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모리

게닌 BIG 3
타모리아카시야 산마비트 타케시
41376.jpg[1]
예명タモリ타모리[2]
본명森田一義모리타 카즈요시
생년월일1945년 8월 22일
출생일본 후쿠오카현 후쿠오카 시
직업게닌, 사회자, 배우
소속사다나베 에이전시
데뷔년도1975년
혼인여부기혼[3]
현재 진행중인 프로그램뮤직 스테이션 (TV 아사히), 타모리 클럽 (TV 아사히)
기묘한 이야기 (후지 TV), 브라타모리 (NHK)[4]

1 개요

일본의 국민 MC
아카시야 산마, 비트 타케시와 함께 일본 게닌 BIG 3로 일컫어지는 인물

2 학창 시절

초등학교 3학년 때 한쪽 눈을 잃고부터 무선에 관심이 많았던 타모리는 후쿠오카 현립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기 통신 대학을 노렸지만 물리학 점수가 안되서 낙방하고 1년간 재수를 하였다. 수험생 시절, 공부를 하면서 틈틈히 한국과 중국의 라디오를 많이 들었는데 이것은 훗날 타모리의 트레이드마크인 '6개 외국어 흉내'의 기초가 되었다. 1965년에 와세다대학 제 2 문학부[5] 서양 철학 전공에 입학한 타모리는 모던 재즈 연구회라는 동아리에 들어가 트럼펫을 맡았지만 실력이 안되어 동아리 매니저와 공연 사회자를 겸임했는데, 이때부터 사회자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후 TBS의 라디오 프로그램 '대학생들의 밴드 대결'이라는 프로에서 학생층 사회자로 나와 프로그램 사회자였던 오오하시 쿄젠[6]에게 칭찬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등록금을 미납하여 와세다 대학에서 제적당했는데 그 이유가 황당하다. 2학년 5월 골든위크 때 친구 2명과 여행을 계획했는데, 돈이 부족하자 부모님이 학비로 쓰라고 송금한 돈을 여행용으로 유용한 것(...)[7] 하지만 제적당한 후에도 동아리 매니저로 계속 일하면서 상당한 수익을 얻었다고 한다.

3 후쿠오카 시절

매니저를 그만둔 타모리는 아사히 생명에서 3년 정도 보험 설계사로 근무하다가[8] 1971년, 아사히 생명에서 퇴사하고 고향 하카타로 돌아와서 평소 재즈에 조예가 깊은 것과 특기였던 요리 실력을 살려서 다방을 운영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1972년, 타모리의 인지도를 높인 계기가 되는 일이 발생한다. 그 날, 타모리는 대학교 때 같은 동아리였고 지금은 재즈 연주자 와타나베 사다오의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는 회사의 직원인 친구와 그가 묵고 있던 호텔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만취한 타모리는 막차 시간대가 가까워가자 친구와 헤어지고 호텔 복도를 거닐다가 열려있는 방 안에서 와타나베의 콘서트에 동행한 재즈 연주자 그룹인 야마시타 요스케 트리오(야마시타 요스케, 나카무라 세이치 , 모리야마 타케오)가 가부키 춤을 흉내내거나 콩트 등을 하며 신나게 놀고 있는 것을 목격, 그곳에 난입하여 나카무라 세이치 주변에 있던 휴지통을 가면 삼아 가부키를 추기 시작했고 곧 나카무라가 재치있게 타모리의 무례를 어설픈 한국어로 지적했다. 그러자 타모리는 더 잘하는 어설픈 한국어로 이를 받아쳤고 타모리와 나카무라의 엉터리 외국어 대결이 시작되었다. 타모리가 표정까지 흉내내며 엉터리 아프리카 어를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야마시타는 호흡 곤란이 될 정도로 웃었다고 한다. 첫차가 나오는 시간까지 신나게 논 타모리는 자신의 이름인 '모리타'만 말해주고 돌아갔다.

