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역대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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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나폴레옹 프랑수아 조제프 샤를 보나파르트 (Napoléon François Joseph Charles Bonaparte) |
생몰년도 | 1811년 3월 20일 ~ 1832년 7월 22일 |
재위기간 | 1815년 6월 22일 ~ 1815년 7월 7일 |
Napoleon II. Emperor of the French, King of Rome, Duke of Reichstadt.
Napoléon François Joseph Charles Bonaparte, Duke of Reichstadt.[1]
프랑스 제1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나폴레옹 1세의 유일한 적자이다. 흔히 나폴레옹 2세 혹은 로마왕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명은 위에 써놓은 것과 같이 '나폴레옹 프랑수아 조제프 샤를 보나파르트'이다.
나폴레옹과 그의 두번째 황후인 마리 루이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인생은 매우 불행했다. 안습.
1 출생과 어린시절
파리의 튈르리 궁전에서 1811년 나폴레옹 1세와 황후 마리 루이즈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 아버지로부터 로마 왕의 작위를 받았는데, 이는 나폴레옹 2세가 자신의 적자이기 때문에 황위계승의 정당성을 갖게 하려는 목적에서 그랬던 것이다.
그러나 생후 3년 뒤, 그가 물려받아야 할 제국은 붕괴했고, 그는 어머니 마리 루이즈의 손에 이끌려 랑부예 성으로 이동하고 있었지만 랑부예가 이미 위험했기에 블루아 성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1814년 4월 8일, 나폴레옹 1세가 퐁텐블로 조약으로 퇴위당하고 엘바 섬 유배행이 결정되었다. 어머니 마리 루이즈는 눈물어린 호소로 아버지에게 요청했지만 프란츠 1세는 자기를 완전히 호구취급[2]했던 사위가 너무나도 괘씸하고 증오스러웠기 때문에(…) 딸의 요청을 단번에 거절하고 나폴레옹을 꼴 좋다며 유배행 결정을 더욱 반겼다. 그 후 4월 13일에 랑부예 성에 갇혀있던 그녀에게 아버지 프란츠 1세가 찾아왔고, 프란츠 1세의 결정으로 오스트리아 연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오스트리아에 반 강제로 돌아가게 되었다.
1815년 아버지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뛰쳐나온 후 백일천하가 시작되었고, 나폴레옹은 아들이 보고 싶어 이제 그만 돌아와 주오라고 마리 루이즈에게 편지를 썼지만 그녀는 이미 유부남 나이페르크 백작과 불륜관계였기 때문에 그의 요청을 씹고 계속해서 나이페르크 백작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 전에 나폴레옹 2세는 버림받았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대패하고 완전히 희망을 잃어버린 나폴레옹은 아들이라도 어떻게든 제위에 앉혀보자는 심정으로 6월 22일에 나폴레옹 2세를 새로운 황제로 선포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내렸다. 그러나 7월 7일에 제2차 왕정복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4살 먹은 어린아이였던데다 오스트리아에 있었던 나폴레옹 2세는 황제 노릇도 해보지 못하고 루이 18세에게 정권을 내주었다.
1815년에 외조부 프란츠 1세는 어린 나폴레옹에게 어지간히 나폴레옹이 싫었는지 그의 이름인 나폴레옹 대신에 자기 이름 프란츠를 집어 넣었다(…).
1816년 3월 7일에 어머니 마리 루이즈가 파르마 공국의 통치권을 일임받게 되자, 어머니와 완전히 별거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5세.
1818년 프란츠 1세는 7세 소년 나폴레옹 2세에게 라이히슈타트 공의 작위를 내렸다. 그리고 3년이 지나 1821년에 아버지 나폴레옹 1세가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5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들 나폴레옹 2세는 비록 얼굴도 기억할 수 없는 아버지지만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3]
2 소년 시절과 청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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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2세는 아버지를 닮아서 매우 잘생겼고, 총명했다고 한다. 특히 외조부 프란츠 1세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사위는 미워도 손자는 좋다. 손자사랑은 어딜가나 똑같은 듯 하다. 게다가 마리 루이즈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외롭게 방치된 외손자를 불쌍히 여겨서 잘 대해 주었다.
