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 |||||
페르디난트 1세 | → | 프란츠 요제프 1세 | → | 카를 1세 |
청년기 | 노년기 |
Franz Joseph I
오스트리아의 황제,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국왕, 독일 연방의 의장, 토스카나 대공, 로트링겐 공 등.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문장 |
Viribus Unitis[1] Virtutis Confido[2]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상징
목차
1 칭호
프란츠 요제프 1세가 1848년 오스트리아 황제로 즉위했을 때의 공식적인 칭호는 다음과 같았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오스트리아의 황제, 헝가리의 왕, 보헤미아의 왕, 롬바르도-베네토,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갈리치아, 로도메리아, 일리리아의 왕, 예루살렘의 왕, 오스트리아 대공, 토스카나 대공, 크라쿠프 대공, 로트링겐, 잘츠부르크, 슈타이어마르크, 케언텐, 카르니올라, 부코비나의 공작, 트란실바니아의 대공, 모라비아의 변경백, 상하 슐레지엔, 모데나, 파르마, 피아첸차 및 구아스탈라, 옹슈비엥침, 자토르 및 테센, 프리울리, 두브로브니크 및 자다르의 공작, 합스부르크 및 티롤, 키부르크, 고리치아 및 그라디스카의 백작, 트렌토 및 브릭센 공, 상하 루사티아 및 이스트리아의 변경백, 호에넴스, 펠트키르히, 브레겐츠, 존넨베르크의 백작, 트리에스테, 코토르, 빈디츠 마르흐의 영주, 독일 연방의 대표이신 프란츠 요제프 1세 폐하(His Imperial and Royal Apostolic Majesty, Franz Joseph I, by the Grace of God Emperor of Austria, King of Hungary, Bohemia, King of Lombardy and Venice, of Dalmatia, Croatia, Slavonia, Galicia, Lodomeria and Illyria; King of Jerusalem etc., Archduke of Austria; Grand Duke of Tuscany and Cracow, Duke of Lorraine, of Salzburg, Styria, Carinthia, Carniola and of the Bukovina; Grand Prince of Transylvania; Margrave of Moravia; Duke of Upper and Lower Silesia, of Modena, Parma, Piacenza and Guastalla, of Auschwitz, Zator and Teschen, Friuli, Dubrovnik and Zadar; Princely Count of Habsburg and Tyrol, of Kyburg, Gorizia and Gradisca; Prince of Trento and Brixen; Margrave of Upper and Lower Lusatia and in Istria; Count of Hohenems, Feldkirch, Bregenz, Sonnenberg, etc.; Lord of Trieste, of Kotor, and over the Windic march; president of The German Confederation.)'
이후 1867년 대타협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창설을 통해 헝가리의 사도왕을 겸임하면서 공식적인 칭호는 아래와 같이 변경되었다. 이탈리아 통일 전쟁 중 이탈리아 왕국에게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를 뺏기는 바람에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가 작위에서 사라진 것이 눈에 보인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오스트리아의 황제, 헝가리의 사도왕, 보헤미아,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갈리치아, 로도메리아, 일리리아의 왕, 예루살렘의 왕, 오스트리아 대공, 토스카나 대공, 크라쿠프 대공, 로트링겐, 잘츠부르크, 슈타이어마르크, 케언텐, 카르니올라, 부코비나의 공작, 트란실바니아의 대공, 모라비아의 변경백, 상하 슐레지엔, 모데나, 파르마, 피아첸차, 구아스탈라, 옹슈비엥침, 자토르 및 테센, 프리울리, 두브로브니크 및 자다르의 공작, 합스부르크 및 티롤, 키부르크, 고리치아 및 그라디스카의 백작, 트렌토 및 브릭센 공, 상하 루사티아 및 이스트리아의 변경백, 호에넴스, 펠트키르히, 브레겐츠, 존넨베르크의 백작, 트리에스테, 코토르, 빈디츠 마르흐의 영주, 세르비아의 군주이신 프란츠 요제프 1세 폐하(His Imperial and Royal Apostolic Majesty, Franz Joseph I, by the grace of God Emperor of Austria; Apostolic King of Hungary, King of Bohemia, Dalmatia, Croatia, Slavonia, Galicia, Lodomeria, Illyria; King of Jerusalem, etc.; Archduke of Austria; Grand Duke of Tuscany, Crakow; Duke of Lorraine, Salzburg, Styria, Carinthia, Carniola, the Bukovina; Grand Prince of Transylvania; Margrave of Moravia; Duke of the Upper & Lower Silesia, Modena, Parma, Piacenza, Guastalla, Oswiecin, Zator, Cieszyn, Friuli, Ragusa, Zara; Princely Count of Habsburg, Tyrol, Kyburg, Gorizia, Gradisca; Prince of Trent, Brixen; Margrave of the Upper & Lower Lusatia, in Istria; Count of Hohenems, Feldkirch, Bregenz, Sonnenberg, etc.; Lord of Trieste, of Kotor, and over the Windic march; Grand Voivode of the Voivodship of Serbia etc. etc.)'
