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페르디난트

이 인물에서 이름을 따온 스코틀랜드록밴드프란츠 퍼디난드 항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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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z Ferdinand (1863년 12월 18일 ~ 1914년 6월 28일)

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였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적통 계승자. 작위는 대공.

1차 세계대전의 불씨를 앞당긴 사라예보 사건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영국에서 크게 흥했던 스코틀랜드의 록밴드 프란츠 퍼디난드는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이름을 따온것이라고 한다.

2 생애

1863년 프란츠 요제프 황제(1830~1916, 재위 1848.12~1916.11)의 남동생인 카를 루트비히(1833~1896) 대공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친모인 마리아 안눈치아타는 결핵으로 프란츠가 8세 때 사망하였으며 이후 카를 루트비히와 재혼한 계모인 마리아 테레지아 대공비[1]가 프란츠를 양육했다. 그리고 1875년에는 합스부르크가의 분가 중 하나인 합스부르크-모데나 가문의 핏줄이 끊기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모데나 가문의 상속자가 되어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고 부자가 된다

페르디난트는 원래 오스트리아 황제자리와 크게 연이 없는 사람이였다. 큰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이미 장남 루돌프(1858~1889) 황태자가 후계자로 있었고, 그 외에도 다른 큰아버지인 막시밀리안(1832~1867)등이 있었기 때문에 황제의 조카에 불과한 페르디난트는 황제의 후계자로서는 그다지 주목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데 1889년 1월에 페르디난트의 인생은 송두리 채 바뀌게 된다. 루돌프 황태자가 권총으로 자살하면서 프란츠 요제프는 자신의 형제중에서 황위 계승자를 새로 선출해야 했는데 막시밀리안은 20년 전에 멕시코에서 처형되었고[2] 막시밀리안의 자녀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페르디난트의 아버지이자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다른 동생이던 카를 루트비히 대공이 후계자로 격상된 것이다. 그 후 1896년 아버지가 사망하자[3] 맏아들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큰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후계자로 낙점되었다.

이렇게 황태자가 된 페르디난트는 후계를 위해 결혼 중매를 받는데 이상하게도 동생 오토(1865~1900)와 [4] 달리 페르디난트는 황실의 중매를 번번이 거절하였다. 그러던중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다른 분가인 테셴 가문의 프리드리히 공작의 저택을 자주 방문하였는데, 대공비 이자벨라는 자신의 많은 딸 중에서 하나가 황태자비로 선택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1898년 페르디난트는 공작의 딸들이 아니라 그들의 시녀에 불과한 조피 폰 초테크를 아내로 선택했다. 이 선택은 오스트리아 황실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는데,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은 엄격한 귀천상혼제를 적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피는 백작 가문의 영애로 귀족의 혈통이었지만, 유럽에서 가장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합스부르크 황실에서는 이조차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럼에도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조피와의 결혼을 고집하자, 결혼을 결사반대하던 프란츠 요제프 황제 사이에는 극심한 반목이 일어났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귀천상혼을 이유로 그의 황위계승권을 박탈할 수 있었다. [5] 하지만 이미 루돌프 황태자의 자살로 황실의 스캔들에 대한 여론이 뒤숭숭한 마당에 또 다른 황위계승자가 계승권을 박탈당한다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여론의 비난이 거세질 것을 알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의 결혼을 허락하였다.

하지만 조피 폰 초테크와 그들의 자녀는 황실에서 지독한 냉대를 받았다. 귀천상혼이었기 때문에 조피 폰 초테크는 황태자비가 될 수 없었고, 단지 황제가 수여한 호헨베르크 여공작이라는 타이틀로 만족해야 했다. 또한 그들의 자녀[6] 또한 황위 계승자가 될 수 없었다. 조피는 결코 공식 석상에서 황태자와 마주할 수 없었으며, 궁중에서 가장 서열이 먼 대공녀보다 아래에 위치해 있어야 했다. 심지어 결혼식 때는 명색이 황태자의 결혼식인데도, 프란츠 요제프 황제 본인은 물론 황실 인사들이 전혀 참석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녀의 친딸이자 프란츠의 이복 여동생 2명만이 참석했을 뿐이었다. 여담으로 황실 인사 중 프란츠의 결혼을 지지한 사람도 오직 마리아 테레지아 뿐이었다고.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그런 아내의 서열을 올려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고, 조피를 당당한 자신의 아내로 사람들 앞에 드러내고자 하였다. 1914년 사라예보 방문 때 아내인 대공비를 대동한 것도 아내의 정치적 위신을 세워주고자 한 배려였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최악으로 끝났다.

