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Theodor Eicke
(1892년 10월 17일 - 1943년 2월 26일)
제 3SS기갑사단 토텐코프의 창립자.
장검의 밤 당시에 에른스트 룀을 죽인 인물이자, 독소전쟁 당시 동부전선에서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약탈하는 전쟁범죄를 저지르며 엄청난 잔인성으로 악명높았던 핵심 전범이다. 흔히 토텐코프 사단의 악명은 이 자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1]' 최종계급은 SS대장(Obergruppenführer)
2 나치당에서
아이케는 알자스-로렌 지역에서 가난한 시골역장의 11명의 형제들 중 제일 막내로 태어났다. 실업학교에 다니다가 17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1909년에 바이에른 왕국군 제 23 보병연대에 지원입대하여 회계 견습사관이 되었다. 그렇게 복무하면서 공을 세워 제1차 세계대전에서 2급 철십자 훈장을 수상받기도 했고, 1914년에는 결혼하여 아이 2명이 태어나기도 했다.
전후에 제대한 아이케는 경찰서에서 정보국 보조원으로 일하다가 나치당에 매력을 느껴 1928년 8월 2일에 돌격대에 입대했고(훗날 친위대로 바꾼다.), 나치당에 입당했다. 그런데 1932년 3월 6일에 아이케는 정부에 대한 폭탄테러혐의를 받아 경찰에 체포되어 바이에른 재판소에서 징역 2년을 선고 받았지만, 가석방되자 이탈리아로 달아났다. 그러다가 나치 정권이 들어서자 1933년 3월에 독일로 돌아온 아이케는 사이가 좋지 못했던 요제프 뷔르켈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3개월 동안이나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무슨 막장드라마도 아니고 그러나 하인리히 힘러가 아이케를 구출해 아이케를 다하우 수용소의 소장직에 배정했다.
아이케는 장검의 밤 당시에 SA의 수장 에른스트 룀의 숙청에 관여했고, 그에게 자결을 강요했으나 눈치를 밥 말아 먹은 룀은 히틀러를 불러달라거나, 히틀러를 데려와서 나의 가슴팍에다가 총을 쏘라면서 웃옷을 벗고 있기도 하자. 결국 룀을 총 쏴서 죽였다. 그리고 그 뒤에 악귀가 각성한다. 1934년 7월 4일에 힘러는 아이케를 모든 강제수용소의 감독을 행사하는, 강제수용소 감시관으로 임명하고 강제수용소 부대의 사령관직도 주었다. 또한 수용소 감시부대의 사령관이 되었는데 이 부대는 훗날 악명을 떨치게 되는 해골부대가 된다.
무장친위대의 다른 두 기갑부대(LSSAH, 다스 라이히)가 SS 특수부대에서 기원되었다면 토텐코프(해골부대)는 수용소 감시병력이었던 SS해골단을 기원으로 한다. 그리고 아이케는 전국에 흩어져 있던 강제수용소를 리히텐부르크, 작센하우젠, 다카우, 부헨발트로 집중적으로 통합시키고, 해골부대의 확장하여 원래 대대편성이였던 해골부대를 3개 연대로 새롭게 편성했다. 그리고 1938년엔 오스트리아 합병으로 오스트리아의 강제수용소의 경비부대원들을 자신의 4번째 해골부대 연대로 끌어들였다. 아이케는 반사회적인 경력을 지녔기에 해골부대원도 반사회적인 인물들로 채용했다. 무식한 농군과 실업자 외에 사회불평분자 등등 여러가지 결함적 인물들을 채용했는데 이들은 오로지 보스인 아이케의 말만 따르게 했으며 친위대의 규율 등은 신경쓰지 않았다.
