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일반적으로 하드보일드 소설이라고 하면 총 든 마초 탐정이 우울한 독백을 읊으며, 똥폼 잡는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하드보일드'라는 단어의 기원에서 보듯이 하나의 스타일에서 기원한 문체나 관점에서 쓰여진 소설을 하드보일드 소설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하다.
네이버에서의 표현을 좀 빌자면, 냉정하고 무감각한 묘사방식으로 자연주의 혹은 현실적인 세계관을 폭력적으로 다루는 것이 하드보일드고, 그런 방식으로 쓰인 게 하드보일드 소설이다. 현재에 와서는 이런 스타일이 비단 추리소설뿐만 아니라 영화에도 많이 전파되었고, 장르를 넘나들며 쓰이는 상황이라 그냥 싸잡아서 총잡이 어쩌고 하기에는 좀 곤란한 구석이 많다.
2 기원과 전개
이러한 하드보일드의 스타일의 소설은 미국의 대실 해밋이 시작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해밋 본인 스스로도 이러한 스타일의 작품으로 큰 인기를 끌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정립하고 실질적으로 가르치기까지 했으므로 대부격으로 친다. 실제로 하드보일드 문학의 전성기를 연 레이먼드 챈들러도 자신보다 먼저 하드보일드 장르를 개척한 선구자가 대실 해밋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완전히 대박을 친 것은 바로 레이먼드 챈들러. 챈들러는 이 스타일을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거의 상징적이라 할 수있는 세계관,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스코트이며 전형이 될 캐릭터를 창조했는데, 그게 바로 필립 말로였다. 챈들러의 시리즈는 히트작이었고, 챈들러 본인은 또 할리우드에 진출하며 이런 스타일이 영화에 적극 반영되는 데도 큰 영향을 줬다. 당연한 얘기지만, 글로만 쓰여진 소설보다 영화의 전파력은 훨씬 빠르고 인상적이므로, 이건 또 물건너 여러 지역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기원을 찾다보니 또 챈들러의 책을 찾게되고... 이런 식으로 여러 작품이 전파되었다. 또 다른 방향에서는 이러한 문체와 스타일이 세계대전과 대공황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여러 문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그 중에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이나 존 스타인벡 같은 거장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이때부터 단순히 추리소설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던 셈이다.
이것이 지금의 하드보일드 소설이 퍼져나간 기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발상지 취급을 받는 미국 안에서도 이러한 자극으로 무수한 작품들이 쏟아져나오면서 추리소설계에 다른 종류의 바람을 불어온다. 즉 기존의 정석으로 취급 받던 본격 미스터리의 자리를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소설들이 메워간 것이다. 이건 추리소설에 있어서 큰 전환점인데, 기존의 본격, 퍼즐 미스터리들이 똑똑하고 그 분야의 지식이 있는 사람들의 '지적 유희'에 가까웠던 반면, 이러한 하드보일드 작품들은, 비교적 현실적인 세계관을 기반하여 일종의 대체현실이나 카타르시스를 전달하는 좀 더 쉽고, 재미 위주의 소설에 더 가까워 졌기 때문이다.
작품을 쓰는 데 필요한 장벽이 낮아지면, 필연적으로 양적인 성장, 질적인 하락이 뒤를 잇게 되는 건 당연한 일. 덕분에 문자 그대로 물량은 폭발했다. 당연히 무난한 내용이 안 먹히면 소재나 캐릭터에서 자극성을 추구하게 되는 법. 그리고 그 자극성을 밀고나가서 인기를 얻은 대표적인 작품이 미키 스필레인의 마이크 해머 시리즈다. 문자 그대로 진성 마초가 총 차고 깽판을 치는 게 작품의 주 골자인데, 이건 기름에다 성냥에 불 붙여서 던진 거나 마찬가지. 다른 작품들이 더 자극을 추구하는 계기가 됐다.