2 즉위 배경
오스트리아 황제인 페르디난트 1세에게 자식이 없었기에 바로 아래의 동생인 프란츠 카를 대공의 장남인 프란츠 요제프가 갖고 있는 제위 계승권 서열은 높았다. 이에 조피 대공비는 일찍부터 장남인 그에게 제왕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페르디난트 1세가 혁명의 와중에 퇴위하자 제위는 프란츠 카를 대공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마리아 안나 황후와 조피 대공비는 프란츠 카를 대공에게도 페르디난트 1세와 마찬가지로 정신지체 증상이 있다는 점을 들어 아들에게 양보하도록 강요했다. 이에 따라 프란츠 요제프가 황제가 되었다.
프란츠 요제프가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의 황제로 재위하던 시절까지만 해도 오스트리아는 제국이었다. 그러나 헝가리는 프란츠 요제프가 재위하던 시절, 별도의 내각을 가진 채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를 섬기는 왕국으로 분리되었고, 그의 재위 중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3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상징
프란츠 요제프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3]처럼 60년이 넘는 재위 기간 동안 근면성실한 국정 수행[4]과 엄격함, 그리고 가족사의 비극으로 인해 생전과 사망 이후 모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전 국민의 사랑과 존경(과 두려움)을 받았다. 그야말로 백발의 노황제 이미지에 딱 맞는 인물. 당대 남자들은 대부분이 황제의 수염과 구레나룻을 모방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제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으로 넘어간 시절에도 빈 시내 곳곳과 가장 호화로운 호텔인 자허 호텔에 초상화가 걸려있었으며, 제국 호텔에는 아직까지도 황제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이렇듯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처럼 존재 자체가 국가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이런 체제가 으레 그렇듯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프란츠 요제프라는 인물 자체의 카리스마와 그에 의한 결집력에 의해 유지되는 불안한 상태였다. 1차 세계대전 중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사망한 후 급속도로 제국이 붕괴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이중제국의 국력이 파탄에 직면한 것도 있지만.)
4 재위
4.1 통치
역사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파란만장한 사건을 겪은 황제. 역사적으로는 1848년 유럽을 뒤흔든 거대한 혁명[5]을 겪고 그 격동의 와중에 백부 페르디난트 1세 황제의 양위로 즉위했다.
1850년, 러시아가 팍팍 밀어준 덕분에 프로이센 왕국과 담판을 지어 올뮈츠 협약으로 독일 연방에서 오스트리아의 우위를 확인, 프로이센에 일대 굴욕을 안겨주었다. 이때부터 자신감이 생겼는지 검열과 경찰국가 체제를 동원한 강력한 신(新) 절대주의 체제로 나라를 다스렸는데, 문제는 이게 시대에 완전히 뒤떨어진 것이었다는 점.
이러한 전제주의 통치 와중인 1853년에는 헝가리인 애국지사가 황제를 암살하려 하기도 했으며[6] 이 사건에 충격을 받아 빨리 후손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난 모후의 계략(?)으로 이듬해(1854) 친척인 바이에른 왕가인 비텔스바흐 가문의 엘리자베트(애칭 시씨)와 결혼했다.[7]
4.2 외교
황제 본인은 황제가 수행할 중요 지상과제로 외교와 국방을 고려해 외교 문제에 많이 간섭했는데, 크림 전쟁 중에 러시아가 점령했다가 영국과 프랑스의 압력으로 토해낸 왈라키아-몰다비아를 점령, 러시아의 뒤통수를 쳤다. 이 행동은 1849년에 대군(약 16만 명)을 보내 혁명을 진압하도록 도와준 러시아에 대한 배신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크게 분노했고, 오스트리아의 얌체짓에 영국과 프랑스도 빈정이 상해 크림 전쟁 후 오스트리아는 국제적으로 고립당했다. 그야말로 병크였던 셈. 이 배신 행위로 러시아와는 관계 악화, 올뮈츠 조약으로 프로이센과 냉전,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의 얍삽한 짓에 냉소와 경멸, 이탈리아는 원래 반(反) 오스트리아 지역 등등,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처하게 된다.
