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회신학대학교

서울특별시의 4년제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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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老會神學大學校 Presbyterian University and Theological Seminary[1]
개교일: 1901년
소재지: 서울시 광진구 광장로5길 25-1
학훈: 경건과 학문(Pietas et Scientia)
면적(m3) 56,441m2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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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로고 및 설명. 왠지 이 친구가 사는 거기가 생각난다

1 개관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에 위치한 개신교계 사립 대학교. 흔히 줄여서 "장신대[2]"라고 불린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마포삼열(Samuel.A.Moffett, 1864.1.25~1939.10.24)이 1901년도에 설립한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속칭 평양신학교)를 전신으로 삼는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1901년 평양에서 김종섭, 방기창 두 사람을 데리고 자신의 사랑방에서 신학반을 만들어 가르쳤다. 이것이 평양신학교의 모태가 되어 1903년 장로회 공의회에서 정식 인준되었고 조선예수교장로회의 교단 신학교인 장로회신학교, 즉 평양신학교로 시작되었다.[3]

2 특성

2014년 기준 대한민국의 장로회 교단 중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에 이어 2위 규모를 차지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신학을 대표하는 직영 신학 대학교이다. 1960년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이 WCC 가입문제[4]로 예장합동의 총회신학교(現 총신대학교)와 분열되면서 "장로회신학대학"으로 시작했다.

총신대학교는 칼 바르트(Karl Barth)의 신정통주의에 부정적이며 성서무오설, 축자영감설을 기반으로 하는 박형룡 목사[5]보수신학을 대표한다면 장로회신학대학교는 설립 배경에 박형룡 목사가 있었기에 과거에는 성서무오설축자영감설을 중시했지만[6]이종성 박사가 나타나기까지 이 둘만 있었다 故 이종성 박사 이후로 신정통주의, 성서비평, 사회복음을 어느 정도 수용하여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입장에 서 있는데, 이는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신학이 개신교 내 스팩트럼에서 보수와 진보를 모두 포용하는 이종성 박사의 통전적 신학(Holistic Theology)의 토대 위에 세워졌기에 가능했다.[7]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및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신학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하나 간단히 말해, 칼바르트(Karl Barth) 계열의 신정통주의를 뒤늦게 헐레벌떡 따르며 한국 개신교 스팩트럼에서 중도(보수)노선 정도로 보면 된다.
(보<혁 기준으로 고신대학교<총신대학교<장로회신학대학교<감리교신학대학교<한신대학교성공회대학교)

예장통합 교단의 목사를 양성하는 과정인 신학대학원(M.Div)[8] 입시의 경우,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총신대학교의 신학대학원과 더불어 준고시급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재수, 삼수는 기본인 리즈시절이 존재했다. 흠좀무[9] 그러나 한국의 개신교의 사회적 신뢰도 하락 및 넘쳐나는 목사후보생 대비 사역지의 부족 등의 이유로, 2000년대 후반부터 하락세를 보이며 2012년 지원자 1,000명선이 무너졌고, 2014년 현재 823명이 지원하면서 망했어요 다만, 교단 신학생을 대부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생으로 장려하는 합동 교단[10]의 경우와 달리 통합 교단은 직영신학교가 전국에 7개가 있고, 각 신학교 출신별로 각자 다른 컬러와 지역색을 갖고 있기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일수도 있다.

타 신학교나 종교적 학교와 다른점이 있다면 채플의 횟수일 것이다. 1주에 채플이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4회가 있다. 출석의 25%이상 결석[11]시 하루종일 성경을 읽는 '성경통독'을 이수해야만 다음학기에 학업을 이어서 할 수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야사에 의하면 먼저 라이벌(?)격인 총신대학교에서 채플을 주당 4회로 늘렸다고 한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교수진이 주당 4회로 채플을 늘림으로써 전국에서 유이하게 주당 4회나 예배를 드리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 많이 하는 신학교라고 해도 주당 3회(감리교신학대학교) 수준이니...

