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260px | 파일:Attachment/이승훈/12.jpg |
[1] |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파일이 없음 |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重章) 수여자 | |||
강우규 | 김구 | 김규식 | 김좌진 |
김창숙 | 민영환 | 서재필 | 손병희 |
신익희 | 쑨원 | 쑹메이링 | 안중근 |
안창호 | 여운형 | 오동진 | 윤봉길 |
이강년 | 이승만 | 이승훈 | 이시영 |
이준 | 임병직 | 장제스 | 조만식 |
조병세 | 조소앙 | 천궈푸 | 천치메이 |
최익현 | 한용운 | 허위 | 박정희 |
李昇薰 1864년 3월 25일 ~ 1930년 5월 9일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호는 남강.
18세기의 가톨릭 인물인 이승훈과 많이 헷갈려 이 사람이 33인 민족대표에 천주교 대표로 나갔다고 오인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 사람은 개신교(장로교)인이다.
평안북도 출생으로, 양민 출신에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었지만 16세에 유기상 알바를 시작으로 10년만에 대상인이 되었다. 근데 하필이면 청일전쟁의 스테이지가 평안도..그 탓에 재산을 모두 잃게 된다. 그러고나서 다시 일어나지만 이번에는 러일전쟁... 이쯤되면 일본이 잘못했다.
그 후 불굴의 의지로 다시 사업을 크게 일으키고 참봉직을 사서 여태 못해봤던 양반행세를 하다가 안창호의 교육 강연을 듣게 되었는데 그의 화려한 말빨에 감동을 받아[2] 신민회로 들어가 교육기관인 오산학교[3], 강명의숙 등을 설립하여 본격 교육자의 길을 가게 된다. 서적 출판을 담당하던 태극 서관도 이 사람의 작품.
그 후 안악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를 가고, 105인 사건으로 인해 유배중에 감옥으로 끌려가 10년형을 선도받고 5년만에 가출옥하였다. 그 동안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었으며 1919년 민족대표 33인에 기독교 대표가 되어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하고 또 다시 감옥으로 끌려가 33인중 가장 늦게 출옥하였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가 오산학교 교장으로 살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며 조만식과 함께 물산장려운동에 힘쓰는 한편 농촌 진흥에 노력을 기울이다 1930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향년 67세.
성격은 능동적이고 유쾌하여 민족 대표 33인의 서열을 정하는 것도 순탄하게 처리하였으며 학교 기금을 위해 평안도의 광산업자들을 포섭하는데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또 세상을 보는 안목이 있어 어디에 땅을 사두라고 하면 어김없이 땅값이 오르게 되는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애시당초 사업가로 성공한 분이니.
독실한 개신교인이지만 3.1 운동 당시 승려이던 만해 한용운 선생을 늘 위에 명단을 쓰고 친하게 지냈다. 그래서 개신교인들이 그걸 안 좋게 말하자 그들을 이렇게 꾸짖었다고 한다.
"나라가 있어야지 종교가 있지! 그럼 일본이 종교만 인정하면 일본이라도 상관없는 거 아니냐? 제발 경솔하게 종교부터 따지지 마라!"
그 외에도 자신의 학생들을 매우 아끼고 좋아했었는지 많은 말을 남겼다.
"열심히 공부해서 일본인들을 앞지르는 것이 나라를 위한 길이다."
"내 유해는 땅에 묻지 말고 생리학 표본을 만들어 내 사랑하는 학생들을 위해 쓰게 하라"[4]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일화도 있다. 오산학교의 화장실은 그 당시에 재래식이었고, 그 때문에 겨울이 되면 쌓인 똥이 얼어버리는 사태가 자주 발생했다. 그래서 이승훈 본인이 직접 얼음똥을 도끼를 들고 와서 손수 깼다는(…) 일화다. 학생들을 아끼는 마음이 드러나는 좋은 일화긴 한데 좀 깬다(…).
여담으로, 이 분이 세운 오산학교의 후신은 현재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오산고등학교.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 학교를 재건한 경우다. 의사양반의 모델인 백인제 선생도 이 학교를 나왔다.
역사학자 이기백과 친척이다. 이기백의 종조부 격이라고 한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이승훈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