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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이름 | 윌리엄 에릭 갈라스 (William Éric Gallas) |
생년월일 | 1977년 8월 17일 |
국적 | 프랑스 (France) |
출생지 | 아스니에르쉬르센 |
신체 조건 | 183cm |
포지션 | 센터백, 풀백 |
유소년 클럽 | AVG 풋볼 (1987-1992) 라싱 클럽 드 프랑스 (1992-1993) INF Clairefontaine (1992-1994) |
소속 클럽 | SM 캉 (1995-1997)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97-2001) 첼시 FC (2001-2006) 아스날 FC (2006-2010) 토트넘 홋스퍼 (2010-2013) 퍼스 글로리 (2013-2014) |
국가 대표 | 84경기 5골 |
아스날 FC 역대 주장 | |||||||||||
티에리 앙리 (2005~2007) | → | 윌리엄 갈라스 (2007~2008) | → | 세스크 파브레가스 (2008~2011) |
목차
"갈라스는 환상적인 선수였다. 갈라스는 스쿼드에 22명의 선수만 있어도, 24명이나 25명을 두고 있는 것 같은 선수였다."- 조세 무리뉴
1 소개
전성기 레블뢰 철의 포백을 계승한 레블뢰 수비진의 핵이었던 선수 런던을 사랑한 프랑스인
첼시에서도 무리뉴 1기의 철의 포백의 일원으로 활약했었던 뛰어난 실력의 보유자.
2 행적
2.1 클럽
2.1.1 첼시 이전
프랑스 2부 리그팀이였던 SM 캉에서 데뷔한 갈라스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어 1부리그로 승격시킨 뒤 1시즌 더 활약한 후 마르세유로 이적하여 로베르 피레스등과 함께 팀을 이끌었다.
2.1.2 첼시
클라우디오 라니에리의 눈에 띈 갈라스는 첼시로 이적하게 되었고 등번호 13번을 받은 뒤 마르셀 드사이와 호흡을 맞추며 팀의 수비진을 공고히 하였고 이후 존 테리와 호흡을 맞추며 팀의 수비의 핵으로 자리잡았다.
2004년 조세 무리뉴가 부임한 뒤 갈라스는 존 테리와 호흡을 맞추며 팀의 중앙수비를 책임지던 중 웨인 브릿지가 부상으로 이탈하자 레프트백으로 이동하면서 존 테리의 파트너 자리를 히카르두 카르발류에게 넘겨주게 되었다.[1] 이 시기 그는 첼시 수비진의 한 축으로 맹활약하며 첼시의 EPL 한 시즌 최다 무실점경기 기록과 한 시즌 최다연속 무실점 경기 기록을 수립하는데 일조하였고 첼시의 EPL 최다승점 리그 우승에 공헌하였다. 이 때 '첼시의 수비진은 갈라스-존 테리-갈라스-갈라스다!' 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그는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갈라스는 이후 세리에 A에서 뛰고자하는 열망을 드러내며 구단에 이적요청을 하였지만 구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첼시와의 갈등을 겪게된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이 끝나고 피로하다는 이유로 미국 투어에 빠지겠다고 선언한 그에게 첼시는 등번호 13번을 뺏어서 미하엘 발락에게 주었고 이는 갈라스에게 큰 불만을 샀다. 거기에다 그는 첼시가 자신을 이적시켜주지 않는다면 자살골을 넣겠다는(..) 기상천외한 발언을 하기에 이르고 첼시와의 관계는 막장으로 치닫는다.
이후 첼시는 칼리트 불라루즈를 영입하며 갈라스를 대체할 준비를 하였고 아스날에서 애슐리 콜을 영입하기 위해 그를 이용하면서 그는 아스날로 이적하게 되었다.
2.1.3 아스날
갈라스는 아스날로 이적하자 다름아닌 데니스 베르캄프의 등번호 10번을 받게 되었다.[2]
아스날로 이적한 갈라스는 준수한 활약을 보이며 팀의 수비를 단단히 하고, 티에리 앙리가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뒤 팀의 주장이 된다.
