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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japanese type 1 anti-tank gun 0001.jpg
1 제원
- 전장 : 2,526.5mm (53.7구경)
- 중량 : 800kg
- 구경 : 47mm
- 초속 : 830m/s
- 수직각도 : -11 ~ 18도
- 수평각도 : 58도
- 약실 : 수평폐쇄식
- 사용탄 : 철갑탄, 대인유탄
2 개요
1식 기동 47mm 속사포(一式機動四十七粍速射砲)[1]는 일본군이 1941년에 채용한 대전차포며, 태평양 전쟁 종전까지 약 2,300문이 만들어졌다. 사실상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주력 대전차포다.
3 개발
일본의 육군은 94식 속사포의 관통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해당 대전차포의 약실용적을 증가시킨 후 신형 철갑탄을 개발함과 동시에 보다 큰 구경의 대전차포 개발에 들어갔다. 이 대전차포의 개발에는 해군이 청일전쟁당시 어뢰정에 채용한 적이 있었던 47mm 속사포도 참고하였다. 이런 노력끝에 1937년, 시제 97식 47mm 속사포를 만들어 냈다. 이것은 구경 47mm, 초속 730m/s 정도의 위력을 가진 포로 처음엔 말이 끄는 방식이었으나 후일 트럭등의 자동차나 장갑차가 견인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차기 속사포 설계에 기초자료가 되었다.
결국 할힌골 전투를 노몬한 사건으로 고쳐 부를 정도로 전략적으나 전술적으로나 대패배를 한 경험으로 신형전차포의 필요성을 인식한 일본군은 전작인 97식 속사포를 기본으로 개발을 진행해 1939년 9월에 설계에 들어가 1941년 7월에 시제 포를 만들어냈는데 이것이 1식 기동 47mm 속사포였다. 하지만 아직 쓴 맛을 덜보았는지 가제식이라는 채용이 불확실한 상태로 계속 놓아두다가 태평양 전쟁에 돌입한 다음 M3 스튜어트 경전차의 쓴 맛을 본 다음에야 정신을 차리고 1942년 5월에 해당 대전차포는 정식으로 채용되었다.
4 특징
1식 속사포는 94식 속사포와 같은 모양으로 개각식(開脚式)의 포가를 장비했다.
가장 큰 특징은 이제까지 94식 속사포와 시제 97식 속사포가 군마에 의해 견인되는 방식이었지만 본 속사포는 차량견인식이었다. 바퀴엔 펑크에 강인한 펑크레스 타이어가 사용되었고, 견인차에 의해 이동되었다. 그래서 명칭인 기동은 1식 속사포의 이러한 이동성을 의미한다.
1식 속사포에 사용되는 47mm 1식 철갑탄의 위력은 90도에서 1,000m에 50mm, 200m에서 65mm의 장갑판을 관통했다. 그리고, 실용발사속도는 1분당 10발 내외였다.
1식 속사포는 94식과 같이 대인유탄도 지급되어 비장갑목표물도 공격이 가능했으며, 일본군의 기준으로 볼 때 관통력이 좋았으므로 전차에 탑재되기도 했다. 일단 97식 치하 전차와 1식 중전차인 치헤에 탑재된 1식 47mm 전차포는 1식 속사포의 차량탑재형으로 같은 포탄을 사용했다. 단 1식 전차포는 포신이 짧으며 1식 속사포에 비해 위력이 약간 낮았다.
1식 속사포는 전쟁 후반기에 배치되기 시작하여 독립 속사포부대에 배치되었다. 해당 부대는 1개 대대는 대대본부, 3개 중대로 구성되어 각 중대에 4~6문이 배치되었다. 부대 명칭인 독립이란 군 직속부대란 말을 의미한다. 일부 부대는 1식 속사포의 배치가 늦었기에 94식 속사포를 같이 이용하였다.
5 실전
개발 당시 최대의 난적으로 평가되던 미군의 M3 스튜어트 전차의 50mm 전면장갑을 관통하는 성과를 보여서 더 이상 미군 전차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일본군에게 심어주었다. 그리고 이 포를 바탕으로 한 47mm 전차포로 기존의 57mm 단포신 전차포를 교체하는 작업도 약 1,000대 정도로 상당량 진행되었기에 정말로 향후 전차전에서 자신을 가질 수 있었다.
문제는 스튜어트 전차는 미국은 물론 세계 열강의 기준에서는 경전차였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원래는 그정도는 상대했어야 하는 물건이지만 포탄을 만드는 기술이 부족했던 탓에 실전에서는 장갑에 포탄이 착탄하면 포탄이 깨지는 등의 참상으로 그나마도 관통시키지 못하는 경우도 빈발했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가지 않아 미군은 75mm 전차포를 장착하고 전면경사장갑 60mm를 자랑하는 M4 셔먼을 대량생산해서 전선마다 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군은 한마디로 망했어요.
