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식 37mm 속사포

제2차 세계대전기의 일본군 화포
곡사포91식 10cm 곡사포, 92식 10cm 캐논포, 96식 150mm 곡사포
야포/산포90식 75mm 야포, 41식 산포, 94식 산포
대전차포94식 37mm 속사포, 1식 기동 47mm 속사포, 97식 57mm 대전차포
보병포11식 37mm 보병포, 92식 70mm 보병포
대공포96식 25mm 고각기총, 5식 40mm 고각기총, 99식 88mm 대공포, 89식 12.7cm 40 구경장 함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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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연합군추축군
미국 나치 독일
영국 일본 제국
소련 이탈리아 왕국
프랑스-
냉전 미국 소련

1 제원

파일:Attachment/type 94 37 mm anti-tank gun 00001.jpg
기관총인줄 알았네 94식 37mm 속사포를 찾아오신게 맞습니다

  • 중량 : 327kg
  • 포구 구경 : 37mm
  • 포신길이 : 1,706mm (46구경)
  • 포구초속 : 648m/s
  • 최대사거리 : 6,700m
  • 상하각도 : -10도 ~ 25도
  • 좌우각도 : 좌우 각각 30도
  • 폐쇄기 : 수평반자동폐쇄식
  • 사용탄 : 94식 대인유탄, 94식 철갑탄, 1식 철갑탄
  • 생산수량 : 3,400여문

2 개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운용한 대전차포. 정식명칭은 94식 37mm 속사포(九四式三十七粍速射砲)다. 속사포란 명칭은 문자 그대로 빠른 발사가 가능한 포를 의미하는 것이며 동시에 포구초속이 빠른 포란 의미도 내포한다.

3 개발

원래 일본군에는 11년식 평사보병포라는 것이 있었다. 이 무기는 르노 FT-17에 장비된 37mm 전차포와 비슷한 성능을 가진 프랑스의 부트 37mm 보병포의 영향을 받아 1922년에 채용된 구경 37mm의 보병포로 직사에 의한 기관총 진지섬멸을 목적으로 했다. 하지만 포탄 작약량이 적은 탓에 포탄의 폭발 반경이 잘 해봐야 5m 정도로 매우 부족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쓰레기 박격포M1939수준의 능력을 보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원래 목적인 적군 진지에 대해 그리 효과적이지 못했다. 게다가 대전차포로의 활용도 28구경이라는 짧은 포신과 낮은 초속 탓에 관통능력에 한계가 있었는데, 이는 이 무기가 애초에 대전차 능력이란 것을 생각하지 않고 만들어진 물건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따라서 좀 더 나은 화포의 필요성에 따라 1933년부터 94식 37mm 속사포가 개발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설계는 1933년 7월에 시작되어 다음해 2월에 기술시험을 마쳤다. 이렇게 해서 프로토타입이 만들어진 후 테스트를 실시했는데, 최종적인 평가는 실용성은 충분하지만 중량의 경감과 사격자세의 저하 등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를 받아들여 9월에 제2호 시제포가 만들어졌으며 1935년에 약간의 개량을 거쳐 1936년에 제식화되었다.

4 특징

  • 발사속도의 향상 : 반자동식의 개폐기와 자동배연장치를 갖추어서 숙련된 사수가 매분당 30발을 발사할 수 있었다. 이전의 일본군 대포들이 이런 장비가 없어서 발사속도가 시망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 운용요원의 보호 : 포수를 보호하기 위해 방어판과 개각식(開脚式)의 포가(砲架)를 가졌다. 이전의 일본군 대포가 운용요원의 보호 따위는 생각도 안한 것을 감안하면 역시 진보라고 볼 수 있다.
  • 내구성 및 안정성 향상 : 바퀴에는 피탄에 강한 철강재질을 썼으며, 발사시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좌우로 넓히는 것이 가능했다. 그래서 속사를 하더라도 안정된 사격이 가능하다.
  • 이동성 향상 : 이동시엔 말 한 마리로 견인하거나 중량 100kg이하의 부품들을 분해해 4필의 말에 탑재해 수송했다. 따라서 험지에서의 운용능력이 증가했다.

이렇듯 적어도 전작인 11년식 평사보병포보다는 여러모로 나았기 때문에 일본군의 주력 대전차포로 사용되었다.