또한 페르디난트는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 보수적인 큰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자주 대립하였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고질적인 문제인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906년 대(大)오스트리아 합중국 방안을 제창하여[7] 민족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을 추구하였는데, 이렇게 되면 기존 체제에서 권익을 가졌던 오스트리아인과 헝가리 인이 불리했기 때문에[8] 기존 권력자들, 특히 헝가리 정계와의 반목이 극심했다. 헝가리 총리는 대놓고 황태자가 제위를 이은 뒤 개혁을 밀어붙이려고 한다면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고 공언할 정도였다.

  •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두 나라가 공동으로 운영하며 명목상 황제가 지휘하는 '공동군' 외에도 미국의 주방위군처럼 독자적인 '방위군'을 유지하고 이는 각각 오스트리아 총리, 헝가리 총리의 지휘를 받았다. 이 때문에 헝가리 총리가 황실 후계자에게 뻗댈 수 있었던 것.

여기까지 읽었다면 알 수 있겠지만,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는 현대 일본의 나루히토 황태자마냥 고집이 세고 자기주관이 아주 뚜렷한 인물이었다(심지어 아내와의 결혼 문제로 기득권층과 갈등을 빚는 것까지 닮았다). 서유럽의 보다 개방적인 가문의 왕족으로 태어났다면 여러모로 정치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텐데,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함께 유럽에서 가장 보수적인 국가 중 하나인 오스트리아의 황족으로 태어나서 오스트리아의 보수적인 정치세계에서는 크나큰 감점 요인이되었다. 황태자는 오스트리아나 헝가리 정계에 친분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페르디난트는 꾸린 예비 내각만 보더라도 기성 정치권에서 소외된 슬라브 출신이 많았다.아웃사이더끼리의 모임 하지만 평화 유지에 대한 강력한 소신[9], 불평등한 국가 구조의 혁신에 대한 정치적 신념, 오스트리아 해군과 군의 보급제도에 대한 현대적인 개선, 귀천상혼 같은 개념은 내버리고 사랑을 찾아서 한 결혼 등 여러 모로 진보적인 인물이었고, 오스트리아 정계의 멸시도 다른 관점에서 보면 다민족국가인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비주류민족 등용을 통한 오스트리아 제국 통합에 중요한 분기점이 될만한 인물이였다. 그리고 페르디난트는 누가 뭐래도 오스트리아의 황실의 후계자였고 당시 큰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시간은 그의 편이였다

아이러니한 점은 페르디난트의 개혁 성향이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을 자극했는데 황태자의 개혁이 성공하면 민족자결의 원리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국 내의 남 슬라브인(유고슬라비아)들도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가지게 되어 굳이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추종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르비아의 광신적 민족주의자들은 황태자를 제거하려는 결심을 하게 된다.

3 암살

1914년 6월 28일 아침 프란츠는 황태자는 아내 조피와 함께 육군 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보스니아사라예보에 도착했다. 원래 육군훈련에 황태자비는 따라갈 필요가 없었지만 프란츠는 아내의 황태자비로서의 권위를 살려주기 위해 동행시켰다. 하지만 황태자 부부는 도착한지 1시간도 안된 10시 10분에 검은 손 단원 네델코 차브리노비치에게 수류탄 테러를 당한다. 여기서 상당수의 부상자가 생겼지만 황태자 부부는 다행히 무사했다. 이후 시청에서 영접행사를 마친 프란츠는 방금전 폭탄테러의 피해자들을 위로하러 가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프란츠는 다시 차에 올라 병원으로 이동하는데 노점에서 대기하고 있던 또 다른 검은손의 암살자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황태자를 보게된다.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프란츠 황태자를 보고 바로 2발의 총알을 쏘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는 그 총알에 목숨을 잃는다. 당시 운전기사 카운터 해리치 중위의 증언에 따르면 프란츠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Sopherl! Sopherl! Stirb nicht! Bleib' am Leben für unsere Kinder!(조피, 조피 죽지마 아이들을 위해 살아줘)"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조피는 시청에서 숨을 거두었고 프란츠도 몇분 뒤에 숨을 거두었다. 왜 이런 말을 마지막까지 했냐면 자신들이 죽으면 아이들이 황실에서 찬밥이 되어 푸대접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사라예보 사건 문서 참조

그리고 황태자 부부의 죽음은 정확히 1개월 뒤 불이 당겨진 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되었다