그러나 일본군은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서 해당 속사포를 철저히 위장한 반지하 진지나 동굴에서 은폐 후 셔먼 전차의 측면 장갑을 여러대의 속사포가 일제히 노리는 전술을 사용했다. 이 경우 셔먼 전차의 측면 장갑은 38mm에 불과해서 700m 거리에서도 격파가 가능했다. 하지만 전방으로 돌격하는 전차가 방어군에게 측면을 보이려면 보통 100m 이내 거리여야 가능하므로 방어진지를 제대로 탄탄하게 구축하지 않으면 셔먼 1대 잡고 보복의 총포탄 세례로 전멸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일본군은 인명경시사상이 팽배했고, 희생을 완전히 무시한다면 이런 대전차포로도 셔먼을 상대할 수 있기는 했다. 일례로 오키나와 전투에서 독립 속사포 제 22대대는 1945년 4월 5일 ~ 7일에 걸쳐 85고지 부근에서 정면으로 미군전차에 사격을 개시했는데 그 결과, 전차 5량을 파괴시켰지만 12문 중 10문의 속사포를 잃었다. 그 때문에 대대장 다케다(武田) 소위는 남은 2문을 도로에 좁게 배치하고 가짜 포구를 만들었다.
이는 고육지책으로 적 전차가 이를 보고 두려워 해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게 할 목적이었다. 여기에 독립 보병 제 272대대는 적의 전차와 같이 따라오는 호위보병을 접근시키지 못하도록 항전했다. 이 방법은 먹혀들어 4월 19일 오전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제 22대대의 속사포 외에 제 272대대의 육탄공격, 대공포와 연대포, 지뢰 등으로 미군 제 193전차대대 A중대의 M4 셔먼전차 30량 이상을 공격해 이 중 22량을 격파했다. 그리고 오키나와 전투 종결까지 합계 147량의 M4 셔먼전차를 파괴했다. 이것만 보면 대전과를 올린 것으로 보이지만 그 동안 작전을 위해 죽은 일본군의 수만 최소 수백명이 넘었으며, 대전차포도 거의 상실하였다. 게다가 이렇게 격파된 전차의 대다수가 즉시 회수되어 수리된다음 재투입되었고, 미군은 예비전차가 만단위로 쌓여있었고 제해권마저 장악하여 바다를 통한 전차 수송에 문제가 없었으므로 결국 적 전차의 수를 제대로 줄이지 못했다.
6 평가
사실 당대의 47mm 클래스 중에서도 부족한 기술력의 한계로 다소 떨어지는 성능을 보인다. 당장 체코의 스코다사가 만든 47mm 대전차포는 1,200m에서 60mm의 균질압연장갑을 관통했다. 하지만 개발 당시를 기준으로 볼때 그래도 일본군이 만든 것 치고는 엄청난 성능저하등의 막장사태가 적어서 일본군 입장에서는 그럭저럭 사용할만한 물건이었다.
문제는 일본군이 보통은 할힌골 전투, 잘 해봐야 대전 초반인 1941년까지만 통용될 수준의 대전차포를 가지고 본격적인 75mm급 대전차포가 필요한 제2차 세계대전 말기까지 1선급 전력으로 굴려먹었다는 것에 있다. 그래서 모자란 성능을 병사의 피로 보충하는 막장사태가 발생했다.
여기에 더해서 수량마저도 부족해서 일선부대에 제대로 지급되지도 못했으며, 포탄 제조도 개판이라 간신히 근접해서 필살의 일격을 먹였더니, 포탄이 깨지는 바람에 관통되지 않아서 적 전차의 75mm 포탄세례를 받는 웃기지도 않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주인과 때와 장소를 잘못 만난 대전차포다. 물론 이것도 없었다면 일본군이 더 막장으로 돌입했겠지만...
7 후계자
사실 일본육군도 47mm 속사포로는 장래의 대전차전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고 인식하고 있어서 영국의 6파운더 대전차포 보다는 2년 정도 늦기는 했지만 동급의 대전차포를 시제품 단계까지 만들었고, 요구조건도 모두 충족했다. 일단 500m에서 75mm 관통, 1000m에서 65mm를 관통하는 능력을 보였으므로 이 정도면 셔먼 전차의 전면 장갑을 500미터에서 관통을 기대할 수 있는 성능이다.
하지만 연합군이 잇달아 중(重)전차를 내놓는 현실로 볼 때 중량당 위력이 낮은 시제 57mm 속사포로는 장래의 대전차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보다 강력한 대전차포를 개발하기로 하고 채용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이 대전차포가 채용되지 않은 이유는 양산이 불가능해서다. 원래 해당 대전차포는 1식 중전차 치헤에도 탑재가 예정되었으나, 포신은 물론 포탄까지도 양산이 불가능해서 결국 치헤도 치하 改와 동일한 무장을 탑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시제품 대전차포도 태평양 전쟁 종전후에 행방이 묘연하므로 과연 일본 육군의 주장대로 강력한 성능을 발휘했는지도 의문이다.
그래서 신형 대전차포라는 물건이 개발되었는데, 이 물건이 92식 10cm 캐논포를 개조하여 자주화한 것이었고, 시행착오 끝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애초에 해당 대포는 평사포라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므로 대전차포로 만들기에는 애로사항이 꽃피는데다가, 차량에 탑재하기에도 너무 큰 문제점이 있었다. 덤으로 평사포 요구수량도 제대로 못채워서 고작 180여문만 제조된 상황에서 이 물건을 대전차포로 만들기 위해 추가로 생산을 한다는 것 자체가 현실성이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후계자가 없다시피 하므로 1식 기동 47mm 속사포는 일본군의 최강 대전차포로 남게 된다.- ↑ 정식 명칭은 "1식 기동 47mm 포(一式機動四十七粍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