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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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그려진 민영환의 젊은 시절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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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시기 민영환의 사진[1]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파일이 없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重章) 수여자
강우규김구김규식김좌진
김창숙민영환서재필손병희
신익희쑨원쑹메이링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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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이승만이승훈이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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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한용운허위박정희

閔泳煥 (1861년 8월 7일 (음력 7월 2일) ~ 1905년 11월 30일)

1 개요

조선 말기의 관료. 여흥(驪興) 민씨이다. 대한제국 성립 후 육군 부장(현재의 중장에 상당)의 지위에 올랐으나 본래는 과거에 급제해 관료가 된 문신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직후 자결함으로써 순국한 애국지사이다. 자(字)는 문약(文若), 호(號)는 계정(桂庭),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그래서 충정공(忠正公) 또는 민충정공(閔忠正公)으로도 많이 불린다.

2 출생 및 가계

1861년 민겸호(閔謙鎬)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이후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민태호(閔泰鎬)에게 입양되었다. 민겸호 집안의 뒤는 둘째 아들인 민영찬(閔泳瓚)이 잇게된다. 1878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관료가 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민씨 일가의 후광을 등에 업고 쾌속 승진을 거듭해 1881년 동부승지, 1882년 성균관 대사성등의 요직을 거친다.

같은 여흥 민씨 일족인 민영환과 명성황후와의 관계를 설명을 해야할 필요가 있을 때가 있는데, 족보를 펴놓고 보지 않는 이상 쉽게 혼동이 올 수가 있다. 일단은 과거에 친척간의 양자 입적이 흔해서 가계(家系)를 따지다가 헷갈리는 것도 원인이 되겠고, 다음과 같은 원인도 있다. 민겸호의 둘째 형인 민승호(閔升鎬)는 명성황후의 아버지인 민치록(閔致祿)의 양자로 들어간다. 이 민승호가 폭사당한 뒤 민승호의 양자로 '민태호'의 아들 민영익(閔泳翊)이 들어오는데, 이 '민태호'는 동명이인인 또다른 민태호(閔台鎬)인 것이다.

민유중(閔維重)은 인현왕후의 아버지로, 앞서 언급한 모든 민씨 사람들의 공통된 조상이다. 그를 기준으로 삼고, 이해를 돕기 위해 간략히 표를 만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민유중의 장남인 민진후(閔鎭厚) 쪽 후손 :
... 민치록 ― 민승호 (입적) ― 민영익 (입적)
... 민치록 ― 명성황후 ― 순종

・민유중의 차남인 민진원(閔鎭遠) 쪽 후손 :
... 민치오 ― 민태호(閔台鎬)
... 민치삼 ― 민태호(閔台鎬) (입적) ― 민영익 , 순명효황후[2]

・민유중의 삼남인 민진영(閔鎭永)[3] 쪽 후손 :
... 민치구 ― 여흥부대부인[4]고종
... 민치구 ― 민태호(閔泰鎬) ― 민영환 (입적)
... 민치구 ― 민승호
... 민치구 ― 민겸호 ― 민영환

촌수를 따져보면, 민유중은 '호(鎬)'자 항렬에게 6대조(代祖)이므로, 명성황후는 민태호(閔泰鎬) 등과 같은 항렬로 12촌지간이 되며, '영(泳)'자 항렬에게는 7대조(代祖)이므로, 명성황후의 조카뻘인 민영환과는 13촌지간이 된다. 친척이라곤 해도 상당히 먼 친척임을 알 수 있다.

위의 표에서 보듯 '민태호' 한 명만 헷갈려도 '족보'가 완전히 꼬여버린다. 순식간에 '민태호'가 아들 민영익을 명성황후의 양오라버니인 민승호의 양자로 보내고나니 자신도 '아들이 없어'[5], 민영환을 대신 양자로 들였다는 새 족보가 생긴다[6]. 또 피붙이라고는 해도 친척 집안의 양자로 들어간 자식은 친부모 집안과는 가계가 끊긴다는 것과, 오빠, 동생이라는 말이 나와도 사실은 오빠뻘, 동생뻘이라는 것을 무시하면 가계도가 개판이 돼버린다. 이런 문제를 앞서 든 '민태호' 문제와 적절히 섞으면 어떤 결과물이 나오는지 다함께 살펴보자.

