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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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圭卨
1848 ~ 1930

조선 후기의 무신(武臣)이자 을사조약 당시 참정대신을 지냈던 인물.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때 이토 히로부미 앞에서 강하게 반대 의견을 던졌다는 이유로 참정대신직에서 축출되었고 1910년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지명받았으나 거절하였다. 서울 출신.[1]

1848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청주(淸州), 호는 강석(江石)이다. 젊은 시절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고 형조판서, 한성판윤, 포도대장직을 거치다가 1905년 대한제국 참정대신[2]으로 부임하였으나 그 해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려 할 때 이토 히로부미 앞에서 조약을 체결하는 것에 강력히 반대했다는 이유로 결국 일제에 의해 참정대신직에서 파직되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지명받았으나 거절하였다. 작위를 거절 혹은 박탈당한 인구는 그 많은 작위 수혜자 중에서 불과 8명이다.

1920년에는 월남 이상재 등과 함께 조선교육회를 창설하여 민립대학기성회로 발전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장지연은 그 유명한 시일야방성대곡에서 을사오적이 개XX라는 것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러나 한규설 이 놈도 을사조약을 못 막은 주제에 무슨 낯으로 살아 숨쉬는가? 라며 폭풍같이 깠다.[3]

한규설이 살던 한옥은 국민대학교에서 구입, 해체하여 정릉 소재지로 옮겨 짓고 학생들의 예절 교육관으로 쓰고 있다. 외부 손님의 교내 탐방 코스, 다도 수업 등에 쓴다. 원래 99간의 큰 집이었다고 하나, 국민대학교의 위치가 산중턱이라 일부만 옮겨 놓았다.
  1. 갑신정변 당시에 살해당한 전영사(前營使) 한규직(韓圭稷)이 형이다.
  2. 의정부 의정대신의 다음 직위로, 내각의 좌의정, 지금의 부총리급. 조병세가 의정대신을 맡았으나 사직을 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국무총리, 국무총리 대리에 가까웠다. 이전에 민영환이 자주 역임했고, 한규설이 을사조약으로 분노해 물러나가 일제가 이완용을 앉혔다. 실질적 총리로 보아도 무방하다.
  3. 원문은 "아, 4천년의 강토와 5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참정(參政)대신이란 자(한규설)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단지 부(否)자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란 말이냐. 김청음(金淸陰)처럼 통곡하며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정동계(鄭桐溪)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