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역대 사무총장

< KBO

기사나 자료가 별로 없고 부정확한 경우가 많아서 많이 부족합니다. 수정이나 추가 부탁드립니다.

1 초대~3대 : 이용일

재임기간1981년 12월 15일 ~ 1991년 2월 21일

사실상 KBO 리그를 만든 장본인이다. 1977년 야구협회 전무이사 재직 시 프로야구 창설에 앞장섰으며[1], 1981년 그의 오랜지기인 이호헌(前 MBC 해설위원)과 함께 KBO 창설을 주도했다.[2] 그 공로를 인정받아 초대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군산시의 야구원로로도 유명한데 군산지역 유소년 야구, 특히 군산상고 야구부를 창단하는데 큰 공헌을 했으며 쌍방울 레이더스 역시 이분께서 창설하는데 큰 도움을 주셨다.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주 대행(1992년~1997년)을 역임했다. 2009년부터 유영구 총재의 고문으로 활동했고, 유영구 총재의 불명예 사임으로 총재대리를 역임했다. 2012년에는 전북 지역 '프로야구 제10구단 범도민유치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 4대~5대 : 안의현

재임기간1991년 2월 ~ 1995년 12월

첫번째 KBO 내부직원 출신. 임선동 선수 계약 문제로 시끄러운 상황에서 건강상의 이유로 자진사퇴 하였다.

3 6대 : 박종환

재임기간1996년 1월 ~ 1998년 3월

경남고등학교와 기업은행 야구단, 육군 야구단에서 야구선수로 활동했던 인물. 1955년 황금사자기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2년간 구단 경영 수업을 듣기도 했으며 1982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롯데 자이언츠 전무가 되었다.
롯데 전무 시절은 원년 팬들에게 천하에 개썅놈취급을 받아도 무방한데,87시즌 후 최동원의 연봉협상에서 동결이 확정된 상황에서 기자들앞에서 5~10% 인하요인이 있지만 동결시켜줄 계획이라고 답하는 미친짓을 저질렀다.[3]그리고 최동원 부친인 최윤식씨가 반발해 연봉을 90만원 인상해서 9000만원을 요구하자 기자들과에 술자리에서'"병신 육갑'"이라 비아냥 거렸고[4]끝까지 물고늘어지다가 팬들의 항의와 주위의 중재로 인해 겨우 끝을냈다.하지만 뒤끝으로 선수협사태때 최동원을 트레이드 시키는 미친짓을 감행하며 결국 최동원이 삼성 입단 계약서에 사인을 한날 전무직에서 사퇴할수 밖에없었다.[5]

KBO 사무총장 시절 외국인 선수제도를 도입한 사무총장으로 유명하며, 부정방망이파동(1997년)으로 일부 구단주와의 마찰이 발단이 되어 사임했다.사퇴와 관련된 내용은 여기를 참조.

4 7대 : 최영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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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1998년 10월 8일 ~ 1999년 12월 24일

MBC 보도본부 스포츠국장 출신이다. 낙하산식 KBO총재 인사를 거부하고, 민선총재 시대를 개막(박용오 KBO 총재)했으나, KBO와 선수협 갈등으로 사임한다.

1997년 외환 위기를 맞이해 KBO 구단들의 압력으로 사무국 직원 6명 퇴출, 직원들 임금을 2년연속 15% 삭감하는 구조조정을 하기도 했으며, 쌍방울 레이더스의 매각은 물론이고 KBO 운영 전반에 각 구단들의 압박에 아무것도 할수 없다는 불만을 수차례 토로하기도 했다.

5 8대~10대 : 이상국

재임기간1999년 12월 28일 ~ 2006년 4월 5일

인터뷰

특이하게 육상선수 출신이다.[6] 고교시절 한국육상선수권대회 단거리 부분 3연패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후 1975년 해태제과에 입사한후 1982년 해태 타이거즈 홍보과장으로 발탁되었다. 1991년에는 39세의 나이로 최연소 야구단장을 맡기도 했다. 1996년에 선동렬의 일본 진출 당시 일본 최고 명문인 요미우리 자이언츠 행을 거의 성사시켰으나 박건배 해태 회장이 선동렬을 주니치 드래곤즈로 보내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뒤 문책 해임되었다.

이후 1998년 정대철 KBO 총재의 특보자격으로 KBO에 입사, 1999년 12월 28일부터 사무총재로 재임하게 되었다. 그의 재임기간 타이틀스폰서 유치, 중계권 협상 시작, SK 와이번스 창단과 현대-기아 자동차의 해태 타이거즈 인수 주도, KBOP 설립등의 업적이 있다.

하지만 잠실 야구장 펜스에 광고를 설치해준다는 댓가로 광고업체로부터 8900만원을 받은 배임수재 혐의와 해당 광고업체가 당시 배기선 국회 문화관광위원장에게 3000만원의 정치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벌금 500만원을 내기도 했다.'비리 경력'이 훈장인가? 희망 없는 프로야구 선수협회와의 갈등, 금품 수수 문제등이 불거지기도 했다. ##

2006년에 퇴임후, 2009년에 유영구 KBO 총재의 특보자격으로 KBO에 재입사 했으며, 이때 사무총재로 재선임 될뻔 했으나 선수협과 야구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2011년 유영구 총재가 물러나자 3개월후인 2011년 8월 21일 KBO 총재 특별보좌역을 사퇴했다.

