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레스 사우스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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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어깨의 주인공은...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
생불, 대인배, 이 시대의 진정한 성인.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개러스 사우스게이트
(Gareth Southgate)
생년월일1970년 9월 3일
국적잉글랜드
출신지왓포드
신체 조건183cm
포지션수비수
프로 입단1988년 크리스탈 팰리스 입단
소속팀크리스탈 팰리스 FC(1988 - 1995)
아스톤 빌라 FC(1995 - 2001)
미들즈브러 FC(2001 - 2006)
감독미들즈브러 FC(2006 - 2009)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U-21 (2013 - )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U-20 (2014)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2016)[1]
국가대표57경기 2골

1 개요

Gareth Harold Southgate. 잉글랜드 출신의 전 축구 선수이자 감독.

2 선수 경력

2.1 클럽

1989년 크리스탈 팰리스에서 데뷔, 1995년에 아스톤 빌라로 이적하였다.

2년 후에는 아스톤 빌라의 중앙 수비수로서 잉글랜드 리그컵 결승전에 출전하여 리즈 유나이티드를 제압하고 우승을 달성하였다.

이것이 2004년 미들즈브러에서 리그컵을 우승하기 전까지 그가 경험한 우승의 전부이다.

이후 아스톤 빌라가 부진한 성적을 거듭하자 다른 클럽에서 우승을 맛보기 위해 정식으로 구단에게 이적을 요청하였고, 결국 2001년에 미들즈브러로 이적하였다.

그리고 2004년 주장 완장을 차고 미들즈브러를 이끌며 리그컵 결승에서 볼턴 원더러스에 2-1로 승리하여 우승을 달성하게 된다.

2006년에는 UEFA 컵 우승에 도전했으나 아쉽게 준우승을 했다.

2.2 플레이 스타일

크리스탈 팰리스 시절에는 중앙 미드필더의 자리에서 뛰었으나, 아스톤 빌라로 이적한 뒤로는 중앙 수비수로 보직을 변경하여 좋은 활약을 펼치며 잉글랜드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발이 빠른 수비수는 아니었으나 그의 강점은 게임 리딩능력과 섬세한 대인마크능력이었으며, 이러한 강점으로 그는 유로 96, 1998프랑스 월드컵, 유로 2000, 2002 한일월드컵 때까지 잉글랜드 대표선수 명단에도 포함되는 등 꾸준히 국가대표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2.3 잉글랜드 대표팀

1995년 포르투갈과의 경기로 국가대표에 데뷔했다.

그에게 있어 자국에서 열렸던 유로 96은 기억하기 싫은 대회이다. 당시 독일과의 4강전에서 승부차기 키커로 나섰으나 실축하는 바람에 잉글랜드의 결승전 진출을 무산시켰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국민들에게 패배의 원흉으로 지목되었고, 언론에서도 "워터게이트, 화이트게이트, 사우스게이트"란 제목으로 조롱했다.결국 비난을 못견디고 가출까지 했는데, 그제서야 국민과 언론들이 지나쳤다는걸 알고 사우스게이트를 집으로 돌려보내야한다고 여론이 일어 다행스럽게도 귀가했다(…).

1998 FIFA 월드컵에서는 3경기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대표팀은 16강전에서 아르헨티나와 접전 끝에 또 다시 승부차기로 패하고 만다.

2년 뒤 다시 유로 2000에 출전하게되지만, 3경기 중 단 한 경기에만 출전할 수 있었고, 잉글랜드는 수비불안을 드러내며 1승 2패로 탈락한다.

2002 FIFA 월드컵에서도 대표팀 명단에 오르지만, 리오 퍼디난드솔 캠벨등의 쟁쟁한 후배 선수들이 치고 올라왔기 때문에 주전자리에서 밀려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하고 8강에서 잉글랜드가 브라질에게 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2004년까지 국가대표 57경기에 나서 2골을 넣었다.

2.3.1 감독 경력

UEFA 컵 결승전 직후 스티브 맥클라렌 감독이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으로 떠나자 그는 보로의 감독에 취임했다.

그리고 대한민국네티즌[2][3]에게 낚여서 그분을 영입하게 되고, 그 결과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팀 성적이 좋지 못한 상황에서 부진한 이동국을 주전으로 쓰지는 못했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4] 교체로 투입하는 모습을 보며 국내 네티즌들은 하라 타츠노리를 능가하는 생불이자 이 시대의 진정한 성인으로 불렀다.[5] 사실 그 이전에는 이름 때문에 남대문이라 불리곤 했다(…).