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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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총장. 2016년 현재 21대 총장으로 기독교와 문화(기독교윤리) 전공의 임성빈 교수가 재직 중이다. 임성빈 교수는 학부-신대원 출신으로 내부승격이 되어 21대 총장으로 선출 되었다. 참 재밌게도 3개 신학대, 장신대와 총신대, 한신대를 분열시키는데 일조한 박형룡 목사도 총장을 임했다.
다음은 장로회신학대학교측의 공식 설명이다.

3.1 해방 전 역사

초창기에는 각 장로회 선교부의 선교사들이 평양에 가서 가르쳤고, 학생들은 1달 공부하고 3달 목회하는 방법으로 1년에 3달 공부하여, 5년간 수업하는 제도로 운영되었다.

1907년 6월 길선주, 한석진, 이기풍 등 7인의 첫 졸업생이 나오게 되었고 그해 9월에 독(립)노회가 창설되어, 이분들이 한국 장로교회의 첫 목사들로서 안수되었다. 1912년에는 장로회 총회가 창립되었으며, 이를 기념하여 중국 산동성에 김영훈, 사병순, 박태로 목사선교사로 파송하여 해외 선교의 시작이 이루어졌다.

1919년 기미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본교 출신 목사들 여러분도 민족대표 33인으로 서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학교 학생들도 다수 이 운동의 선두에 나서 활동함으로써, 여러 학생들이 체포되어 학교가 일시 휴교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일제의 갖은 억압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의연히 그 임무를 수행해 왔으나, 1938년 제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안이 총회장에 의해 불법적으로 선포되므로, 신학교는 이에 동참할 수 없다고 거절함으로써, 무기휴교 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신학교가 문을 닫자, 목사 양성을 중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총회는 친일하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1940년 평양에 '평양신학교'를 세우고, 채필근 목사가 교장에 취임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서울에서는 김대현 장로가 중심이 되어, 김재준 목사를 교수로 '조선신학교'[12]가 설립되었다.

한국의 신정통주의는 장공 김재준(1901-1987) 목사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유학한 후 귀국하면서 도입되었으며, 조선신학교의 교수로 오게된 것이 이후 조선신학교의 성향과 발전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성경 비평을 학문적으로 도입한 신정통주의 신학의 김재준과 몇몇 비교적 진보적인 신학을 하던 목사들이 이 학교의 교수가 되면서 이 학교의 신학교육은 (신학적으로) 진보적이게 되었고 이에 대해 기존 교단의 적지않은 사람들이 반발했다. 그래도 이러한 내분은 어차피 일제가 아예 내선일체의 일환으로 조선 장로교를 다른 종파들과 모두 합쳐 일본 기독교에 흡수시켜버리려는 의도 때문에 이때까지는 딱히 표면화되지 않았다.

3.2 해방 후 분열의 역사

광복이 되어 장로교 내 각 파벌 간 갈등이 심화되면서 본격적으로 신학교 분열이 표면화되었다. 특히 조선신학과 신학적인면과 파벌적인면 모두에서 반대되던 (후)평양신학교가 이북에 위치하여[13] 남북분단의 와중에 사라지고 장로교 총회에서 정식으로 인가받은 유일한 신학교육기관이라고는 조선신학교가 유일하게 존재하게 되면서[14] 목회자 교육내용을 둘러싸고 신학적(교리적)/헤게모니적 갈등이 심화된 것이다. 심지어 신사참배 문제로 갈등을 겪고있던 고신파는 이미 고려신학교 설립으로 인해[15] 광복한지 몇 해 되지도 않아 사실상 분리된 상태였다.

