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형가가 진시황제를 찌르려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왼쪽의 덩치 큰 사람이 형가이고 오른쪽에서 두 번째의 도망가는 사람이 소매가 잘린 진시황이다. 오른쪽 밑에 데꿀멍하는넘어져 있는 사람은 형가를 수행한 부사 진무양. 당황해서 달려오는 호위병과 번오기의 목이 든 상자와 형가가 던진 칼이 기둥에 박혀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형가가 있는 왼쪽을 자세히 보면 형가가 양팔과 한쪽 발을 들고 있고, 칼을 던지는 형가를 말리기 위해 어떤 사람이 형가의 몸을 한 팔로 붙잡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荊軻
?~BC 227
중국 전국시대의 협객이자 유명한 자객. 진시황을 암살하기 위해 갔으나 실패한 일화로 유명하다. 그의 생애에 대해 잘 알려진 것은 없으나 사기 자객열전 이나 십팔사략에 그에 관련된 이야기가 남아 있다.
2 협객 시절
형가의 조상은 제나라 간신이었던 경봉(慶封)이었지만 태어난 곳은 위(衛, 지금의 하남성 부근. 과거 은나라가 있던 자리)나라였고 본인이 사는 곳은 연(燕)나라였다. 왜냐면 경봉이 주살된 후 후손들이 성을 바꾸고 여기저기 흩어졌기 때문이다. 본디 천하 제일의 검객이었지만[1]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유세가가 되려 당시 위나라 군주였던 원군(元君)에게 출사했으나, 외면당했다. 그 후 시전 바닥에서 개백정인 아무개[2] · 축(현악기의 일종)쟁이 고점리와 띵가띵가 놀며 소일하였다. 그러다가 감정이 복받치면 셋이 얼싸안고 울다가 웃다가 했다고 전하는데, 이 때 셋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주변에 신경쓰지 않고 행동했다고 한다. 여기서 나온 말이 바로 방약무인(傍若無人). 이는 원래 주변에 거리낌없는 당당한 행동을 뜻하는 말이었는데, 뒷날 의미가 바뀌어 제멋대로 날뛰는 것을 뜻하는 말로 바뀌었다. 이렇듯 분방한 생활을 했으나 그의 본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은 천하 제일의 석학 중 한 명인 전광(田光) 뿐이었다.(그런데 석학이라곤 했지만 이 사람도 그냥 평범한 시장터 노인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형가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당시 이미 진을 제외한 6국 중 3나라(조,위,한. 춘추시대 최강국 진나라의 후예들이라 하여 이른바 삼진三晉으로 불림)가 멸망한 상태였고, 조나라를 평정한 진나라는 제나라를 매수해놓은 상태에서 초나라와의 결전을 앞두고 연나라를 먼저 손보려 시기를 엿보고 있는 중이었다.
3 진왕 영정 암살 시도
이런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기 위해 전광 선생에게 연나라 태자 단(丹)이 찾아왔다.
태자 단은 진왕 영정과 어린 시절 아는 사이였으나 그만큼 그의 위험성을 더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국가의 멸망을 막기 위해 자객을 파견해 일거에 뒤집기를 하려는 단에게 전광이 추천한 사람이 바로 형가였다. 단이 암살 계획에 대해 절대 비밀로 해 줄 것을 당부하자, 전광은 형가에게 암살건에 대해 이야기한 뒤 '태자가 나를 믿지 않소,그러하니 비밀을 알고 있는 입 중 내 입은 영원히 닫혔다고 전해주시오' 라고 말하곤 망설임 없이 자기 목을 끊어버렸다.
형가는 태자 단에게 찾아와 명검인 상절(霜切)을 받고[3] 연나라의 곡창 지대인 독항 지방의 비밀 지도와 항장인 번오기(樊於期)의 목을 요구하였다. 번오기는 영정의 미움을 받아 연나라로 망명해 온 장수였고 다정한 성격인 단은 당연히 그 말을 따를 수 없었다. 그러자 형가는 표표히 그의 집으로 가 '이러저러해서 당신의 목이 필요합니다' 라고 담백하게 용건을 말했다. 대인배인 번오기는 웃으며 '놈을 죽이는데 필요한 거라면 어서 가져가십시오' 라고 대답하고 자기 칼로 스스로 목을 베었다고 한다. 잠시 뒤 형가는 그의 목을 가지고 돌아갔다.