아이케는 군대적인 상황을 싫어했기에 친위대 해골부대는 친위대 안에서도 별난 존재였다. 아이케는 해골부대원 병사들에게 수용자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무자비하게 구타하라고 요구하거나 채찍으로 때리거나 몇몇을 사살하여서 겁을 주는 방식으로 수용자를 엄격히 다루도록 늘 지시했다. 이러한 그의 수용자들을 다루는 법은 곧 모든 수용소 감시병력에게 전수되었고, 이는 여러가지 문제점을 양산했다. 훗날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장으로 취임한 루돌프 헤스도 취임식에서 아이케의 말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국가의 적들을 동정하는 놈은 SS에 있을 가치가 없으며, 그러한 나약한 자들은 우리 부대가 아닌 수도원에나 보내야 한다. 우리 부대는 용서없이 명령만을 수행할 뿐이며, 해골훈장은 멋으로 달린 게 아니다."
하지만 빌헬름 프리크가 장관으로 있던 독일 내무성은 SS의 과격한 행동에 우려하였고 보안경찰청장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도 강제수용소 장악을 노려 아이케의 수용인 학대행위를 문제삼자 결국 아이케도 1937년 2월에 수용인의 학대금지령을 내리게 되었다.[2] 아이케는 제 2차 세계대전 출정전까지 힘러의 직속에 있으면서 강제수용소를 자율적으로 운영했다. 그러나 잔혹한 성격으로 악명이 높은 아이케도 의외로 직속부하들에겐 신망이 높아 부하들로부터 “파파“라는 애칭 즉, "아버지 아이케"라는 애칭을 받기도 했다. 게다가 하인츠 구데리안 같은 명장들로부터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으로 보아 나름 개인적인 신망은 있었던 듯하다.
그뒤에도 미친 악귀를 깨운 것도 모자라 사단 전체를 악귀에게 팔아넘겼다.
3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941년 독소전쟁 동부전선에서 테오도어 아이케와 토텐코프 사단
제2차 세계대전의 개전 직후인 1939년 10월에 아이케는 해골부대의 연대를 규합하여 1939년 11월 1일에 해골사단을 편성한 후 그 사단장이 되었다. 그리고 강제수용소 감시관의 자리는 리하르트 그뤼크스에게 물려주었다. 아이케의 해골사단은 다카우에서 훈련 후 헤르만 호트 대장의 제 15 장갑군단과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상급대장의 제 1 장갑군 등에 배속시켜 서유럽 전선에 종군하게 했다. 센 강을 도하하여 프랑스로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등의 활약을 펼친 해골부대였지만 5월 27일에 제 2연대가 영국군 포로 약 100명을 총살했고 항복하길 거부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살해해 악명을 떨쳤다.
그러다가 아이케와 해골부대는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에 레프 원수가 이끄는 군대에 소속하여 전투를 하면서 독소전쟁에 참여했다. 당시 아이케와 해골부대는 독소전쟁 당시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학살하면서 엄청난 악명을 떨쳤다. 한마디로 아이케는 토텐코프(해골부대)의 인종범죄와 대량학살의 흑역사를 만든 장본인이였다.[3]
그러다가 1942년 2월 8일에 데미얀스크 전투에서 포위탈출전을 벌이다가 해골부대원들이 무려 80%가 전사했다. 생존병들은 1942년 10월에 러시아에서 철수하였고, 프랑스로 돌아와서 재편된 후에 1943년 2월까지 프랑스 주재사단으로 머물렀다가, 만슈타인 원수의 남방군 집단에 참가하여 동부전선에 복귀한 해골부대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아이케는 전황을 확인하기 위해서 정찰기를 타고 오를레카(Orelka) 근교를 비행하던 중 타고 있던 기체가 격추되면서 사망했다. 토텐코프 사단은 상위부대의 불허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사단장의 시신을 소련군의 포위망에서 수습해오는 광신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가 죽자 언론은 그를 영웅으로 추대했으며 그의 시신은 오를레카 근처의 독일 군사 묘지에 매장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그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고있다. 그 뒤에도 해골부대의 악명은 그대로 남아 전후에는 사단 전체가 범죄자 취급을 면치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