1. '민태호', 민승호, 민겸호, 여흥부대부인은 친형제자매이다.
2. 민영익, 순명효황후는 '민태호'의 자식이다. 민영익은 민승호의 자식이기도 하다. '민태호' = 민승호
3. 민영환은 '민태호'의 자식이다. 민겸호의 자식이기도 하다. '민태호' = 민겸호
4. 민승호는 명성황후의 친정오라버니이고, 그 아들인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친정조카이다.
5. 따라서 '민태호', 민승호, 민겸호, 여흥부대부인은 명성황후의 친형제자매이고, 또한 민영익, 순명효황후, 민영환은 명성황후의 친조카이다.
6. 그런데, 여흥부대부인은 고종을 낳고, 명성황후는 그 며느리가 되고 순종을 낳고, 순명효황후는 그 며느리가 되고 순종의 아내가 된다.
7. ????
8. 그러므로 민영익, 순명효황후, 민영환, 고종, 순종은 모두 4촌지간이다.

지금도 여전히 민영환과 명성황후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정보들이 인터넷상에 돌아다니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 한 곳만 링크를 제시해도 충분히 설명이 되리라 본다. '국가보훈처 공식블로그'이다.

3 민씨 척족의 신진 대표

친아버지인 민겸호는 민씨 척족(戚族)의 중심인물로서, 부정부패가 심하였다. 1881년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였고 1882년에는 구군영(舊軍營), 즉 구식 군대를 기존의 5군영에서 2군영으로 축소, 개편하였다. 이 과정에서 구군영 소속 군인들에게 쌀로 지급하는 급료를 13개월 체불한 끝에, 6월 9일 일부 군인들에게 1개월분의 급료만 우선 내주었다. 그나마 지급한 급료도 겨와 모래를 섞었고 양도 절반 정도 밖에 안되자, 구식 군대의 군인들은 격분하여 난동을 벌였다. 이에 민겸호는 주동자를 색출하여 체포하는 등 강경하게 진압하려했는데, 이는 오히려 기름에 불을 붙인 격이 되었다. 난동은 곧 한양 도성을 휩쓸은 반란 즉, 임오군란으로 발전하였고, 결국 민겸호는 6월 10일에 반란군에게 살해당한다.

이 때, 민영환 역시 구식군대의 처단 표적이 되기도 했으나 살아남았다. 이후 사직서를 냈는데 1884년 바로 이조참의로 복직했고, 도승지, 전환국 총판, 홍문관 부제학, 이조 참판, 내무 협판, 개성 유수, 해방 총관, 친군연해 방어사, 한성 우윤, 기기국 총판 등을 역임했다.

1887년에는 상리국 총판, 친군전영사, 호조판서가 되었고, 1888년과 1890년 병조판서를 2차례 역임했다. 1893년에는 형조 판서, 한성 부윤, 1894년에는 독판 내무부사, 형조 판서가 되었고, 1895년에는 주미 전권공사에 임명되었다. 각종 직책들을 보면 갑신정변 이후 민영익이 정권에서 밀려난 이후 그의 가지고 있던 직함을 거의 그대로 물려받았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도 민겸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처단 대상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당시 민중들에게 미움받던 여흥 민씨 척족의 대표격인 인물이었기 때문인지 동학농민운동 당시 전봉준의 체포 후 진술 기록을 보면 고영근, 민영준[7]과 함께 민영환을 탐관오리의 대표로 지목하고 있다.

다만, 위에서 볼 수 있듯 민영환은 과거 급제 이후 쾌속 승진을 거듭하며 중앙의 경직(京職)만 맡아 봤기 때문에, 실제로 민중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예를 들면 고부군수 조병갑과 같은) 탐관오리 짓을 할 수 있었을 지는 의문이다. 매관매직 등의 부정부패에 연루되었던 정황이 있다는 말도 있으나, 그보다는 명성황후를 비롯한 민씨 외척(外戚) 세력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너무나도 컸고, 민영환이 민씨 일가 세도정치의 대표격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지목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더구나 왕조사회에서는 왕이나 왕후를 지목해 비판을 하는것이 금기시되었기에, '군주를 측근에서 잘 보필하지 못하고 미혹케 하는 간신'이라는 식으로 에둘러서 신하, 관리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고종, 명성황후가 받아야 할 비난을 대신 덮어썼을 가능성도 있다.