1859년에는 프랑스 제2제정의 황제 나폴레옹 3세(재위 1852년~1870년)의 강력한 지원을 받은 사르데냐 피에몬테 왕국이 군비를 증강해 도발해오자 재상 카보우르가 원하던 대로 먼저 선전포고를 때려버리는 대실수를 저지른다(…). 그 결과 마젠타와 솔페리노 전투에서 잇따라 패해 롬바르디아를 상실했고[8] 1866년 프로이센과의 7주 전쟁에서 패배해 베네치아까지 상실했다.
같은 해(1866) 통일 독일 문제의 주도권 쟁탈전에서 최종적으로 프로이센에 패배해 독일 연방에서 강제로 배제당했다(1866, 7주 전쟁). 그래도 1차 대전 이전까지는 그 외의 땅들[9]은 철저하게 지키고 있긴 했는데, 사실 빌헬름 1세와 독일 장성들은 오스트리아 땅을 갈라먹길 원한 걸 비스마르크가 억지로 가라앉힌 거라서 비스마르크가 아니었으면 최소한 체코는 통째로 잃을 뻔한 대위기였다(…).
더불어 오스트리아 황제로서 콘클라베에 거부권을 행사한 마지막 군주이기도 하다. 교황 레오 13세 선종 후 열린 1903년 콘클라베에서 전임자처럼 진보적인 성향인 마리아노 람폴라 추기경의 선출이 유력해지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크라쿠프 대주교 푸치나 추기경으로 하여금 거부권을 행사하도록 했다. 결국 이 해에 선출된 교황은 보수 성향의 비오 10세였다. 비오 10세는 선출 다음 해인 1904년, 오스트리아 황제의 거부권을 박탈해 추기경이 아닌 인물의 콘클라베 간섭을 영구히 차단했다.
4.3 이중제국 성립
1866년의 잇따른 대실패로 말미암아 1867년, 헝가리인과 타협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을 구성해 오스트리아의 황제이면서 동시에 헝가리의 사도(使徒)적인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이렇듯 평생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떠받친 인물이지만, 1867년 이중제국 체제의 선택과 슬라브족에 대한 황제 자신도 인정한 차별 정책과 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운 발칸 반도로의 남진 정책이 공교롭게도 그의 사후 제국 해체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에서는 과실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최근까지 이어진 세르비아의 혼란에 일부 공과가 있다고도 볼 수 있다.
4.4 사망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인 1916년 11월 21일 68년간 제국을 짊어졌던 86세의 노황제는 쇤브룬 궁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황실묘지(Kaisergruft)에 안장되었는데, 그의 석관 양옆에는 황제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던 아내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황후와 아들 루돌프 황태자가 잠들어있다.
5 가족 관계
5.1 비극으로 얼룩진 가정사
몰락해가는 합스부르크 왕조를 지탱한 황제이자 동시에 역대 황제들 중 가장 불행한 가정사를 가진 황제
자신의 부족함으로 아내와 자식들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평생의 죄책감에 시달렸으며 동시에 갈등과 대립 속에서 죽음의 순간에도 조강지처(?)인 한 여자[10]만을 사랑한 애처가이자 순애보 황제
사적 영역이 매우 심각하게 불행했다. 콩가루 집안도 이런 콩가루가 없을 정도. 당대 유럽 군주들은 숱한 염문을 뿌리는 등 추문을 달고 살았으나[11] 프란츠 요제프는 그런 쪽으론 깨끗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는 초능력이 있다고 해도 말이 될 정도로 아내, 동생, 아들, 조카 등 그와 가까운 관계의 사람들 대부분이 불행했다. 그런 비극에 엄청난 심적 고통을 겪고도 꿋꿋이 산 걸 보면 정말 대단한 인물. 장수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못 볼 꼴까지 다 보게 되었다. 오죽했으면 '프란츠 요제프가 젊었을 적 사형시킨 헝가리 민족주의자의 어머니가 그에게 저주를 내렸다'는 소문까지 돌았겠는가.
