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아나

Juana

인명. 후안(Juan)의 여성형.

1 스페인의 여왕

역대 카스티야 왕국계의 스페인 군주
이사벨라 1세후아나 & 펠리페 1세카를로스 1세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라 1세의 차녀. 카를 5세(카를로스 1세)와 페르디난트 1세의 어머니이며, 아라곤의 캐서린의 둘째 언니. 어머니인 이사벨라 1세가 하얀 피부와 금발머리를 가진 미인이였다고 하고 초상화도 그렇게 묘사되어 있다. 딸들인 후아나 [1] 나 막내 딸인 핸리8세의 첫번째 왕비 캐서린 역시 미인형 이였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2]

원래는 후계자는 아니였지만 오빠 후안이 일찍 죽고 언니 이사벨라가 사망하면서 카스티야의 후계자가 되었다. 결국 이사벨라 1세가 1504년 사망하자 카스티야의 여왕이 되었다. 16살의 나이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아들이자 잘생긴 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외모가 뛰어났던 필립과 결혼을 하게 된다. [3] 이때 후아나의 오빠인 아스투리아스 공 [4] 후안은 필립의 여동생인 마르가리타와 결혼을 한다. 아라곤 쪽의 두 남매는 모두 서로의 배우자인 신성로마제국의 남매에게 미친듯이 빠져들게 된다. [5] 하지만 남편인 필립은 부담스러워 했고 뺀질뺀질 이리저리 다니기만 하고 후아나는 더더욱 남편을 잡고 싶어 안달하게 된다.[6] 후아나가 25세가 되었을 때 어머니인 이사벨라가 사망을 했고 위의 다른 형제가 모두 사망하여 후아나가 어머니의 영토인 카스티야의 여왕이 된다. 이따 남편인 필립 역시 공동으로 카스티야의 왕이 된다.

하지만 남편 필립이 1506년 장티푸스로 급 사망하게 되고 후아나는 너무 슬퍼서 정신줄을 놓아버리게 되었다. 이때 후아나는 막내 아이인 카타리나를 임신 중이 였는데 이 딸은 이후 후아나가 유폐 될때 함께 유폐되어 어린시절을 갇혀서 보내게 된다. 유폐된 이후 막내아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아이들은 시누이이자 새언니가 되는 오스트리아의 여대공 마르게리타에게 보내 교육을 받게 했다. 마르게리타는 그동안 2번의 결혼을 했지만 모두 살아남은 자녀 없이 남편이 일찍 사망하여 끝나게 되는데 본인은 더이상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홀로 네덜란드를 통치하며 지냈다. [7]
이런 일이 일어난 건 당시 스페인을 구성하는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왕이 부부 사이였던 것일뿐 통치권도 각각 갖고 있었기에 레콩키스타의 완수와 별개로 두 나라는 하나가 아니라서 각각 다른 법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카스티야 왕국과 달리, 아라곤 왕국은 원칙적으로 여성이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 이사벨라 1세가 페르난도 2세의 아내로서 일단 공동 통치자 명분으로 아라곤의 여왕 지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사벨라의 후계자인 후아나도 일단은 아라곤의 여왕이란 직책을 갖고 있긴 했지만.
그러나 페르난도 2세는 딸인 후아나가 결혼한 이후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고 있다는 명분으로 카스티야의 섭정이 되는 한편, 재혼해서 후계자가 될 아들을 생산해 그로 하여금 아라곤의 왕통을 유지하려 했다. 즉 아라곤이 카스티야를 흡수하는 형식으로 통일을 이룰 속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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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로, 부르고뉴의 필리프 대공. 후아나 여왕의 남편으로서는 카스티야의 펠리페 1세.)
이에 후아나의 남편인 펠리페 1세는 분개하여 반발했고, 스페인의 의회인 코르테스는 논의 끝에 후아나를 합법적인 카스티야 여왕으로, 그 남편 펠리페를 왕으로 인정하며 카스티야의 실권을 펠리페 1세에게 양도했다. 그러나 펠리페 1세는 카스티야 왕위에 오른지 1년만에 병으로 급사해버리고 말았는데, 일설엔 장인인 페르난도가 독살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펠리페 1세는 '미남공'이라 불릴 정도로 워낙 훤칠하게 생긴 데다 바람기까지 있는 탓에 후아나가 즉위하고도 부부는 오래 붙어있지 못했지만, 후아나는 그런 남편을 끝까지 편집증적으로 사랑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거 때문에[8] 그녀는 오컬트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고 한다. 남편이 죽자 그녀는 큰 상심에 잠겨 더욱 정신적으로 불안해졌으며, 남은 40년 여생을 홀몸으로 살았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기행 때문에 그녀는 미친 후아나(후아나 라 로카, Juana la Loca)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페르난도 2세는 사위 펠리페가 죽자 딸 후아나의 섭정으로서 사실상 스페인 1인 통치에 들어가 더욱 의욕적으로 대외 팽창에 나선다. 그는 이미 1504년 프랑스와 각축을 벌여 이탈리아나폴리시칠리아를 차지했고, 1512년엔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낀 나바라 왕국의 피레네 산맥 이남을 차지했다. 신대륙 정복에도 한창 가속도가 붙어 쿠바를 비롯한 중아메리카 동부 해안이 스페인 수중에 떨어졌다. 그런 한편으로 통치를 보다 강고히 하기 위해, 1507년 나폴리에서 귀국 직후 딸 후아나를 그녀의 막내딸-그러니까 카를의 여동생이자 페르난도의 외손녀-과 같이 토르데시야스 성에 가두고 카스티야 섭정직에 올랐다. 이 경위에 대해서는 권력을 분점하지 못하게 유폐했다는 설과 그녀를 노리는 정적으로부터 보호했다는 설이 있다. 기실 양쪽 다 해당된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페르난도 2세는 첫번쨰 아내 이사벨라1세가 사망한 이후 거의 바로 자식보다도 어린 프랑스 왕실 혈통의 저메인(Germaine)을 왕비로 들였는데[9] 재혼한 아내와의 사이에서 살아남은 자식이 없자, 후아나의 아들들을 후계자로 삼는 쪽으로 생각을 바꾼다(아라곤 왕위에 대한 건 카를 5세 항목을 참고). 그는 처음에 페르디난트 1세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었지만 나이 때문에 카를 5세 쪽으로 바꿨다고 한다. 여러 일이 있었지만 페르난도 2세 사후, 결국 카를은 어머니 후아나 여왕과 공통통치자 형태로서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후아나는 공식적으로 카스티야와 레온, 아라곤의 여왕이었고, 그 아들인 카를로스 1세(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에 이르러 실질적인 통합이 이루어져 스페인 연합왕국이 출범하게 된다. 다만 카를 5세는 어머니를 유폐당한 상태 그대로 놔둬서, 그녀는 여전히 실권이 없었다. 후아나는 사망할 때까지 공식 직함 대부분을 그대로 갖고 있었기에, 카를 5세는 그녀 생전엔 어머니의 공통 통치자로서 스페인을 통치했다.