그 뒤에 필요한 것은 자신과 같이 보조를 맞출 담대한 부사(사신은 정사와 부사가 같이 가는 게 원칙이었다). 그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그와 동등한 검술을 지니고 있다는 노구천(魯句賤)이란 자였는데, 아주 친한 친구였지만 과거 쌍륙[4]을 하다가 사소한 말다툼이 벌어지는 바람에 조금 서먹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불러도 그는 오지 않고, 진나라 군세가 언제 쇄도해올지 모르는 급박한 국제 정세에 초조해진 태자는 13살때 사람을 죽였다는 진무양(秦舞陽)이란 장사를 부사로 삼아 갈 것을 요구한다. 사실 그 때 노구천이 오지 못한 것은 강이 범람해서 건너 오지 못하고 있는 것 뿐이었는데, 일이 안 되려고 작정하면 어떻게 해도 안 된다는 말대로 그걸 알 턱 없는 형가는 결국 진무양과 같이 진나라로 갈 것을 결정한다.
진나라로 가기위해 역수(易水)를 건너며 형가가 남긴 노래는 아직도 남아 있다.
風蕭蕭兮易水寒(바람 쓸쓸하고 역수 강물은 차구나!)壯士一去兮不復還(장사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리)
연(燕)나라 태자와 빈객들은 일의 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 흰색의 의관을 차려 입고 송별을 나와 이윽고 역수(易水) 강변에 이르렀다. 로신(路神)에게 제사를 지내 장도를 기원한 후에 길을 떠날 때 고점리(高漸離)가 축을 타자 형가가 곡조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변치(變徵)의 곡조로 부르는 형가(荊軻)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또 곡조를 우(羽)로 바꿔 부르니 전송 나온 사람들은 모두 눈을 부릅뜨고 관을 밀어낼 듯이 머리털을 세웠다. 이윽고 형가가 수레에 올라타고 길을 떠났는데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무 의심 받지 않고 당당하게 진왕 정 앞까지 온 형가였지만, 찌질하게도 부사로 보내 준 진무양이 바들바들 떨기 시작하여 의심을 사고 말았다. 형가는 태연히 웃으면서 "천한 시골 녀석이 천자를 뵙게 되니 당연히 떨리는 것입니다." 하고 진상물로 가져온 연나라의 전략 요충지가 그려진 지도 두루마리를 펼치는데... 실은 보검 상절이 이 두루마리 속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몸수색을 피하기 위해)
그런데 진무양이 손을 떨다가 두루마리 한쪽을 놓치는 바람에 결국 숨겨둔 상절을 들켜버렸고, 칼날의 빛을 본 진왕 정이 재빨리 일어나는 바람에[5] 형가가 내지른 보검은 상처도 내지 못하고 진왕의 옷소매만 스쳤을 뿐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형가가 짧은 단검을 휘두르기 위해 옷소매를 잡아챘는데, 그 옷소매가 찢어져 나갔다는 설도 있다. 어쨋거나 형가는 포기하지 않고 보검을 쥐고 진왕 정을 쫒아 전상 단상 기둥 사이를 숨바꼭질 하기 시작했다.
당시 진나라의 국법에는 왕이 부르기 전에는 그 어느 누구도 왕이 있는 전상 위로 올라갈 수 없었으며, 또한 대전에서는 무기를 지참할 수 없었기에 검을 가진 자는 진왕 혼자였다. 결국 자기 목숨을 스스로 지켜야 하는 상황, 진왕에겐 장검 녹로(鹿盧)가 한 자루 있었지만 마음이 급해서 자루에서 빠지질 않았다(너무 길어서 잘 빠지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 회심의 일격을 날리는 형가를 어의인 하무저(夏無且)가 날린 약주머니가 제지하였고, 또한 좌우에서 칼을 등에 지고 뽑으라고 소리쳤다.[6] 결국 진시황은 칼을 뽑을 수 있었고, 형가는 칼에 찔리면서도 마지막 수로 비수를 던졌으나 기둥에 튕겨나왔다. 그 틈을 노려 영정은 칼로 형가를 여덞번이나 내리쳤으며, 그는 영정을 보고 미소지으면서 "일이 실패한 것은 너(진왕)를 사로잡아 태자에게 보답하고자 했기 때문이다!"고 씁쓸히 말하며 숨을 거두었다.[7] 전상 아래에 있던 진무양은 다져진 고깃덩이가 되었다. 이후 어의 하무저는 금 200일이라는 막대한 보상을 받았다.