4 개화파 관료로

이후로는 일본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의 힘을 빌려 근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활동하는 대표적인 친러파였다. 1886년 청나라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밀약을 맺을 것을 고종에게 건의했으나 같은 여흥 민씨 출신인 민영익이 반대하여 성사되지 못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도승지, 이조참판 같은 요직에 있었으나 1895년 을미사변 직후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을미사변 직전에는 주미 전권공사로 임명되었으나 을미사변으로 인해 부임하지 못하고 사직했다.


이 사진은 훗날 미러사이트 링크주소가 사진 출처로 나오는 전설이 됩니다.[8]

1894년 12월 제정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알렉산드르 3세가 죽고 니콜라이 2세가 즉위하자 1896년 5월 거행된 대관식의 축하사절단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대관식에 참석했다. 사절단 일행에는 윤치호도 포함돼 있었다. 이때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개통 이전이라서[9]

사절단은 요코하마에서 기선을 타고 태평양을 횡단, 캐나다 밴쿠버로부터 미국으로 입국, 대륙을 철도로 가로질러 뉴욕에서 다시 기선을 타고 런던으로 가서 거기서 다시 베를린을 거쳐 러시아로 들어가 대관식에 참석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반년에 가까운 여행을 해야만 했다. 대관식에 참석한 이후는 (시간에 여유가 있으니까)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블라디보스톡으로 와서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결과적으로는 정말 지구를 한 바퀴 돈 셈이 되어버렸다. 이 여행이 한국 최초의 세계일주다. 총 걸린 시간은 6개월 2일이었고, 이때의 기록을 정리한 여행기가 ≪해천추범(海天秋帆)≫이다.

이전에도 청나라와 일본에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이 때의 러시아 여행를 전후해서 본격적으로 서구 문물에 눈을 뜨게 되었다. 러시아로 향하는 길에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제국 등 당시의 서구 열강을 전부 순회 방문하였으며, 이들의 발전된 문물 제도를 직접 체험면서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귀국 후에는 의정부 찬정을 지내던 도중 광무개혁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군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군부대신을 지내면서 군대의 근대화를 강력하게 주장,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하고 군령권이 황제에게 직속되도록 만들었다. 1897년(광무 1년), 다시 영국ㆍ독일ㆍ프랑스ㆍ러시아ㆍ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 6개국의 특명전권공사로 발령을 받았다. 유럽에 체류하면서 특명전권공사의 자격으로 영국 빅토리아 여왕(1897년)의 즉위 60주년 기념식(다이아몬드 희년)에도 참석한 바 있다. 이때의 기록을 ≪사구속초(使歐續草)≫로 남겼다.

이후에도 탁지부 대신, 표훈원(表勳院) 총재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민영환은 당시로서는 해외 경험이 풍부한 사람었으므로, 개화 정책을 실천하고자 유럽 열강의 제도를 모방하여 정치 제도를 개혁하고 민권을 신장시킬 것을 지속적으로 고종에게 상소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전제군주정을 지향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상소는 거부되고 군사개혁안만이 받아들여졌다. 당시의 대한제국의 상황상, 기초적인 제도 기반도 없이 표면적인 모방만을 추구했던 군사개혁은 지나치게 무리한 시도였다.

이후 독립협회를 후원하여 '독립ㆍ자강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민권의 신장과 의회의 설치 등 정치 개혁 여론을 선도하려 했다. 군부대신 겸 내무대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개혁파를 옹호하고 중추원(中樞院)을 의회로 개편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당시의 어용단체인 황국협회(皇國協會)로부터 "독립당을 옹호하여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하려 한다." 라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였기도 했다. 의회제도의 도입은 좌절되었다.

5 러시아로 일본을 견제하다

그는 기본적으로 일본을 신뢰하지 않았고, '가까운 나라인 일본과 친하게 지내면 이들의 침략을 막기 어려우니, 멀리 있는 러시아의 힘을 빌어 일본을 견제해야 한다'[10] 라고 생각했다. 온건 친러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며, 갑오개혁으로 친일파 관료 세력이 대두한 이후에도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 친일파 대신 및 일진회 회원들과 대립했다. 이완용은 초기에는 민영환과 같은 친러파였지만 이후에 친미파, 다시 친일파로 갈아탔다. 그만큼 시세를 읽는 능력은 뛰어났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뒤 다시 의정부 참정대신(參政大臣), 탁지부대신을 거쳐, 그의 건의에 의하여 설치된 원수부의 회계국 총장, 표훈원 총재, 헌병사령관을 역임하였고, 육군 부장(현재의 중장에 상당)에 오르고, 훈일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 대훈위이화장(大勳位李花章)을 수여받았다. 참정대신은 의정대신의 다음 직위로, 내각의 좌의정, 지금의 부총리 급에 해당한다. 조병세가 의정대신을 맡았으나 사직을 했으므로 사실상 국무총리, 국무총리 대리에 가까웠다. 이 직위는 나중에 한규설에게 가고, 한규설이 을사조약에 분노해 사임하자 일제가 이완용을 앉혔다. 실질적인 총리 위치로 보아도 무방하다.