카를은 통치 초기에 스페인 국민들에게 반발을 사는 바람에 반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는데, 1520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카를이 신성 로마 제국 선제후 투표를 위해 잠시 스페인을 비운 틈을 타 톨레도에서 일어난 반란군은 후아나가 유폐되어 있는 장소, 토르데시야스를 점령하고 후아나에게 완전한 통치권을 넘긴다는 문서를 들이밀고 실권을 발휘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후아나는 국정을 이끌 자신감도 없고 의심도 많아서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10] 특히 후안나의 자식들은 막내 카타리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태어났을때 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자랐기에 정이 없어 그녀가 죽을때까지 찾지도 않아 가정적으로도 매우 불행했다. 그나마 죽었을때 카를 5세가 장례를 치뤄주었으니 다행.
그녀가 정말 미쳤는지 아니만 단순히 주변 사람들의 권력 싸움에 희생된 불쌍한 여인인지는 아직도 역사의 수수께끼.
어머니인 이사벨라의 외가쪽 가계에 정신이 미약한 사람이 많았는데 유전적인 영향을 뺄 수는 없고 그렇다고 광적인 미침 보다는 우울증 쪽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생각됨.

2 나바르의 여왕

2.1 후아나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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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나바르 왕국의 군주
엔리케 1세후아나 1세 & 펠리페 1세펠리페 1세

재위기간: 1274-1305

상파뉴 왕조 엔리케 1세의 외동딸로 1273년 태어났다가 아버지 엔리케 1세가 사망하자 1살의 나이로 나바르의 여왕이 되었다. 1285년 프랑스 필리프 4세와 결혼하면서 필리프 4세는 나바르의 공동 왕 펠리페 1세로 즉위하게 되고 이 때부터 나바르는 프랑스의 일부가 된다. 참고로 후아나는 프랑스 식으로는 잔느가 된다.

펠리페 1세와의 사이에서 4남 3녀를 낳았는데 딸 마르그리트, 블랑슈, 아들 로베르는 요절하고 무사히 성장한 아이들은 루이, 필리프, 샤를, 이사벨라였다. 루이, 필리프, 샤를은 각각 루이 10세(나바르의 루이스 1세), 필리프 5세(나바르의 펠리페 2세), 샤를 4세(나바르의 카를로스 1세]]로 즉위하게 된다. 1305년 사망하고 남편 펠리페 1세가 1314년 사망할 때까지 통치했으며 펠리페 1세 사후에는 아들 루이스 1세가 뒤를 이었다.