자신의 얼굴을 알아봤으니 타모리가 재즈 팬이 틀림 없다고 확신한 야마시타는 하카타의 재즈 바에서 '모리타'라는 이름의 남자를 수소문하기 시작했고 그러다 어떤 재즈 바에서 '주인이 4차원인 것으로 유명한 다방이 있다.'라는 정보를 듣고 둘은 재회한다. (상술하다시피 이 시기 타모리는 다방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비엔나소시지를 곁들인 커피를 메뉴판에 비엔나커피라고 적는 등 괴짜 주인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재회 후 야마시타 트리오는 큐슈에 갈 때마다 그 다방에 방문하여 같이 놀게 되고, 타모리는 연예인들 사이에서 나름 유명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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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야마시타 트리오의 추천으로 만화가 아카츠카 후지오가 타모리의 다방을 방문하였고 타모리의 즉흥 개그에 감탄한 아카츠카는 그해 8월 말 생방송이 있었던 자신의 프로그램에 타모리를 출연시키기로 결정, 타모리는 아카츠카의 방송이었던 <만화 대행진 아카츠카 후지오 쇼>(1975년 8월 30일 방송)에서 일반인 신분으로 처음으로 TV에 출연하게 된다. 운좋게도 이때의 타모리를 아카츠카 후지오의 절친이자 토크쇼 <테츠코의 방>의 진행자인쿠로야나기 테츠코[9]가 보고 "저렇게 웃긴 사람이 왜 여태 개그맨으로 데뷔하지 않았지?"하고 생각하여 타모리를 자신의 토크쇼에 게스트로 섭외, 2번째로 TV에 출연하게 된다. 해당 방송에서 타모리는 엉터리 외국어 흉내를 TV에 최초로 선보였고 일약 대중들의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타모리의 개그 스타일이 너무 이질적이라고 판단한 예능전문 기획사들도 타모리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고[10] 타모리 본인도 이미 다방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별 미련없이 하카타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자 개그 만화의 1인자로 불리는 만화가인 아카츠카는 그를 프로 개그맨으로 데뷔 시킬려는 목적으로 '자신이 한달에 2~30만엔씩 생활비를 줄테니 다방을 처분하고 도쿄로 상경하여 자기 집에 머물면서 연예인 데뷔를 준비하자'며 설득하였고 결국 심사숙고 끝에 아카츠카의 제안에 응한 타모리는 그의 부인과 함께 도쿄로 이주하게 된다. 이후 아카츠카는 타모리의 매니저를 자처해서 약 9개월 동안 소속사를 찾아다녔고, 마침내 타나베 에이전시와 계약에 성공한다. 타나베 에이전시는 1973년 호리프로 매니저 출신의 타나베 쇼지가 호리프로 소속 연예인들 일부를 데리고 독립하여 설립한 신생회사로 본래 The Alfee, 나츠메 마사코 등 가수와 배우들이 중점적으로 소속되어 있는 회사였지만 타모리를 시작으로 예능 분야에도 진출할 수 있었다.

참고로 타모리는 연예계 데뷔가 확정되고 본격적으로 연예계에 진출하기 직전에 다음과 같은 4개의 개명을 스스로 만들었다고 한다.

1. 다른 선배 개그맨의 예풍을 따라가지 않고 제자 또한 만들지 않는다.[11]
2. 어떠한 연예계 파벌에도 들지 않고 연예계 일과 사생활 또한 철저히 구분한다.
3. 방송에서는 항상 당당한 태도로 임한다.
4. 사적인 자리에서는 사인을 제외하고는 노코멘트로 일관한다.

4 연예계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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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타모리의 이미지
1초 유세윤

타모리는 1976년 4월 도쿄 12 채널 (현재 도쿄 TV)의 심야 프로그램이자 영국 BBC에서 방영한 코미디 프로그램 <Monty Python's Flying Circus>의 일본어 번역판인 <하늘을 나는 몬티 파이선> 중간에 삽입된 "타모리 코너"에서 정식으로 연예계에 데뷔한다. 데뷔 당시 나이는 30세로 비트 타케시, 아카시야 산마 보다 나이는 연상이지만 후배가 된다.

이후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 <타모리의 올 나잇 일본(タモリのオールナイトニッポン)>을 진행하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니혼 TV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금요일 10시! 소문의 채널!!(金曜10時!うわさのチャンネル!!)>에도 레귤러로 출연, 특유의 개성적인 컨셉으로 점점 컬트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참고로 당시까지만 해도 타모리는 선글라스가 아닌 해적이 쓰는 검은 안대를 착용하고 '전후 최대의 아마추어 연예인'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프로그램 중간 중간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코너에서 혼자 개그를 하는 형태로 TV에 출연하였다. 주로 구사했던 개그로는 이구아나 흉내, 그럴듯한 외국어 묘사, 즉석에서 인물들을 바꿔가면서 성대모사 하는 것 등이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슬랩스틱 콩트를 하던 정통 게닌들과는 다른 컨셉이었기 때문에 대중들에게는 심야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성드립을 자주 구사하는 괴짜 비호감 게닌으로 취급받았다. 타모리 본인도 이 시기 자신의 모습을 "에가시라 2:50 같은 느낌이었다"라고 회고했다.

