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국(조선)

換局

조선 시대의 환국
갑인환국경신환국기사환국갑술환국신축환국정미환국

1 개요

조선의 국왕 숙종의 MAX 초필살기.

조선 후기 정치 균형이 붕괴한 원흉으로 꼽히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탕평책이라는 극약 처방이 나오게 된다. 검은 고양이 네로, 네로, 이랬다 저랬다 장난꾸러기.

마치 격투기나 프로레슬링에서 볼 수 있는 장면으로, 두 선수가 치고 받고 싸우다가 한쪽이 져서 심판(왕)이 승리한 쪽의 손을 들어주다가 갑자기 승리한 쪽의 죽빵을 날린 후 쓰러진 두 선수를 밟고 챔피언벨트를 들고 심판이 포효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1] 그 심판이 빈스 맥마흔, 데이나 화이트급 절대 권력자라서 관중조차 이 결과를 어찌할 수 없다는 점 또한 비슷.

사전적 의미로는 시국이나 판국이 바뀌었다는 말인데, 현대정치로 치면 의회해산이나 내각총사퇴 같은 상황으로 이 지점에서는 조선 시대의 정치 관련 용어의 하나로 서인남인 사이에서의 정권 교체와 관련되어 일어난 일련의 대규모 숙청을 일컫는다.

그 사건에 엮여서 신세 꼬인 유명한 인물로는 송시열, 장희빈 등이 있다. 인현왕후도 죽지는 않았으나 환국에 휘말려 한 번 폐비되었고, 탁남의 수장 허적과 남인 병권의 수장 유혁연, 청남의 수장 윤휴, 기사환국 이후에 결성된 통합남인의 수장 민암, 송시열의 수제자 김수항도 죽임을 당했으며 남구만, 박세채, 김덕원, 목내선, 권대운 등의 대신등은 쫓겨났다 복귀했다를 반복했고, 정개청의 사당과 이이, 성혼의 종묘 배향 문제, 각각의 당파에서 추종하는 성현들의 신원 문제는 집권당파가 바뀔 때마다 뒤집어졌다.

2 배경

환국의 목적은 정치를 주도하는 세력을 왕이 결정하면서, 그 가운데 신하들을 대결을 이용해서 숙청해서 신권을 약하게 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함이었다. 정치의 주도권을 왕이 쥐고 사대부의 목숨줄을 쥐기 위한 것이지만, 환국이 일어날 수 있었던 배경은 오히려 왕권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붕당이 본격화 된 선조 때부터 왕들은 조금씩 결격사유가 있었는데, 선조는 일단 적통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임진왜란 때 삽을 거하게 푸고 정유재란 때 이순신을 필두로 한 공이 있는 사람을 대거 숙청하는 바람에 권위가 말이 아니게 떨어졌다. 아들 광해군은 서자에, 그것도 둘째였고 의붓어머니 폐위 같은 정치적 실수를 저질렸다.

다음의 왕인 인조광해군을 반정으로 몰아내고 왕이 되는 과정에서 도와준 신하들의 눈치를 안 볼 수 없었고, 그나마도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하면서 역시 권위에 손상이 갔다. 효종은 인조의 삽질로 떨어진 왕권에 소현세자의 의문의 죽음에 인조가 소현세자의 아들이 아니라 둘째인 봉림대군(효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적장자 계승원칙을 벗어난 찬탈 비슷한 상황이었다. 덕분에 재위 내내 형수와 조카들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이를 왕권에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조카들을 견제하는데 힘을 쏟을 수 밖에 없었다.

효종은 이렇게 왕권이 땅에 떨어진 상황에서 정국 주도권을 잡기 위해 북벌론을 주장하면서 '재야의 왕'인 송시열을 끌어들여서 서인의 협조를 구하려고 했고, 송시열과 서인에게 저자세를 보일 수 밖에 없었다. 현종은 그나마 결격사유가 크게 없어서 효종부터 시작된 정통성 문제로 예송논쟁까지 벌어지자 말년에 남인에게 손을 들어줘서 어느 정도 왕권을 세우기는 했다.

