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판 메이헤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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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 van Meegeren
1889년 10월 10일 ~ 1947년 12월 30일

1 개요

네덜란드의 유명한 위작 작가. 얀 페르메이르(=얀 베르메르)[1]의 위작을 가장 많이 그린 인물로 본명은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Henricus Antonius van Meegeren)으로 이름 한은 헨리퀴스의 약칭이다. 외래어 표기법이 바뀌면서 공식적인 자료에는 판 메이헤런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사람들 사이에서는 반 메헤렌이란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2 개인사

어릴 때부터 미술 쪽으로 진로를 개척하고 싶어했으나,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 & 건축학 공부 강요 크리가 터졌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해당 분야로 공부할 수밖에 없었고, 대학 역시 델프트 공과대학교의 건축공학 쪽으로 진학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학 진학하기 이전에 다녔던 학교에서 화가였던 바르튀스 코르텔링(Bartus Korteling)을 멘토삼아 종종 의견을 나누면서 미술가의 꿈을 꾸고 있었고, 이 시기에 얀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소개받아 큰 감명을 받았다. 어쨌든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진학한 것이었기에 판 메이헤런은 곧 건축학 공부를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판 메이헤런이 화가로 활동하던 시절의 미술계는 인상주의 사조가 주류였는데 공교롭게도 판 메이헤런은 고전화가들의 화풍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 영향으로 비평가들은 주류에서 벗어난 작품에 그닥 호의적인 평가를 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고전화풍이나 흉내낼 줄 아는 구닥다리 화가라는 식으로 혹평을 가하는 비평가들도 있었는데 결국 계속되는 혹평에 시달린 판 메이헤런은 결국 비평가들을 엿먹이기로 작정했다. 당시 고전화풍이 찬밥신세라고 해도 만약 네덜란드 황금기의 유명화가가 그린 작품이라면 비평가들이 부왘하면서 찬사를 늘어놓았는데, 이런 점을 노려 얀 페르메이르의 위작을 만들어 비평가들에게 보여주어 온갖 찬사를 하게 한 다음 "사실 내가 그린 주작이었다. 네놈들은 비평가라면서 안목이 그것밖에 안되냐?"이란 말을 하여 공개적인 망신을 주려하였다.

이에 근 4년간 페르메이르의 화풍을 완벽하게 흉내낼 수 있도록 연습하였으며, 17세기에 제작된 캔버스를 구하고 당시 스케치 방식을 그대로 모방하였으며, 페르메이르가 사용했다는 붓과 동일한 붓을 구하여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이 그림이 오래된 그림처럼 보일 수 있도록 페놀포름알데히드로 처리를 하였으며, 100도~120도 사이의 높은 온도에 구워낸 그림 위에 북을 굴려서 의도적으로 균열이 생기도록 하였다. 그리고 균열에는 검은 잉크를 흘려 채워넣는 형태로 17세기에 그린 그림처럼 보이게 만드는 방법을 고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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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936년 처음 완성한 작품이 『엠마우스에서의 만찬(The Supper at Emmaus)』이다. 그리고 판 메이헤런은 얀 페르메이르의 전문가로 이름높았던 브레디위스 박사를 찾아갔다. 세심한 기법이 들어간 위작이란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브레디위스는 이 작품이 페르메이르의 작품이라 감정하였고 여러 비평가들은 명작에 찬사를 늘어놓으면서 하악하악거렸으며, 예술 협회에서는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 이 그림을 사들였다. 더불어 어딘가에 묻혀 빛을 보지못할 뻔 했던 명작을 발견해낸 판 메이헤런의 명성 역시 올라갔다. 비평가들을 골탕먹이려고 시작했던 작업이 부와 명성을 가져다주자 여기에 맛들인 판 메이헤런은 이제 돈을 위해서 위작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판 메이헤런은 1936년~1946년까지 페르메이르, 프란스 할스, 피터르 더호흐의 화풍을 흉내낸 위작 8편을 제작하여 공개하였으며, 그 때마다 사람들은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 판 메이헤런의 위작을 사들였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네덜란드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여 혼란스러운 상태이었고, 페르메이르의 경우 작품이 워낙 적다보니 이후로도 다른 사람의 작품을 오인하여 페르메이르의 작품으로 인정된 사례도 종종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페르메이르의 작품이 나온다고 해도 크게 의심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3 진짜같은 위작으로 괴링을 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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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이 끝날 무렵 연합군은 헤르만 괴링이 약탈한 것으로 추정되는 예술작품 중에서 페르메이르의 그림으로 추정되는 작품(『간음한 여인과 예수(Jesus with the Adultress)』)을 발견하였고, 그것이 판 메이헤런이 판매한 작품임이 밝혀졌다. 당시 나치청산에 열을 올리고 있던 네덜란드 사람들 입장에서는 판 메이헤런은 국보급 그림을 나치 독일에 팔아넘긴 천하의 개쌍놈이었으며 반역죄로 법정에 세워 처벌하려 하였다. 하지만 판 메이헤런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로 인해 재판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는데…