러일전쟁을 전후해 참정대신, 외무대신, 내부대신과 학부대신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날로 심해지는 일본의 내정간섭에 항거하여 일본을 비난하며 친일내각과 대립했기 때문에 친일 대신들의 공적(公敵)이 되었다. 결국 한직인 시종무관장으로 좌천당하였으며, 순국할 때까지 시종무관으로 있었다.

6 을사조약과 자결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체결이 되자 전 의정대신(議政大臣; 영의정에 해당)인 조병세를 대표로 조약을 반대하는 신하들을 규합해, 이를 철회하고 을사오적 등의 조약 찬성파 신하를 처벌하라는 공동 상소를 올렸으나 일본 헌병대에 의해 조병세가 체포되고 입궐이 거부되는 소동이 있었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자신이 대표가 되어 상소하려 했으나 이번에도 일본의 헌병대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하고 평리원((平理院; 법원)에서 왕명 거역죄로 견책까지 당하게 된다. 그는 이에 분노해 귀가 후 자신의 명함 앞뒷면에 유서를 남기고 칼로 자신의 목을 베어 자결하였다.[11] 사망일은 1905년 11월 30일로, 향년 45세(만 44세 3개월)이다.

그가 남긴 유서는 전부 3통으로, 백성들에게 보낸 것이 가장 유명하고, 대한제국에 주재하는 외국 외교 사절들에게 보낸 것과, 고종황제에게 올린 것이 따로 있다. 즉, 내용이 서로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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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이 자신의 명함 앞뒤에 쓴 유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嗚呼!國恥民辱乃至於此,我人民行將殄滅生存競争之中矣。夫要生者必死,期死者得生,諸公豈不諒?只泳煥徒以一死仰報皇恩,以謝我二千萬同胞兄弟。泳煥死而不死,期助諸君於九泉之下。幸我同胞兄弟千萬倍加奮勵,堅乃志氣,勉其學問,結心戮力,復我自由獨立,則死者當喜笑於冥冥之中矣。鳴呼,勿少失望!

訣告我
大韓帝國二千萬同胞。

(아아!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머지않아 생존 경쟁 중에 모두 다 죽어버리겠구나. 무릇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살아날 것인데, 여러분은 어찌 헤아리지 못하는가?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고, 우리 2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한다. 영환은 죽되 죽지 아니하고, 구천에서도 여러분을 도울 것을 약속한다.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들은 억천만 배 더욱 분발하여, 의지를 굳건히 하고, 학문에 힘쓰며, 마음과 힘을 합하여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는 마땅히 어두운 저승에서라도 기뻐 웃으리다. 아, 조금도 희망을 잃지 말라!
우리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작별하며 고하노라.)

7 순국 이후

그의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조병세를 비롯해 전참판 홍만식, 학부 주사 이상철 등 여러 사람이 뒤이어 자결하였다.

사망 직후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대신(議政大臣)으로 추증되었고, 대한제국의 최고 훈장인 대훈위금척대수장(大勳位金尺大綬章)이 추서되었으며, 충정공(忠正公)의 시호를 받았다. 고종이 사망한 뒤에는 고종의 종묘에 배향되었다. 광복 후에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묘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구성초등학교, 구성중학교·구성고등학교 사이에 있으며, 묘역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친필로 쓴 묘비가 남아있다.