4 후일담
이 사건 직후 분노한 진왕 영정은 왕전과 왕분 이신을 보내 연나라 침공을 시작한다. 연나라왕 연희는 수도 계성까지 함락당하자 조가(趙嘉)의 주장을 받아들여 암살을 주도한 아들 연단의 목을 잘라 진나라로 보내지만 진나라는 무시하고 계속 연왕을 추격했다. 연왕은 요동을 거쳐 압록강을 넘을 시도들 했지만 직전에 진나라 군대에 따라 잡혀 연나라왕은 포로가 되었다.[8]
형가전의 후일담에 의하면 형가와 서먹서먹했던 검객 노구천은 형가의 진시황 암살미수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 아깝게도 그는 검술을[9] 잘 연마하지 못했구나! 내가 이전에 그를 너무 몰랐구나! 예전에 내가 그를 꾸짖었을 때, 그는 나를 자신과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형가가 죽고 연나라가 망하자 형가의 벗 고점리는 머슴이 되어 송자(宋子) 땅에 잠적하지만 축솜씨 때문에 정체가 알려지고, 고점리의 축솜씨가 진시황에게 알려지자 진시황은 고점리를 용서하는 대신 고점리의 눈을 멀게하고 악공으로 삼았다. 악공으로 일하면서 진시황과 가까워진 고점리는 축에 납을 넣어서 암살기회를 노리다. 어느날 연주 도중 진시황의 목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축으로 쳤으나 눈이 멀어서 빗맞았고, 결국 친구의 뒤를 따르게 된다.[10] 형가와 고점리에게 죽을뻔 한 진시황은 다시는 멸망당한 나랏 사람을 자신에게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다.
5 여러 이야깃거리
등 뒤에 칼을 뽑으라고 외친 자가 후궁이라는 설이 있지만, 사기 자객열전에는 그냥 '좌우'라고만 되어 있어 정비석 초한지의 각색으로 보인다. 특히 그 궁녀가 호녀(胡女)였는데 그 공으로 진시황과 하룻밤을 보내 낳은 아들이 진을 망친 이세황제 호해라는 베리에이션도 있지만 이는 고우영의 각색.
연암 박지원은 자신의 저서 열하일기에서 형가가 역수에서 기다리던 것은 노구천이나 다른 검객이 아닌,아직 거사를 치른 준비가 안된 자신을 추스르기 위한 행위라고 말했다.
조선후기 농민 반란의 지도자 홍경래는 12살에 형가와 진시황의 고사에서 모티브를 얻어 이런 시를 지었다.
"가을 바람에 역수 장사의 주먹이요 / 벌건 대낮에 함양 천자의 머리라"
내리치겠다고 쓰지는 않았지만 훗날 그의 말과 행동으로 보아 언젠가는 이 나라 백성을 괴롭히는 왕을 없애겠다는 무서운 뜻을 숨기고 있음이 분명했다.[11] 그래서 글을 가르치던 그의 친척은 염통의 쫄깃함을 견디지 못하고 그를 집으로 쫓아보내고 다시는 왕래하지 않았다고 한다.
6 평가
현대에서 형가의 행위를 두고 그에 대한 평가는 다소 엇갈리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긍정적인 평가는 당시에 강대한 진나라가 나머지 여섯 나라를 차례로 병탐하는 상황을 막고 평화를 지키기 위한 의로운 행동이었다는 것이고, 부정적인 평가는 진시황이 당시의 혼란 상황을 종식시키기 위한 통일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 있었으므로 형가의 암살 기도는 결코 대국적인 행위가 못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진시황과 진의 통일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직결된다. 진시황과 진의 통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 형가는 다소 부정적으로 평가받을 것이고, 반대로 진시황과 진의 통일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면 형가는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것이다.
물론 저러한 평가가 나오는 건 현대의 중국이 하나의 중국을 표방하고 있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국에서 한족이란 개념이 생긴게 전한 때이다.
사실 진시황이나 형가나 둘 다 각자의 입장이 있으므로 둘 중 한사람을 칭찬하기 위해 다른 한사람을 비판해야 하는게 아니다. 즉 진시황의 통일 공적과 형가의 용기, 의로움 둘 다 포용하는 형태의 평가도 있다.
7 대중문화 속의 형가
장예모가 주연을 맡은 홍콩,중국 합작 영화 진용(1989)에서 환생한 옛 연인을 맡은 공리를 보고 반가워한 진나라 무사를 맡은 장예모가 이름을 부르며 기뻐하지만 환생한 그녀는 당연히 그가 누군지 모르고, 진나라 사람이라는 이야기에 맹강녀이니 여러 진나라 인물 이야기를 하지만 누군지 몰라한다. 한번 송나라 장군인 악비 이름을 말하지만 당연히 진시황 치세로부터 1000여년이나 지나서 태어나는 악비를 모를 수 밖에. 그러자 "그럼 , 형가도 아시겠네요?"라고 말하자 대단히 불쾌한 얼굴로 "그런 대역적 이름은 입에 담지도 마시오!" 라고 화낸다. 그녀가 "아니? 형가는 폭군에게 맞선 영웅이라고요." 라고 말하자 "무엄한 소릴! 그 자는 폐하께서 직접 참수한 대역적이오!" 라면서 짜증낸다.
