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1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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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표준영정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명국환의 <떠나가는 김삿갓>(작사 김문응, 작곡 전오승)의 유명한 첫 대목 #||

신선의 목소리 무아의 경지로다 천재로다 천재로다 김삿갓 김삿갓

홍서범의 <김삿갓> 중에서||

1.1 개요

김삿갓...이요?
조선 후기의 시인으로 본명은 김병연(金炳淵). 자는 난고(蘭皐). 별호는 김립(金笠)이다. 사실은 홍서범이라고 한다[1] 김삿갓이란 이름은 그가 인생의 대부분을 삿갓을 쓰고 다니며 방랑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807년(순조 7년) 음력 3월 13일(양력 4월 22일) ~ 1863년(철종 13년 - 철종이 사망한 해이기도 하다). 어쩌면 김조순과 강화도령 철종보다도 유명한 세도정치기 최고 네임드.[2] 한가지 특이한건 안동 김씨, 그 중에서도 성골노론 장동 김씨 일가였다. 그것도 세도정치기에![3]

1.2 유년 시절

김삿갓이란 이름은 그가 떠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이름을 물을 때, "김립(金笠)", 바로 말해 김삿갓이라 대답한 것에서 유래.

김병연이 '김삿갓'으로 된 직접적 원인은 그의 조부였던 무신 김익순(1764 ~ 1812)에게 있다. 그가 고작 대여섯 살이던 1811년 신미년부터 다음해 임신년 봄까지 일어난 홍경래의 난 때, 김삿갓의 '할아버지'인 당시 선천 부사 5품 관료인 김익순이 홍경래에게 붙잡힌다. 그는 홍경래에게 구걸하며 항복해 가족들은 모두 목숨은 부지하였으나 홍경래의 세력은 패하였고. 김삿갓의 삶은 이런 파란만장한 배경에서 전개된다.

실록을 살펴보면 그 과정이 복잡하다.

평안 병사가 아뢰기를,

곽산(郭山)에서 출전했던 장령(將領)이 보고하기를,‘15일 이른 아침 곽산에서 출발하여 신시(申時)에 선천부(宣川府)에 이르렀더니, 모여 있던 적도들은 관군이 이르렀다는 것을 듣고서 이미 모두 무너져 흩어졌고 고을 아래 사는 백성들은 안정되어 동요하지 않았기에 대군(大軍)이 우선 잠시 본부(本府)에 머무르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 의주 부윤(義州府尹) 조흥진(趙興鎭)의 첩보(諜報)를 받아 보았더니,‘본부(本府)의 영병장(領兵將) 허항(許沆)과 김견신(金見臣) 등이 서림성(西林城)에서 철산(鐵山)으로 진병(進兵)하였더니, 1대(隊)의 적도들이 소문을 듣고 흩어졌으며, 운암성(雲暗城)에 모여 있던 적들은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허물어졌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계속 진에 머물고 있는 장령(將領)들의 보고를 받아 보았더니,‘선천(宣川)의 전 부사(府使) 김익순(金益淳)이 적괴(賊魁) 김창시(金昌始)의 수급(首級)을 가지고 진의 앞에 왔으므로, 순무 중군(巡撫中軍)이 잡아들여 공초(供招)를 받은 뒤 칼을 씌워 영문(營門)으로 압송하였습니다(후략)


《순조실록》 15권, 12년(1812 임신 / 청 가경(嘉慶) 17년) 1월 17일(신묘) 4번째기사

이 기사를 본다면 김익순이 홍경래의 참모 김창시의 목을 잘라서 왔기 때문에 비록 항복한 죄는 크지만 어느 정도 용서받을 수 있고 막장테크를 타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전략)“적병이 처음 일어났을 때 방어하는 계책을 본받지 않은 채 흉적의 선봉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항서(降書)를 보냈고, 군관(軍官)의 가짜 첩문을 태연히 받았으며, 인과(印顆)와 부신(符信)을 명령대로 싸보냈습니다. 그리고 날뛰는 마음을 품고 만나기를 청하여 공손히 문안 인사를 나누고, 대청에 올라가 술잔을 주고받았으며, 말미를 받고 돈과 쌀을 받았으니, 나라를 배신하고 적을 따르는 일을 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또 죽음을 면할 계책을 내어 적의 수급(首級)을 사서 수기(手記)를 꾸며 주었으니, 흉악하고 패려한 뱃속이 남김없이 드러났습니다. 모반 대역임을 지만(遲晩)합니다.”

하였으므로, 정법(正法)하였다.


《순조실록》15권, 12년(1812 임신 / 청 가경(嘉慶) 17년) 3월 9일(신사) 1번째기사||

여기에 보면 스스로 투항해서 홍경래가 준 벼슬을 받은 것 뿐 아니라 수급을 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전말이 이러하니

평안 병사가 대역 부도 죄인(大逆不道罪人) 조문형(趙文亨)을 효수하였다고 아뢰었다. 조문형이 애초 적도가 김창시(金昌始)의 수급(首級)을 베어오자 죄인 김익순(金益淳)이 천금(千金)을 주겠다는 수기(手記)로 그 수급을 억지로 팔게 하고는 와서 바쳤는데, 도의 조사에서 그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다.