3 그리고 현재
하지만 시간이 점점 흐르고 독자층과 작가층에도 전환이 오게 된다. 물론 기존의 막장 세태를 그대로 물려받은 작품들은 꾸준히 생산되고 소비된다. 그러나 대중의 취향이란 게 항상 고정되어있는 건 결코 아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질적인 향상은 오게 되는 법이다. 이러한 독자층의 요구와 작가들의 성장은 또 새로운 작품들을 낳았다. 또 본격 미스터리의 전통은 다른 방식으로 계승되고 예전 작품들이 분서갱유당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본격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들도 다시 꾸준히 늘어났으므로 이런 장르들에 하드보일드 스타일이 결합되며 새로운 변형이 나타나기도 한다. 시대도 변했으며, 하드보일드 스타일이 추리소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미국에서만 시도된 것도 아니다.
4 삼류 문학?
기존 항목에서는 하드보일드는 그냥 대다수가 삼류인 흥미 위주의 추리소설이며 좋은 작품 몇 개 있어서 그게 부각받는 것임. 이라고 돼있었지만, 이건 또 심각한 일반화의 오류다. 이건 우리나라에서 양판소 유행하니까. 몇 개 질좋은 거 빼고 중세 세계관의 이고깽들이 대부분인 게 판타지 문학이고 이게 전부임 이라는 것과 똑같다.
판타지 소설만해도 톨킨에서 시작해서 양판소에 이르기까지 스타일 불문, 수준, 내용, 소재에 이르러서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이를 보는 인식도 천차만별이다. 가령 동네 양판소 마니아 아저씨에게 판타지 소설은 중세 비스무리한 배경에서 소드마스터나 이고깽이 날뛰는 데스월드(..) 일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톨킨에서 비롯된 거대한 서사적 세계관을 다루는 소설일 수도 있으며, 또 어떤 사람의 눈에는 디스크월드에서 비롯된 유쾌하면서 독특한 세계관을 다룬 작품일 수도 있다. 이걸 또 무시해버리면 상당히 곤란해진다. 우리 나라에서의 일반적인 인식이 그냥 동네 아저씨의 인식이 주류를 이룰 수 있지만, 세계로 넓혀버리면 또 다르기 때문이다. 백번 양보해서, 국내 한정으로 둔다해도 음지의 수많은 서브컬처 팬들은 나름의 관점이 또 존재할 것이니 그냥 도매금으로 넘겨 버릴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단순화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판타지 문학을 인식하는 시선간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무시하는 셈이다.
거기다 설명했지만, 하드보일드 소설은 애초에 '장르'가 아니라 '스타일'이다. 즉 온갖 장르에 다 적용된다. 하물며 장르와 장르간의 경계도 다 허물어져가는게 작금의 현실인데, '스타일'을 그것도 일부에 국한시키는 건 상당한 오류인 셈이다.
5 초기 작품의 영향력에 대해서
다만 엄밀히 말해서 선조의 영향력은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톨킨의 작품이 무수한 자손을 남기고, 서브 컬쳐계에 영향을 준 것처럼 초창기 선구자들의 영향력이 지대하다. 이를 하드보일드 '추리소설'로 한정시킬 때, 이러한 점이 두드러지기는 한다. 이를 테면 전 항목에서 소개되었던, 청교도 적이고 부유층을 적으로 삼는 사회비판적 시각은 로스 맥도널드가 남긴 면이고, 간략한 묘사, 장년 층의 남성 주인공, 현실에 가까운 폭력적인 세계관은 대실 해밋, 우울하고 냉소적인 태도, 기사도, 장광설, 1인칭 시점 등은 레이먼드 챈들러가 창조한 필립 말로의 영향력이 크다. 그리고 대리만족성을 극까지 몰고간 마초 총잡이 스타일은 미키 스필레인이 선구자.
이게 긍정적인 부분도 있고, 부분적인 면도 있다. 간단히 말해서 저런 묘사나 특성은 하드보일드의 스타일을 살리기에 적합한 도구들이다. 그리고 여전히 잘 다루면 효과적인 부분은 존재한다. 진부한 클리셰나 상황설정에서도 양질의 작품은 나오는 것처러 말이다. 하지만 현재에 와서 이러한 클리셰들은 일부는 버려지고, 일부는 포함되며, 오마주되거나, 혹은 놀림감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 정착된지 몇십 년이 흘렀는데, 판에 박힌 작품만 나오기는 힘들다. 물론 고정독자층이 있으니 클리셰 판박이인 작품도 많이 공급된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관습을 깨거나 장르간의 교류로 새로이 탈바꿈한 작품들도 쏟아져 나오므로 단순히 단정짓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