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우스의 승리

혹시 한니발이 자마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더라도 카르타고는 전쟁에서 패했을 것이다. 한니발이 이탈리아에서 비록 트라시메네와 칸나이에서 승리했을지라도 로마의 동맹을 깨뜨리지 못함으로써 전쟁의 승패가 일찌감치 결정되었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동맹을 깨뜨리는 것이 한니발의 전쟁 전략 가운데 최우선적인 목표이자 그가 성취하려고 했던 궁극적인 승리였던 것이다. 로마에게 승리를 안겨준 일등 공신은 자마 전투의 승자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아니라 지연자 파비우스 막시무스였다. 그가 즐겨 사용한 지연과 고갈 전술이 한니발의 구도를 무력화시키고 로마의 막대한 전쟁 동원력이 가동될 시간을 벌어 주었던 것이다. 그는 지연함으로써 국가를 구했다.(cunctando restituit rem).

F.하이켈하임, 『로마사(A History of the Roman People』

1 개요

고대 로마의 위대한 정치가이자 장군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Quintus Fabius Maximus)와 관련된 일화이자 시사용어, 피로스의 승리와는 반대로 싸우지도 않고 승리를 거두거나, 혹은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끝끝내 이기는 것을 뜻한다. 한 마디로 지구전, 소모전 전략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말. 참고로 영국 노동당에 큰 영향을 준 정치단체인 페이비언 협회는 이 양반의 이름을 딴 것이다.

2 유래

2.1 파비우스의 등장

제2차 포에니 전쟁 초기인 기원전 217년, 알프스 산맥을 넘어온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 바르카의 군대에 맞섰던 로마트레비아 전투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에서 대패를 당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결국 로마 원로원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독재관에 퀸투스 파비우스 장군을 임명했다.

2.2 지연전

로마군의 통수권을 위임받은 파비우스는 한니발 군대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식량징발대의 본대를 차단시키는 작전을 폈을 뿐 직접적인 싸움은 피했다. 지연작전으로 한니발 군대가 스스로 지치기를 바랐던 것이다. 정정당당한 싸움을 원하고 전쟁에서 후퇴는 치욕이라고 여기던 당시 로마의 기풍 아래서 파비우스는 온갖 비방을 받았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독재관으로 있으면서 지연작전을 계속 추진했다.

결국 한니발은 이탈리아 반도의 장화에 해당하는 지방에서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전술에 휘말려 상당한 곤경을 치렀다. 파비우스의 전략은 한니발 스스로 말라죽게 하는 것이 목적인 지구전이었다. 한니발만 만나면 로마군은 맥을 못추고 패해하기 일쑤였지만 그렇기에 한니발과 굳이 싸우지 않고 그의 힘을 빼는 것이 승리의 지름길이 된다는 생각이었던 것. 그러나 이런 전술을 이해하지 못했던 로마 시민은 기원전 216년에 파비우스를 실각시키고 강경파 바로와 파울루스를 집정관으로 선출시켰다.

2.3 이해받지 못한 이유

칸나이 전투 전까지 로마인들이 파비우스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당시 로마 사회의 관념상, 그리고 당시 로마가 처했던 상황상 당연한 것이다. 한니발의 군단이 이탈리아 내부를 휘젓고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로마인들의 경제적 피해가 매우 컸다. 한니발 때문에 입은 피해가 어찌나 컸던지, 현재까지도 남부 이탈리아는 그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지 못했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다.[1] 이러니 일반 로마인들 입장에서는 "지금 내 농장이 쑥밭이 되고 있는데/내 상업 루트가 완전 똥망이 되어버렸는데 한니발과 싸우지 말자고?"라는 말이 나오는게 당연한 상황이다. 그리고 여기에 파비우스의 지연전에 말려 고생을 하던 한니발도 파비우스를 제거하기 위해 반간계를 썼다. 다른 로마인들 재산은 혼돈 파괴 망가를 외치며 휠윈드를 돌고 휩쓸면서 다녀도 파비우스의 재산은 건드리지 못하게 한 것. 그러자 파비우스가 적과 내통한다는 여론이 들끓었고 결국 파비우스는 경질당했다.[2]

2.4 다시 지연전

파비우스의 지연전 전략에 불만을 품고 강경파가 정권을 잡자, 그들은 곧바로 한니발과의 결전을 추진한다. 그러나 바로와 파울루스는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에서 대패하고 7만명의 군사를 한큐에 날려먹는 대삽질을 거두고 로마는 이제 싫든좋든 파비우스의 전략에 기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보자면 파비우스에게는 반대파의 군사적 실패로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된 절호의 상황이었다.