《순조실록》15권, 12년(1812 임신 / 청 가경(嘉慶) 17년) 3월 19일(신묘) 1번째기사||

다시 말해 항복한 것 때문에 처벌 받을 것이 두려워 수령의 목을 잘라온 것을 돈을 주고 사서 자기가 자른 것으로 속였으니, 그야말로 기군망상(欺君罔上)[4]의 막장테크다.[5] 당시 기준으로는 임금을 속이면 곱게 죽여주는 것(사약)이 은사가 될 지경이니 본인이 처벌받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손까지 벌을 받는게 당연한 일이다. 가문 전체가 노비로 전락하는 건 면하겠지만 16세 이상 남성들은 사형당하거나 아예 신분 자체가 격하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가문이 가문인 데다 적극적으로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게 고려되어 동정론이 대두. 조정은 김익순만 왕을 속인 죄로 처형하고 나머지 가족들은 벼슬길만 막는 선에서 끝냈다.

조부의 죄는 그 대로 끝났지만, 그의 아버지 김안근은 수치심에 의해 다음해 고작 서른 아홉에 화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래도 홀 어머니(함평 이씨) 아래서 자란 김삿갓은 몰락하였어도 양반집 자제였고, 그것도 그 유명한 안동 김씨, 그 가운데도 성골급인 장동 김씨 일족이다. 이 점 덕분에 멸문지화의 위기에 몰렸음에도 조부 김익순이 처형된 걸로 일가의 몰살은 면한 것이다. 덕분에 머리만큼은 꽤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1.3 왜 삿갓을 '썼을까'?

야사에 따르면 그가 나이를 먹어 16세가 되었을 때, 과거를 본 적이 있다고 하며 이 이야기는 맹꽁이 서당 8권에도 소개되었다.

해당 과거는 중앙에서 임금이 주재하는 대과가 아니라 거주하는 지역의 지방관이 주재하는 "향시"로 대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봐야 할 시험이었다. 문제는 하필이면 그 날의 시제가 김익순을 논박하라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자신의 할아버지인 김익순의 잘못을 신랄하게 깠다이리저리 적어 제출하였다. 그 때 썼다는 시에 따르면 "선대왕이 보고 계시니 넌 구천에도 못가며, 한번 죽음은 가볍고 만번죽어 마땅하리라. 네 치욕은 우리 동국 역사에 길이 남아 웃음거리로 남을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하여간 글솜씨는 있어서 급제 해서 즐겁게 돌아와서 자랑하다가 그 이야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은 어머니에게서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되는데… 하필이면 그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였고 자신은 그것도 모른 채 할아버지를 신랄하게 까는 답안을 적어내려갔던 것이다. 이에 큰 충격을 받아 4년간 집에서 폐인처럼 지내다가 20살 되던 해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폐인처럼 있던 시기에 결혼했는데 아내가 절세미인이라 소문이 자자했던지라 이것도 조용히 방구석에서 지내려던 김삿갓에게는 여간 스트레스가 미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다른 기록에는 김삿갓은 이미 자신의 조부가 반역으로 처형된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일단 과거시험을 보려면 증조부부터 자신까지의 친가 3대+외조부까지 조상 4대의 이름을 답안지에 모두 적어야 한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과연 김삿갓이 조부가 누군지 몰랐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는 한다. 뭐 저 김익순이라는 사람을 그냥 자기 조부랑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기는 하지만…

다만 강효석(姜斅錫)이 정리한 야사집인 "대동기문"에 실린 정확한 내용은 "사실 김삿갓이 썼다고 알려진 시는 노진이란 자가 지은 김삿갓 조부 디스시"로, 이 이야기가 언제부터 영월 과거장에서 김삿갓이 직접 쓴 시로 와전되었다는 것이 정설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평안도에 시 짓는데 이름을 날리던 노진이란 선비가 살고 있었는데, 김삿갓과는 거의 라이벌에 가까운 관계에 있었으나 실력은 노진이 약간 그에 못미쳤다고 한다. 그는 평소 김삿갓이 역적의 손자인 주제에 근신하지 않고 천하를 주유하며 술이나 퍼마시고 내키는 대로 시를 짓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떠돌아다니던 김삿갓이 오랜만에 평안도에 들어오자 김삿갓에게 망신을 줘서 쫓아낼 생각으로 조부의 허물을 끄집어내 시를 한 수 지었으니, 그 제목이 '김익순의 죄가 하늘까지 미쳤음을 꾸짖고 가산 군수 정시의 충절어린 죽음을 논하다(嘆金益淳罪通于天 論鄭嘉山忠節死/탄김익순죄통우천 논정가산충절사)'였다. 조선시절의 패드립 근데 패드립은 김삿갓이 먼저 시작했다는 게 함정

김삿갓은 술을 퍼마시고 대취한 상태에서 그 시를 또박또박 낭독한 뒤 '그 놈 시 한 번 잘 지었구나!'라고 말하고는 피를 토하면서 평안도를 떠났고, 그 후 일생동안 관서 땅은 단 한 치도 밟지 않았다고 한다.

