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너 하이젠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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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rner Heisenberg
1901년 12월 5일 ~ 1976년 2월 1일

< 193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
1931 - 수상자 없음베르너 하이젠베르크1933 - 폴 디랙, 에르빈 슈뢰딩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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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이론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1920년부터 4년동안 뮌헨-루트비히-막시밀리안 대학교와 괴팅겐-게오르크-아우구스트-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했으며, 1923년에 뮌헨에서 박사학위를 획득하고 1924년에 괴팅겐에서 교수 자격증을 획득했다.

20세기 초 양자역학에 큰 공을 세웠으며, 특히 중요한 업적으로는 그 유명한 불확정성의 원리가 있다. 또, 양자역학의 기술 방법인 '행렬역학'을 고안해 냈는데 이 업적으로 겨우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1][2] 나중에 폴 디랙에 의해 행렬역학은 슈뢰딩거의 파동역학과 수학적으로 동일하다는 점이 밝혀진다. 똑같은 현상을 서로 다른 방법으로 설명한 셈. 간단히 비유하자면 똑같은 과일을 놓고 한국에서는 사과라고 하고 미국에서는 애플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 외에도 이 중성자와 양성자로 구성된다는 이론도 하이젠베르크가 주장했고, 다체문제나 강자성 연구등 이것저것 머리아픈 연구를 많이 했다. 그러나 실험에서는 볼프강 파울리만큼이나 빵점짜리 과학자였다. 실제로 이 때문에 박사학위를 받지 못할 뻔했다. 박사학위 자격 구두 시험에서 감독관이었던 실험물리학자 빌헬름 빈(Wilhelm Wien)이 모두 실험물리 문제를 내는 바람에 한 문제도 대답하지 못했고, 같이 감독관으로 있던 이론물리학자 아르놀트 조머펠트(Arnold Sommerfeld)가 하이젠베르크가 대단한 천재라고 바득바득 우겨서 겨우 합격할 수 있었다[3].

31세에 노벨상을 탄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실제로 대단한 천재가 맞았다. 앞에서 언급된 조머펠트는 하이젠베르크의 학부 시절 지도교수이기도 했는데, 그는 하이젠베르크의 재능을 일찍 눈치채고 신입생 시절부터 수준 높은 교육을 시켰으며, 보어아인슈타인과 만날 기회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나중에 '조머펠트에게 물리학에 대한 희망을 배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4][5] 조머펠트의 도움으로 보어의 세미나에 참여한 하이젠베르크는[6] 보어에게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고, 보어는 여기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보어는 세미나가 끝난 후 하이젠베르크와 함께 산책을 하면서 하이젠베르크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토론했고, 나중에 자기와 함께 연구하자고 제안한다. 하이젠베르크는 입학한 지 2년이 채 못되는 대학생이었는데, 아인슈타인에 버금가는 대학자 보어의 눈에 든 것이다. 한편 아인슈타인과의 만남은 그 후 몇 년 뒤에 이루어졌는데 하이젠베르크는 이 때의 토론에서 불확정성의 원리에 대한 힌트를 얻는다. 그 토론 내용은 하이젠베르크의 저서 '부분과 전체'에 자세히 나온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피아노 연주 실력이 수준급이었다고 하며 어려서부터 상당한 수준의 철학 교육을 받았다. 이 때문인지 양자역학의 철학적 문제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때때로 하이젠베르크를 물리학자이자 철학자로 소개하는 인명 사전도 있을 정도.[7] '물리학과 철학'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으며, 자서전격인 '부분과 전체'에서는 양자역학에서 제기되는 온갖 철학적, 윤리적,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주제가 다루어진다. 그의 손자인 베냐민 하이젠베르크는 영화감독을 하고 있다.

종전 뒤 나치 협조 관련에선 무죄로 처리되어 1946년부터 1970년까지 막스 플랑크 연구소(Max-Planck-Gesellschaft)에서 소장으로 일했으며 늘그막은 평온했다.

늘그막에 한 학생이 그에게 찾아와 자신의 이론을 물은 적이 있다. 하이젠베르크는 그 학생에게 그딴 쓰레기 이론은 집어치우라고 말했고, 학생은 낙심하여 돌아왔다. 그 학생이 들고온 이론은 어떤 장에 관한 이론이었고, 그 학생이 바로 피터 힉스였다. 힉스 입자의 그 힉스다.

2 핵무기 개발설

불확정성 원리 발견 등으로 인정받아 나치스의 핵연구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종전 후 밝혀낸 바로는 핵연구에 관한 실수란 실수는 모두 저질렀다고.