기원전 215년 ~ 기원전 213년까지 1차로 집정관을 지내고 뒤이어 아들을 대신해서 다시 섭정하고 기원전 209년 ~ 기원전 208년 다시 집정관을 지냈으므로 실제적으로 이례적으로 4년이나 독재를 하다시피 했지만 뚝심있게 대한니발 전략을 추진해 나갔고 이후 "로마의 방패"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받게 된다. 이후 로마의 검이라고 불린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함께 로마의 위대한 장군으로 칭송받았다.

기원전 211년, 2차례의 공성전 끝에 카푸아가 함락당했고 209년에는 반란이 일어나 타렌툼을 잃었다. 207년에는 하스드루발의 지원군이 전멸하면서(메타우루스 전투) 한니발은 루카니아 지방을 버리고 이탈리아 장화 끝인 브루티움으로 철수해야 했다. 이후 한니발은 브루티움 지방 내에서도 점차 구석으로 몰리게 되었다.

2.5 승리

이윽고 기원전 204년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보내서[3] 한니발의 근거지인 에스파냐를 점령한 후, 카르타고의 본토인 북아프리카를 침공시켰으며, 놀란 카르타고는 황급히 한니발을 불러들였다. 결국 한니발군은 기원전 203년에 이탈리아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다음해 자마 전투에서 승리해서 카르타고를 점령 직전까지 몰아서 휴전을 맺었다.

파비우스 본인은 한니발이 이탈리아에서 철수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3 평가

3.1 긍정적인 평가

처음에는 파비우스의 전략을 이해하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를 "굼뜬 사람(cunctator)"이라며 비난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비록 단기간에 결판은 나지 않았어도 그의 전략이 결국 옳았다는 것이 입증되어 "지연자", "굼뜬 사람" 등의 비난섞인 호칭은 "지구전주의자"라는 명예로운 호칭으로 바뀌었다. 시인 엔니우스(Quintus Ennius)는 그의 용기를 찬양한 시를 썼다.

“오직 한 사람, 그 만이 지구전을 써서 우리 공화국을 일으켜 세웠노라. 그는 자신의 명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조국의 안위만을 중히 여겼기에, 오늘날 그의 숭고한 애국심은 찬란히 빛나고 있고,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의 명예는 더욱더 고귀하게 되리라.”

즉 진정한 용기를 지닌 정치가는 대중의 요구에 영합하지 않고, 오직 국가의 이익을 중히 여긴다는 것이다. 파비우스의 전술이 당시엔 인기가 없었지만 결과적으론 로마를 구한 것이다. 왜냐하면 한니발은 파비우스가 지구전을 펼치는 동안 로마시를 공격하지 못하고 남부 이탈리아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한니발이 남부 이탈리아에서 발이 묶여 있는 동안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은 에스파냐와 카르타고 본토를 공격해서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조국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멀리 내다보고 그것을 현명하게 대처한 파비우스는 위대한 정치가의 상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파비우스의 위대함은 칸나이 전투에서 패장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데서도 나타났다. 집정관 바로가 로마로 패주해 왔을 때, 파비우스는 원로원 연설에서 바로가 비록 전투에서는 패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공화정과 시민을 구하기 위하여 로마에 돌아온 것을 오히려 칭찬했다. 카르타고에 대한 로마의 최종적인 승리는 바로 이러한 파비우스의 조국애와 관용정신에 힘입은 바도 컸다.

카르타고군은 처음의 방어군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전략적인 기습의 우위와 최대한의 전력보존을 하기위해 알프스 산맥을 넘었던 관계로 빈약한 보급에 의존하고 있었으나 연승으로 전쟁의 수행력이[4] 높아졌고 병사들의 사기 또한 높았기에 사기가 땅에 떨어진 로마군으로서는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이런 것을 안 파비우스는 일부러 전면전을 피하고 청야전술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식량을 확보하려는 카르타고 군의 소규모 부대를 공격해 전멸시키거나 한니발의 본대와 떨어진 만만한 부대를 공격하는 식으로 대응하였다. 이런 전략으로 인해 가뜩이나 빈약한 보급 자체가 부족해진 한니발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들쑤시면서 어쩔 수 없이 목표였던 로마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전략적 요충지에서는 방어군이 유리한 지형에서 방어를 굳건히 하고 있었고, 이런 일련의 상황이 이어지면서 한니발 군의 사기와 전쟁 수행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카르타고 군이 전쟁수행 의지를 상실했을 때가 좋은 반격의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은 이것을 기다리지 못했고, 결국 파비우스를 내쫓고 전면전을 걸었다. 그 결과가 바로 칸나이 전투. 아직 사기가 높고 남부 이탈리아에 도착하여 병력을 보충하고 보급을 받은 카르타고 군에게 전멸당하는 대패를 당하면서 카르타고 군의 전쟁 수행 의지와 사기가 다시 높아졌다. 이후 돌아온 파비우스는 지구전 전략을 고수하며 한니발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한니발은 연전연승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로마의 동원력이 발휘되며 구석으로 몰리기 시작했다.[5]