이러한 장로교 내부 교파 간 갈등은 더욱 커져 결국 1947년 (후)평양신학교 출신 학생 51명이 대구에서 열린 제 33회 총회에 서울에 새로이 완전한 장로교 정통신학교를 세워줄 것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내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대해 김재준은 그해 7월에 총회에서 자신의 신학관을 명확히 밝혔지만 1948년에 총회의 요청을 받은 박형룡 목사가 이를 검토한 결과에 대해 장로교의 교리에 어긋난다며 매우 부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16]

박형룡의 의견을 받아들인 총회에서는 조선신학교 개조를 위해 김재준을 1년간 해외로 유학보내고 니가가라 하와이 조선신학교에 보수주의(근본주의) 교수들을 대거 수혈하는 방안을 내놓지만 이 방안에 대해 조선신학교에서 거세게 반발함으로써 사실상 이 개조안은 무효화된다. 때문에 결국 총회 산하 신학대책위원회에서는 조선신학교 개조를 포기하는 대신 그해(1948년) 5월에 보수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를 새로이 설립하기로 결정한다. 그 결정에 따라 결국 그해 6월, 박형룡를 임시교장으로하여 서울 남산에 새로이 장로회신학교가 개교했고, 이것이 1949년 35회 총회에서 인가 받게되면서 장로교 내부 분열이 가시화된다.

한편 이 난리 중에도 1947년에는 문교부로부터 정규대학으로 인가받는다. 그리고 재단법인 한신학원 인가와 함께 조선신학대학으로 개편하였다.

이 난리를 피우는 도중에 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조선신학대학은 부산으로 피난하여 교육을 계속한다. 1951년에 36회 총회에서 서로 교육하는 신학의 내용이 판이하게 다른 두 신학교의 양립에 의한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두 신학교의 직영을 전부 취소하고 대신 총회직영의 새로운 신학교를 대구에 세우자며, 사실상 두 학교를 합친 새로운 학교를 만들자는 방안을 내놓고 그 해 9월에 총신대학교가 설립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명칭과 교수진이 남산에 있던 장로회신학교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었고, 총회에서 내놓은 두 학교 결합을 위한 소위 '합동 7원칙'에서 요구한 "신한 교육을 순복음부의에 기초해서"한다던가 중요과목을 7인의 선교사 교수에게 맡긴다던가, 신학교 현직원의 총사퇴 등등의 안은 조선신학대학이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으므로, 조선신학대학 측에서는 당연히 불복했다.[17] 이때 학교 이름도 현재 한신대학교라는 명칭의 기원이 되는 한국신학대학교라는 이름으로 갈아버린다.[18] [19]

이 이후로는 각 대학은 서로 독립된 상태였으며, 1953년에 결국 한신대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이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분리되었다.

1953년 총회는 '총회신학교'를 대구광역시에서 시작하여 후에 서울로 옮겨오게 되었다. 서울로 옮겨온 총회신학교는 남산의 옛날 조선 신궁 자리에서 수업을 하였는데, 이 자리가 적산이었으므로, 정부로부터 불하를 받아, 교사를 짓자고 하는 과정에서 당시의 돈 3,000천만 환을 사기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한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에큐메니칼운동을 지지하는 측과 이를 반대하는 측으로 나뉘어 분쟁을 계속하게 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이 싸움으로 결국 1959년 대전에서 모인 제44차 총회에서 총회신학교가 두 파로 나뉘어, 에큐메니칼 측은 서울 광진구 광장동 353번지 1만 9천평의 대지를 구입하여 교사를 짓고 '장로회신학대학'으로 새 출발을 하였고 N.A.E 측, 즉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는 측은 사당동에 교사를 짓고, 옛 이름 그대로 '총회신학교'[20] 출발하였다.

장로회신학대학교는 1961년 문교부로부터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대학'으로 대학 인가를 받았으며, 1966년 대학원 설립, 1973년에는 '장로회신학대학'으로 개명하고, 1976년부터 미국 San Francisco 신학교와 목회학 박사과정을 공동으로 개설하였다. 1980년에는 신학대학원(M.Div.)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1992년에는 지금까지 San Francisco 신학교와 공동으로 실시하던 목회학 박사과정을 중지하고, 1992년에 시카고에 있는 McCormick 신학교와 공동으로 이 과정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1993년부터는 '장로회신학대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93년에는 교육부로부터 '세계선교대학원'이, 1995년 10월에는 교육부로부터 '교역대학원'과, '교육대학원'이, 1996년 11월에는 '교회음악대학원'이, 2001년 7월에는 '교역대학원'을 폐지하고, '목회전문대학원(목회신학석사과정, 목회학박사과정)'이 설립인가를 받았다.