본인 주장으로는 직접 사보타주라고 밝히진 않았으나, 원자로 연구비를 타먹으면서 핵무기 개발에는 기술상이나 비용상의 이유로 어렵다는 핑계를 대며 시간끌기를 했다고 밝힌다. 이에 대해서 인하대학교 차동우 교수의 '교양 물리'란 책에서는 연합군이 '나치가 핵무기를 먼저 만들지도 모른다'는 아인슈타인의 편지를 받고 부랴부랴 핵무기를 만들어서 그걸로 추축국에게 GG를 받고 나치 독일의 과학 연구소를 습격해 봤는데 다행히도 나치 독일에서는 하이젠베르크라는 개념인이 과학부 장관이라 핵무기를 일부러 만들지 않고 있었다라고 서술하기도. 당시에도 물리학자들은 핵개발이 이루어지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미국의 핵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도 독일이 먼저 핵을 개발하면 연합국 측이 크게 밀릴 것을 예상하고 시작한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의 책 《부분과 전체》를 보면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는데, 알아먹기 힘든 중언부언이라 그대로 신뢰하기는 힘들다. 하이젠베르크의 적극적인 나치 부역 여부 및 그 진정성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많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암묵적인 나치 부역자였다는 사실에는 대부분 동의했다. 특히 이 떡밥은 독일 과학사 연구가와 미국 과학사 연구가 사이의 좋은 논쟁거리였다.

하지만 1992년 영국이 보관중이던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팜홀에서 포로로 억류되었던 독일 과학자들의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하이젠베르크 및 그의 동료들은 실제로 나치에 협력한 적이 없음이 밝혀졌다.[8] 데이비드 보더니스의 교양 과학서 《E=MC^2》에서는 하이젠베르크가 핵개발에 열성적으로 뛰어든 비윤리적인 과학자로 묘사되지만, 이는 엄연한 오류다. 오히려 반대.

그러나 저 녹취록만으로 그가 무죄였다고 단정 할수도 없다. 연합군이 도청용 마이크와 녹음기를 이용해 포로들의 대화내용을 도청,녹취한다는 것은 이미 1940년 10월 영국 포로수용소를 탈출한 프란츠 폰 베라에 의해 상세히 보고되었으며 이와 관련해 국방군 방첩부는 1941년 6월 11일, 포로수용소에 수감 될 시에 도청에 주의하라는 행동지침을 전군에 하달했다. 하이젠베르크가 포로로 억류된 시점에서는 최말단 사병부터 고위 장성까지 도청될 위험에 대해 알고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포로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심지어 장성급들까지- 금방 경계를 풀고 동료 혹은 영국군이 심어놓은 프락치(정보를 캐내기 위해 일부 협조적인 독일군 포로를 활용했다.)를 상대로 군 기밀 부터 자기가 저지른 전쟁범죄까지 술술 불긴했다. 처음에는 정훈용 영화 '철조망에 갇힌 군인들'에서 본 내용을 서로 상기시켜주며 도청에 조심하자고 하다가 이내 경계를 풀고는 자신에게 어떤일이 있었는지 수다를 떨고는 했던것이다. 숨겨진 도청용 마이크를 향해서.

하지만 하이젠베르크는 그런 머리나쁜 군인들 하고는 다른 차원의 인간. 도청의 위험에 대해서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자기가 만들던 무기가 얼마나 끔찍하고 용납되기 어려운 물건인지도 자각하고 있던 그가 동료들과 함께 6개월간 철저하게 연기를 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빌헬름 카이저 연구소에서 우라늄계획의 일환으로 원자로 연구와 핵무기 제조 가능여부에 대해서 하이젠베르크와 오토 한과 같은 과학자들이 연구를 시작했다. 1942년 6월 4일 나치 수뇌부 앞에서 원자력의 군사적 의미를 밝힐 때, 그들은 핵무기 제조를 위해서 우라늄235가 필요하며, 자연계에서 이를 정제하여 농축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어려우며, 너무 비용이 많이 든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그들이 연구 중에 발견한 플루토늄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하지 않았다. 여튼 하이젠베르크와 그가 책임지고 있던 빌헬름 카이저 연구소에 의해서 독일이 핵무기를 손에 넣지 못한 것은 확실하다.[9]

이와는 달리 하이젠베르크와 독일이 핵무기를 만들 능력이 아예 없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링크 당시 전황이 독일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나치는 핵무기 개발에 큰 관심이 없었고, 또한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한 대다수의 연구진들이 실험이나 엔지니어링에는 무지(혹은 무관심)한 이론물리학자였다. 심지어 하이젠베르크는 원자로의 필요성조차 인지하지 못했다고 한다.[10]

위와는 약간 상반되는 내용이지만 캐런 폭스, 아리에스 케크 지음의 아인슈타인 A to Z 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서술되어있다.