이렇게 선조 때부터, 특히 인조 이후에 소현세자의 정통성과 관련된 문제로 왕은 신하들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우선은 자기가 권위에 문제가 있었고, 그래서 신하들의 협조가 절실했다. 자기 권위가 약하고 신권에 기대는 바가 많다 보니 왕실이 사대부 권력층 변동을 견딜만큼 튼튼하지 못했고, 환국으로 인한 충격을 감당할 수 없었다. 정국을 주도할 동력도 부족했을 뿐더러 설사 환국을 하더라도 그 여파에 왕권까지 흔들릴 가능성 때문에 할 수 없었다.

이런 것은 숙종 때 오면서 완전히 뒤바뀐다. 소현세자 후손과 봉림대군 후손간의 정통성 문제는 3대를 지나서 숙종 때 이르러 계승이 안정화 되면서 숙종은 더이상 소현세자 후손들에게 정통성의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숙종 본인도 적자, 원자, 세자의 이상적인 단계를 밟으면서 정통성에 흠결이 없어서 누구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이렇게 왕실의 정통성 문제가 해결되자 신권에 기대어 정국을 이끌 필요도 감소했고, 환국으로 사대부를 갈아엎어도 왕권에 미치는 영향이 적었다. 덕분에 나중에는 자기 부인과 아들까지 환국에 연관되었음에도 숙종의 권위 자체는 여전히 확고했고, 왕실도 환국으로 인한 여파에서 대체로 무사할 수 있었다.

3 환국의 사례

숙종 이래로 환국이라 부를법한 정치적 격변은 6번 있었으나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한 4개를 주로 환국이라 부른다. 연도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이 중에서 경신환국은 경신(대)출척이라고도 불리고, 기사환국은 기사사화라고도 불리며, 갑술환국은 갑술옥사라고도 불린다. 출척은 '반대파를 쫓아낸다' 정도를 뜻하고, 옥사는 '감옥에 가두는 사건' 정도를 뜻하며, 사화는 사화항목 참조.[2] 또한 예송논쟁, 즉 갑인예송의 처리를 새로 즉위한 숙종이 마무리하며 서인을 쫓아내고 남인을 기용한 것을 갑인환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환국을 즐겨 시전한 군주이자 처음으로 환국이란 개념을 도입한 군주는 다름아닌 숙종. 대개 '숙종 시대' 하면 '장희빈' 외에도 '환국'으로 기억하는 사람도 꽤 많다. 숙종 스스로는 환국을 통해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할 수 있었지만, 결국 노론의 손을 들어주어 조선 후기 노론의 일당 독주와, 더 나아가 세도정치의 원인을 제공해 버렸다.(숙종이 3번의 환국을 일으킨 기간인 20년보다 이후에 재위한 기간이 26년으로 더 길다.)

다만 영조 3년의 정미환국은 자신의 탕평책을 밀어붙이기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노론에서 소론 탕평파로 일시적인 환국을 단행한 것이라 숙종과는 경우가 조금 다르다. 그보다는 차라리 경종 때인 1721년~1722년의 신임옥사(신임사화)도 노론을 전격적으로 숙청했다는 점에서 사실상 환국과 다를게 없는 편. 요새는 신임환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숙종이 즉위한 직후의 갑인환국은 신임환국보다도 유명하지 않은데, 숙종이 즉위하자마자 예송을 잘못 이끈 죄를 물어서 서인들을 모조리 내쫓고 남인들로 정권을 채운 것을 말한다. 천하의 송시열도 귀양을 가야 했고, 송시열을 옹호하던 송시열의 제자들은 죄다 쫓겨났으며, 김수항은 노골적으로 남인을 편드는 숙종에게 항의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박살이 났다.