4 사후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묘는 본래 오스트리아 황실 묘지에 안장될 예정이었으나, 아내 조피가 위에서 말한 신분문제 때문에 황실 묘지에 묻히지 못하게 되자, 계모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나서서 황실 묘지에 프란츠를 혼자 놔두는 것보다 차라리 조피와 함께 안장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였고, 이를 받아들여서 페르디난트 부부의 묘는 그들이 기거하던 지방의 성에 함께 안장되었다. 하지만 조피는 죽어서까지 황실로부터 푸대접받았다. 황태자 부부의 장례식은 합동으로 치러졌지만 그녀의 관은 남편보다 15인치 가량 낮은 곳에 위치해 있어야 했고, 그 위에는 시녀를 상징하는 장갑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이는 그의 장남 막시밀리안이 아니라 조카인 카를 1세였다. 귀천상혼으로 그의 아들은 후계자가 될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조피의 자녀들은 부모가 암살당한 뒤 오스트리아 황실은 프란츠의 자녀들이 오스트리아 황실소속이 아니라 이들은 조피가 하사받은 칭호인 호헨베르크 가문이라는 핑게로 연금 지급까지 거부했다. 프란츠가 물려준 유산은 적지 않았지만, 대부분 토지 등 부동산의 형태라서 아직 어린 자녀들이 그것을 가지고 생활하기엔 곤란했다. 그나마 다행히 이들에게 동정적이었던 일부 인사들이 이들을 보호해 주었는데 특히 이들의 계조모인 마리아 테레지아(2번) 대공비는 황실에서 자녀들을 돌봐주지 않는다면 차라리 마리아 본인의 연금을 대신 주고서라도 보호하겠다고 강짜를 부렸다. 당시 황실의 여성 중에선 그녀가 가장 지위가 높아서[10] 그녀의 발언권을 무시할 수 없었고, 결국 황실에서 연금을 되돌려 주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 황실이 해체되면서 재산들의 대부분을 몰수당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자녀 중, 아들들(막시밀리안, 에른스트)은 나치의 안슐루스에 반대하다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서 고초를 겪고 독일의 2차 대전 패전 후에야 석방되었다. 막시밀리안(1902~1962)은 1945년부터 10년간 소련군정 하에서 아르츠테텐(Artstetten)이라는 소도시의 시장을 지내기도 했다. 에른스트는 석방이후 어렵게 살다가 1954년 50세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딸인 조피는 1920년에 19살 나이로 결혼해 4명의 자식을 낳았으나, 독소전쟁에 참전했던 차남 프리드리히 에른스트 레오폴트는 1945년 전쟁터에서 22세로 전사하고 같이 참전한 장남인 프란츠 페터 파울은 소련 굴라그에서 1949년 28세로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그래도 그녀는 페르디난트의 자식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았는데 공교롭게도 부모를 죽인 일당 중 하나이며 범인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았던 바소 추브릴로비치(1897~1990)와 같은 1990년 89세로 숨을 거뒀다. 3째인 알로이스 카를 요제프(1925~2003)는 천수를 누리며 많은 손자,손녀,증손녀를 남겼으며 막내인 딸 조피 아말리아 테레지아는 1929년생으로 2024-12-09 10:45:19 현재 살아있다.
  1. 유명한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과는 동명이인. 계모이긴 하지만 프란츠와는 8살 밖에 차이나지 않았다.(1855년 생).
  2. 멕시코 혁명을 틈타 나폴레옹 3세가 그를 멕시코의 황제로 만들어 그를 통해 멕시코를 지배하려고 했으나, 처절하게 실패하고 혁명군에 의해 오히려 처형당하게 되었다. 안습.
  3. 신앙심이 깊어서 매일 성지에서 떠온 물을 마시다가 위장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4. 황실에서 시키는 대로 독일 작센 가문의 공주 마리아 요제파와 결혼했다
  5. 실제로 귀천상혼으로 자신의 계승권을 포기하는 사례는 왕왕 존재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황후 엘리자베트의 큰오빠 또한 귀천상혼을 이유로 계승권을 포기했고, 따라서 그 작위는 둘째가 이었다
  6.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7. 이 방안을 제안한 포포비치는 루마니아 인이었다.
  8. 두 민족을 합쳐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전 인구 비율에서 고작 44%에 지나지 않았다.
  9. 합스부르크 제국과 로마노프 제국이 서로 전쟁을 벌이면 둘 다 망한다.고 보고 러시아에 대한 적대정책에 반대했다. 실로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
  10. 황후 시씨(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는 암살당했고 막시밀리안의 아내인 샤를로테(카를로타)는 막시밀리안이 총살당한 후 정신병에 걸려서 유폐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1927년 사망) 사실상 마리아가 황실 내 최고 어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