그 장예모가 나중에 감독을 맡은 영화인 '영웅'이 바로 이 이야기를 기초로 하여 만들어 진 것이며, 이연걸이 맡은 역할인 '무명'의 모티브가 바로 형가이다. 물론 영화에서 나오는 10보 필살검은 형가는 쓸 줄 모른다. 당연하겠지만 영화 상의 허구이다. 덧붙여 이 영화에서 진시황 역을 맡은 배우는 중국의 유명 배우인 진도명. 드라마 <강희왕조>의 강희제, <무간도3>의 심등, 초한전기에서 유방 역으로 유명한 배우이다. 중국판 최수종
천카이거의 영화 '시황제 암살'(원제: 荊軻刺秦王(형가자진왕))도 형가의 열전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여러가지로 비난받은 '영웅'과는 다르게, 이쪽은 수작이다.
국내에 대자객 형가라는 비디오가 나온 적이 있는데, 형가 역을 맡은 배우가 서금강이다. 흠좀무
국내에선 문영이라는 작가가 형가가 시장 바닥에서 함께 어울렸다는 개백정을 주인공으로 한 <구도>라는 단편 소설을 썼다. 일반적인 역사 소설이 아니라 역사를 가지고 재창작한 무협 소설이다. 국내 유일 장르 문학지 <판타스틱> 2008년 9월호와 <꿈을 걷다>라는 단편집에 실려 있다.
삼국지 드라마인 삼국에서 사마의 휘하 위군 병사들이 제갈량의 계략에 빠져 상방곡에 갇힌 후 화공을 당하며 죽음을 앞두고 부르는 노래가 바로 형가의 역수가다. 물론 오랜 세월동안 음은 사라지고 현대에는 역수가의 가사만 전해 내려오기 때문에 창작한 노래이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선 암살단(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이 아닌가 하고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를 해 봤던 중국 역덕들 사이에선 의견이 분분하다.
모바일게임 영웅 for Kakao에서는 마법형 원거리 공격 캐릭터로 등장한다. 다만 여기서는 암흑 주술을 사용하는 암살자 컨셉이며 황제의 암살에 실패하며 형장에서 참수될 위기에 처하자, 금기의 주술을 외우기 시작하며 신체 자체가 암흑이 되어버린 캐릭터로 등장한다. 흠좀무
FGO서는 당연하게 어쌔신의 클래스로 등장, TS당해 여자가 되었다. 형가(Fate 시리즈) 항목 참조.
- ↑ 의외로 암살자는 아니다.
- ↑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 ↑ 이때 검으로 급소를 찌르지 못하고 빗나가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검의 날에다가 치명적인 독을 입혔다는 이야기도 있다.
- ↑ 장기와 비슷한 보드게임으로 도박의 일종이다.
- ↑ 고우영 십팔사략에서는 진무양은 겁먹고 내려가고 형가 혼자 자연스럽게 지도를 바치는데 이 과정에서 진무양이 시끄럽게 벌벌 떠는 바람에 수상하다 여긴 진왕 정이 형가도 밑으로 내려가라고 하자 형가가 이를 무시하고 상절을 꺼내 진왕 정을 공격한 것으로 묘사한다.
- ↑ 조고가 외쳤다고 하는 소설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소설일 뿐, 일단 기록에는 누가 외쳤는지 없다. 그냥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외쳤던 듯. 다른 야사로는 이때 한 시녀가 저 말을 해서 이후 진시황의 총애를 얻었고, 그래서 낳은 아이가 '호해'라는 설도 있다.
- ↑ 야사에서는 이때야 영정도 한숨을 돌릴 수 있었는지 '수염 난 후 처음으로 혼쭐이 났다.'고 농담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 ↑ 이 때 고조선도 진나라에 칭신하였다고 한다.
- ↑ 단검술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
- ↑ 고점리가 살해를 시도한 공간이 궁중 악단 연주회 였는데, 이 자리에 있던 커다란 징에 진시황의 목소리가 울려퍼져서 고점리의 계산이 실패했다고도 전해진다.
- ↑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에서는 "가을바람이 불 때 역수장사가 벌건 대낮에 함양천자 머리를 주먹으로 날려버린다"라는 무시무시한 해석이 나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