5 사회자로

1981년 10월, TV 아사히에서 <타모리 클럽>이라는 심야 버라이어티의 사회자로 발탁된 타모리는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방송에 출연하기 시작한다. <타모리 클럽>은 '각종 덕후들을 위한 방송'이라는 캐치프라이즈를 내걸고 매니아들이 있기만하면 어떤 주제도 가리지 않고 방송으로 내보냈고, 이러한 전략은 먹혀 들어가서 해당 방송은 서서히 일본 전역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한다. <타모리 클럽>은 2016년 현재까지 35년째 계속 방영 중인, 일본에서 가장 오래 방영된 예능 프로그램 중 하나이다. 오프닝 영상만 보고 속아서 므흣한 내용인줄 알고 기대하면서 봤다가 이게 뭐지 하는 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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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모리 클럽>이 방영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82년, 타모리는 후지 TV의 프로듀서였던 故 요코자와 다케시의 새로운 프로그램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森田一義アワー 笑っていいとも!)>(통칭 와랏테이토모)의 사회자로 발탁된다. <와랏테이토모>는 주5일 생방송으로 방영된 프로그램으로 매 요일마다 다른 코너와 다른 레귤러 멤버들이 출연했고 타모리는 프로그램의 전체 진행을 맡았다. 비록 방영 초기, 와랏테이토모의 시청률은 부진했지만, 텔레폰 쇼킹[12]이 인기를 얻자 '친구처럼 편하고 아무 부담없이 볼 수 있는 방송'이라는 모토로 그간 예능 방송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아이돌이나 사회의 각종 유명 인사들이 레귤러 멤버로 출연하여 시청자들과 함께 소통하는 코너들을 지속적으로 신설,[13] 마침내 1989년부터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점령한다. 이후, 와랏테이토모는 2014년 3월 31일 종영 될때까지 무려 26년동안 동시간대 시청률 수위방송기록을 지키며 일본을 대표하는 예능 방송으로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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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모리 클럽>과 <와랏테이토모>로 사회자로써 두각을 나타낸 타모리는 1983년 34회 홍백가합전에서 종합 사회를 맡게 되는데 NHK 아나운서 이외의 사람이 홍백의 종합 사회를 맡은 것은 타모리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타모리는 1986년 10월 24일 부터는 TV 아사히의 신설 음악 프로그램 뮤직 스테이션(통칭 엠스테)의 2대째 사회자로, 1989년부터 방영을 시작한 기묘한 이야기에서는 중후한 이미지의 스토리텔러로 발탁되어 국민 MC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였다. 1994년부터 방영을 시작한 정글 TV에서는 그간 사회자로서의 이미지 때문에 게닌으로서의 정체성이 약해졌디는 평기를 받은 것에 대한 반동으로 기존보다 거칠고 웃음에 초점에 맞춘 진행을 선보이기도 했다.[14] 이 밖에도 스펀지의 원조격인 트리비아의 샘에 평가단 위원장으로 출연하였다.

2008년 세상을 떠난 개그 만화가 아카츠카 후지오의 장례식에서 직접 조제문을 읽어 그를 추모한 바 있다. 이는 아카츠카 후지오가 그를 연예게에 데뷔시켜주고 일본의 국민 오와라이로 만드는데도 기여해주는 등 많은 인연을 쌓았던 것도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아카츠카 후지오의 장례식에서 "역시 타모리 답다"라는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조제문을 부탁받긴 했는데 장례식 전날 술을 진탕 마시는 바람에 귀찮아져서 제문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해 보니 "아카츠카 선생이시라면 이럴 때 차라리 개그를 치시겠지"라는 생각에 칸진쵸[15]를 흉내내 백지를 들고 나섰다고 한다. 즉, 거의 8분에 달하는 조제문은 전부 타모리가 즉석에서 한 말이며, 결국 개그는 날려버리고 진심을 담아 고인에 대한 추모를 한 것인데, 즉석에서 말을 만들어 내면서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게 8분간이나 이야기를 한 타모리의 말발을 대표하는 에피소드가 되었다. 여담으로, "칸진쵸가 개그라면 오치(이야기의 결말)는 뭔가요?" 라는 질문에 "내 매니저 성이 토가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참고로 토가시는 칸진쵸 이야기에서 요시츠네 일행을 풀어준 수비대장의 성이라고. 그런데 이걸 또 <이이토모> 마지막 생방 고별사에서 톤네루즈의 이시바시가 그대로 패러디했다(...)

2014년 3월 31일자로 와랏태이토모가 종영되었다. 참고로 와랏테이모토 마지막회에 등장한 게스트들이 후덜덜한데, 오프닝부터 타모리와 함께 이 아카시야 산마가 출연, 이후 일본의 거물급 연예인들이 차례로 등장하다가 무려 아베 신조까지 텔레폰쇼킹의 게스트로 등장. 방송 마지막에는 게스트로 비트 타케시가 등장하여 방송불가용어로 점철된 축사를 생방송으로 읽는 위엄을 뽐내면서 종영되었다, 이 외에도 야후 재팬에서는 이이토모의 종영을 맞아 첫 페이지의 디자인을 바꾸는 등, 일본을 대표하는 방송답게 전국적인 스케일의 반응들이 이어졌다.

