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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진구의 법정동 | ||||
법정동 | 광장동 | 구의동 | 군자동 | 능동 |
자양동 | 중곡동 | 화양동 | ||
밑줄은 구청 소재지. |
화양동 華陽洞 / Hwayang-do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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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대한민국 |
광역자치단체 | 서울특별시 |
기초자치단체 | 광진구 |
관할 행정동 | 화양동 |
면적 | 1.16km² |
인구 | 23,990명 (2012.12.31.) |
세대수 | 13,032가구 (2012.12.31.) |
주민센터 | 화양동 홈페이지 |
華陽洞 / Hwayang-dong
목차
1 개요
서울에서 동이 아닌 리로 더 자주 불리는 네 동네 중 하나.[1] 분명 행정구역 단위는 동인데, 사람들은 화양리라고 많이 부른다. 버스 정류장 이름도 화양동이 아니라 화양리다. 특이하게 이름이 비슷한 근처 동네 자양동은 자양리라고 안 부른다.
건국대학교가 여기 위치한다.
2 동명 유래 및 역사
조선 태조가 광진구와 면목동 일대를 왕실 목장으로 삼은 곳에 세종이 정자를 하나 지으며 이름을 화양정이라고 하였다. 이는 주서(周書)에 나오는 '귀마우화산지양(歸馬于華山之陽, 말을 화산남쪽으로 돌려 보낸다)'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으로 무력으로 나라를 세웠지만 무(武)를 쉬게 하고 문치에 힘쓰고 있음을 기리는 뜻이라고 한다.
다른 설로는 단종이 영월로 귀양 갈 때, 이곳에서 하루 머무른 뒤에 정순왕후 송씨와 헤어졌는데, 정순왕후가 단종에게 꼭 돌아오라(回行)며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고 한다. 지금의 화양리는 회행리가 변한 것이라고 하는 설이다.
이 동에 통합된 모진동은 과부가 많이 살았는데, 모진 여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라 하여 그냥 1914년에 모진리가 되었고, 그게 쭉 이어진거라고 한다. 한자로는 음차하여 毛陳이라고 썼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에 속했으나, 구한말에 한성부에 편입되자 한성부 남부 두모방 전관계에 속했다. 그러나 1911년 경기도 경성부 두모면 장내능동리로 소속이 바뀌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경성부 축소로 고양군 뚝도면에 속하였고, 능동리에서 분리되어 뚝도면 화양리와 모진리가 되었다.
1949년 서울에 편입되면서 성동구 화양동과 모진동이 되었다가, 1995년 광진구가 성동구에서 분리되자 화양동과 모진동은 이에 속하였다.
2009년 모진동이 화양동에 통합되어 폐지되었다.
3 환경
현재는 주택가가 빽빽히 들어서 있어 경치를 느낄 수 없지만 조선시대에는 경치가 빼어났을 것이다. 드넓은 초원이 있고, 서북쪽에 중랑천, 동북쪽에 용마산, 남쪽엔 한강이 흐르고 있었으니 경치를 보면서 마음의 위안을 받았을만 하다. 실제로 조선시대 때에는 왕들이 이 근처로 매 사냥이나 산책을 자주 나왔었다.
현재도 가까운 거리에 중랑천이 흐르고 있고, 동북쪽에는 어린이대공원이 있어 주민들이 애용하고 있다. 건국대학교 캠퍼스도 산책하기 좋다.
예전부터 화양동은 번화가였지만 요즘은 홍대와 더불어 서울의 핫플레이스로 부상 중이다. 대학교 앞 놀거리와 먹거리들로 꽉 차있다.
유흥가들은 대부분 남쪽에, 한적한 주택가들은 거의 북쪽에 분포하고 있다.
4 교통
서울 지하철 2호선과 서울 지하철 7호선의 환승역인 건대입구역은 동남쪽에, 서울 지하철 7호선 어린이대공원역이 동북쪽에 있다.
능동로, 동일로, 아차산로, 광나루로가 이 동의 동서남북으로 지난다. 가까이에 강변북로와 동부간선도로, 영동대교, 청담대교가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그래서 출퇴근 시간이면 도로가 많이 막히는 편이다.
분당수서로가 청담대교와 이어지고, 청담대교 건너면 바로 화양동이기 때문에 성남 버스 102와 성남 버스 1002는 화양동을 종점으로 한다. 세종대 혹은 건국대 다니는 용인, 분당 학생들이나 단국대 다니는 화양동 학생들은 참고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