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옥(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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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鈺
1887~?

친일파인가? 독립운동가인가?

1 개요

1923년에 일어난 의열단의 제2차 국내 거사계획 실행요원. 일제 기관 파괴와 친일파 암살의 지령을 받고 무기를 국내로 반입하는 것을 돕다가 발각돼 체포되었다. 학계에서는 황옥이 공을 세우기 위해 일제의 밀정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는게 다수이나 그가 친일파라고 단정짓지는 못하고 있다.

영화 밀정의 주인공인 이정출의 모델이다.

2 생애

2.1 사건 이전

일명 황만동(黃晩東)으로, 1887년(고종 24)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으며 1920년 3월 경기도 경찰부 직속 도경부에 특채되었다.

2.2 황옥경부폭탄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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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경기도경찰부에서 경부로 근무하던 중 의열단의 단원인 김시현과 만나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의하였으며 김상옥의사가 국내 활동중 수사망이 좁혀져 오고 있다는 정보를 제공해서 상하이로 망명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 중국으로 출장을 떠나 톈진에 도착하였다.

이 곳에서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만나 항일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을 서약하고, 조선총독부 등 일제의 기관 파괴와 일제의 요인 및 친일파 암살 등의 지령을 받았다. 이어 김원봉으로부터 폭탄 36개와 권총 5정을 받아 권동산·김시현·김재진 등과 함께 신의주를 거쳐 서울까지 운반하였다.

그러나 김재진이 일본 경찰에 밀고함으로써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황옥은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1924년 경성지방법원에서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장결핵과 폐렴으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1925년 12월 가출옥하였다. 1928년 5월 재수감되었다가 1929년 2월 다시 가출옥하였는데, 이 사건을 가리켜 일명 '의열단의 제2차 국내 거사계획' 또는 '황옥경부폭탄사건'이라 일컫는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서는 황옥이 고려공산당의 내정과 극동인민대표대회의 내용을 정탐하기 위한 일제의 주구 역할을 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즉 이 거사가 실패로 끝난 것은 황옥의 간계 때문으로, 황옥이 공을 세우기 위해 의열단에 접근해 무기의 국내 반입을 돕는 척하며 일제의 밀정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일제가 의열단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벌인 대표적인 공작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하지만 위 주장에 대한 반박도 가능하다. 황옥은 출소 후 같이 투옥되었던 김시현이나 의열단원 우승규 등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조선독립운동사 편찬 발기인대회에 김시현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또한 반민특위에서 친일경찰들의 행위 증명을 위한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하였다. 밀정으로서 감쪽같이 속인 것 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반민특위에서 황옥의 밀정행위에 대한 처벌, 정 아니라면 반민특위에 회부된 친일경찰들이 자신들의 처벌을 위해 증인으로 나서는 황옥을 밀정이라 말했어야 하나 그러지도 않았다. 쉽게 판단을 내릴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의열단의 단장이었던 김원봉이 그를 "경기도 경찰부 고등부 경부이나 과거 의열단원으로 활동했으며, 불행히 관헌에 체포된 자"라 발언하기도 해서 그의 행적은 영원한 미스테리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2.3 광복후

미군정기 제2경무총감부에서 경무총감으로 근무하며 반민특위에서 활동하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국민당 소속으로 파주에서 출마, 낙선했다. 이후 6.25 전쟁때 납북되었다.
여담으로, 1983년 11월 8일, 민주화 시위 도중 서울대 도서관에서 추락해 숨진, 황정하(서울대 도시공학과 4학년 재학중 사망,1960~1983) 씨가 황옥의 친손자라고 한다.

3 외부링크

영화 '밀정' 실존 인물 황옥의 정체는 뭐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