를 갓넘기고 요절하는 비극적인 일생을 살았다.

1970년대 닉슨 행정부에서 미국 국무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중국과의 관계 개선, 소련과의 군비제한 등 데탕트를 실현해낸 20세기 세계 외교계의 거목 헨리 키신저는 메테르니히를 자신의 롤모델이라고 열렬히 칭송했다. 본인의 하버드대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가 메테르니히의 빈 체제였고, 이후 자신의 여러 저작에서도 존경심을 자주 드러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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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방영된 TV 시리즈 <나폴레옹>의 종반부에 단역으로 등장한다. 러시아 원정의 참패로 내리막에 접어든 나폴레옹을 방문하여 그동안 프랑스가 전쟁으로 차지해 온 유럽 각지의 점령지들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고, 거부할 경우 오스트리아가 다른 동맹국들과 함께 프랑스에 선전포고한다는 최후통첩을 전달하는 모습.[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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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왈츠 음악으로 유명한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그의 자식들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요제프 슈트라우스,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를 주인공으로 한 TV 전기영화 <슈트라우스 왕조>(Die Strauß-Dynastie)에서는 <자칼의 날>로 잘 알려진 배우 에드워드 폭스가 맡아, 극 초반의 비중있는 조연으로 등장했다. 보수주의의 거두 답게 친정부 성향인 요한 슈트라우스 1세를 적극 지지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1. 현재 Staatskanzler는 현재 오스트리아에서 총리직을 의미하지만 전제 왕정시절에는 당연히 군주가 모든 결정권을 쥐었으며 실무는 관례적으로 외무장관이 최선임 장관이었다. 특별히 국가 재상직을 만들어 역임한건 두 인물이 활약할때 뿐이다. 사실 메테르니히가 국가 재상직에 있던건 나폴레옹 전쟁시기가 아니라 정적과 프란츠 2세에 밀려 실세에서 멀어졌던 관직커리어 후반기이다.
  2. 그 이유는 프랑스 혁명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명분 때문에 프랑스 자체를 쪼갤 수 없었고 무엇보다 프랑스를 패전국이라고 아주 개발살을 내버리면 세력의 균형은 커녕 다른 국가들이 제2의 프랑스가 되어 또다시 유럽의 패권을 거머쥐거나, 혹은 프랑스가 복수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3. 그리고 그것은 훗날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에게 가혹했던 베르사유 조약다시 전쟁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였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아주 적절한 처사였다.
  4. 그 다음 장면에서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하고, 결국 엘바 섬으로 유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