하지만 그의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은 매우 불행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메테르니히는 그의 평생의 원쑤였다. 아버지의 원쑤 사천왕들도 그렇고, 어째 보나파르트 가문에는 원쑤들이 잘 따라붙는것 같다. 4살 먹은 어린아이였을 시절부터, 메테르니히는 그가 프랑스 제국 부흥의 단초를 제공할 지 모른다며 그를 대놓고 감금(…)했고, 그 생활은 어린 시절 내내 계속되었다. 그리고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 2세가 프랑스어를 말하고, 프랑스어로 된 책을 읽는 것 자체를 금지시켰다.이쯤되면 조교(…)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그 대신 독일어로 말하고 독일어 책을 읽는 것은 허락했다. 아니, 강조했다. 메테르니히의 이런 행동이 나폴레옹 2세의 마음을 병들게 만들었고, 그에게 우울증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또, 그의 우울증을 심화시키는데 어머니의 정신나간 행동이 한 몫 했다(…). 1817년에 마리 루이즈가 나폴레옹 2세를 만나러 오기로 약속을 했었는데, 나이페르크 백작의 아이인 알베르티나를 출산하게 되면서 그와의 약속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당시 6살이던 나폴레옹 2세는 그 말을 듣자 매우 심하게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818년 7월에 어머니가 파르마에서 다시 빈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나폴레옹 2세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리고 그때 만난 후에 그의 어머니 마리 루이즈는 다음에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1819년 8월 9일에 나이페르크 백작의 둘째 아이 굴리엘모를 출산하게 되면서 또 다시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안습. 그리고 그 후로도 계속 어머니를 만날 수 없었다.논 자유에 모미 아냐 요태까지 그래와꼬 아패로도 께속...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꿋꿋이 버텨냈고, 메테르니히의 이어지는 자국어에 대한 탄압 속에서도 그는 프랑스어와 아버지 나폴레옹 1세에 대해 더욱더 깊은 애정을 품고 탐구했다. 프랑스어를 밤낮으로 공부했던 그는 궁정 도서관에서 나폴레옹의 부하였던 라스 카스가 쓴 "세인트 헬레나의 기록"과 몽트랑 백작이 썼던 "회상록"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를 통해 자기 아버지가 어떠한 인물인지 다시 확인했다.
그러나 너무 무리했던 탓인지, 결핵에 걸린 때도 이 때였다. 게다가 아버지를 닮고 싶다는 욕심에 아버지처럼 되겠다고 한 여러 군사훈련들이 오히려 그의 몸을 망치는데 더욱 이바지 했다(…).
1828년에는 아버지처럼 티롤 연대의 대위로 입대했다. 그리고 이듬해 나이페르크 백작이 죽은 후 그의 유서를 통해 까발려진 진실을 알게 된 그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그것을 알게 된 후 그는 가장 친한 오스트리아인 친구 프로케쉬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만약 조제핀 황후가 내 어머니셨으면, 우리 아버지는 세인트 헬레나에서 묻힐 일도 없었을 거고, 나도 이곳 빈에 있지 않았을거야. 우리 어머니는 매우 상냥하신 분이시지만, 너무 주변 인물들에게 휘둘려. 너무 연약하다고 생각해. 그 여자는 내 아버지의 아내가 될 자격이 없어."
그만큼 그는 자신의 어머니 마리 루이즈에 대해, 특히 그녀의 개념없음경솔한 행동에 커다란 증오를 품게 되었고, 위와 비슷한 정확한내용의 글을 써서 남겼다고 한다.
3 그의 친구 프로케쉬, 그리고 나폴레옹 2세의 죽음
오스트리아에서, 그의 유일한 친구였던 프로케쉬는 언제인가 "워털루 전기"라는 책에서 나폴레옹을 옹호해 주었던 적이 있었고, 이에 감동한 나폴레옹 2세는 그와 친구가 되었다. 프로케쉬는 1832년 7월 21일에 로마에 살고 있는 나폴레옹 2세의 친할머니 마리아 레티치아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때 그는 "나폴레옹은 매우 훌륭한 청년이고, 아버지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라고 전했다. 이에 그녀는 매우 기뻐하면서 "그 아이라면 아버지처럼 훌륭한 지도자가 되겠지요. 머지않아 그 아이의 시대가 오고, 다시 프랑스의 왕좌에 오르게 될 것이라 전해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프로케쉬가 레티치아를 만난 그 날, 나폴레옹 2세는 병상에 누웠다. 그 동안 무리해 왔던것이 쌓이고 쌓여서 폭발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인 1832년 7월 22일, 나폴레옹 2세는 21세의 나이로 쇤브룬 궁전에서 죽었다. 그의 석관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용 묘지인 카프치네 교회에 안장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통에 따라 심장을 비롯한 장기들은 분리되어 안치되었다.[4] 그래서 그의 시신이 훗날 프랑스 파리로 옮겨진 후에도 그의 심장과 창자는 빈에 안치되어 있다.