이때 김좌명의 아들 김석주와 왕의 외할아버지인 김우명, 왕의 장인 김만기, 사씨남정기, 구운몽을 지은 대문장가 김만중 형제를 제외한 모든 서인이 쫓겨났다. 하지만 왕의 장인 김만기는 남인들의 유화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골수 서인, 그것도 송시열을 추종하는 입장에 있었고 김석주와 허적의 사이를 계속 이간질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야심가였던 김석주는 남인들이 탁남과 청남으로 갈라져 개싸움을 벌이면서 세력을 소진하길 기다렸다가 숙종이 자기들끼리 물어뜯는 남인들을 보며 불쾌해하고 있을 때 탁남의 영수 허적의 서자, 허견의 역모를 밝혀내어 탁남을 박살내고 사사건건 강경하게 나가면서 왕의 눈에 거슬렸던 윤휴도 죽임으로 청남도 날려버렸다. 이것이 경신환국이다.

이로 인해 서인은 복권되었고 서인의 소원이던 우율종사[3]가 이루어졌으며 정개청의 사당은 허물어졌고 윤선도의 작호도 거두어졌다.

하지만 십년이 채 못되어 장희빈을 중전에 앉혀주고 싶었던 숙종이 서인 왕비인 인현왕후를 내쫓기 위해 기사환국을 일으킨다. 장희빈이 아들을 낳자 숙종은 태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들에게 원자의 칭호를 내리려 했다. 이에 서인 조정은 조심스럽게 너무 이르다고 만류의 의사를 비추었으나 숙종은 막무가내였고 훗날 경종이 되는 장희빈의 아들은 그렇게 원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때 송시열이 왕의 나이가 젊은데 서자에게 원자가 웬말이냐고 딴지를 걸었고 격노한 숙종은 바로 송시열을 귀양보내버렸다. 결국 정권이 도로 뒤집히고 남인의 최고 원로들인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에게 삼정승 자리가 제수되었고 민암 등도 다시 권력의 실세로 복귀한다. 숙종은 송시열, 김수항을 사사하고 허새의 역모를 수사한 전 훈련대장 김익훈을 체포하였다. 숙종은 남인들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일흔이 넘은 노인인 그를 곤장을 쳐서 죽여버렸고 당시 고변자 김환, 이회 등도 모조리 처형했다.

그리고 남인들의 의례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허적을 신원하는 한편 우율종사를 무르고 정개청의 사당도 도로 지어주었다. 그리고 소론을 중심으로 한 잔여 서인 세력의 결사적인 반대와 남인들의 조심스러운 만류에도 인현왕후를 폐서인했고 장희빈을 중전으로 맞아들인다. 연명상소를 올린 오두인, 박태보 등은 혹독하게 고문당해서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고 만다. 송시열이 사사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왕의 변덕 덕분에 남인들은 실로 근 십년만에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지만 이미 3번이나 환국을 본 터라 남인들은 실세 민암을 중심으로 숙종의 입맛에 맞게 철저한 예스맨으로 행동하는 한편 장희빈의 오라버니 장희재를 극진히 대접하며 장희빈의 눈에도 들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숙종의 변덕은 어디 가지 않아서(...) 숙빈 최씨를 총애하면서 장희빈을 슬그머니 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무렵 함이완, 한중혁 등의 젊은 서인들이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데, 이것이 민암의 정보망에 걸려들었고 신이 난 민암은 이것이 서인 세력을 박살내버릴 기회라고 판단, 이를 숙종에게 고했다.

숙종은 특별히 엄한 형벌을 쓰라고 하면서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공교롭게도 장희재 집안 사람들이 민암, 오시복을 비롯한 남인 수뇌부와 결탁하여 최 숙원(훗날의 숙빈 최씨)를 해치려 한다는 정반대의 고변이 들어왔다. 그러자 숙종은 즉시 민암을 비롯한 남인 세력을 개발살내버리고 다시 서인 정권을 세운다. 이것이 바로 갑술환국이다.