4 개설 과정

4.1 학부

  • 신학과(Th.B)[21]
  • 기독교교육과(B.A)
  • 교회음악학과(B.M)

4.2 대학원

4.2.1 석사

  • 신학대학원(M.Div)[22][23]
  • 일반대학원(Th.M, M.A, M.M, M.P.S)
  • 목회전문대학원(Th.M in Min)
  • 세계선교대학원(Th.M in Miss, M.A)
  • 교역대학원(Th.M in Min)
  • 교육대학원(M.A in Ch.Ed)
  • 교회음악대학원(M.C.M)

4.2.2 박사

  • 일반대학원(Th.D)
  • 목회전문대학원(Th.D in Min, D.Min)

4.3 같이보기

  1. 영문명의 경우 2014년 이전까지는 단과대학같은 느낌 때문인지, College를 고집하다가 2014년에 들어오면서 2/3년제 대학에서 많이 쓰는 College 대신 University를 정식 채택하였다. 취지는 세계적 추세에 맞춘다나 뭐라나?
  2. 전국 각지(서울장신대학교, 부산장신대학교, 한일장신대학교)에 '장신대'라는 표현이 들어가는 학교들이 있다. 이 학교들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산하 7개 직영 신학대학으로 장로회신학대학교와 같은 교단 소속이다. 하지만 이들은 장로회 통합교단 소속의 신학대학라는 뜻에서 장신대라는 이름이 학교 명칭에 들어가있는 것일 뿐, 모두 엄연히 다른 별개의 대학교이다. 재단도 각각 다르다. 보통 그냥 "장신대"라고만 부를 때는 '장로회신학대학교'를 가리킨다.
  3. 이 평양신학교를 전신으로 삼는 또 다른 대표적인 학교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의 총신대학교를 들 수 있다. 두 학교의 소속 교단이 과거에는 하나(조선예수교장로회)였으므로 평양신학교가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총신대학교의 모태라는 주장은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으나, 역사적으로 볼 때에는 논란이 있다. 현재 설립자의 후손 및 설립자의 소속 교단인 미국장로교회(옛 미국북장로교, 현 PCUSA)와 교류를 하고 있는 곳은 장로회신학대학교이다. 참고로 후손의 동의하에 마포삼열의 유품과 유해는 장로회신학대학교 교내에 안치되어있다. 또, 평양신학교의 학적부는 장로회신학대학교에 있다.
  4. 이 문제는 사실 좀 더 복잡한 이면과 이해관계가 얽혀있지만 표면적으만 보았을 때에는 WCC 가입에 찬성하는 노선이 통합측, 반대하는 노선이 합동측의 기원이 되었다. 따라서 통합이 합동보다는 진보적인 편이며(세계 신학흐름에선 둘 다 보수지만)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5. 근본주의 개신교 신학자로도 유명하다.
  6. 혹자는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신학이 현재도 성서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을 기본으로 한다고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사실상 학계에서 저 두 가지 설은 이미 아웃오브 안중인데다가 현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성서학 수업에서는 성서비평학을 교수에 따라 정도 차이는 있어도 기본 성서연구 방법론으로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다. 다만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소속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 내부에는 여전히 성서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을 지지하는 교회들도 있다. 학교보다도 목회 현장의 스펙트럼이 더 넓은 게 통합측인지라...
  7. 어떤 사람들은 한경직 목사의 중립적 영성 때문이라고도 하는데, 그분은 너무도 중립을 좋아하셔서 군부독재시절에 전두환 옆에 웅크리고 앉아서 조찬기도를 했다. 별로 자랑할 것은 못된다는 뜻.