황제의 가족 관계는 정말로 꼬일 대로 꼬여있었다. 젊은 시절의 프란츠 요제프는 유약한 성격인지라 여장부였던 어머니 조피 황태후의 기세에 눌려 지냈고, 결혼 후에는 거기에 아내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와 어머니 조피 사이의 갈등이 더해졌다. 자유롭고 발랄한 가풍의 바이에른에서 자란 엘리자베트는 엄격한 빈 궁정에 적응하지 못 했다. 결혼식 직전 엘리자베트가 시어머니 조피에게서 받은 건 예물이나 편지 같은 게 아니라 6페이지에 걸친 궁중예법이었다고 한다. 결혼 후에도 조피는 며느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며 간섭했고, 첫 아이로 딸이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이름을 따다 붙이고 엘리자베트에게서 빼앗아 양육했다.[12] 거기다 이 어린 조피 황녀가 엘리자베트가 고집 부려 동행한 여행에서 사망하면서 조피 황태후가 육아를 맡는 것이 더욱 정당화되어 조피는 그 후 태어난 세 아이 중 막내딸 마리 발레리를 제외한 둘을 자신이 키웠고, 엘리자베트는 아이들이 자기보다 할머니를 더 따르는 것에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일중독자인 프란츠 요제프는 격무에 시달리느라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 했다. 황제는 자신의 아내를 위해 어머니에게 자식들을 돌려주라고 부탁했지만 조피는 아이들을 자신에게서 뺏어가려 한다면(?) 다른 곳으로 떠나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어머니한테 이렇게 휘둘리고 사니 이 양반도 한심한 인간일 수밖에. 엘리자베트는 자신을 사랑한다지만 아무 것도 해주지 못 하는 남편을 원망했고, 결국 현실에서 도피해 평생을 고독 속에 살며 여기저기로 여행만 다닐 뿐이었다. 프란츠 요제프도 마찬가지로 이런 아내의 행동으로 크게 상처받았지만 그녀를 차마 비난하지는 못 했다.
아이들 역시 불행했다. 아버지는 일만 하느라 제대로 얼굴도 볼 수 없었고 어머니도 빈에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할머니 조피는 지나치게 엄격하고 손주들에게 사랑을 주기보다는 황족으로서 행동하기를 바랐다.[13] 이런 가운데 자식들은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 한 채로 자랐다.[14] 특히 루돌프 황태자는 차기 황제라는 이유로 도가 지나칠 정도로 엄격한 교육을 받았는데, 조피가 임명한 군사교관에게 7세부터 군대식 교육을 받았다. 겨울 새벽 눈 속을 행진시킨다든지, 냉수목욕이라든지, 숲 속에 혼자 내버려두고 온다든지. 심지어 루돌프를 깨울 때는 옆에서 권총을 쏴서 그 소리로 일어나게 했다고 한다.[15] 이것이 황제의 자식들이 부모의 사랑이 가장 필요할 나이에 받았던 것들이었다. 루돌프는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를 원망하는 반항적인 청년으로 자라났고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는 자신의 의무를 등한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루돌프를 이해하지 못 해 부자 관계 또한 막장이었다. 이처럼 황제의 가정에는 행복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16]
21세기 들어 아내와의 불화에 대해 새로운 연구가 진행되었다. Family Tree DNA라는 집단의 DNA 연구(https://www.familytreedna.com/public/habsburgfamilyproject)에 의하면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인인 찰스 홀트(Charles Holt, 1865~1947)가 프란츠 요제프의 사생아일 확률이 매우 높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합스부르크-로렌 가문의 부계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 찰스 홀트가 태어난 1865년 이후로 엘리자베트 황후는 헝가리 독립을 지지하고(1867년), 막내인 마리 발레리를 출산(1868년)[17]하는데, 그 직후부터 궁정에 머무르지 않고 평생 여행을 다니는 삶을 살게 된다. 이 시기가 묘하게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엘리자베트가 다른 여자와 관계하여 사생아를 낳은 프란츠 요제프를 전보다도 더 경멸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된다.
1889년 아들 루돌프 황태자가 사망하고, 1898년에는 아내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황후가 이탈리아인 아나키스트 루이지 루케니에 의해 암살당했다.[18] 아내의 죽음을 듣게 된 장소는 엘리자베트가 그렇게도 혐오하던 집무실 책상 위였다. 부관의 보고를 받고 황제는 집무실 책상에서 쓰러져 잠시 정신을 잃었고, 깨어난 후 한 말은 짐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짐에게는 이제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구나.였다.