또다른 설로는 어떻게 출세를 해보려고 같은 문중인 안동 김씨 세도가를 기웃거리거나, 자신의 신분을 시골 양반으로 속이고 양반모임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그만 자신의 신분이 들켜 양반들이 왕따를 시킨데다가 사촌이 과거를 봐서 합격했지만 김익순의 자손이란 이유로 취소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김삿갓이 "난 출세는 못하겠구나"라 생각하고 스스로 유랑생활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근데 상식적으로 보면 당시의 태세를 뻘드립으로 풍자하고 비판하던 김삿갓이 '반역자' 취급을 받은 할아버지가 있어서/혹은 그런 조부를 비난했다는 이유만으로 일평생 방랑만 했다는 것은 어딘가 이상하다. 사실 그가 늙으막까지라도 안동 김씨 세도가를 기웃거렸다면 철종 시절 안동김씨란 사실 하나만으로도 군수 정도는 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런 점을 종합해볼때 (물론 죄다 설이라 확실한건 알 수 없지만) 자의든 타의든 결국 김삿갓은 당시의 조선왕조와 안동 김씨의 행각에 회의를 품고 방랑생활을 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홍경래의 난도 사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원인 중 하나였고, 무엇보다 할아버지도 손자 낯 부끄러운 일을 많이 했던 터라.(...)[6]

1.4 왜 '삿갓'을 썼을까?

1번째 설론 22세까지는 그냥 이곳저곳 다니는 방랑생활을 하였으나, 어느 날부터 자신은 더 이상 하늘을 볼 낯짝이 없다는 이유로 몸 전체가 그늘지는 거대한 삿갓을 만들어 쓰고 다녔다고 한다. 이후 김병연은 김삿갓으로 불리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름보단 김삿갓(김립)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2번째 설은 당시 삿갓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중적인 패션 아이템(?)이었다는 것이다. 낚시하던 노인네가 주로 삿갓을 쓰고 낚시를 한다든가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김삿갓의 삿갓은 민중과 함께하려는 그의 의지가 담긴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7]. 그냥 햇빛(자외선)이랑 비바람 맞기 싫어서 쓴게 가장 실용적인 이유다.

다음은 위와 관련하여 김삿갓 본인이 쓴, 참고할 만한 시 한 편이다(편역본 출처: 양동식의 '길 위의 시').

나와 삿갓

내 삿갓은
정처 없는 빈 배

한 번 쓰고 보니
평생 함께 떠도네

목동이 걸치고
송아지 몰며

어부는 그저
갈매기와 노닐지만

취하면 걸어두고
꽃 구경

흥이 나면 벗어 들고
달 구경

속인들의 의관은
겉치레, 체면치레

비가 오나 바람 부나
내사 아무 걱정 없네

1.5 죽장에 삿갓쓰고 방랑 삼천리, 그리고 디스 시문

세상을 떠날 때 까지 그야말로 백두산을 제외한 조선팔도 이곳 저곳을 누볐으며, 때로는 한 곳에 머물며 훈장 노릇을 하여 후학을 기르고 숙식을 해결하였다. 그는 높은 문장으로 사대부들의 악덕과 사회에 존재하던 폐해 따위를 비판하여 듣는이의 동조를 이끌어내는 격조높은 노래와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들을 노래로 풀어내어 불렀기 때문에 그는 명망이 있었다한다.

김삿갓의 시의 특징은 뼈대가 있는 언어유희다. 개드립, 패드립, 섹드립, 고인드립이 넘쳐난다

  • 마음쓰는 폭이 좁은 친구의 파자를 풀어서 파자로 반박을 한 일화
김삿갓이 친구네 집에 놀러 갔는데

안주인이 "人良卜一(인량복일)하오리까?"하고 묻자 (다른 버전으로는 人良且八(인량차팔)이 있다.)
그 친구가 "月月山山(월월산산)하거든."하고 답했다.
그러자 김삿갓이 화를 내며
"丁口竹夭(정구죽요)로구나 이 亞心土白(아심토백)아."[8]

하고 가 버렸다.

이를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따라서, 아래와 같은 내용이 된다.

김삿갓이 친구네 집에 놀러 갔는데

안주인이 "식사 올리오리까?"하고 묻자
그 친구가 "저 친구가 가거든."하고 답했다.
그러자 김삿갓이 화를 내며
"가소롭구나나쁜 자식(혹은 돼지 새끼)아."
하고 가 버렸다.

위 시의 경우 人良卜一이 아니라 上人良이라고 써 있는 판본도 있다. 사실상 여러 판본을 통틀어 이본이 없는 것은 月月山山이 유일하다. 어떤 판본에서는 '정구죽천'을 김삿갓이 아니라 머슴이 외치기도 한다. 김삿갓이 밥을 얻어먹는 것을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도 판본마다 다르다. 한편, 이 이야기의 주인공 자체가 김삿갓이 아니라 임진왜란 후의 네임드 문관 둘이라는 판본도 있다. 어찌되었던 내용은 위에 설명한 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 사멱난관(혹은 사멱난운)
許多韻字何呼覓 많고 많은 운자에 하필 멱자를 부르는가?

彼覓有難況此覓 첫 번 멱자도 어려웠는데 이번 멱자는 어이 할까?
一夜宿寢懸於覓 오늘 하룻밤 자고 못자는 운수가 멱자에 걸리었는데
山村訓長但知覓 산촌의 훈장은 멱자 밖에 모르는가.