5 문제점

  • 과도한 경량화 : 지나친 경량화를 시행한 탓에 포미(砲尾)의 강도가 약했으므로 약실용량을 증가해 신형포탄을 시험하던 중 포미가 탈저현상(포미가 바깥으로 이탈하는 것)을 일으켜 시험하던 병사가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는 해당 포가 강력한 신형포탄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타이트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더 이상의 능력향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결국 후속 개량형을 만드는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 구식체계 유지 : 원본인 PaK 36도 94식 속사포가 배치될 쯤에는 견인할 때 편리하고 병사들이 끌고 가더라도 편하도록 고무 타이어를 바퀴에 도입해서 편리성을 증대시켰으며, 포방패도 개수하는 등의 개량을 진행했다.
하지만 94식 속사포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해당 포의 마차바퀴를 철제로 만드는 등의 뻘짓을 저질렀는데, 덕분에 피탄시 내구성은 좋았으나 해당 포를 질질 끌고 가야 할 보병의 입장에서는 중량 증가와 함께 엄청난 힘을 들여야 제대로 굴러가게 되는 등의 부작용을 낳았다.

결국 이런 문제점은 해당 속사포의 명성을 크게 떨어뜨리는 데 일조하였다.

6 운용

94식 속사포는 보병연대의 속사포 중대에 4문씩 배치되었다. 속사포 중대는 4개 분대(전포대라고 부름)로 구성되어 1문에 1개분대씩 편성되었다. 분대는 분대장, 포수, 포수예비, 장탄수, 전령, 탄약수(5명) 및 연기가 빠져 나오지 않았을 때 세곤(포 구멍을 닦을 때 쓰는 막대기) 담당으로 합계 11명으로 구성되었다.

포를 방열시엔 분대간 거리는 약 100m로 분대 후방 300m에 소대본부(2개 분대를 관리), 또 300m 후방에 중대본부가 설치되었다. 중대본부와 소대본부는 유선전화가 있었지만 소대본부와 각 분대사이엔 전령이 달려가서 연락을 취하였다. 하지만 이는 일반적인 포진으로 지형과 상황에 따라 각 지휘관이 판단하여 운용하였다.

7 실전

기존의 일본군이 보유한 대포들보다는 나은 성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본군은 일단 여기서 만족하고, 치하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97식 전차의 방어력도 중거리에서 94식 속사포의 포탄을 전면장갑으로 막을 수 있는 수준으로 지정하는 등 일본군 대전차포의 표준으로 한동안 군림했다. 당장 3,400여문이라는 많은 생산량이 이를 입증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너무 타이트하게 만들어져서 신형포탄을 사용한 화력증대가 불가능하므로 1941년에 포미를 강화한 1식 37mm 속사포 개발의 계기를 제공했다. 이외에도 1식 기동 47mm 속사포가 개발되는 등 후속 대전차포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일본군의 고질적인 무기부족 문제는 94식 속사포가 퇴역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결국 94식 속사포는 일선에 남아 M3 스튜어트 경전차, 마틸다 전차 등 일본군 입장에서 강력한 전차를 계속 상대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당연하게도 포탄은 튕기고 그 다음에는 속사포와 운용요원이 함께 죽는 일만 남았다. 게다가 이런 현상은 지속되어서 나중에는 75mm 전차포와 전면장갑 60mm를 자랑하는 M4 셔먼을 상대하다가 박살나거나, 만주 작전때는 T-34IS-2를 상대로 포격한 다음 개발살나는 것으로 태평양 전쟁이 종전될 때까지 1선에서 활약했다고 쓰고 학살당했다.

8 창작물

영화 마이웨이할힌골 전투 장면에서 등장한다. 대놓고 밝은 아침에 전장으로 이동하던 일본군이 본진에서 멀리 가기도 전에 이미 자신들이 건설한 부교를 타고 공격해오는 대규모 BT 전차 부대와 맞서게 되는데 포탄세례 속에서 급히 행렬 뒤에 있던 94식 6륜 트럭에 실린 포와 포탄을 내려 장전한 후에 발포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물론 전투 장면 자체가 일본군의 막장 대전차 전술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지라 별다른 활약은 못하며, BT 전차들의 공격에 얻어 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