그러다가 108년의 시간이 흐른 1940년 12월 15일, 아돌프 히틀러[5][6]의 지시로 아버지 나폴레옹이 매장된 파리의 앵발리드로 이장되었다. 저 묘소에서 보면 NAPOLEON II ROI DE ROME이라고 쓰여진 바닥이 보이는데 그게 나폴레옹 2세의 관을 안장하고 석판을 덮은 것이다.
나폴레옹 2세의 관을 옮기는 독일군.
앵발리드에서 나폴레옹 1세의 관을 바라보는 히틀러. 히틀러가 총통 취임 이후 파리를 방문한 것은 평생 단 한 번, 그것도 3시간에 불과했는데 이 때의 필수코스에 앵발리드가 포함되었다.
4 기타
바이에른의 공주였던 오스트리아 대공 프란츠 카를의 아내 조피와 염문이 있었다고 한다. 조피는 원래 매우 총명하고 당찬 성격이었는데, 옛날부터 정신박약아로 소문이 다 나있던 프란츠 카를과 정략결혼을 해야만 했다. 이 때문에 모자란 남편과의 애정없는 결혼으로 불행했던 그녀는 마찬가지로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불행하게 살던 나폴레옹 2세와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던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염문이 사실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확실한 건 두 사람이 저러한 사유로 가까웠다는 것이다. 나폴레옹 2세가 죽을 때 그녀는 둘째 아들을 임신중이었고 그 와중에도 나폴레옹 2세의 병간호를 했지만 결국 그는 죽었고 이후 그녀는 냉정한 성격이 되었는데 이것이 훗날 고부갈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7] 둘째 아들인 막시밀리안 1세를 편애한 것도 나폴레옹 2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라는 소문이 도는데 일조.
여담으로 조피의 형부가 바로 나폴레옹 2세의 이복형제인 외젠 드 보아르네이다.
참고로 나폴레옹 3세로 알려진 루이 나폴레옹은 이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나폴레옹 1세의 동생인 루이 보나파르트와 의붓딸인 오르탕스의 아들로 나폴레옹 2세의 사촌형이다.[8] 위 염문설은 어쨌든 간에 공식적으로 나폴레옹 2세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들도 없었다.
영국의 신스팝 그룹 Pet Shop Boys 의 King of Rome가 바로 나폴레옹 2세에 대한 노래이다. #
- ↑ 라이히슈타트 공은 외할아버지 프란츠 1세가 준 작위이다.
- ↑ 물론 촌넘에게 패하고 딸을 빼앗긴 프란츠 1세는 나폴레옹을 잘 대해주지 않았고,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에게 '당신 아버지는 가나쉬(프랑스어로 쓸모없는 늙은이)요'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런데 프랑스어를 모르는 마리 루이즈는 시종에게 그 뜻을 물어보았는데, 시종은 당황해하면서 "멋지고 영리한 어르신"이라는 뜻이라고 왜곡했다. 마리 루이즈는 나중에 나폴레옹이 없는 자리에서 프랑스인 재상에게 가낫쉬라고 칭찬하면서 분위기를 얼려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 ↑ 워낙 나폴레옹의 애정이 지극했기 때문인지,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좋았던 것 같다. 나폴레옹의 비서였던 멘느발과 만났을 때 그에게 "멘느발 아저씨, 아빠한테 많이 사랑한다고 전해줘."라고 속삭였다고 한다.
- ↑ 레오폴트 1세의 형인 페르디난트 4세 이래 19세기까지 유지되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통.
- ↑ 파리 빠돌이에 나폴레옹의 숭배자였다고 한다. 오 마이 갓!
러시아 원정가서 개털린것도 그로 인한 영향이 아니었나 싶다. - ↑ 흥미롭게도 바로 며칠 후에 히틀러는 소련 침공 계획을 작성할 것을 명령한다. 12월 18일에 내려진 총통의 '명령 21호'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바로 바르바로사 작전.
- ↑ 이때 조피에게 고통받은 며느리가 바로 미인 황후로 유명한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 ↑ 다만 최근에 Lucotte 교수에 의해 나폴레옹 3세와 1세의 유전자 검사가 있었는데, 둘은 실제로 아무 혈연관계가 없음이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