그리고 한중혁 일당은 은화를 모으고 해상진인 운운하며 옛날같으면 역모죄로 삼족을 멸할 수준인데도 불구하고 관대하게 주모자들은 변방에 정배하고 잔챙이들은 석방하는 수준에서 마무리했다. 이들을 배신하고 민암에게 붙어서 고변한 함이완은 5차례나 형신을 받고 절도에 정배되었다. 그리고 인현왕후의 복위를 논하는 자는 세자를 흔드는 자니까 역적이다! 라고 선언하더니 며칠도 못가서 인현왕후에게 별궁에 들어와 살것을 명하고 급료도 지급했다. 그러더니 "폐비가 하는 걸 보니까 뉘우치는 것이 간절하더라고, 폐비를 신구해도 역률로 다스린다는 거 취소"(...) 라고 선포한다. 그러곤 얼마 가지 않아서 인현왕후를 다시 중전으로 삼고 장희빈은 다시 희빈으로 강등해버린다.

분노한 장희빈은 오빠 장희재의 첩 숙정과 결탁하여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굿을 하는 한편 이홍발을 비롯한 남인세력을 규합하여 장희빈의 아버지의 무덤과 비석을 파괴하고 저주의 상징물을 묻어둔 다음에 장희재의 종인 업동을 시켜 고변하게 했다. 그리고 서인정권의 핵심인 병조판서 신여철의 종인 응선의 호패를 훔쳐서 증거물로 바쳐 서인의 행위라고 뒤집어 씌울 속셈이었지만 응선은 매를 맞아 죽으면서도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여 일은 흐지부지되었다.

그런데 업동이 술에 취해서 내일이면 묘소에서 재밌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는 증언이 나왔고 이를 수사하던 남구만, 유상운은 장희빈 일가의 자작극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세자의 위치를 걱정하여 국청을 여기서 접자고 건의했으나 삼사가 반발하면서 수사는 재개되었고 이홍발을 비롯한 남인 7명이 처형되었다.

장희빈 일가는 다행히도 피를 보지 않았으나 인현왕후가 죽은 이후 숙빈 최씨가 장희빈이 중전마마를 저주했다고 고변하면서 일이 커졌다. 숙종은 장희빈을 사사할 것을 명령했고 결국 죽음을 맞는다. 이 시기 장희재의 아내 자근아기가 인조의 첩인 소용 조씨의 아들인 숭선군 이징의 아들 동평군 이항, 이의징, 김덕원 가문의 자제들, 오시복 등이 장희재와 결탁하여 한 각종 '불순행위'를 낱낱이 고변했고 덕분에 많은 숫자의 남인들과 장희재도 함께 죽게 된다. 이로 인해 남인의 실각에는 쐐기가 박히게 된다.

이후 남인 처분 문제를 놓고 소론 남구만, 유상운 등이 온건론을 펼치자 송시열 등 핵심인물들이 대거 죽임을 당한 범서인계가 격노하였고 강경론을 주장한 노론이 압도적인 다수로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어쨌거나 숙종의 의중에 따라 정권을 잡은 노론은 경종을 흔들기 위해 경종에게 대리청정을 시켰지만 경종이 무난하게 일을 처리하면서 일이 꼬이게 된다. 결국 숙종이 예순을 일기로 승하하고 경종은 왕좌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압도적인 힘을 가진 여당이었던 노론은 경종을 만만하게 보고 안하무인으로 굴었는데 경종이 누구 피를 이어받았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바람에... 자세한 것은 신임옥사 참조.