마음 씀씀이가 고약한 시골 훈장이 한 끼를 청하러 찾아온 김삿갓을 내쫓기 위해, 실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는 글자인 '찾을 멱(覓)'[10]자 네 개로 운을 떼어 시를 짓게 했을때 그가 지은 시이다. 김삿갓 이전에는 이 사멱난운을 통과한 사람이 전무했다고 한다. 잘 보면 멱이라는 글자의 뜻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한거라 멱이 아닌 다른 글자여도 되니 약간 치사한(?) 수이긴 하나 기발하긴 기발하다고 할 수 있다. 절묘하게 시골 훈장에게 한 방 먹이기도 했고.

  • 다음은 금강산에 가서 저녁에 한 사찰에 들렀을 때 절에 있던 선비와 중이 자기들끼리 비밀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며 김삿갓을 우습게 대하다가, 김삿갓의 말솜씨에 눌려 그 선비가 김삿갓을 내쫓기 위해 싯구로써 우위를 가리기프리스타일랩배틀를 청했다가 망신을 당한 일화다.
절에 있던 선비: 자, 내가 먼저 운을 띄울 테니 어디 한번 답해 보시오.

김삿갓: 좋습니다. 운을 띄워 보시오.
선비: 타!
김삿갓: 언문 풍월이오?
선비: 당연하지.
김삿갓: 그거야 간단합니다.
(속으로 "네놈이 날 우습게 보는 모양인데 어디 한번 맛 좀 봐라.")
선비: 그럼 해 보시오.
김삿갓: 사면 기둥 붉게 ! [11][12]
선비: 또 타!
김삿갓: 석양 행객 시장! [13]
선비: 또 타!
김삿갓: 네 절 인심 고약

운을 띄우자마자 바로 대답하는 김삿갓을 보고 선비와 중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게다가 가면 갈수록 듣기 거북한 말이 튀어 나오니 운을 더 띄울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김삿갓은 "지옥 가기 딱 좋"[14]라고 대답하기 위해 선비가 '타'라고 한 번 더 띄우기를 기다리고 있자 결국 선비가 GG쳤다.[15]

  • 어느 서당에서 걸음을 멈추었는데 제대로 대접도 해주지 않은채 야박하게 문전박대하니 분기탱천하여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시
書堂乃早知

房中皆尊物
生徒諸未十
先生來不謁

내 일찍이 서당인줄은 알았지만
방안에는 모두 귀한 분들일세
생도는 모두 열명도 못되고
선생은 와서 인사조차 않는구나.

해석만 보면 그냥 점잖게 까는 것 같지만, 이 문장의 음을 소리내어 읽으면...

서당내조지요,

방중존물이라.
생도제미이고.
선생내불알이라.

오늘날에 봐도 상당히 저속한 단어들을 사용하였는데, 당시 19세기 조선의 언어생활과 이 시를 쓴 김병연은 양반이었음을 생각해보면 그 때 김삿갓은 굉장히 화가 났었던 것 같다. 한국 최초의 펀치라인.

물론 민중들의 대사(예를 들면 봉산탈춤이라던지)에서 욕설이 난무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과격한 표현은 감정과 생각을 나타내는 수단으로써 그다지 드문 표현은 아니었지만, 이 시에서 파격적인 특징은 시를 지은 사람도 양반이고, 시에서 풍자하는 대상도 서당의 훈장이니 역시 양반이라는 것이다. 김삿갓이 평민이기만 했어도 멍석말이가 한판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일단 문학적으로는 양반임에도 민중의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더하여 이 시는 조선시대의 욕과 비속어에 대한 귀중한 자료이기도 한데, 오늘날도 그렇지만 욕이나 비속어가 기록된 기록물이 거의 없기 때문에 과거의 비속어에 대한 귀중한 자료다.

(김삿갓)

毛深內闊 모심내활

必過他人 필과타인
털이 깊고 속이 넓은 것을 보니
필시 딴 사람이 먼저 지나갔도다.[16]

(처녀)

溪邊楊柳不雨長 계변양류불우장

後園黃栗不蜂坼 후원황률불봉탁
개울가 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길게 자라고
뒷마당 알밤은 벌이 쏘지 않아도 벌어지네.

물은 사람이나 대답한 사람이나 아니 그전에 처녀것이 그렇게 생긴걸 어떻게 알았지

  • 김삿갓의 "연유삼장(嚥乳三章)"을 소개한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소재는 시아버지와 며느리.
1장 一章

父嚥其上 婦嚥其下 부연기상 부연기하
上下不同 其味則同 상하부동 기미즉동
시아비가 그 위를 삼키고, 며느리가 그 아래를 삼키니
위와 아래는 같지 않으나 그 맛은 같더라.

2장 二章
父嚥其二 婦嚥其一 부연기이 부연기일
一二不同 其味則同 일이부동 기미즉동|
시아비가 그 둘을 삼키고, 며느리가 그 하나를 삼키니
하나와 둘은 같지 않으나 그 맛은 같더라.

3장 三章
父嚥其甘 婦嚥其酸 부연기감 부연기산
甘酸不同 其味則同 감산부동 기미즉동
시아비가 그 단것을 삼키고, 며느리가 그 신 것을 삼키니
단것과 신것은 같지 않으나 그 맛은 같더라.