  8. Master of Divinity의 약자로 우리말로는 교역학 석사 또는 목회학 석사로 번역할 수 있다. 미국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의 일부 개신교 정규 신학 학제에서는 이 학위 과정에 입문해야 정식 목사후보생으로 인정받는다. 목사 되는 것도 FM대로 가자면 꽤 어려운 과정이다.
  9. 보통 300명 정원에 1,500~1,600명 정도는 기본으로 응시했다. 학부부터 신학을 공부하게끔 되어있는 독일과 달리, 미국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의 신학학제는 신학대학원 지원자가 학부시절 다양한 전공을 공부하고 진학하는 것을 격려하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신학대학원생들은 신학대학 외에도 일반대학교 출신들이 많다. 즉,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신학의 문을 개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응시생 중 간혹 10수생도 보이는 등, 불굴의 의지를 지닌 용자들이 생겨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10. 합동에는 교단신학교로 총신대학교칼빈대학교, 대신대학교, 광신대학교 네 개의 신학교가 있고, 각 학교마다 석사과정이 개설되어 있다. 그러나 교단의 정서상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가장 높게 치는 편이다. 이 부분이 통합과 많이 다르다.
  11. 우스갯 소리로 '째플'이라고도 한다
  12. 현재의 한신대학교의 전신이다.
  13. 평안도세력과 경기중부세력간의 세력, 파벌문제가 낳은 병크다. 평안도의 평양신학교에 경쟁의 의미로 경기의 조선신학교가 설립되면서 본격화되었다.
  14. 1946년 6월 12일 남한지역 장로교회 노회들이 승동교회에 모여 남부총회로 모여 제 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고 조선신학교를 직영하기로 하였다. 이때부터 얼마간 장로교의 인정을 받은 정식 목회자 양성기관은 조선신학교 뿐이었다.
  15. 그리고 이것이 장로교 총회에서 인정받지 못해 신학교가 정식으로 인가받지 못함에 따라 장로교 주류와 고신파 사이의 갈등은 더욱 심각해졌다.
  16. 심지어 박형룡은 보고서에서 김재준의 주장이 교회를 능욕하는 내용이라고 까댔는데, 이게 장로교 총회가 조선신학교에 부정적인 입장을 갖게 만들었다.
  17. 명분은 총회 진행방식 및 새로운 신학교 설립의 불법성
  18. 1951년 4월 28일에 일어난 일이다.
  19. 글에 따라 이미 총회신학교가 세워진 후인 1952년에 교명을 바꿨다고 설명하는 곳도 있으나 한신대학교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연혁에는 1951년의 일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20. 지금의 총신대학교이다.
  21. 학부생의 경우 일정 수준 (4.3 만점에 3.3 학점 이상)에 도달하고 그 외 몇가지 조건에 충족(TEPS 500점 등...)하면 신대원에 무시험 진학이 가능한 특전이 있다. 이는 기교과의 경우도 같으며 교음과의 경우 1년에 3명만이 가능한 전형이다.
  22. 보통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들어가기 어려운 과정으로 유명한 것이 바로 이 과정이다. 단, 신학대학원 학위는 정식 교육부 인가 학위이기는 하지만 목회자 양성과정에서 있는 특별학위이기에 석사로 인정을 해 주는 곳도 있고 아닌곳도 있다.
  23. 예를 들어서 일반대학원의 신학박사 학위를 위해서는 일반대학원의 신학석사 학위가 필요하고 목회학 석사 학위로는 진학이 불가능하다
  24. 장로회신학대학교는 국내 신학대학교 중 최초로 역사신학(교회사) 교수들이 국정 교과서 반대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대학 동아리연합회, 신학대학원 학우회에서도 공식적으로 국정 교과서 반대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현재도 학내에서 국정 교과서와 관련하여 찬반토론이 활발하게 진행중이며 특별히 신약학 김철홍 교수의 국정 교과서 찬성 견해 개진 후 다양한 의견 표출이 이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