그는 모든 선수들에게 신사적이고 부드러운 태도를 가지고 대했다. 특히 코치진들이 전부 자기보다 선배들이라 오히려 자기가 굽신거렸다(…). 나쁘게 말하면 감독으로의 카리스마, 권위가 없다는 뜻.

이동국이 계약만료로 떠난 다음 해인 2008/09 시즌 초반 잘나가면서 상승세를 타나 싶었는데, 이후 엄청난 하락세[6][7]를 타며 강등 크리. 그래도 스티브 깁슨 구단주는 그를 경질하지 않았다. 구단주도 과연 생불.

2009/2010 시즌 2부리그에서 와신상담하며 프리미어 리그로의 진입을 다시 노렸으나, 이번에도 초반 상승세 이후로 하락세[8]를 타며 결국 깁슨 구단주의 뚜껑을 열리게 만들어 더비 카운티와의 경기에서 2-0으로 승리한 직후 경질되었다. 그런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잘못된 선택이었던 듯(…).[9]

영국방송국 ITV의 2010 FIFA 월드컵 프로그램에 아일랜드의 레전드 안디 타운젠드와 함께 월드컵 유망주 몸값을 매겼는데 타운젠드가 박주영의 몸값으로 900만 파운드를 책정하자 너무 비싼게 아니냐고 했다. 역시 그분때문에 안좋은 추억이 떠오르는듯

한국 유소년지도자들이 참가한 지도자 컨퍼런스에서 이동국과의 인연으로 한국을 돕고싶다라고 하며 다시 한번 생불인증을 하셨다.

2013년 3년 계약으로 잉글랜드 U-21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했다. 2015년에 열린 U-21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 결승까지 진출하며 성공적으로 대표팀을 이끌었고 2014년에는 U-20 대표팀 감독을 임시로 맡기도 했다. 2016년엔 서드파티와 관련된 문제로 하차한 샘 알라다이스를 대신하여 잔여 경기를 지휘하게 되었다.

  1. 서드파티 문제로 사임한 샘 알라다이스를 대신하여 잔여경기 지휘.
  2. 사실 이 yakubu라는 사람은 미들스보로의 팬사이트 운영까지 한 사람으로, 한국선수가 있어야 명분이 선다고 생각해서 그랬다고 한다. 사실 이동국 본인이 먼저 구단과 연결된 상황에서 관계자가 이 사람에게 이동국이란 답을 유도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본인은 이후 부진한 이동국과 이동국 팬들이 보로팬으로 행세하며 팬포럼에서 막장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것을 보며 이 짓을 왜 했는지 후회했다고(…).
  3. 참고로 관계자에게 2005년부터 메일을 보냈다는데, 이 관계자가 그 전에는 관심을 안가지다가 임수정 사진을 보내니깐 낚였다고 한다.(...)
  4. 이것에 대해 사람들은 자기가 사실상 자기 뜻으로 영입한 선수라 그런거 아니냐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이동국은 알폰소 알베스와는 달리 자유이적으로 이적료가 한푼도 안들었기 때문에 크게 아쉬울 일은 없었다.
  5. 이후에도 한국기자를 만나면 이동국 잘있냐고 물어본다고 한다. 기량 회복해서 잘 뛰고 있다는 말을 듣고 분명 그럴줄 알았다며 기뻐했다고...기회를 더주지 못해 미안했다고 전해달라 했다는 후일담이 있음. 참고로 이동국 방출 결정당시 혼자서 끝까지 방출에 반대했다고 함.
  6. 11월 9일 아스톤 빌라 원정에서 승리한 이후 이듬해 2월 28일 리버풀 FC와의 홈경기까지 리그 14경기 무승행진. 그것도 8경기나 졌다.(...)
  7. 팀 역사상 최고의 이적료인 무려 1,270만 파운드를 들여 영입한 네덜란드 리그 득점왕 출신 스트라이커 알폰소 알베스가 리그 4골에 그치며 제대로 먹튀짓을 했다.(...)
  8. 초반 상승세를 주도한 툰차이 산리와 로베르트 후트가 이적마감 직전 스토크 시티로 이적하며 생긴 공백을 메우지 못했다.
  9. 후임 감독으로 셀틱 FC에서 명장이었던 고든 스트라칸이 왔으나 기존 선수들을 이적시키고 SPL 출신 선수들로 채워넣다가 막장성적을 찍으며 물러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