1939년 아인슈타인은 미국에 살고 있었으며, 우라늄 폭탄이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 잘 알았기 때문에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위험을 경고했다. 그 무렵 독일에 남아있던 하이젠베르크는 유용한 기술을 가진 물리학자로서 갑자기 나치스 정부로부터 호의적인 대접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폭탄 제조를 위해 연구할 것을 요구받았다. 이에 따라 하이젠베르크는 대부분의 2차대전 기간 동안 무기가 아닌, 에너지를 위한 핵 반응로 연구를 하며 지내게 되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속임수 덕분이었다고 훗날 하이젠베르크는 말했다. [중략] 그는 원자폭탄 제조의 실용성을 과소평가하고 폭탄을 만들지 못할 수도 있다고 얘기함으로써 나치스가 갈피를 못 잡게 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은 누군가가 폭탄을 만들 수 있게 되기 전에 전쟁이 끝날 것으로 믿었다고 말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공동 연구자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이젠베르크의 이야기밖에 알지 못한다. 하이젠베르크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역사학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가 폭탄을 만들지 못한 이유를 실수 때문으로 믿고 있다. 그는 이론물리학에는 정통했지만 실험 쪽은 아니었다.

여기까지가 발췌. 약간은 차동우 교수의 교양 물리와 비슷한 내용으로 보인다.

3 부분과 전체

아마도 대학이나 대학원에 다니는 이과생일 경우 부분과 전체라는 그가 집필한 책을 들어라도 봤을 것이다. 그와 그의 지인이 토론을 하는 방식으로 쓰여져 있고 과학 외적으로 하이젠베르크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상당히 난해하다. 애초에 양자역학이라는게 그렇지만 그것을 수식이나 그림 없이 인물간의 대화로 나타내다 보니 아무 생각 없이 읽으면 무슨 소리인지 모른다.

한국에서는 서커스출판사에서 정발되었는데, 유영미 번역가가 번역했으며, 김재영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가 감수를 맡았다.

  1. 하이젠베르크는 이 엄청난 걸 만들어내고도 그게 수학에서 말하는 '행렬'이라는 걸 몰랐다고 한다. 그러다가 수학자 출신 물리학자 막스 보른이 이걸 알아보고 정리하여 함께 논문을 출판하게 된다.
  2. 행렬역학이 수학적 엄밀성을 갖추게 된 데에는 막스 보른의 역할이 컸지만, 하이젠베르크만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어 막스 보른은 이를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하지만 결국 나중에 그도 다른 업적으로 노벨상을 수상한다.
  3. 그리고 빈은 조머펠트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하이젠베르크의 박사학위 자격을 인정했지만, 비꼬는 말 한 마디를 남겼다. '대체 이론물리학 하는 놈들은 뭘 하는 놈들이길래 시대를 뛰어넘는 천재가 매년 한명 이상씩 나오는거지?'
  4. 대학에 입학할 무렵 하이젠베르크는 수학과 물리학 사이에서 고민했었다고 한다.
  5. 20세기 초에 워낙 쟁쟁한 물리학자들이 많아 조머펠트는 상대적으로 덜 유명하지만 그도 절대 무시 못할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또한 젊은 학생들의 선생으로서도 매우 뛰어났다. 아인슈타인은 조머펠트가 이 점에서 '경탄할 만하고 비상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6. 형편이 어려웠던 하이젠베르크에게 조머펠트가 세미나 장소까지의 기찻값까지 대주었다고 한다. 한편 하이젠베르크는 세미나 장소에서 자신의 물건이 거의 모두 들어있는 가방을 도둑맞아서 돌아온 후에 알바 비슷한 일을 하며 한참 고생하기도 했다.
  7. 사실 당시 유럽 출신의 다른 많은 물리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보어는 철학자라고 해도 좋을 만큼 양자역학의 철학적 의미에 대해 깊이 연구했다. 하이젠베르크가 나중에 자신의 스승들에 대해서 '조머펠트에게는 물리학에 대한 희망을, 보른에게는 수학을, 보어에게는 철학을 배웠다'는 말을 남겼을 정도. 슈뢰딩거는 쇼펜하우어와 인도 철학에 조예가 깊었다. 슈뢰딩거의 저서 '정신과 물질'을 보면 그의 철학적 내공을 짐작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철학자 마하의 이론에서 상대성 이론에 대한 영감을 얻은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한편, 미국의 물리학자들은 이런 철학적 성향(?)이 좀 적고 대체로 실증주의적 경향을 보인다.
  8. 또다른 경우가 독일 화학자인 오토 한(1879~1968)이다. 하지만 나치에 의하여 강제로 방사능 연구 및 핵제조 실험에 참여했다고 알려졌고 역시 무죄 처리되었으며 영국에게 명예학위 및 기사작위까지 받았다.
  9. 실은 벨기에에서 4천톤의 우라늄 광석도 득템했고, 점령한 노르웨이에 수력발전소에서 추출하는 중수 탱크도 있었건만... 이 중수탱크는 2차대전 당시 연합군 측에서 특공대를 보내 폭파했으며 중수를 이동하는 배도 같이 수장했다.
  10. 핵반응에 필요한 우라늄의 임계질량을 계산하려면 원자로가 반드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