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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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통령장(複章) 수훈자
강기동구춘선권동진권병덕김경천
김동삼김병조김붕준김상옥김성수
김완규김익상김지섭김하락나석주
나용환나인협남상덕남자현노백린
린썬문창범문태수민긍호민종식
박동환박열박승환박용만박은식
박준승백용성신규식신돌석신석구
신채호신홍식쑨커쑹자오런안재홍
양기탁양전백양한묵E. 배설언더우드
여운형여지이연기우오세창오화영
유동열유여대유인석윤기섭위빈
이갑성이동녕이동휘이명룡이범석
이범윤이봉창이상설이상재이승희
이위종이은찬이인영이재명이종일
이종훈이필주임예환장건상장인환
전명운전해산정환직조성환조완구
주자화주시경지청천채상덕천청
최석순최성모탕지야오편강렬홍기조
홍범도홍병기황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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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01.05 ~ 1923.01.22)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 만납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1]
혁혁한 전과를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억하지 못했던 의열단들의 이야기를 이 영화를 통해서 생각해보는 그런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설민석 '밀정'강의중

실존했던 각시탈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용맹했던 총잡이, 아니 용맹 그 이상.

도대체 왜 이분의 일대기가 영화화 되지 않는지 미스테리인 독립운동가

1 개요

독립운동가. 영웅

그의 존재로 인해 항일 무장투쟁의 정신적 발판이 마련되었다는 평가를 받는 불굴의 상징. 그의 사후 국내외에서 활발한 항일 무장투쟁이 전개되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면서 한학을 수학하는 동시에 어의동보통학교를 다녔다.[2]

14세부터 낮에는 철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공부하는 한편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1910년에는 경성영어학교를 다녀 국제정세와 서양문화에 안목을 넓혔다. 1912년에는 동대문 밖 창신동에서 영덕철물상회를 경영하였다. 이듬해에는 정진주와 혼인하였다.

1917년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일화(日貨) 배척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위해 말총모자를 창안, 생산해 보급하였다. 또한 농구·장갑·양말 등도 아울러 생산해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국산품을 장려하는데 앞장섰다.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것은 3·1 운동 이후부터였다. 그 해 4월 동대문교회 안의 영국인 피어슨 여사 집에서 혁신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혁신공보』(뒤에 『독립신문』으로 개제)를 발간해 독립사상을 계몽, 고취하였다. 그해 12월에는 암살단을 조직해 일본 고관 및 민족반역자에 대한 응징 및 숙청을 기도하였다. 특히, 1920년 4월에는 한훈·유장렬 등과 함께 전라도 지방에서 친일민족반역자 서모 외 수명을 총살하였다. 또한 오성헌병대분소를 습격해 장총 3정과 군도 1개를 탈취하였다.

1920년 8월 24일에 미국의원단이 동양 각국을 시찰하는 길에 내한한다는 소식에 접하자, 그 해 5월부터 김동순·윤익중·신화수·서대순 등의 동지를 지휘해 환영하기 위해 나오는 총독 사이토 마코토 및 일본 고관을 암살하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거사계획은 실천에 옮기기도 전에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었고, 동지들이 붙잡혀 단독으로 거사를 추진했으나 여의치 않자, 10월 말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 뒤 11월 임시정부요인 김구·이시영·조소앙·신익희 등과 독립운동 거사계획에 참여하는 동시에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1921년 7월 독립운동자금의 모금을 위해 한때 귀국해 충청도·전라도 등지에서 모금하여 다시 상해로 들어갔다. 이 무렵 한당사령부장을 맡게 되었다. 1922년 11월 중순 상해에서 임시정부요인 이시영·이동휘·조소앙·김원봉 등과 의논해 일본총독 및 주요 관공서에 대한 암살·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다.

