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哲鏞
1 개요
2 생애
1946년생. 제주도 출신으로 오현고를 졸업한 뒤 1966년 육군사관학교 26기로 입학해 1970년에 임관했다. 동기로는 신일순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이상희 국방장관 등이 있다. 병과는 통신으로 5679부대(대북감청부대) 등 국군정보사령부에서 주로 근무했다. 국가정보원장 군사보좌관, 8사단장 등을 지냈다.
하마터면 대위로 전역할 뻔 했다. 당시에는 소령을 6-7년이면 달았는데 1976년, 1977년 소령진급심사에서 연거푸 떨어졌다. 이복형이 재일교포였는데 1950년대 말에 만경봉호를 타고 재일교포 북송으로 북한에 갔다. 그때문에 연좌제로 진급에 불이익을 받았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진급청원편지를 써서 간신히 진급에 성공했다.
1994년 12월에 결혼했다. 아내는 10살 연하인 추순삼 대령(여군 27기)[1] 준장(진) 상태에서 결혼식을 올려서 총각장군은 아니었다. 총각장군은 2013년에 정우교 준장이 타이틀을 쥐게 된다.
2002년에 5679부대장으로 재직 중에 연평해전 직전 북한 경비정의 도발을 상급부대에 보고하였는데, 최종적으로 단순침범으로 보고되었다. 이후 연평해전이 발발하였다. 그후 국정감사가 열리자 일일정보 보고서[2]를 흔들며 기무사가 5679부대를 표적수사했다고 주장했고 국방장관인 김동신이 북의 도발징후를 묵살했다는 주장을 했다. 이 일로 정직 1개월을 당했고 현역복무 부적격 심사를 받게 되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국군기무사령부가 5679부대를 조사한 것 때문에 말이 많았다. 군내 3대 정보기관이 같은 정보기관을 처음으로 감사를 맡게 한 것 때문이다. 그후 2002년 10월에 정직 처분을 받은 채 불명예 전역했으나 2005년 항소심에서 승리해 정직 조치는 사라졌다. 재판부는 경비정 도발을 단순침범으로 보고한 것은 정보본부의 분석 실수이지 한소장의 책임은 아니라고 봤다.
2010년에는 육사 1기수 선배인 남재준 장군과 갈등을 빚었다. 한소장이 회고록을 펴내면서 실명을 적시하진 않았지만 연평해전 당시 한미간 정보공유 문제 등을 놓고 당시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을 비판한 것. 당시 부사령관이 남재준 대장이었다. 그러자 남재준 대장은 한철용 소장에게 이메일을 보내 토론을 하다가 국방 고위직 출신들끼리 설화가 일어나선 안 된다고 중단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