이런 미친;;;;

이런 시를 쓴 이유는 김삿갓이 떠돌아다닐 적에 하룻밤 신세를 지기위해 찾아간 집의 주인의 며느리가 유종을 앓아 젖을 빨아야 되기 때문에 재워 줄 수 없다하여 이 시를 읊어 놀렸다는 설과, 아비 父가 아니라 사내 夫를 써서 방랑 중 건달패들과 함께 놀다가 패거리들이 원하는 음담패설 시를 지어 웃겨주었다는 설이 있다. 사내들 중 하나가 아내가 유종을 알아 젖을 빨아줘야 한다는 걸 놀림받고 있던 걸 기억하고 지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69자세로 비틀었다.

  • 유명하지는 않지만, 함경도에서 어떤 부자들이 노니는 것을 보고 술 좀 달라고 했다가 되려 푸대접을 하니까 다음과 같은 시를 읊어서 부자들을 화나게 하기도 했다.
日出猿生原 일출원생원.

猫過鼠盡死 묘과서진사.
黃昏蚊簷至 황혼문첨지.
夜出蚤席射 야출조석사.

해 뜨자 원숭이가 마당에 나타나고
고양이가 지나가자 쥐가 다 죽네.
저녁이 되자 모기가 처마에 이르고
밤이 되자 벼룩이 자리에서 쏘아 대네.

역시나 언어유희가 잘 두드러지는 작품. 각각 성이 원생원 = 원숭이, 서진사 = , 문첨지 = 모기, 조석사 = 벼룩으로 치환된다는 언어유희를 이용한 것이다. 이 한시가 품은 뜻을 모를 리가 없는 부자들은 그 시를 읽고 화를 낼 수밖에 없었겠다. 근데 진짜 멍석말이 안 당했나?

  • 하룻밤 신세를 지기 위해 어느 절에 갔더니, 절에 있던 승려와 선비가 김삿갓의 초라한 행색만 보고 하대를 하고 푸대접을 하는 등 매우 고약하게 굴었다. 이에 지필묵을 갖다 달라고 하고 시를 썼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僧首團團汗馬囊 승수단단한마랑

儒頭尖尖坐狗腎 유두첨첨좌구신
聲令銅零銅鼎 성령동령영동령
目若黑椒落 白粥 목약흑초락 백죽

중의 둥근 머리는 땀이 찬 말의 불알이며
뾰족뾰족한 선비 머리통 상투는 앉은 자지로다.
목소리는 구리방울을 구리솥에 굴리듯 요란하고,
눈깔은 검은 후추알이 흰죽에 떨어진 듯 흉하구나.||

  • 개성에 가서 어느 집에 하룻밤 신세를 지려 했으나, 주인이 '집에 불을 피울 장작이 없다'는 핑계로 문을 닫으며 쫒아냈다. 그러자 김삿갓은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조롱했다.
邑名開城何閉城(읍명개성하폐성)

山名松岳豈無薪(산명송악기무신)

고을 이름은 개성인데 어찌 문을 닫아 걸며
산 이름은 송악인데 어찌 땔감이 없다 하느냐||

개성의 한자를 그대로 직역하면 성을 연다는 뜻이고, 개성의 진산인 송악산(松岳山)은 '소나무 산'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에서 따온 것. 그래도 쌍욕은 안한 걸로 봐서 그렇게 화가나진 않았나보다.

  • 가렴주구를 폭로한 시도 썼다.
宣化堂上宣火黨 선화당선화당.

樂民樓下落民淚 낙민루낙민루
咸鏡道民咸驚逃 함경도함경도.
趙岐泳家兆豈永 조기영조기영.

선화당에서 화적같은 정치를 행하고
낙민루아래에서 백성들이 눈물흘리네
함경도 백성들이 모두 놀라 달아나니
조기영이 가문이 어찌 오래 가리오?

당대 함경도 관찰사 조기영의 가렴주구를 폭로한 시로 선화당, 낙민루, 함경도, 조기영의 한자 훈을 바꿔서 기가막힌 시를 지었다.

  • 걸식 도중 쉰밥을 얻어먹고 분노하여 이런 시도 지었다.
二十樹下三十客 이십수하삼십객

四十村中五十食 사십촌중오십식
人間豈有七十事 인간기유칠십사
不如家歸三十食 불여가귀삼십식

스무 나무 아래에 서러운(서른) 나그네
망할(마흔) 놈의 마을에서 쉰 밥이네
사람 세상에 어찌 이런(일흔) 일이
집에 돌아가 설은(서른=설익은) 밥 먹느니만 못하구나

  • 또한 시 중에는 시(是)와 비(非) 단 두글자로 지은 시도 있다. 제목도 시시비비가(是是非非歌). 허황된 이론을 가지고 옳다 아니다 하며 탁상공론이나 일삼는 부류를 풍자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한다.
是是非非非是是

是非非是非非是
是非非是是非非
是是非非是是非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함도이 옳지 않으며,
그른 것을 옳다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 함이 옳지 않음이 아니다.
그른것을 옳다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 함이 이 그른 것이 아니며,
옳다는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함이 도리어 이 그른 것을 옳다 함이다.