하지만 팀의 주장이 된 갈라스는 병크를 터트리는데, 특정 선수에 대해 선수단이 자신에게 불만을 이야기하자, 해당 선수와 대화를 나눴으나 그 해당 선수가 자신을 비롯한 선수단에게 욕을 했다는 내용을 언론에 폭로한다. 이 일로 분노한 벵거는 갈라스를 주장직에서 박탈하였고, 주장직은 세스크 파브레가스가 맡게 된다. 이 일에 대해 아스날 레전드인 나이젤 윈터번도 충격을 먹을 정도였고, 이 사건과 여러 악재가 겹치면서 아스날은 우승 레이스에서 뒤쳐지게 된다.
이후에도 갈라스는 사미르 나스리와 불화를 겪으며 트러블이 있었고 결국 자유계약 신분이 된다.
2.1.4 토트넘
자유계약 신분으로 이적한 팀은 다름 아닌 토트넘이였다. 이로써 갈라스는 런던 연고 라이벌 관계에 있는 첼시, 아스날, 토트넘에 모두 몸담은 선수가 된 셈.
갈라스는 3년간 토트넘에서 활약하며 팀의 챔스 8강 진출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2.1.5 이후
토트넘을 떠난 갈라스는 퍼스 글로리로 이적하여 1시즌 활약한 뒤 은퇴한다.
2.2 국가대표
2.2.1 유로 2004
갈라스는 유로 2004에 참전해 프랑스가 8강에 올라가는데 공헌했지만, 8강에서 프랑스는 그리스를 만나 패해 탈락한다.
2.2.2 2006 독일 월드컵
마르셀 드사이가 국가대표에서 은퇴한 뒤 릴리앙 튀랑과 호흡을 맞추며 프랑스 국가대표팀의 주전 센터백으로 자리잡아 월드컵 기간동안 팀의 철벽 수비에 공헌하며 팀의 준우승을 이끌었다.
3 플레이 스타일
사실 수비수로의 능력들이 최고수준은 아니었지만 어딜 가서든지 한자리는 차지했다. 키도 어느정도 부족하고 대인방어가 완벽한 것도 아니고 태클이 최고 수준도 아니고 게임을 읽고 차단하는 능력도 최고수준은 아니었지만 이 모든게 그래도 골고루 뛰어났기에 어디서든 중용되었다. 일단 센터백치고 매우 빠른발을 갖추었기에 첼시에서 웨인 브릿지가 부상을 당했을때 종종 뛰기 시작한 왼쪽 풀백을 내 포지션처럼 뛰었다. 게다가 오른쪽 풀백을 보는데도 문제는 없어서 이 포지션으로도 종종 출장하였다. 센터백으로도 키는 좀 작으나 발이 빠르다보니 스피드가 좋은 선수들을 상대하거나 앞으로 나가서 인터셉트 하거나 수비 뒷공간을 커버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4백의 어느 자리를 가던 한 가락 하는 선수였다. 바꿔말하면 수비전용 땜빵 다만 풀백으로써의 공격력도 참담한 수준이었으나 그리 크지 않은 키에 비해 점프력이 좋고 오프더볼 상황이나 세트피스 상황에서의 위치선정이 매우 탁월하여 헤더 옵션으로 활약하며 공격에 이비지하였다. 첼시나 아스날에서도 수비수로만 뛰었지만 매 시즌 골을 넣기는 했다. 괜히 무리뉴가 얘를 전용 만능땜빵이라고 칭찬한게 아님 속도와 높이 두 가지를 겸비한 기술이 좀 되는 수비수였고 실수하는 일도 굉장히 적었기에 여러모로 쓰임이 많았던 스타일이었다. 사실 게다가 포백 어느자리에서든 부상은 늘 일어나는 것 다만 개인으로는 풀백보다는 센터백을 좋아했던 듯.
4 트리비아
- 갈라스는 런던을 연고로 한 첼시, 아스날, 토트넘에 몸을 담았다.
- 갈라스는 나스리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다.
- 조별예선 2차전 한국과의 경기에서 내내 경기를 지배하다가 후반 40분경 설기현의 크로스, 조재진이 떨궈준 볼을 박지성이 밀어넣은 동점골 때문에 화가나서 공을 잡고 걷어찼다(..).
올라갑니드아아 헤디잉 슈우웃 골ㄹㄹㄹㄹㄹ- 약 14초경 분노의 발차기를 시전하시는 분이 바로 이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