7.1 혈죽

그의 자결 1년 후인 1906년, 그의 자택, 자결했던 방의 마룻바닥에서 대나무가 돋아났다. 실내에서 대나무가 자라는 것이 무척 드문 일이라 사람들은 이를 그의 피가 대나무가 된 혈죽(血竹)이라고 일컬었는데, 일제는 이것을 조작으로 의심하고 조사 후 뽑아버렸으나미망인이 뽑힌 혈죽을 수습해서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흠좀무 한건 대나무 잎의 개수가 45개로 순국 당시의 나이와 정확히 일치했다는 점이다. 이 이야기는 KBS 스펀지 209회에서도 소개되었다.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48화 방송분에도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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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촬영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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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보관되고 있는 혈죽. 민영환의 후손들이 보관하다 현재는 고려대박물관에서 보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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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서의 화원이었던 석연 양기훈이 당시에 그린 혈죽도. 현재 고려대박물관 소장.

8 애국자인가, 탐관오리인가?

흔히 을사조약에 항거해 자결한 우국지사, 순국자로서의 이미지만이 강하게 남아있지만, 젊은 시절에는 명성황후를 등에 업은 민씨 척족 출신으로서 행실이 방자하다고 욕도 많이 먹었고, 매관매직이나 부정부패에 연루되었던 의혹도 남아 있어서 마냥 좋게 평가하기에는 애매한 점이 많다. 특히 위에 적혀 있듯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군에서는 민영환을 조선의 3대 탐관오리 중 한 명으로 꼽았을 정도였다. 따라서 실제 행적에 비해 마지막 행적만을 가지고 지나치게 미화되었다는 견해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에 반박하는 견해도 있는데, 그가 젊은 시절에 여흥 민씨 척족 중 한 명이었던 것은 맞지만 그가 민씨 세도(勢道) 기간 중 그가 직접 저지른 과오라고 할만한 점을 지적하기가 어렵고, 전봉준 등 동학 세력이 민영환을 매관매직을 일삼은 부정부패의 우두머리로 지목한 것 또한 그가 민씨 척족의 대표로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지목된 것에 가깝다고 본다. 그리고 민씨 척족은 당시 수구 세력의 대표격으로 알려져 있었던 반면, 민영환이 보여준 행보는 그와는 거리가 먼 개화파적인 면모가 두드러지는 것도 사실이다.

당시의 인식과 현대에 와서 밝혀진 사실이 다른 아주 좋은 사례이다. 애초에 민씨 일족은 부정부패가 심했느냐 아니냐를 떠나서 상황에 대한 인식을 보면 온건 개화파이지 최익현 류의 개화 반대파가 아니다. 이들이 수구파로 알려진 것은 급진개화파가 자신들과의 개화의 속도 차이로 상대를 수구당으로 싸잡아 분류해버렸기 때문이었다. 민씨 일족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개판이 된 것도, 당시의 사회ㆍ문화적 환경에도 어느 정도는 원인이 있다. 전근대적인 인식에서 나라가 어지러운 것은 중앙 정치의 책임인데, 임금에게 책임을 직접 물을 수는 없기 때문에 임금 주위의 정치 세력에게 책임을 돌리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 멸망의 책임을 전적으로 고종이나 민씨 세력에만 묻는 것이 이해하기도 쉽고 마음 편하지만, 못보고 지나치는 것들이 분명히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동시대에 쓰여진 역사 자료라 할지라도 철저한 사료비판을 거친 현재의 연구 성과를 통해 살피는 것이 객관적 이해를 위한 길이다. 물론 당시 고종이나 대원군은 대놓고 매관매직으로 자금을 마련했고, 민씨건 종친이건 조씨건 벼슬 좀 하는 이들 중 수탈을 일삼던 관리가 차고 넘쳤던 것도 사실이니,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평가가 '상당부분 책임이 있다'는 평가로 바뀌는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은, 비록 젊은 시절에 과오가 있었다 하더라도, 외국을 순방하고 돌아온 이후에는 국제 정세를 깨달아 개화파가 된 점, 고종에게 여러 가지 정치 개혁안과 근대화를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던 점, 친일 단체로 변질되기 전인 초기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후원하고 민권 신장에 찬동하였던 점 등은 그의 공적이라고 본다. 젊었을 때의 과오와 나이가 든 다음의 공적을 나누어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젊었을 때는 지체 높으신 집안 출신 젊은이로 방약무인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정신을 차려 개화파 우국지사다운 면모를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세계 유람 전과 후의 민영환이 보여준 행보는 매우 다르다. 조지훈의 '지조론'에서도 초년보다 후반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로 민영환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한일병합 때 자결한 황현은 평소에 남에 대한 평가가 아주 매서워서 '매천의 붓 아래 온전한 사람이 없다(梅泉筆下無完人; 매천필하무완인)'란 평을 들었는데, 그의 저서 <매천야록>에서는 민영환과 이용익 등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도 비난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기록만으로는 이를 사실로 입증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에, 민영환의 인물을 평가할 때에는 이러한 사료 부족 문제를 고려해서라도 젊은 시절보다는 나이든 이후의 삶에 초점을 맞춰 판단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아울러, 당시 중앙 정계의 실세 중에서 국가를 망국의 길로 이끈 책임을 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황제와 백성에게 사죄한 인물은 그가 거의 유일했다는 점 또한 고려할 필요가 있다.