  • 시가 아닌 말장난 중에도 이런 것도 있다. 어느 머슴이 헐레벌떡 뛰어가길래 김삿갓이 잡고 어딜 그리 급하게 가냐고 하니 사람이 죽어 부고를 쓰러 간다고 했다. 김삿갓이 자기가 글을 알고 있으니 써주겠다고 했는데, 쓴 것은 유유화화(柳柳花花)[17]. 글을 모르는 머슴은 고맙다고 하고 그것을 받아갔다. 그런데 국어로 그대로 직역하면 '버들버들꽃꽃', 그러니깐 버들버들 떨다가 꼿꼿해졌다,(...) 즉 죽었다는 뜻이 된다.

아무튼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10년 단위로 집에 들어와서 자신의 아들과 딸들을 보고 또 나가고 그런 모양이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아들이 그만 여행하고 집에 돌아오라는 편지를 수십통이나 배끼어 아버지가 갈만한 마을마다 이를 부탁하고 맡긴 모양이다. 그런 편지를 아무 탈 없이 받은걸 감안하면 그의 엄청난 명망이 짐작된다. 그리고 아들과 집안 사람들이 몇 번 귀향을 권하였으나, 그 때마다 심부름을 보내는 둥 따돌리고는 도망쳤단다. 그렇게 살다가 마흔 줄에 들어 떠돌아 다니는 생활이 힘에 부친다는 이유로 이유로 집에 틀어박히려고 왔는데, 가정의 일을 소홀히 하여 가족들로부터 냉대받는 것이 그를 바깥에서의 생활로 발길을 돌리게 하였다.

이쯤되면 조선의 투팍 인정합니다 김삿god a.k.a 갓삿갓 프리스타일 챔피언

1.6 방랑의 종지부

그는 외지인 전라도 동복현(현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18] [19])에서 그나마 거지 꼴이 아닌 잘 알던 이 집에서 누워 치료를 받다가 방랑의 종지부를 찍었으며 그가 마지막 남긴 말도 뭔가 가련한 느낌을 준다.

"안 초시,[20] 춥구려. 이제 잠을 자야겠으니 불을 꺼주시오…."

뒤에 '어머니가 보고싶소'라고 했다고 한다. 김삿갓의 어머니는 후에 친정으로 돌아가 말년을 보냈는데 어머니가 사시는 마을에서 소식만 묻고 바로 가는 일을 여러번 했다고 한다. 그리고 뒤늦게 부친의 별세 소식을 들은 아들이 직접 가서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데리고 왔다고 한다. 자신의 입장에서는 방랑생활이 몸에 배었을지 몰라도, 가족 입장에서는 훌륭한 가장은 아니었던 셈. 그냥 솔로로 살면 좋았을텐데

그래도 사후에는 워낙 유명해져서 임금도 알고 있을 정도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김삿갓 손자 되는 사람이 절에서 스님으로 있었는데, 그걸 알게 된 임금이 일부러 궁으로 불러서 김익순 죄를 사해주고 관직을 내려주었다. 사실인즉 가문의 힘으로 복권된게 아닌가 한다. 이미 고종 즉위 이후라서 세도정치는 이미 쫑난 상황이었기는 하지만 완전히 엎어진 것도 아니었고, 이유야 어떻건 두령의 목을 잘라왔으니 가문의 힘을 쓰면 복권이 가능하긴 했다. 또 당시에는 거지들이 김삿갓 흉내를 내면서 구걸하는 일도 잦았다고 한다. 덕분에 이삿갓, 윤삿갓 임삿갓 홍삿갓 하는 별의별 짝퉁들이 어설픈 흉내를 내고자 시도 썼으나 역시 짝퉁들이라 실력은 영 아니었다고 한다.(...)

1.7 평가

왠지 은거기인이나 도사틱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사실은 일생을 주유한 방랑자였다. 비슷한 인물로는 해학으로는 정지윤(=정수동)과 정만서, 실존 인물이 아닌 이로는 봉이 김선달, 시대가 겹치는 인물로는 고산자 김정호가 있다. 다만 실제 김정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도를 만든 사람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것.

1.8 문학과 대중매체에서의 김삿갓

성황당, 자유부인으로 유명한 정비석(1911~1991)이 소설 김삿갓을 쓴 바 있는데,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21] 그 밖에도 1980년대 후반, KBS에서 만든 교통안전 홍보 애니메이션(안전운전 365일)에서도 김삿갓이 나오기도 했다. 이 애니에서 김삿갓을 노인들이 "여보시오. 삿갓 양반."이라고 불렀다. MBC 드라마 <상도> 마지막 부분에 잠깐 나오기도 한다.

작가 이문열은 그의 일생을 <시인>으로 소설화시켰다. 이문열 최고의(혹은 마지막) 걸작으로, 작가의 주변 문단이나 문학적 생애를 집대성했다. 스핀오프 작으로 <도둑과 시인>이라는 작품도 있다. 현대문학상 수상작. 작중 초기 김삿갓은 언어유희의 달인이다. 다만 실지로 김삿갓의 작품사에서 이런 언어유희는 극히 일부이다. 그래서 다만 작가는 이런 시풍을 써낸 시기를 '세상에 대한 울분으로 자신의 재능을 낭비하는 시절'로 간주한다.