2.2 후아나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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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나바르 왕국의 군주
카를로스 1세후아나 2세& 펠리페 3세카를로스 2세

재위기간: 1328-1349

카페 왕조 루이스 1세의 딸로 1312년 태어났으며 1316년 아버지 루이스 1세가 사망하자 프랑스-나바르 왕국을 상속받아야 했지만 살리카법 때문에 숙부 펠리페 2세에 밀렸다. 하지만 1328년 숙부 카를로스 1세가 사망하고 프랑스에서는 발루아 왕조가 들어서면서 나바르 왕국과 분리되어 나바르의 여왕으로 즉위한다. 1328년 사촌뻘이었던 에브뢰의 루이[11]와 결혼하여 루이는 나바르의 공동 왕 펠리페 3세로 즉위했다.

후아나 2세는 펠리페 3세와의 사이에서 3남 4녀를 낳았는데 아들로는 샤를, 필리프, 루이, 딸로는 마리, 블랑슈, 아그네스, 필리프, 잔느가 있었다. 장남 샤를은 카를로스 2세로 후아나 2세의 뒤를 이었고 블랑슈는 프랑스 필리프 6세의 두번째 아내가 되었다.

2.3 후아나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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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나바르 왕국의 군주
엔리케 2세후아나 3세& 안토니오엔리케 3세

재위기간: 1555-1572

1528년 엔리케 2세와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프랑수아 1세의 외조카이다. 1541년 윌리히-클레페-베르크 연합공국의 공작 빌헬름 5세와 결혼했으나, 1545년 이 결혼은 무효처리가 되었다. 1548년 방돔 공작 앙투안 드 부르봉과 재혼했는데 1555년 엔리케 2세가 사망하자 후아나 3세는 남편 앙투안(나바르의 안토니오)과 공동 왕으로 즉위했다. 어머니 마르그리트가 프랑스 왕족이었기 때문에 어릴 때는 프랑스 궁정에서 자랐으며 종교개혁자들의 보호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위그노였다. 후아나 3세는 곧 나바라의 국교를 개신교로 지정하고 가톨릭을 배격했다. 그러나 1560년 샤를 9세 치하에서 안토니오는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아들 앙리 또한 개종시켰다. 1562년 위그노 전쟁이 발발하자 부부는 가톨릭 진영과 위그노 진영으로 갈라서서 대치했고 안토니오는 루앙에서 전사했다. 샤를 9세의 어머니로 당시 왕태후였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종교 간의 화합을 위해 후아나 3세의 아들 앙리 드 부르봉과 자신의 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를 결혼시키기로 했다. 후아나 3세는 처음에는 이 결혼을 탐탁치 않아 했으나, 카트린의 설득에 결국 승낙했고 1572년 두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먼저 파리에 갔으나, 무리한 여행 끝에 지병인 호흡기 질환이 악화되어 급사했다. 이에 대해서는 카트린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소수 의견도 있다.[12]

안토니오와의 사이에서 3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앙리, 삼남 루이, 장녀 마들렌은 요절하고 차남 앙리와 차녀 카트린만 성장했다. 그 중 앙리는 후아나 3세의 뒤를 이어 나바르의 왕 엔리케 3세로 즉위하는데 나중에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대가 끊긴 후 앙리 4세로 즉위하게 된다.

3 코세르테르의 용술사의 등장인물

후아나(코세르테르) 참조.

4 경계선상의 호라이즌의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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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선상의 호라이즌》의 등장인물. 성우는 다나카 리에.

트레스 에스파냐의 알카라 데 에나레스에 소속하는 학생회의 부회장 겸 회계. 대죄 무장 나태의 싫증(怠惰な嫌気)의 사용자로 팔대용왕의 일인이다.

장수족의 엘리트로서 통하고 있지만, 반수족의 아이들에게 자신있는 과자를 만들고는 문병하러 가곤 한다. 총장 연합 총장인 펠리페 세군도에 대해서는 무엇인가 한심한 그에 대해서 설교를 하고는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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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녀는 장수족이 아닌 반수족[13]

그녀는 과거 세군도가 레판트 해전에서 구해 낸 소녀다. 장수족의 마을에서 태어난 반수족이었기 때문에 연금[14]되어 나올수가 없었다,하지만 그덕에 마을이 레판토 해전에 의해 멸망되었어도 살아남을수 있었고 그런 후아나를 세군도가 구해준다,하지만 자신을 구해준 세군도를 신용할 수 없었던 후아나는 자신을 장수족이라고 속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아이의 모습을 해 그에게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15]. 세군도에 대한 감정은 단순한 감사와 동경을 넘어서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수족의 엘리트로 여겨지는 것은 디에고 베라스케스의 제안에 의하는 것으로, 현재의 그녀의 용모는 베라스케스로부터 들은 세군도의 기호의 여성의 모습인것 같다.아니 이 인간들이 반수족이기에 본래의 성격은 외관에 반해 어리다.