6 기타 여담

  • 타모리의 전담 개인기는 역시 외국어 흉내. 직접 들어보자. 2002년 12월 <테츠코의 방>에서. 연말이면 항상 테츠코의 방에 고정출연한다. 순서대로 독일어,러시아어, 스페인어, 중국어, 한국어, 조선어(북한) 순. 마지막 북한 부분이 백미다. 한국어만 흉내내는 영상
  • 일본을 대표하는 개그맨, MC다보니 이곳 저곳에서 패러디가 많이 된다. 오덕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패러디 캐릭터라면 은혼의 타모. 또한 페르소나 스토커 클럽의 타이틀은 <타모리 클럽>의 노골적인 패러디다. 인기 코너 페르소라 미미극장 또한 타모리 클럽의 코너 소라미미 아워를 베ㄲ...벤치마크한 것.
  • 유루유리 정발판에서 작가 후기 번역시 작가 필명인 '나모리'를 써야하는데 번역측에서 '타모리'라고 오자를 내버렸다.
  • 한창 후배인 록 밴드 블랭키 젯 시티의 팬이라고 한다. 멤버들이랑 같이 술마시러 가는 꿈도 꿨고 재결성해줬으면 하는 밴드에 블랭키를 올렸다고.
  1. 타모리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철조망에 얼굴을 부딪혀서 오른쪽 눈을 실명했기 때문에 선글라스를 쓰고 방송에 출연한다. (요미우리 석간 1986년 11월 7일자에서.). 본인 왈 실명도 실명이지만 눈이 실눈이어서 컴플렉스라고(...)
  2. 자신의 성씨 '森田(모리타)'를 '田森(타모리)'로 뒤집은 것
  3. 2살 연상의 일반인 여성과 결혼했으며 자녀는 없다.
  4. 타모리가 전국을 순회하는 여행 프로그램.
  5. 주간 대학에 합격한 것은 아니었고 야간 대학이었다.
  6. 1934년생으로 70~80년대에 MC로 활약했으며 민주당 출신 전 참의원이기도 하다. 비례대표로 2001년에 당선되었다.
  7. 출처는 역시 요미우리 석간 1986년 11월 7일자.
  8. 이때 동료였던 2살 연상의 일반인 여성과 결혼했다.
  9. 1933년생으로 1953년에 데뷔한 일본 최초의 TV탤런트 중 하나. 유명한 책으로 <창가의 토토>가 있다.
  10. 당시 유명 배우로 시작하여, 버라이어티의 진행자나 개그 방송의 레귤러로 활약했던 "사카이 마사아키"도 타모리의 개그 스타일이 과연 방송에서 먹힐까 의문을 가졌기 때문에 타모리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는게 나을것이다"라고 쓴소리를 했다고 한다. 후에 타모리가 엄청난 인기를 얻게되자, 그 이후로 타모리를 만날때마다 존칭으로 부른다고.
  11. 다만, 1982년. 타모리는 아키츠키 후지오와 함께 <스타 탄생>의 자매 프로그램인 <개그맨 스타 탄생>의 심사위원으로 출연, 자신들은 재밌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심사위원들은 톤네루즈의 개그에 악평을 하자 톤네루즈를 그랑프리 수상자로 적극 추천하며 이들을 본격적으로 방송가에 데뷔시켰다. 훗날 톤네루즈는 <개그맨 스타 탄생>에 출연하기 전부터 타모리를 '동경'하고 있었지만 이 때부터는 타모리를 '숭배'하기 시작했다고 발언했다.
  12. 코너에 초대받은 연예인과 타모리가 토크를 하는 코너. 게스트는 코너 막바지에 다른 연예인에게 전화를 걸고, 타모리는 전화를 받은 연예인에게 프로그램 섭외 요청을 한다. 만약 요청이 승낙될 경우 해당 연예인은 바로 다음 회 게스트가 된다.
  13. 80년대만 해도 아이돌은 예능에서 웃기거나 망가지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거의 없는, 말 그대로 '우상(아이돌)'이었고 예능에도 단발성 게스트 정도로만 출연했다.
  14. 특히, 연예인들이 나와서 요리를 하는 정글 쿠킹이라는 코너가 신드롬을 일으켰다.
  15. 미나모토 요시츠네의 '도망, 그리고 죽음'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