맹꽁이 서당에서 김삿갓을 한번 다룬적이 있던 윤승운 화백이 만화광장에 김삿갓 일대기를 연재했는데 성인대상 작품으로 의외로 수작이다. 단행본은 연재때문에 못다한 김삿갓의 후손들 이야기도 넣었는데, 손자는 일제 연간에 합방 은사금 수령도 거부한다. 불과 150~200년 전의 인물이기 때문에 김삿갓의 증손자가 1970년대까지 살았다고 한다.압권은 소주병이 가득한(!) 김삿갓의 묘 앞에서의 대사 "저는 만화를 그리는 윤가입니다" "옹야". 이 만화를 보면 왜정 때 일본인들도 김삿갓 무덤을 둘러보고 연구하던 사람도 있었던 걸 알 수 있다. 어린이 버전으로도 상당히 두껍고, 거기에 김삿갓의 시를 다룬 해설까지 있어 대단히 괜찮은 책이 있다. 이것만 보아도 웬만한 김삿갓의 야사나 시는 다 안다 싶을 수준의 수작.

KBS 제1라디오사회교육방송에서 1964년부터 2001년까지 방송했던 반공 라디오드라마 김삿갓 방랑기의 주인공 이름도 김삿갓이다. (해당 캐릭터는 성우 오정한(현재 이민), 故김현직, 구민, 탁원제, 김정호 등이 이 배역을 거쳐가기도 했다.)

멜랑꼴리를 그리는 천재적으로 재미없는 작가 비타민이 뜬금없이 그에 관한 일화를 종종 올리는 걸 볼 때,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것 같다.(…)

웹소설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주인공 이영의 절친한 친구로 등장한다. 헌데 이름은 김병연인데 거의 이름으론 불리지 않는다.라온에겐 나의 김 형 이영과 김윤성에겐 난고[22]라고만 불린다 후에 이자가 김삿갓으로 불리게 되는 과정이 역사와는 좀 다르게 그려지지만 쨌든 참 아련하기 짝이 없다.
2016년 KBS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등장한다. 여기서는 일단 본명으로 등장하지만 웹소설과는 달리 처음부터 엄청 큰 삿갓을 쓰고 다닌다. 별명은 삿갓을 쓸 때 제일 멋있어서 갓병연(...)

1.9 여담

프로토스의 사기성을 까는 시를 쓴 적이 있다고 한다#

이름의 특성 때문인지 국어나 문학 시간에 김삿갓에 관련된 것이 나오면 일부러 "김삿갓이" 이런 식으로 노려서 강조해서 읽는 사람도 있다. 만약 낄낄댄다면...뭔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원도 영월군에는 '김삿갓면'이라는 면이 있다. 오지라 피서목적의 팬션등이 많은데 어째 김삿갓이란 이름의 점포가 많다김삿갓팬션, 김삿갓마트 영월에는 자매품(?)으로 '한반도면'도 있다.

2 노래

1989년에 가수 홍서범이 부른 노래 제목. 당연히 항목1의 인물을 소재로 부른 곡으로 한국가요 역사상 최초의 랩송[23] 으로 알려져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1992)와 현진영의 '슬픈 마네킹'(1990)보다 앞선 랩송.

하지만 정작 가사 내용은 항목 1의 인물 소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서(...) 특별한 의의는 없다(?).

2.1 노랫말

김삿갓 김삿갓 김김 삿갓삿갓 김김 삿갓삿갓
김삿갓 김삿갓 김삿갓 김삿갓 삿갓삿갓 삿갓삿갓

1807년 개화기에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글공부를 좋아하여
열 살 전후에 사서삼경 독파 이십세 전에 장원급제했네
안동 김씨에 본명은 김병연 어머니를 모시고 아들 둘에 처 하나
중국의 이태백 일본의 바쇼 그렇다면 보여주자 대한민국 김삿갓

백일장 과거에서 조상을 욕한 죄로 하늘이 부끄러워 삿갓을 쓰고
이름도 버리고 가정도 버리고 욕심도 버리고 양반 또한 버렸네
그 후로 한평생 삿갓을 쓰고 삼천리 방방 떠돌아다니니
사람들은 그를 보고 김삿갓 김삿갓 삿갓이라 하네

김삿갓 김삿갓 나는 좋아 김삿갓
김삿갓 김삿갓 너무너무 좋아 김삿갓

삿갓 쓰고 죽장 짚어 바람 부는대로 구름처럼 떠돌며
착한 서민의 친구 되어 못된 양반 혼내 준 의리의 사나이
도인에는 도 시에는 시로 맞서 시 짓기 내기에 져 본 일이 없네
산첩첩 수중중 구경하고 동가식 서가숙 방랑하네

외롭고 고독한 방랑의 생활 술은 삿갓의 유일한 친구
한 잔 하면 시상이 떠올라 두 잔 하면 세상이 내 것이라
한 잔에 시 한 수 또 한 잔에 시 한 수 신선의 목소리 무아의 경지로다
천재로다 천재로다 김삿갓 김 삿갓
삿갓 삿갓 삿갓 삿갓

김삿갓 김삿갓 나는 좋아 김삿갓
김삿갓 김삿갓 너무너무 좋아 김삿갓
김삿갓 김삿갓 김김 삿갓삿갓 김김 삿갓삿갓
김삿갓 김삿갓 김삿갓 김삿갓 삿갓삿갓 삿갓삿갓

가사가 좀 고증에 안맞는 부분들이 있다.