스페인의 역사상 후아나라는 인물은 광왕녀(狂王女)라 불린 후아나, 펠리페 2세의 동생인 후아나 2세로 2명이 존재하지만, 그녀가 습명한건 펠리페 2세의 동생인 후아나 2세이다.

애니 2기 1화에선 대죄무장인 나태의 실증을 사용하여 호라이즌이 대죄무장을 사용하는걸 막았지만 그 다음 야구부에게 지휘를 내리려는 찰나 뜬금없이 옆에 불쑥 튀어나온 아오이 토리의 고간에 손을 대버려서(...) 몇분전의 진지한 모습이 순식간에 망가지는 모습을 보였다.

2화에선 위에 설명된 대로 과자를 만들어서 반수족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모습을 보여줬고 업무로 조금 지쳐서인지 압축수면용 부적까지 착용하고 수면중이였지만 마침 세군도에게 전해줄 편지 덕분에 타치바나 긴에게 세군도가 오해받는 상황을 본의 아니게 벌였다.

3권에서는 토리의 입으로 고간에 손을 댄 사건이 토리와 루이 엑시브 사이의 대화 중 언급되자 먹던 라면을 뿜고서(...) 루이 엑시브와 토리를 금서목록으로 지정 해버린다.(...)
  1. 후아나는 후안의 여성형 이름으로 오빠인 후안이 있지만, 유아사망률이 높았던 시기에 후안이라는 이름을 어떻게든 후세로 남기려로 후아나의 이름을 후아나로 지었다 . 그리고 진짜로 후아나가 후계자가 된다.
  2. 하지만 대부분의 영화 혹은 드라마에서 아라곤의 캐서린은 검정 머리 검정눈의 음울한 여성으로 그리곤 한다. 하지만 그녀의 남아있는 초상화를 보면 당시 미인으로 치던 얼굴이다.
  3. 바람둥이였던 필립은 공식적인 결혼식 하루 전날 부인이 될 후아나의 방에 가서 벌써 동침을 했다.
  4. 후계자에게 내려지던 작위로 영국의 웨일즈 공 같은 것이다.
  5. 오빠인 후안은 부인 마르가리타에게 매우 빠져들어서 몸이 약한대도 불구하고 성관계를 너무 열심히 하다 기력이 소진되어 사망했다고 할 정도.
  6. 아예 남편의 정부를 피투성이가 되도록 매질하여 그거 보고 분노한 남편한테 빰을 얻어맞기도 했다.
  7. 당시 여성은 남편이나 아버지 등 남성이 없이는 권리를 내세울 수도 없었는데 이 시기에 마르게리타는 더 이상 결혼하지 않고 홀로 살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요즘 시기의 "나 결혼 더 안해"와는 다른 의미이다.
  8. 하지만 아내를 사랑해서 부부관계는 했다. 그저 편집증에 짜증났을뿐이지.
  9. 프랑스의 루이12세의 외조카로 페르난도2세와의 사이에 아들을 하나 낳지만 이 아들은 태어난지 몇시간만에 사망해버린다. 이후 자녀는 없다. 그런데 이 아들의 이름도 후안..
  10. 유폐당했다기보다는 후아나 본인이 탑에서 나가는 걸 거부했다는 말도 있다. 유폐 과정 자체는 그녀의 의사와 무관했을지 모르지만, 그녀가 탑에서 나가겠다는 의사 표현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11. 후아나 2세의 증조할아버지였던 프랑스의 필리프 3세의 증손자였다. 정확히는 필리프 3세의 서자 루이의 아들이 바로 에브뢰의 루이였다. 에브뢰의 루이는 후아나 2세의 할아버지 필리프 4세의 이복동생이다.
  12. 영화 여왕 마고에서는 독살된 것으로 나온다.
  13. 육체는 인간과 동등의 속도로 늙지만, 정신은 장수족과 같이 늙는 것이 늦다, 그레서 정신을 육체가 따라 잡지 못하는 이상한 거동이 많기 때문에 장수족과 반수족을 분별하는 기준이 된다.
  14. 장수족은 반수족을 동족으로 보지않고 차별을 한다
  15. 하지만 세군도는 어느정도 짐작은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