6 11대 : 하일성

재임기간2006년 5월 8일 ~ 2009년 3월 31일

야구해설가 출신. 역대 사무총장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며, 아직도 KBO 사무총장은 하일성인줄 아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2016년 9월 8일부터는 그럴 일이 없을 듯 하다. 자세한 내용은 하일성 문서의 4문단 참조.

재직 당시 고척 스카이돔의 문제의 씨앗을 방관하고 1차 지명제도 폐지[7]로 인해 프로구단의 아마야구 지원을 요원하게 만들어 프로야구 발전을 후퇴 시킨 부분에 대해서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다.[8] 2009 WBC의 상금을 횡령한 사건도 하일성 총재 재임기간에 벌어진 일이다. 일설에는 네오플현대 유니콘스 인수 제안을 했지만 무슨 구단인지 모르고 씹었다는 이야기가 돌았었는데 그만큼 사무총장 시절 하일성은 평이 좋지 못했으나,[9] 고양 원더스 해체 후 그 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현실(정확히는 이전부터 작게나마 알려지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이 알려지고 허민에 대한 비판 여론이 강해지며 오히려 선견지명이었다는 평가가 높아졌다.[10]

7 12대 : 이상일

재임기간2009년 4월 1일 ~ 2011년 12월 13일

안의현 사무총장에 이어 두번째 KBO 직원 출신(1983년 기록원으로 입사, 운영부장,홍보부장 등)이다. 사무총장에서 물러난 후 총재특보로 자리를 옮겼다. 선수협 파문 당시 백분토론에 출연하여 무식한 발언으로 사회자에게 한소리 먹었던 그 사람이다.

8 13대 : 양해영

재임기간2011년 12월 14일 ~ 현재

1988년 KBO 총무부에 입사해 홍보부장, 총무부장, KBOP 이사 등을 거쳤다. 2011년 1월 사무차장에 올랐다.

한국야구위원회의 주요 수입을 담당하는 자회사 KBOP의 회장직을 성공적으로 이끈다는 평가와 함께 구본능 총재를 잘 보좌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5년부터 기존에 구단 사장단들만 모여서 진행햇던 KBO 윈터미팅을 리그발전을 위한 의견수렴 및 마케팅 전문가의 강연 등으로 개선했다.기사

'28년 외길' 양해영 KBO 총장 "내 사주에 야구가 있다"<1>, '붉은 대추' 양해영 총장 "암 수술 두 번, 야구로 극복"<2>, 양해영 KBO총장 "2020년 1000만 관중 돌파"<3>. 양해영 사무총장 "야구가 왜 좋으냐건 그냥 웃지요"
  1. 1975년 재미교포 사업가 홍윤희 씨의 제안으로 프로야구 창설을 시도했으나 당시 높으신 분 때문에 그냥 프로야구 창설은 썰로 그쳤다. 하지만 실업야구의 발전이 필요하다는 것은 야구인들 누구나가 다 공감을 했기에 이후 전후기 리그와 시즌 왕중왕전인 코리안시리즈를 도입하게 된다.
  2. 창단과정의 비화는 KBO 리그 역사 항목 참조.
  3. 최동원의 87년 성적은 14승 12패 2세이브였다.15승을 기준으로 14승이 되면 5-10%를 깎는다는 조항이 있었던것.하지만 당시 전례에 따르면 통상 2세이브는 1승으로 간주되었던 시대였다.이럴경우 최동원의 연봉 조항에서 승수는 15승이 되는것이고 연봉 동결이 확실한 상황인데 인하요인 이라는 흠좀무한 개소리를 지껄였던것.
  4. 故최윤식 씨는 한국전쟁 당시 다리를 잃어서 의족을 차고 다녀야 했다.
  5. 최동원이 트레이드된게 언론에 나가자 부산 시민 전체가 롯데 구단 전화에 욕설을 날렸다고 한다(...)
  6. 광주 살레시오고 - 성균관대 졸
  7. 원래 2006년, 하일성은 "오늘날의 한국프로야구가 부진한 것은 스타선수가 없어서다."라며 해외파 특별 드래프트와 함께 1차지명 제도 확대방안을 추진했다. 2007년에는 1차 지명자가 2명으로 확대 되었으며 최종적으로는 1차 지명자를 3명까지 늘릴 계획이었지만....서울특별시 입성만을 노리며 떠돌이 생활을 하다 수원시에 잠시 머물던 현대 유니콘스에게 너무 불리하다는 의견과 함께 2007시즌 중반 터진 현대 유니콘즈 매각과정에서 "기업에 팔려고 하니 이런 불리한 제도가 걸림돌이다." 이야기가 나와 결국 폐지해버리고 지역연고라는 단어대신 도시연고를 해야한다는 주장을 했다.
  8. 이런 우려에 대해 KBO는 아무 문제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실제로는 그냥 손을 놔 버렸다.
  9. 참고로 이때 네오플의 CEO가 바로 고양 원더스를 창단했었던 허민이었다.
  10. 거절했다 하더라도 소위 '급'이 안 돼서 거절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kt와의 논의도 진척 중이었고, 이 당시까지만 해도 재벌들의 놀이터라는 크보판에 네오플 정도의 기업이 들어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봤어야 한다. 이장석이 현대를 인수할 수 있었던 것은 kt의 인수가 최종결렬되면서 의사를 타진해볼 기업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했고 그나마도 얼마나 많은 비토가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이해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조기에 현대 사태를 처리 하지 못한 점은 실드의 여지가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