이런 일들 이후에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지만 특유의 성실함과 의무감으로 사망할 때까지 국가를 떠받치고 있었다. 그야말로 불굴의 의지. 그 스스로도 당대에 조신에게 "나는 운이 없는 놈이야."라는 말도 남겼다고 한다. 몰락해가는 왕조와 제국을 떠받치는 일에 60년이나 매진한 스스로에게 남긴 자조일지도.
출판된 참고할 만한 자료로 <황태자의 마지막 키스>와 <석양녘의 왈츠>가 읽을 만하다.
그나마 프란츠에게 사적으로 위로가 되어준 사람으론 정부인 카타리나 슈라트(1853~1940)라는 여배우가 있었다. 정치에 관여하지도 않았고, 금전적으로도 깨끗한 데다 성격도 좋았다고. 게다가 프란츠 요제프와의 관계는 애인이라기보다는 황제가 생애 단 한 번도 갖지 못 했던 인간적인 감정들을 나누는 진정한 친구와도 같았다고 한다.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아내 엘리자베트가 남편을 자기에게서 떼내려고 일부러 소개해준 여자라는 점. 카타리나 슈라트와의 관계는 매우 플라토닉했으며 둘의 관계(?)는 그녀의 집을 방문해서 담소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카타리나는 프란츠가 사망한 뒤에는 빈 근교에 있는 히칭의 저택에서 조용히 살다 1940년에 사망했다. 황제와의 관계에 대해선 별다른 발언을 하지 않고 눈에 띄는 정치적인 행동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가장 정치적인(?) 행동으로는 안슐루스로 인해 아돌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방문했을 때 집의 창문을 가리고 바깥을 보지 않았던 정도.
5.2 후계자 후보들
5.2.1 막시밀리안 1세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이었던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1832~1867)은 나폴레옹 3세의 꼬드김에 넘어가 1864년 멕시코 제국의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멕시코에서 반군(막시밀리안의 입장에서는)이 들고 일어나 1867년 막시밀리안을 잡아 총살해버렸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의 싸움에서 참패해 엉망진창인 상태라 동생을 도울 여력이 딸렸던 듯한데… 이 일로 인해 유럽의 왕실들을 돌아다니며 남편의 구명 활동를 벌이던 막시밀리안의 아내 샤를로테는 그만 미쳐버렸고, 오빠인 벨기에 국왕이자 콩고를 지옥으로 테라포밍한 악마이자 방사능 폐기물이라는 말조차 수치인 놈에 의해 유폐되었다. 황제의 어머니로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조피 황태후도 차남의 사망에 충격을 받았는지 이 사건 이후로 정치 활동을 그만둔다.
이 사건을 두고 블라디미르 레닌은 '어리숙한 왕족이야말로 이용해먹기 딱 좋은 존재'라는 촌평을 남겼다.
5.2.2 루돌프 황태자와 마이어링 사건
프란츠 요제프 1세와 황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루돌프 황태자(1858년~1889년)는 항상 격무에 시달리는 아버지와 대부분의 시간을 여행으로 보내는 어머니 아래에서 외롭게 자라났다. 그는 (당시로서는) 진보주의자로서 제국의 황제로서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와 정치적으로 대립적인 관계에 위치해있었다. 어머니의 자유분방하고 예민한 기질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던 루돌프는 당대에 가장 폐쇄적이었던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황실[19]을 갑갑해했고 황실내에서도 이해받지 못 한다고 여겼다. 정략결혼으로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의 딸, 브라반트의 장미라고도 불리운 아름다운[20] 스테파니 공주와 결혼했지만 당연히 사랑은 없었고[21] 스테파니가 딸을 낳고 나서 사이가 급격히 멀어져 외도를 일삼았다.[22] 그러다 보니 스테파니는 바람피우는 남편한테 가정에 충실하지 못 하다며 화를 냈고, 아버지도 루돌프에게 '왜 가정에 충실하지 않냐'고 질책만 하여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도 어머니인 엘리자베트는 아들 부부의 갈등을 귀찮아하며 그저 여행만 다닐 뿐이었다. 그녀 역시 우울증이 심하고 며느리와 남편을 싫어해 루돌프의 약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루돌프는 사촌인 라리쉬 백작부인에게 소개받은 베체라 남작의 딸 마리와 사귀게 되었고, 독단으로 교황에게 정략결혼을 무효화해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교황의 반응은 당연히 황제에게 사태를 알리는 것.