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

韓景職
(1902-2000)

1 개요

대한민국개신교 예수교 장로회 목사. 한국 예장통합 증경 총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평안남도 평원에서 출생. 진광 학교와 오산 학교, 숭실 대학을 나왔으며 남강 이승훈조만식의 제자이기도 하다. 이후 미국에서 프린스턴 신학 대학을 졸업했으며 월남 이후에는 영락교회를 세우는 등 한국 개신교계에서 상당히 비중이 있는 인물. 훗날 숭실대학교 총장이 된 이효계에게 '한 우물을 파거라' 라며 법관을 권유.

학원 설립자이기도 한데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신설동에 있는 대광고등학교, 대광중학교, 대광초등학교를 설립한 장본인이다. 대광고등학교의 경우는 2011년에 자율형 사립고등학교가 되었으며, 가수 김광석, 야구선수 김재박, 대학 교수 마광수, 사회운동가 강의석[1] 등이 졸업했다.

1992년 템플턴 상을 수여받는 자리에서는 일제강점기 말기에 신사 참배를 하였다는 양심 선언을 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동료 목사들의 체포로 어쩔 수 없이 한 것이라고 한다.

현재 숭실대학교에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건물이 있으며 채플, 입학식 등을 진행하기 위한 강당으로 자주 쓰인다.
장로회신학대학교에도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건물이 있으며, 여기의 경우는 아예 특강이나 과정별 예배가 아닌 한, 채플을 비롯한 모든 주요 행사의 중심지가 된다. 애초에 학교 자체가 작고 건물 수도 적어서 여기 말고는 딱히 큰 행사를 치를 만한 공간도 없지만...

재건 직후(1954) 당시에는 지금의 경희 의료원이 숭실대에 흡수되고자 신청을 내었으나 재정 문제를 들어 거절했다는 루머가 있다. 어찌되었건 경희 의료원은 경희대 소속이며 숭실대에는 의학 관련 전공으로 메디컬 스쿨 대비반만이 존재한다.

1950년 밥 피어스 목사와 함께 '월드비전'을 설립하였다.

한국 기독교의 흑역사중 하나인 군사독재정권 시기 국가조찬 기도회의 중심 인물중 한명으로도 유명하다.

2 서북청년단과의 관계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김병희 편저, 『한경직 목사』, 규장문화사, 1982.)

1945년 9월에 한경직은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했으나 소련군의 진주로 그 해 10월 월남했으며 12월에 김재준의 도움을 받아 일본의 천리교 건물을 사들여 오늘날 '영락교회'의 시초인 '베다니 교회'를 열었다. 다음 해인 1946년에 교회에 속한 청년들이 중심이 된 서북청년회가 11월에 출범했으며 이들이 바로 서북청년단의 시초였다.

그 서북청년단은 잔혹하리만큼 철저한 반공정신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1947년에 3월 1일에 제주도에서 일어난 소요사태로 경찰 66명이 해임되자, 그 후임으로 투입되었다. 이후 벌어진 4.3 사건 때 제주도의 남로당이 5.10 총선거에 반대해 무장단을 결사해 경찰서를 습격하고 60여명이 사망하자, 제주도 한라산 일대에 계엄령을 내리고 그 주변부의 민간인들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남로당 무장대로 규정해 학살, 약탈, 강간 및 살인연습 등을 자행하였고, 그 중 서북청년단 무장단의 활약(...)이 가장 돋보였다.

이후 서북청년단은 한국 내 남로당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전향한 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한 '보도연맹'이 6.25 전쟁 중에 북한군에 부역행위할 가능성이 있다는 추정 이유로 북한군 미점령지역의 보도연맹 인원들을 예비검속 차원에서 대량학살한 보도연맹 학살사건 에서도 가장 앞장서서 학살에 나섰으며 그 밖에도 이승만 초상화와 태극기를 가지고 다니며 강매를 하였고 이에 불응하면 공산당 빨갱이로 누명을 씌워 고문, 폭행, 살해 등을 일삼고 가족들을 상대로 협박, 금품 갈취, 성상납, 강제결혼 등을 하였다.

이후 서북청년단은 5.16 군사정변 시기에 해체되었고, 그 참가인원들은 지방으로 옮겨 교회를 건축하고 자신들의 '반공행위'를 내세우며 목회를 하였다.

한경직은 자신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공식 석상에서 인정하고 사죄하였으나, 영락교회에서 시작된 서북청년단의 만행에 대해서는 함구하였으며, 사죄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위의 발언처럼 자신의 저서를 통해 이들이 반공의 선두였으며 자랑스러웠다고 밝혔다.
  1. 취소선이 그어진 이유는 해당인물이 해당학교를 졸업하는 과정에서 해당학교와 엄청난 마찰을 빚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사항은 강의석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