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 포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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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y Fawkes

1570년 4월 13일(율리우스력) ~ 1606년 1월 31일

1 생애

영국 프로테스탄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모친은 남편이 죽자 가톨릭 남성과 재혼했고 그 영향으로 가이 포크스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당시의 가톨릭계는 영국왕 제임스 1세가 영국을 다시 가톨릭 국가로 돌려놓길 바랐지만, 제임스 1세는 가톨릭의 대대적인 탄압은 중지했어도 여전히 성공회를 영국 국교로 하는 우대정책을 폈고[1] 이에 불만을 품은 귀족 로버트 캐츠비는 제임스 1세를 암살할 생각을 가지게 된다. 가이 포크스는 그런 로버트의 눈에 띄인 절호의 인재였고 이에 따라서 상원의회의 지하에 대량의 폭약(흑색화약)을 설치하고 터트려 몰살시킨다는 계획을 실행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암살 모의에 참여했던 인물 중 하나가 변심하여 제임스 1세에게 밀고를 하는 바람에, 결국 암살은 실행전 단계에서 발각되었고 11월 5일 가이 포크스는 긴급체포되었다. 당초에는 함구했던 가이 포크스지만 결국에는 고문을 당하여 입을 열고 말았고 이에 따라서 암살계획의 전모가 밝혀지며 암살에 관련된 자들이 줄줄이 체포됐다. 체포되는 가이 포크스를 묘사한 당대의 판화. (대영박물관)

형은 1월 31일 집행되었으며 가이 포크스에게 언도된 형은 교수척장분리형[2]이었다. 그러나 이미 고문으로 몸이 많이 상한 상태였던 가이 포크스는 형이 끝까지 집행되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 일설에 따르면 맨 앞의 "교수" 단계에서 사형집행인이 발판을 치우기 전에 먼저 목에 밧줄이 묶인 채로 뛰어내려 목이 부러져 숨을 거두었다고도 한다.

다행인 것은 이 사건의 여파가 연루자들이 처단되는 선에서 그치고 튜더 왕조 시대와 같은 대대적인 가톨릭 탄압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 사건으로 가톨릭을 뿌리뽑기를 원했던 청교도들은 스튜어트 왕조에 실망하게 되어 점차 반항적이 되며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떠나가기도 했다.

2 자유와 혁명의 상징

그런 사정 덕분에 영국, 정확히는 잉글랜드에 감정이 있는 스코틀랜드인이나 미국인에게는 자유혁명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인기가 있는 편이지만 잉글랜드에서는 정신줄 놓은 반역자로 취급됬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영국 특히 잉글랜드에서도 권력에 대항한 자라는 이미지가 심어졌다. 예로 유명 보수주의 블로거 Guido Fawkes(기도 포크스)[3]는 이 사람의 본명인 Guido Fawkes에서 따왔다. 영국에서는 가이 포크스의 사후 북아일랜드 지방을 제외한 지역에서 가이 포크스의 테러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가 벌어졌다. 자세한건 가이 포크스 데이 / 가이 포크스 가면을 참조.

영어에서 그 녀석 또는 그 사람을 뜻하는 단어 Guy는 가이 포크스의 이름에서 생겨났다.

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폴아웃3포크스브이 포 벤데타브이는 가이 포크스의 영향을 받은 인물들이지만 사실 가이 포크스가 자신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들만큼 고상한 인물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것은 암살계획이 수립된 계기가 사실은 종교적인 문제 뿐만이 아니라 스페인을 비롯한 가톨릭 국가 등과의 외교나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의 미묘한 정치적인 사정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1.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서 모셔온 왕이라서 잉글랜드 국민들에게 최대한 우호의 제스쳐를 보여야 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명군이라 칭송받는 엘리자베스 1세의 법령을 유지하는 것이니, 도리어 가톨릭 교도를 탄압을 중지한 것만으로도 상당한 정치적 위험을 부담한 셈이다.
  2. # 일단 한 번 교수당한 다음 죽기 직전에 해방되어 산채로 해부한 다음 마침내 목을 베고 시체는 다섯 토막을 내어 사람이 많은 곳에 내거는 법정최고형. 국가반역죄를 꾀한 평민에게만 선고된다.
  3. 매우 유명하고 영향력있는 블로그다. 정치인들도 한 번씩은 언급을 하고, 전 수상인 카메론이 직접 기도 포크스 블로그 10주념 축하 동영상을 보내기도 했다. 정작 기도 포크스에서 카메론은 인기가 똥망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