[23] 황제는 경악했고 루돌프는 제대로 찍혀버렸다. 황제에게 결별을 강요받고 모욕까지 받은[24] 황태자는 이 공개적인 창피와 심한 질책에 더는 견디지 못 하고 1889년 1월 30일, 마리 베체라와 함께 마이어링으로 가서 자살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죽음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카를 1세의 아내인 지타 황후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가 어렸을 적 루돌프의 누나 기젤라가 '시신의 총상 주변에 화상이 없었다,[25] 따라서 암살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타살설을 지지하는 증언들도 꽤 있다. 진보적인 황태자가 황위에 오를 것을 두려워하는 보수파 세력, 혹은 황실을 증오하던 공산주의자가 마이어링의 별장에 침입해 두 사람을 살해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암살설 같은 타살설을 지지하는 쪽의 주장 중에는 루돌프 황태자의 장례가 교황의 인가를 받은 가톨릭 식으로 치러졌다는 점을 든다.[26]
루돌프와 마리 베체라는 약 14살 정도 나이차가 났으며, 루돌프가 (아무리 정략결혼이라 한들) 가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둘의 관계는 대략 흠좀무. 마이어링 사건은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로 포장되곤 하지만 실제로는 그리 지고지순한 로맨스 따위가 아니었다. 루돌프에게는 미치 카스팔이라는 이름의 정부를 비롯해 여러 여자가 있었다. 처음 루돌프가 같이 죽자고 했던 사람도 미치 카스팔이었는데 그녀는 거절했고 그 다음 순위(?)인 마리 베체라를 꼬드겨 동반자살한 것. 그러나 후세 사람들은 이 이야기가 좋았던 모양으로 2차 저작물까지 만들었다. <황태자의 마지막 키스>라는 책이 이 사건을 다루고 있으니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에드워드 노튼 주연의 일루셔니스트란 영화도 이 이야기를 배경으로 만들었고,[27] 루돌프에 대한 뮤지컬도 2012년 말, 2014년말 한국에서 공연.
셜록 홈즈: 그림자 게임에서는 제임스 모리아티가 개입한 사건 중 하나로 루돌프 황태자의 자살 기사가 나온다.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일대기를 다룬 엘리자벳에서도 '마이어링 왈츠'라는, 이 이야기를 춤으로 표현한 장면이 있다. 근데 루돌프보다 더 눈이 가는 등장인물이 있으니… 항목 참조
5.2.3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사라예보 사건
루돌프 사망 후 프란츠 요제프의 동생 카를 루트비히가 황태자가 되었지만 그는 1896년 형보다 먼저 사망하고, 세 번째 황태자로 선택된 황제의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1863~1914)는 아내 조피[28]와 함께 1914년 6월말 사라예보의 육군 훈련에 참관차 갔다가 가브릴로 프란치프[29]의 피격을 받아 죽고 만다.[30] 그로부터 딱 한 달 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5.2.4 엘리자베트 페츠넥
황태자 루돌프와 황태자비 스테파니 사이에서 태어난 손녀 엘리자베트(1883~1963)[31]는 루돌프가 죽고 어머니 스테파니가 재혼하고 나서는 황제 할아버지 곁에서 자란다. 그러나 살리카법으로 인해 여성이었던 그녀는 제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
성장한 엘리자베트는 몇몇 스캔들을 겪은 후, 사회민주당원 레오폴트 페츠넥과 사랑에 빠져 두 번째로 결혼하고 아예 황족 신분을 버린다. 평민이 되고도 붉은 황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미모의 황후 엘리자베트의 손녀답게 굉장히 미인이었다. 마지막으로 살았던 폴란드에서는 평전도 나와 있는 모양.
5.2.5 카를 1세
네 번째 황태자는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둘째 남동생의 손자인 카를(1887~1922)이 되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조카이기도 하다. 그러나 카를 1세는 즉위 후 딱 2년만에(1916년 11월말에 즉위해 1918년 11월 퇴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공중분해되면서 쫄딱 망하고 만다(…). 카를 1세는 일반적인 "망국의 군주"들과는 달리 성실하고 머리 좋은 인물이었지만 당시의 상황상 제국의 해체를 막기는 힘들었다. 자세한 내용은 카를 1세 항목을 참고.