9 그외

그가 세상을 떠난 곳은 현재 종로구 공평동 하나투어빌딩(옛 한미빌딩/한미은행 본점)이 있는 자리다. 바로 옆의 태화빌딩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14년 후에 있었던 3.1운동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모였던 태화관 자리다.

이 문서의 유서내용은 교학사 교과서에 인용 되기도 하였다.

새비지 A. 랜도어가 쓴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12]에 보면 민영환과의 통교와 랜도어가 그린 초상화가 나온다. 여기에서의 묘사에 의하면 '장군'으로 칭해지며[13] 외국 문물에 관심을 가지는 호방하고 개방적인 성격이지만 서양화의 원근법을 이해하지 못해서 "왜 옆모습이 안 나오는 거요?"라고 투덜대는(...) 장면도 있다. 랜도어는 결국 민영환의 측면 초상화를 따로 그려주었는데, 이를 위해 닭 우는 꼭두새벽부터 관복을 갖춰 입고 찾아왔다는 증언이 남아있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는 도로충정로는 민영환의 시호인 '충정(忠正)'에서 따왔다. 충정로역도 충정로에서 따온 것.[14]

흑역사가 하나 있는데, 훗날에 대립하게 되는 친일파 송병준이 김옥균을 만난죄로 투옥되었을 때, 석방을 주선해준 흑역사가 있다...

자결 당시 배에 칼을 꽂았으나 바로 죽지 못하고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가[15] 몇시간이나 지난 후에야 도움을 받아 목에 상처를 내고 죽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시대에는 왕에게 끝까지 간언하여 사약을 받는 정치적 자결이 주였지 이런 식의 할복은 존재하지 않았으니 어떻게 해야 사람이 죽는지 정확한 방법을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1. 출처: 대한제국멸망사, 호머 헐버트
  2. 순종의 아내. 황태자비.
  3. 민진후, 민진원의 배다른 동생이다.
  4. 흥선 대원군의 아내
  5. 글 제일 첫머리에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민태호'라고 적혀있다.
  6. 실제로는 민태호(閔台鎬)는 민영린(閔泳璘)을 양자로 들였다.
  7. 나중에 '민영휘'로 개명한다. 휘문고등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며, 갖은 악랄한 방법으로 재산을 긁어모아 거부가 되었다.
  8. 엔하위키 미러가 아직 운영중이던 2013년의 일이다. [유머 교학사 국사 교과서 클라스]
  9.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1850년부터 공사를 시작해서, 1897년 부분개통하였고 모스크바~블라디보스토크 전구간 개통은 1904년의 일이다. 철도 개통 이후 만주지역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증가할 것이라는 일본의 우려도 1905년 발발한 러일전쟁의 이유 중 하나이다.
  10. 이이제이, 원교근공(遠交近攻) : 삼십육계 중 제23계. 먼나라와는 동맹을 맺고, 가까운 나라는 공격한다.
  11. 처음에는 작은 칼로 복부를 찔렀으나 칼이 작아 깊이 들어가지 않자 다시 목을 베었다고 한다.
  12. 원문이 Korea이기 때문에 이 부분이 '한국'으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가장 큰 원흉(?)은 시사영어사의 창립자 민영빈. 그가 펴내는 영어 교과서마다 반드시 한국의 전통문화 관련 파트를 꼭 넣도록 했기 때문에 이후에도 다른 영어 관련 책에서 이 책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13. 정확히는 병조판서였다.
  14. 민영환 묘역이 있는 용인시 구성읍내의 도로도 도로명주소 개편 직후에 '충정로로' 명명했으나, 서울 충정로와 혼동의 소지가 있어 도로명을 '구성로'로 변경했다.
  15. 물론 상황이 비슷한거지 그냥 병신짓이었던 미시마 유키오와 그래도 나라를 생각한 죽음이었던 민영환의 비교는 불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