이듬해 1월 조선 총독(사이토 마코토)이 일본제국의회에 참석하기 위한 도쿄행을 기회로 총살하려는 계획이었다. 임시정부에서는 안홍한을 수행시켜 권총 4정과 실탄 수백발을, 그리고 대형 폭탄은 의열단에서 맡아 김한으로부터 받기로 하고 안동현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서울에 들어오도록 하였다. 상해를 떠나면서 농부 차림으로 변장하고 밤을 틈타 압록강 철교를 건너면서 경비경관을 사살하였다. 신의주에 들어와서는 세관검문소 보초를 권총으로 머리를 때려눕히는 등 격투 끝에 국내 잠입에 성공하였다. 서울에 와서 김한·서대순 등 동지들과 만나 조선총독을 총살하기 위한 치밀한 거사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상해 주재 일본 경찰의 통보로 일제가 경계를 강화하자 조선총독 암살거사는 시일을 끌게 되었다.

1923년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이 투탄으로 건물의 일부가 파손되고 행인 남자 6명과 여자 1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큰 소동이 났다. 투탄 당시만 하더라도 의거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일본 경찰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5일이 지난 1월 17일에 일본 경찰은 투탄의 장본인을 알아내고 은신처를 추적하였다. 그러던 중 1월 17일 새벽 3시 은신처인 매부 고봉근의 집이 종로경찰서 수사주임 미와 와사부로에게 탐지되었다. 종로경찰서 우메다·이마세 두 경부 지휘 아래 20여 명의 무장경찰에게 은신처가 포위되었다. 고봉근의 행랑방에 들어 있는 천하의 개쌍년여자가 종로경찰서에 있는 친정오빠에게 밀고하여 탄로난 것이다.

은신처가 탄로나자 단신으로 두 손에 권총을 들고 총격전을 벌였다. 먼저 종로경찰서 유도사범이며 형사부장인 다무라를 사살하였다. 이마세·우메다 경부 등 수 명에게 중상을 입힌 뒤 추격하는 일본 경찰에게 사격을 가하면서 가옥의 옥상을 뛰어 다니며 도주했다. 눈 덮인 남산을 거쳐 금호동에 있는 안장사에 이르러 스님에게 승복과 짚신을 빌려 변장하고 산을 내려왔다. 18일은 무내미 이모집에서 유숙하고 19일 새벽 삼엄한 일본 경찰의 경계망을 피해 효제동 이혜수의 집에 은신하며 여기서 동상도 치료하면서 앞으로의 거사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3년 1월 22일 새벽 최후 은신처마저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고 말았다. 상해로부터의 서신이 효제동으로 온 것을 전해준 전우진이 일본 경찰의 수사망에 걸려들어 고문당한 끝에 은신처가 밝혀지게 되었다.

그날 5시 반경 경기도 경찰부장 우마노가 총지휘관이 되고 보안과장 후지모토가 부지휘관이 되어 시내 4대 경찰서에 총비상령이 내렸다. 기마대와 무장경관 400명이 은신처를 중심으로 효제동 일대를 겹겹이 포위하였다. 일경 결사대가 지붕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김상옥은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방안 벽장 안으로 들어가 숨어 있었다. 구리다 경부가 방으로 들어와 벽장 안을 열어 젖히다 가장 먼저 사살당했으며, 벽장 담을 뚫고 순식간에 옆집 74번지를 지나 76번지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겁에 질린 76번지 집주인이 소리를 지르며 저항하자 다시 담을 넘어 72번지로 갔다. 이후 담벼락을 지탱해 권총 2자루로 3시간 반 동안 총격전을 벌였다. 탄환마저 다하여, 마지막 남은 탄환 한발을 머리에 대고 벽에 기댄 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자결, 순국하였다. 이후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했는데, 총 11발의 총상이 있었다고 한다.[3] 이 때 자결한 총알 1발을 제외하면 10발의 총알을 맞은 것이 된다... 역시 신념은 총알로 부숴지지 않는다. 구리다 경부가 사살되고 일경 16명이 사상하였다.