로마가 인내심을 가지고 파비우스의 전쟁 수행을 조금만 더 지켜보았더라면, 칸나이의 패배 없이 한니발은 병력 손실과 보급 부족에 시달려 어쩔 수 없이 후퇴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을 것이고, 바로 이 때 로마가 후퇴하는 한니발 군을 공격, 섬멸하거나 섬멸에 실패하더라도 병력의 손실로 전쟁 수행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전략적 시나리오를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6]

3.2 잊혀진 점

사실 파비우스의 승리는 파비우스만의 승리라고는 보기 어렵다. 파비우스가 한니발의 군대를 상대하기 전, 로마의 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한니발의 주요 거점이였던 칼리니아 성채 등을 공략하고,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한니발에게 출혈을 강요, 한니발이 자신의 전력을 제대로 운용할 수 없었던 상황을 만들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3.3 정치적인 관점

파비우스에 대한 칭송은 어느 정도 정치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파비우스는 카토를 비롯한 스키피오 반대 파벌의 정치적 원로였다. 카르타고 전쟁의 영웅 스키피오를 몰아낸 카토 중심의 반스키피오파는 한니발을 패배시키고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스키피오의 명성을 어느 정도 억누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이들에 의하여, 스키피오에 대한 대안으로 선택된 영웅이 파비우스이다. 결국 파비우스 칭송은 "우리는 스키피오만으로 이긴 것이 아니다."라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파비우스 전략'이 사실 스키피오가 없이는 성공 가능성이 확실하지 않았던 전략이었다는 점이다. '파비우스 전략'에는 한니발과 싸우지 않음으로서 한니발의 세력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을 억누르는데는 성공했지만, 최종적으로 한니발과 카르타고를 어떻게 무찔러야 할지, 확실한 '출구전략'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고, '출구전략'을 제시하고 그 자신이 실제로 구체화 시켜 실현에 옮긴 것이 바로 스피키오였다.

즉, 파비우스 전략은 한니발을 제외한 다른 카르타고 장군들에 대해 모든 전선에서 로마 장군들이 우세함을 유지해야한다는 가정을 토대로 짠 전략인데, 문제는 이러한 가정을 통한 전황이 강대국 카르타고를 상대로 장기간 그리고 전역에 걸쳐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가 분명하지 않다는 위험을 안고 있다. 예를들면 10년간의 지연전을 수행하는 동안, 카르타고 측에서 1차 포에니 전쟁 말기에 등장한 하밀카르와 같은, 다른 유능한 카르타고 장군이 등장해 한쪽 전선에서 피해가 가기 시작했다면 전쟁은 완전히 다른 양상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칸나이 전투 이후, 시라쿠사가 카르타고 편에 붙고 사르데냐 원주민이 봉기하면서 로마는 위기에 몰리게 된다. 카르타고 본국은 이 때 가용병력을 양분하여 시라쿠사와 사르데냐를 손에 넣으려다가 결국 로마에게 패배하고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했지만 만약 둘 중 하나라도 카르타고의 손에 넘어갔다면 한니발 전쟁은 파비우스의 구상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는 당시 로마의 중요한 밀 공급지였을 뿐만 아니라 한니발이 카르타고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경에서도 파비우스의 전략을 계속 수행했다면 정말로 한니발이 벽에 똥칠할 때까지 한니발이 이탈리아 남부에 걸터 앉았을지도 모른다. 또 전쟁이 팽팽한 상황에서 장기화될 경우 마케도니아의 개입도 무시할 수 없다. 마케도니아는 제 2차 포에니 전쟁을 틈타 그리스 남부 도시들과 싸우고 일리리아에서 우위를 점하는 정도에서 만족했지만, 로마가 계속 수세에 몰려있다면 마케도니아가 로마의 지원을 받는 헬라스 도시들로부터 우위를 인정받고 일리리아까지 손에 넣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되면 로마는 정말 이탈리아 내부에 고립되어버릴 여지도 있었다.