판 메이헤런 : 그거 사실 위작이었다. 내가 조작한 거였다.
검사 : 어디에다 대고 신성한 우리 법정에서 구라질이야?
판 메이헤런 : 못 믿겠으면 즉석에서 내가 그려주마. 어때?
검사 : 좋아. 한번 해봐라.

…결국 경찰 관계자들의 감시하에 3개월 동안 위작을 그리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고, 처음에는 저 사기꾼이 책임을 면피하려고 거짓말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서서히 정교한 위조작품이 나오는 걸 보고 혀를 내둘렀다. 이를 계기로 판 메이헤런은 전세계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으며, 네덜란드에서도 국보급 보물을 팔아넘긴 매국노에서 더러운 나치놈들을 골탕먹인 위대한 사기꾼으로 평가가 수정되었다. 이렇게 판 메이헤런이 위작을 그리는 기술이 있음을 보여주었으니 나머지는 판 메이헤런이 판 작품이 위작이란 사실을 증명하면 결백이 입증되는 것이었다. 다만 당대 미술전문가들과 비평가들은 주작질에 넘어갔다는 사실에 쪽팔려서 심사는 피하려 하였으나, 진위를 밝히기 위해 조사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어쩔 수 없이 심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17세기에는 사용되지 않았던 방법이 확인되어 판 메이헤런의 작품은 모두 정교한 위작으로 판명나게 되었다. 결국 판 메이헤런은 미술품 위조 혐의에 대하여 유죄를 인정받게 되었고 1년형을 선고받았지만 건강문제로 인해 수감되지는 않았고, 1947년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이 양반이 죽고 난 이후로도 계속 논란이 불거져 얀 페르메이르 및 동시기 화가들의 작품과 판 메이헤런의 위작에 대한 조사가 여러차례 있었으며 아직까지는 1946년의 결론을 뒤엎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방사능을 이용한 조사에서도 시대적으로 위작임이 인정됐다.

여담으로 괴링에게 미술품을 넘기고 받은 돈은 위조지폐였다. 서로 속고 속았다[2] 더불어 위작 작가라서 위작만 그린 사람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오리지널 작품도 남아있다. 게다가 워낙 유명세를 탔던 인물인 까닭에 판 메이헤런의 작품도 제법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고 한다.

4 판메이헤런의 진실?

그러나 최근 학자들과 미술 전문가들의 연구결과는 판메이헤런이 나치를 골탕먹인 위대한 사기꾼이 아니라 그저 돈이 필요했던 하찮은 인간 쓰레기 사기꾼일 뿐이었다는 결론이 나오고 있다.

애당초 판메이헤런이 재능을 인정받지 못한 화가라는 말 자체가 거짓말이었다고 한다. 판메이헤런은 오히려 인상주의 등의 현대 화풍에 대한 반동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고풍적 화풍의 화가로서 인기가 있었던 상황이었다고.

그러나 판메이헤런은 1930년대 이후로 매너리즘에 빠지면서 창작 의욕이 꺾였고 작품도 잘 안 팔리면서 이전처럼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해 위작에 손을 대게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나치즘에 빠져서 비교적 진보적 성향이던 미술계와 불화하게 된 것도 한 요인이었다고 한다.

학자들중에는 괴링이 위조지폐를 지불한 이유는 판메이헤런의 작품이 가짜인 걸 알아서였다고 추측하는 경우도 있지만 괴링이 진짜를 잘 약탈한 것만큼이나 가짜에 잘 속기도 해서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고.그냥 자기 돈 나가는 게 아까웠나

결국 전범으로 체포된 판메이헤런은 미국 기자에게 자기가 재능을 인정받지 못했고 평론가들을 골탕먹이기 위해 위작을 만들었으며 나치를 골탕먹였다는 식으로 허풍을 떤것을 미국 기자가 그대로 믿어버려서 그대로 미국 신문에 실었고 이 때문에 판메이헤런은 나치를 골탕먹인 위대한 사기꾼으로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1. 유명한 작품으로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가 있다.
  2. 이를 두고 앗! 시리즈의 '미술이 수리수리'라는 책에서는 "가짜 그림을 팔고 받은 가짜 돈을 가짜 은행에 가짜 저금을 하면 되겠다"라는 드립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