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체제

Wiener System
Empty System

1814~15년 빈 회의 이후 유럽에 성립된 체제. 메테르니히 체제(Metternichsches System), 유럽협조체제(Concert of Europe), 또는 5두 체제(pentarchy)[1]라고도 한다.

온 유럽을 전쟁의 불바다로 만든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난 원인을 자유주의민족주의의 확산으로 보고 구 체제로 되돌아가자는 것이 이 체제의 주요 골자이며 만약 각 국에서 이런 자유주의,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날 경우 유럽 국가들은 이런 운동을 진압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각 국은 비밀경찰과 언론 검열 등을 펼쳤고 나폴레옹 전쟁 이전의 정부 체제를 복귀시켰다.

그러나 이 체제는 이미 변하고 있는 시대적 배경을 무시하는 조치였다. 이미 유럽 각국에서는 나폴레옹이 퍼트린 프랑스 혁명의 이념들인 자유, 평등, 박애가 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곧 유럽 각지에서 빈 체제에 대한 반발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식인들은 빈 체제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말도 안되는 시도라고 반발했고 분열되어 있던 독일이탈리아에서는 민족주의 열풍이 불었으며 프랑스에서는 7월 혁명이 일어나 루이 18세의 뒤를 이은 샤를 10세가 폐위되었다.

또한 이 체제에서 중요 역할을 맡았어야 할 영국산업 혁명과 해외 식민지 진출에 골몰하느라 관심이 없었으며[2] 러시아도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다. 또한 그리스 독립전쟁에서 영국러시아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빈 체제의 이념을 무시하고 그리스의 독립을 지원했다. 게다가 그리스 독립전쟁으로 유럽에는 다시 열병에 가까운 자유주의, 민족주의 운동이 불기 시작했다. 샤를 10세의 뒤를 이은 것은 친 혁명 성향의 루이 필리프였으나 1848년에 프랑스 2월 혁명이 벌어져 프랑스에 공화정이 세워졌고 오스트리아에서도 3월 혁명이 벌어져 메테르니히가 축출되면서 빈 체제는 막을 내렸다. 외교적으로 본다면 오스트리아-프러시아-러시아신성 동맹이 붕괴된 크림전쟁(1854년)이 결정타였다.[3]

빈 체제는 보수주의를 기반으로 구 체제 복원을 외쳤지만 빈 체제가 성립되고 무너져내리는 과정을 보면 이 체제의 목적은 상호 견제와 세력 균형이였고 결국 각 국의 이해관계로 인한 협력 체제의 분괴와 내부에서의 반발이 맞물려 무너져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여담으로 위와 같은 성격 때문에 빈 체제를 국제기구의 첫 사례로 보기도 한다. 국제공조란 역시 어려운 법이다.
국제정치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시기이기도 하며 현실주의 외교의 거두이자 빈 체제 연구에 큰 공헌을 한 헨리 키신저는 그의 여러 논문과 저서에서 메테르니히에 대한 빠심을 열렬히 표출하기도 했다(...).

빈 체제는 1860~70년대 이탈리아 통일전쟁과 보오전쟁(1866), 보불전쟁(1871)을 거쳐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 의해 1881년의 삼제동맹으로 부활한 측면이 있지만 다시 망할놈 빌헬름 2세에 의해 붕괴되면서 독-오-이의 동맹과 영-불-러의 삼국협상으로 재대립하였다. 이것이 거대한 전쟁으로 이어진것은 1914년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것으로 빈 체제가 이루어진지 정확히 100년만에 평화는 상실되고 30년간의 양차대전이 몰아닥쳤다.
  1. 빈 체제를 지탱한 프랑스, 오스트리아,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의 다섯 강대국을 말함
  2. 게다가 영국은 오랜 세월에 걸친 왕권과의 투쟁의 결과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자유로운 사회 환경이 갖춰져 있었으므로 타국에 비해 '탄압'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덜했다.
  3.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정치체제 상 자유주의, 민족주의 운동 확산 방지를 목표로 한 빈 체제로 인해 받는 수혜가 가장 큰 나라였기에 발칸 반도에서 이익을 지키겠다고 스스로 빈 체제를 무너트린 것은 장기적으로 보면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리고 기존의 유럽의 평화 질서가 완전히 붕괴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은 붕괴하게 된다. 자업자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