물론 카르타고의 장군들은 로마를 상대로는 대부분 함량 미달의 전과밖에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로마군이라고 해도 결코 무적의 군대는 아니고 카르타고 군 역시 완전히 허수아비는 아니다. 베티스 고지의 전투를 보면 알겠다만 스페인에서 본격적으로 본국의 보급을 받아 규모가 늘어난 카르타고 군을 상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스키피오와 같은 장군을 발굴해내는데 실패해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패배한 스키피오 형제들처럼 로마가 스페인에서 압도적인 물량을 가진 카르타고 군에 패주하는 양상이 반복되었다면 본토 이탈리아가 받는 압박은 한니발 단독이 이탈리아에서 주둔하는 것보다 훨씬 커졌을 것이며, 이들이 이탈리아로 들어오게 된다면 파비우스 전략의 전제가 무너지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실패할 가능성도 높다.

이렇게 다른 전선에서의 패배를 저지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된다면 파비우스의 전략은 모두 헛수고가 될 것이었으나, 혜성처럼 나타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그들을 저지하는 것을 넘어 오히려 스페인을 정복하고, 카르타고 본국을 공격하여 전쟁을 제대로 종결시켰다.

이렇듯 전략을 수립하는 전제에 있어 전쟁의 위협이 없는 상태의 카르타고 본국이 쏟아내는 물량을 제한된 물량으로 저지해낼 수 있는 장군이 로마에 필요했고 추가로 해당 로마 장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물량을 가지고도 로마 장군을 이길 수 있는 한니발 외의 다른 카르타고 장군이 등장하면 안 된다라는 요소도 필요했다. 이것이 장기간에 걸쳐 들어맞기에는 "운"이라는 요소에 의지해야 했었다. 결과적으로는 카르타고 장군들이 모두 수준 미달의 능력을 보여주었고, 로마 측에서는 스키피오라는 걸출한 군 사령관읜 등장으로 맞아 떨어져 이 전략이 승리를 가져왔으나, 파비우스 전략 자체만 본다면 승리를 결정지을 수 있는 전략이기에는 지나치게 불확실하다 할 수 있다.

그리고 파비우스는 전쟁의 결정타가 된 스키피오의 아프리카 공략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7] 이 장면에서 파비우스의 전략적 안목에서도 한계가 노출되버렸다. 파비우스의 방식으로는 포에니 전쟁은 몇년을 더 끌었을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파비우스가 무능한 인물인 것은 절대 아니다. 고유명사화되어 지금까지 이름이 남아있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상황상 지연전이 강요되었고 파비우스는 이를 대단히 훌륭하게 수행했다. 하지만 소위 '파비우스 전략', '파비우스의 승리'는 정치적으로 띄워진 소지가 존재하며, 파비우스에 대한 비판은 이러한 시각도 존재한다는 요지로 작성되었다.
  1. 물론 이건 수사적 표현에 가깝고, 현대 이탈리아 남부의 낙후된 경제의 원인은 이탈리아 특유의 심한 지역감정과 산업화의 격차에서 비롯된 것이다.
  2. 장기전, 지구전시 지휘관이 가장 받기 쉬운 오해다. 저거 싸우라고 보내놨더니 할 일은 안하고... 우주방어 항목 참고
  3. 여담이지만 파비우스는 20대 홍안의 스키피오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하진 않았다고 한다. 그가 지휘관으로 전쟁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은 집정관으로서 한니발과 싸운 아버지와 비상시국인 덕이 컸다, 로마 공화정에는 30대쯤이 되어야 공직에 본격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전통이 있었고, 결정적으로 이 당시 로마의 모든 장군들이 전쟁에 투입되었기에 보낼 사람이 없었다.
  4. 모멘텀(Momentum)이라고 부른다. 물리학에서는 '관성'으로 번역하는 단어인데, 말 그대로 똑같은 크기의 물체(군세)라도 기세가 붙으면 더 저지하기 어려워지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5. 흔한 상식과 달리, 스키피오와 무관하게 이탈리아 내에서도 한니발은 계속해서 수세에 몰렸다.
  6. 그러나 당시 사회는 지구전과 같은 전략적 방어전술의 개념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에 파비우스가 처음부터 끝까지 지휘를 담당헀더라도 로마 내에서 그의 평가는 박했을 것이다.
  7. 사실 제1차 포에니 전쟁 때 로마 집정관 레굴루스가 카르타고 본국을 공격했으나 실패한 바가 있어, 파비우스 외에도 반대하는 사람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