일본 철혈통치의 핵심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천여명의 일본 군경에 혼자 맞서 총격전을 벌일 정도의 인물임에도 안타깝게도 대중들에게는 별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대중매체에서도 별로 다뤄지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는지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이 시각에 의하면 김상옥의 진짜 목적은 사이토 총독을 서울역에서 암살하는 작전이었는데 그런 중대한 작전을 앞두고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해 경계가 강화될 우를 범했겠느냐는 것이다. 즉,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은 김상옥과 무관하게 다른 조직이나 독립운동가가 벌였고 일제는 이를 김상옥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추격했다는 것이다. 이 시각에서는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을 실행한 인물로 무명지사 김상환, 맹호단원 이강연, 고려공산단원 이한호 등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독립운동가들이 항쟁에 사용하던 폭탄이 조잡했던 것과는 달리 종로경찰서에 투척된 폭탄은 그 위력이 대단했다고 한다.[4] 당시로선 이 정도의 고성능 폭탄을 제조할 능력을 지닌 독립운동단체가 의열단밖에 없었던 것이 거의 분명하므로 김상옥의 의거로 보는게 맞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건 일종의 시험성격의 의거였다는 주장도 있다. 즉, 실전에서 폭탄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도 할 겸, 조선총독부일본 경찰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한 목적 겸으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는 것이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었다.

아래는 김상옥 의사와 관련된 다큐멘터리 자료이다.

- 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의거를 중점적으로 다룬 순국선열의 날 다큐멘터리 : [1]
- 김상옥 의사의 생애를 중점으로 순국까지를 다룬 다큐멘터리 : [2]

2 여담

  • 대학로 마로니에 광장에 김상옥 의사의 동상이 있으며, 종로4가 북쪽 효제초교 앞길은 그의 이름을 딴 "김상옥로"로 명명되었다.
  • 이상의 친구로 유명했던 야수파 화가 구본웅이 중학생 시절 그 김상옥의 순국 현장을 목격했었는데 이때의 강렬했던 기억은 그의 야수파 화풍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친일화가로 전략해버린다...
  • 살아계실 적 별명은 '동대문 홍길동'이었다고 한다. 본진과 같은 영덕철물점을 중심으로 독립자금을 지원함은 물론 무장투쟁을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여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하는 기마경찰을 맨손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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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로 때려눕혀 검을 빼았을 만큼 무술에도 능했으며 당시 총솜씨는 말 그대로 명사수라 불릴만큼 비범했다고 한다.[5]
  • 드라마틱한 생애, 히어로적 활약으로 인해 영화나 드라마화하는데 대단히 적합한 인물이지만 실제 작업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독립이후 영화화를 위한 시도가 있었으나 좌절되었고 그 후로도 여러번의 시도가 번번히 엎어졌다. 하지만 김상옥 의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크리에이터라면 다들 작품화 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이는 만큼 조만간 결과물이 도출될 가능성이 높다. 단 영화 암살의 등장인물 하와이 피스톨의 모티브가 된 인물 중 하나임은 거의 틀림없어 보인다. 또한 영화 밀정의 등장인물인 김장옥은 김상옥 의사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
  • 사회적 활동에서도 상당히 시대를 앞서갔던 사람로 자신이 설립한 '영덕철물점'이라는 곳을 기반으로 능란한 사업수완을 발휘해 독립자금을 조달했으며 당시 철물점 종업원들에게 요즘의 '노동조합'과 같은 단체를 설립해 자신들의 권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단발령 이후 잘린 머리를 감추고 다니기 위해 모자가 유행했는데 이것이 대부분 수입산이지라 말총을 이용한 모자를 창안해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우스개 소리로 한국판 토니 스타크, 부르스 웨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그의 항일 정신을 대표하는 일화 중 하나로 김상옥 의사가 중국에 있을때 오랜동안 함께 활동하던 여류 독립투사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일이 있었다. 이때 김구는 그에게 돈을 주며 '관'을 사 오라고 했으나 그는 그 돈으로 관을 사지 않고 권총을 사 왔다고 한다. 동료의 원한을 갚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관보다는 총이 더 필요하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임시정부 관계자들은 크게 감탄했다고. 물론 돈을 마련해 장례식을 위한 관은 따로 구입했다고 한다.[6]
  • 보통 여타 독립투사들의 경우 의거를 기리는 행사를 할때 '의거 기념식'이라는 표현을 쓰고 사망자들의 경우 순국 '추모식'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김상옥 의사의 경우 사망일이 1월 22일임에도 '순국 추모식'이라는 말 대신 '시가전 승리 기념식' 또는 '독립활동 기념식'이라는 단어를 쓴다. 비록 일본 경찰과의 서울시내 총격전을 벌이시고 마지막 한발로 순국했으나 '시가전'이라고 칭송될만큼 혁혁한 공로를 세웠고 당시 일제에 준 충격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역사가에 따라서는 그의 활약으로 일본에 억눌려 있던 우리 민족이 저항을 위한 의지를 되찾았고 이후 항일 무장투쟁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 실제 생존 애국지사 중 한명은 어릴적 신문에 난 김상옥 의사의 투쟁을 보고 '일본놈들은 수천명인데 왜 저 분 혼자 싸우시는가?'라며 독립운동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 순국하시는 당시에도 일본 경찰이 이 분을 얼마나 두려워 했는지 잘 나타나는데 김상옥 의사는 마지막 총알로 자결하신 후에도 양 손에 권총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고 한다. [7]