5.3 가계도
비극적으로 사망한 인물은 ☆ 처리.
- 할아버지 프란츠 2세 (1768년 2월 12일 ~ 1835년 3월 2일)[32]
- ↑ with united forces, 단결.
- ↑ My trust in virtue, 미덕.
- ↑ 재위: 1837년 6월 20일~1901년 1월 22일, 63년 216일.
- ↑ 매일 새벽 5시에 어김 없이 일어나서 10시간 이상 집무했다.
- ↑ 최종적으로는 러시아군의 도움으로 헝가리 반란군(독립군?)을 진압.
- ↑ 잠입한 헝가리 애국지사가 칼을 들고 덤벼 찔려죽을 뻔했다. 근위병들이 빨리 달려왔기에 살 수 있었다.
- ↑ 원래 조피 대공비는 엘리자베트의 언니인 헬레네(애칭 네네)와 결혼시키려 했지만 프란츠 요제프가 헬레네와의 첫 선을 보는 자리에서 헬레네 옆에 있던 엘리자베트에게 뿅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계획을 수정, 엘리자베트와 결혼하도록 했다.
- ↑ 그나마 상당한 희생자(7,000명 이상)에 깜짝 놀란 나폴레옹 3세가 사르데냐를 배신 때리고 단독으로 강화를 맺은 덕분에 베네치아는 간수했다. 하지만 7년 뒤…
- ↑ 니더외스터라이히, 오버외스터라이히, 잘츠부르크, 포어아를부르크, 캐른텐, 슈타이어마르크, 티롤, 뵈멘(보헤미아), 매렌(모라비아), 슐레지엔, 갈리치엔-로도메리엔, 부코비나, 크라인, 달마티엔, 퀴스텐란트, 운가른(헝가리), 크로아티엔-슬라보니엔, 보스니엔-헤르체고비나.
- ↑ 다만 엘리자베트를 조강지처라 하기도 뭐한 게, 엘리자베트는 황제의 아내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책임마저 방기한 채 민생이야 어떻든 미모만 가꾸며 주구장창 여행만 다녔으니(...). 심지어 아들의 결혼식에조차 나타나지 않는 등 어머니로서도 최악이었다.
- ↑ 특히 러시아 황족들이 문란했다.
- ↑ 합스부르크 황실과 아들 프란츠 요제프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황태후의 입장도 간과할 수는 없지만, 그녀가 가혹한 시어머니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어머니한테 휘둘리고 산 프란츠 요제프 역시 좋은 남편이라고는 못 한다.
- ↑ 첫째 손녀 조피한테 직접 자신의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아주 애정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 ↑ 막내딸 마리 발레리만은 예외로, 엘리자베트가 시어머니에게 빼앗기지 않고 직접 양육한 자식이었던지라 자기 손으로 못 키웠던 위의 세 아이 몫까지 쏟아부은 듯한 애정을 받았다. 그러나 이건 이것대로 아이에게 좋지 못 해서 막내딸은 도피여행을 해대던 엘리자베트의 곁에 늘 붙어있으면서 어머니의 우울증을 달래는 역할을 해야 했다. 마리 발레리는 '엄마가 나 때문에 못 죽고 이 세상에 살아있다'고 느꼈다는데, 어린 나이에 이런 게 좋은 영향을 미칠 리가 없다.
- ↑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다! 할머니란 사람이 진짜 인정머리 없던 셈. 이러다 보니 루돌프는 죽을 맛이며 우울증에 빨리 걸렸다. 보다 못 한 엘리자베트가 황제에게 교관을 관대한 사람으로 바꿔달라고 부탁했고 요제프도 수락해 황태후 조피를 설득해 교관을 바꾼다.
- ↑ 사실 이것도 전체적으로 보면 프란츠 요제프의 책임이 가장 크다. 자세한 건 루돌프 황태자 참고
- ↑ 루돌프를 낳은 이후 임신하는 것을 극히 꺼려하다가 갑작스럽게 막내아이를 가지기로 결정했다.
- ↑ 루케니는 체포되고 나서 스위스 정부에 사형을 원했지만 스위스는 사형이 폐지된 터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를 분하게 여긴 그는 교도소에서 목매어 자살했다.
- ↑ 오스트리아에서는 조부대부터 명문 귀족이 아니면 황제의 특허가 없는 한 황궁 무도회에 참석할 자격도 없었다.