  • 1807년 개화기에 태어나: 개화기라고 부르려면 강화도 조약 이후에나 되어야지 이 시점은 개화기가 아니라 조선 후기라고 해야 한다.
  • 20세 전에 장원급제했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것은 예전에 김삿갓이 과거에 장원급제했는데 알고보니 할아버지를 욕한 것이 되어버려서 충격먹고 삿갓쓰게 되었다라는 통설에서 나온거지만 현재 시점에서의 연구성과로 보면 김삿갓은 장원급제는 커녕 과거 급제도 한 적이 없다.

3 소주

1996년에 보해양조에서 내놓은 소주. 소주 위의 소주라는 광고 문구를 내걸고 '프리미엄 소주'를 표방하며 감미료로 을 집어넣고, 기존의 투명한 소주병이 아닌, 새카만 색의 전용 소주병을 사용하여 출시하였다. 당시 소비자 가격은 무려 1,400원. (출시기사). 의외로 인기를 끌자, 진로의 '참나무통맑은소주', 두산경월(현 롯데칠성음료)의 '청산리벽계수' 등이 발매되면서 프리미엄 소주 시장을 이끌었지만, IMF의 철퇴를 맞고 안드로메다로 떠났다. 근데 그래봤자 희석식 소주. OTL

4 별명

모치즈키 소카쿠의 별명. 그가 쓰고 있는 삿갓에서 유래했다. 주로 동네 오락실이나 문방구 게임기 등에서 이렇게 부르는 아이들이 좀 있었다.
  1. 홍서범이 김삿갓을 모티브로 한 김삿갓이라는 노래를 냈기 때문이다. 자세한건 후술
  2. 그의 사망년은 정확히 철종 훙(사망)년과 고종 즉위년과 일치한다.
  3. 정확히는 김조'순'과 김익'순'(덤으로 벽파였던 김달'순'도)이 항렬이 같은 18촌 집안으로, 김익순이 김조순보다 한 살 많다. 후술하겠지만 김익순의 가문은 무신 집안이었다.
  4. 임금을 속임.
  5. 따져보면 군인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반란군에 항복해서 협력하다가, 반란이 실패로 끝나자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서 전과를 조작한 것이다. 현대에도 이 정도면 엄청난 중범죄고, 그 가족들도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될 것이다.
  6. 애초부터 매관매직으로 선천부사직을 얻은 데다가 단순히 반역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조정에 처형당한 것이 아니라 홍경래의 부하 장수의 수급을 취해서 임금에게 바쳤는데, 문제는 자기가 목벤 게 아니고 다른 사람이 벤 것을 천 냥에 샀다. 깜박 잊었는지 목만 받고 입 싹 씻을려고 그랬는지 약속한 천 냥을 주지 않아서 그 사람이 사실을 임금에게 이야기해서 결국 기군망상죄+모반대역죄로 목이 날아갔다.
  7. 출처: 이응수의 '풍자시인 김삿갓'
  8. 다른 버전으로는 "丁口竹天(정구죽천)이구나 이 犬者禾重(견자화중)아!"가 있다.
  9. '~~할만하다'란 뜻이 되기도 한다. 사실 이 뜻으로 쓰이는 것이 '옳다'란 의미로 쓰이는 것과 거의 비등비등하다.
  10. 여담으로 서울 남산의 옛 이름인 '목멱산(木覓山)'의 '멱'자가 바로 이것.
  11. 혹은 '벌거타'(벌겋다)라고 표기된 판본도 있다.
  12. 사방이 온통 노을빛으로 물들어 붉게 보이는 것을 불타는 것에 비유한 말이다. 즉, 저녁때가 됐다는 뜻이다.
  13. 여기서 '석양 행객'은 자신을 가리킨다. 직역하면 '해 질 무렵에 길을 가는 나그네'의 뜻.
  14. 당시의 한글 표기법은 중철 표기법, 예를 들자면 '사람을'을 '사람믈'로 부르는 것과 같다. 사실 고등학교를 한국에서 나온 독자라면 국어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은 이상은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정확히는 고1 국어에 나온다.
  15. 판본에 따라선 스님만 등장하기도 한다.
  16.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에 그대로 패러디 된다.
  17. 버들 유, 버들 유에 꽃 화, 꽃 화
  18. 참고로 문중에 김삿갓이 남긴 시와 글이 있었지만 6·25를 거치는 중 훼손되어 폐기크리(...). 당시 국군의 명령에 따라 마을을 비웠는데, 마침 장마철이라 돌아왔을 무렵에는 김삿갓의 유물에 곰팡이가 피어서 썩어버렸다고 한다.
  19. 현재 동복에는 마을부흥 차원에서 김삿갓이 돌아갈때 머물던 집이나 기념비, 관련 공원 등이 존재하나 진짜 '복원'만 한 수준이라 볼 것이 거의 없지만 산책하는 기분으로 구경하려 가자.
  20. 자기 마지막을 돌보던 인물.
  21. 그래도 TV CM이 출판당시 전파를 타긴 했다. 지금이야 거의 없지만 80년대만 해도 유명하거나 저명한 작가가 쓴 소설들의 TV CM이 이따금 나오곤 했었다.
  22. 蘭皐. 실제 김병연의 자.
  23. 사실 서수남과 하청일의 '팔도유람'은 1971년작으로 그보다 18년이나 앞선 랩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