  1. 상하이를 떠나면서 남긴 김상옥 의사의 말. 사실상의 유언이며 오늘날 종로구 효제초등학교에 이 어록의 비문이 세워져 있기도 하다.
  2. 오늘날의 종로구 효제초등학교.
  3. 이 때의 광경을 당시 17살이던 서양화가 구본웅이 목격했다고 한다. 구본웅은 자신이 목격한 김상옥 의사의 죽음을 시화집 "허둔기"에 그림과 글로 남겼다.
  4. 당시 언론보도에는 폭탄 제조자가 유태인이나 혹은 아랍인이라고 할 정도로 위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이후 KBS 다큐 등에 따르면 폭탄의 제조자는 이태준 선생이 소개해 준 헝가리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5. 순국하실 때 무려 400 : 1이라는 절대적인 수적 열세에서 쌍권총을 들고 대치했는데 실제 양손 사격은 명중률이 매우 떨어진다. 이는 스펀지에서도 나온 사실인데 권총을 쏠 때 손바닥이 받는 충격량은 6N으로 이는 투수가 공을 던질 때 받는 충격량이라고 한다. 그런데 권총을 양손에 쥐고 쏘게 되면 손바닥이 그 2배의 충격을 받게 되어 정조준이 힘들고 명중률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실제 스펀지에서도 현직 사격 교관이 정지된 상태에서 양손 사격으로 5개의 캔을 맞추는 실험을 해본 결과 명중률이 매우 낮았다. 그런데도 김상옥 의사는 중심 잡기도 어려운 기와집 지붕 위를 날아다니며 양손 사격으로 일본 경찰 10여 명을 살상했으니 그 사격 솜씨가 어느 정도였는지 실감이 갈 것이다.
  6. 비슷한 이야기가 곽낙원 여사에게도 있다. 여사의 생일상을 차리겠다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내 먹을 것 내가 마련할 터이니 돈을 달라고 한 다음, 생일날 모인 사람들 앞에서 권총 두 자루를 내놓았다고.
  7. 멀리서 이 모습을 본 일본 경찰은 김 의사가 살아 있을까봐 다가가지 못했고 결국 김 의사의 어머니를 보내 생사를 확인하게 했다고 한다.죽은 아들 생사를 자기가 확인해야 하는 어머니는 무슨 죄시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