- ↑ 하지만 남아있는 초상화나 사진을 보면 그리 예쁘진 않다. 시어머니 엘리자베트가 며느리 스테파니를 싫어한 이유 중에는 못 생긴 외모도 포함되어있다는 설이 있다.
- ↑ 스테파니는 외향적이고 오만한 성격의 소유자인 터라 내성적이고 우울증 앓는 루돌프를 이해할 턱이 없어 나약하다고만 여긴 남편을 결혼초부터 싫어했다.
- ↑ 아내 스테파니랑 딸 엘리자베트 마리한테는 아예 무관심한 데다 처소로 찾아가지도 않았다. 틈만 나면 정부한테 갔다.
- ↑ 애초에 이혼을 금지하는 가톨릭이 이런 요청을 허가해줄 턱이 없다. 왕실의 일이라면 더 안 해준다. (영국의 헨리 8세도 이혼을 안 시켜주자 빡쳐서 가톨릭을 버렸다.) 이런 걸 황실에서 가르쳐줄 리가 없으니 모르고 저지를 수밖에.
- ↑ 신임 대사를 환영하는 접견식에서 황태자가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러 나오자 꼴도 보기 싫다며 등을 돌려 외면하는 굴욕을 주었다. 그리고 나중에 따로 불러 당장 정부랑 결별하고 가정에 충실하라며 크게 화를 냈다.
- ↑ 머리에 총을 대고 자살하면 총 내부의 가스가 터져나오면서 총상 주변에 총구 모양의 화상이 남게 된다. 화상이 없다는 것은 멀리서 쐈다는 뜻.
- ↑ 자살한 사람은 교회에서 장례를 치를 수 없다. 루돌프도 처음에는 교황이 장례를 거부했는데 후에 입장을 바꿔 장례를 치렀다. 이에 대해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교황에게 아들이 반 황실 세력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증거를 제시했기 때문에 교황이 인정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에 따르면 황제가 아들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지 않은 것은 제국내의 혼란을 두려워해서라고 한다.
- ↑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많은 내용이 사실과 정말 많이 다르다. 이 영화의 오스트리아 제국은 현실 역사와는 무관한 패러럴 월드로 보는 것이 맞다. 여기선 약혼녀를 죽인 천하의 개쌍놈으로 몰려 누명을 쓰고 자살하고 약혼녀는 주인공 마술사에게 뺏긴다. 덤으로 천하의 개쌍놈으로 모는데 그 약혼녀도 일조했다.
할리우드 개객끼 - ↑ 조피는 왕녀가 아니라 백작 영애였기 때문에 귀천상혼(貴賤相婚)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래서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황태자였지만 조피는 황태자비가 될 수 없었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이도 모두 계승권이 없었다. 불쌍했던지 프란츠 요제프는 이들의 결혼과 함께 조피에게 호엔베르크 공작 작위를 주고 그 후손들이 계승하게 했다.
- ↑ 1894~1918. 세르비아 민족주의 단체 <검은 손> 조직원으로 수감되었다가 폐결핵으로 죽었다. 공범 중 하나는 잡혀서 16년 동안 복역하다 나와 1990년 93살로 죽었다.
- ↑ 귀천상혼 문제로 조피는 페르디난트와 함께 공식석상에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날 사라예보에서의 행사는 공식 행사이긴 해도 페르디난트가 황태자가 아닌 군 사령관으로서 참석한 행사였기에 아내도 동석할 수 있었다. 기필코 아내를 공식석상에 동행시키려는 페르디난트의 꼼수였으나… 운이 없어도 참 더럽게 없는 셈. 페르디난트가 필사적으로 남긴 유언은 "안 돼! 여보… 우리가 죽으면 아이들은 어찌 되라고… 당신만이라도 죽으면 안 돼!"였다고 한다.
- ↑ 할머니의 이름을 땄고, 할머니 엘리자베트가 평생 헝가리에 애착이 깊었던 연유로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에르치'로 불렸다고. (엘리자베트라는 이름은 헝가리식으로 '에르체베트'가 되고 이를 줄인 애칭이 '에르치')
- ↑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황제.
- ↑ 부황의 뒤를 이어 즉위했으나 1848년 퇴위.
- ↑ 살해당하거나 자살한 건 아니지만 오스트리아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몰락하고 폐위되자 실의에 빠져 병고에 시달리다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