경종이 4년만에 승하하자 경종 연간에서 죽을 뻔 했던 영조는 김일경 문제를 들고 나와 소론을 내쫓아버리고 삼수의 옥을 주도한 김일경, 목호룡을 처형한다.[4] 그리고 죽은 김창집, 이이명, 조태채, 이건명을 비롯한 4대신을 신원하여 대충 당쟁을 수습하려 했는데 골이 너무 깊어진 노론은 정호, 민진원을 비롯한 강경파들이 주도하고 있었고 왕의 당쟁 자제 요구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살아남은 소론인 이광좌, 조태억, 최석항 등을 모두 죽일 것을 청했다. 결국 영조는 하는 수 없이 아버지의 필살기를 가동하니 자세한 것은 정미환국 참조.

그런데 숙종이 장희빈, 인현왕후를 위해 환국을 한 것이 아니라 환국을 위해 장희빈, 인현왕후를 이용했다는 주장도 강력하게 제기된다. 확실히 훗날 병신처분을 통해 소론을 내쫓고 노론들 불러들인 것인 장희빈의 아들이라 껄끄럽기도 하고, 영 똘똘해보이지 않는 세자 경종을 쫓아내기 위한 포석이었다는 해석이 강하다. 하지만 기사환국까지는 몰라도 갑술환국이 터지는 시점에서는 남인 정권이 숙종의 의중을 철저히 따르는 경향이 강해서 숙종이 굳이 남인들을 내쫓을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이 있다. 게다가 이때는 경종을 숙종이 나서서 보호하던 시점이니 세자 문제도 관여가 되지 않았다.

후에 순조조에 벽파가 완전히 전멸당하고 시파로 정권이 교체되는 일이 있긴 했지만 그건 환국으로 치지 않는다. 시파가 어엿한 당파라기보단 그냥 왕 말 잘듣자는 범 당파적 신하들의 모임에 가까운 데다가 악명높은 세도정치붕당정치를 몰아내고 조선을 지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4 기타

환국과 비슷하게 정국이 전환되지만 그보다는 강도가 약한 것으로 처분이라는 표현이 있다. 예컨대 숙종의 병신처분이 있는데 절대로 병신을 처분한다는 뜻이 아니고 병신년(1716년)에 회니시비 문제를 재평가하여 윤증은 스승을 모욕한 패륜아로, 그리고 윤선거와 유계의 공저로 결정되었던 가례원류는 유계의 단독 작품으로 송시열이 윤선거를 모욕한 증거가 없다고 종전의 판단을 모조리 뒤집으면서 결과적으로 2년 전 죽은 윤증을 단박에 격하시키고 노론의 손을 들어준 처분을 뜻한다. 이로서 영조의 경우 1725년 즉위 직후 을사처분(노론 복권), 1729년 단행한 기유처분(노소론 협상 - 탕평파)과 1740년 단행한 경신처분(소론배제, 노론 복권) 등이 있다. 이렇듯 처분은 아버지 숙종보다는 영조가 주로 시전했다.

5 관련사항

  1. 이걸 잘 표현한 만평(?)이 사계절 출판사가 내놓은 "역사신문" 4권에 나온다. 서인을 거꾸러뜨린 남인이 좋아라 하다가 심판 숙종이 남인의 팔 하나를 잡고는 갑자기 보디 블로를 아랫배에다 갈겨버린다. 엄청나게 아파하는 남인과 영문을 몰라하는 서인의 표정이 포인트. 환국 권투
  2. 이 용어들은 이후 조선의 정권을 장악한 서인 특히 노론의 입장에서 붙인 표현들이다. 그래서 남인들을 밀어내면 출척이 되고, 자신들이 쫓겨나면 사화가 되는 것이다.
  3.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배향하는 것. 서인들은 인조 때부터 꾸준하게 요청하였으나 인조는 당쟁을 워낙에 혐오하여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효종과 현종은 너무 강력한 서인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여 들어주지 않았다.
  4. 어찌보면 이것도 환국이라면 환국이다. 최석항, 이광좌를 비롯한 소론의 실세들이 죄다 쫓겨나고 삼정승, 승정원, 대간이 모두 노론으로 채워졌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