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발락

전체 이름미하엘 발라크 (Michael Ballack)
생년월일1976년 9월 26일
국적독일
출생지괴를리츠[1]
신체 조건188cm, 85kg
포지션미드필더
프로 입단1995년 켐니츠 FC 입단
소속 클럽켐니츠 FC (1995-1997)
FC 카이저슬라우테른 (1997-1999)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 (1999-2002)
FC 바이에른 뮌헨 (2002-2006)
첼시 FC (2006-2010)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 (2010-2012)
국가 대표98경기 42골[2]
2002 UEFA BEST 11
FW
호나우두
FW
티에리 앙리
MF
데이미언 더프
MF
지네딘 지단
MF
미하엘 발락
MF
클라렌스 세도르프
DF
호베르투 카를로스
DF
크리스티안 키부
DF
알레산드로 네스타
DF
카를레스 푸욜
GK
리슈튀 레츠베르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올리버 칸
(2000~2004)
미하엘 발락
(2004~2010)
필립 람
(2010~2014)

준우승한거 다 우승으로 올려주면 지단급

1 개요

올리버 칸, 미로슬라프 클로제와 함께 2000년대 전차군단콩라인 의 상징

독일 축구 역사상 가장 위협적인 슈팅을 쏘았던 선수

동독의 마지막 유산

독일의 前 축구선수. 프란츠 베켄바워로타어 마테우스의 뒤를 잇는 독일의 무게중심 미드필더의 적자. 현재 이 계보를 잇는 선수는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있다.[3] 또한 구 동독 유스시스템의 마지막 유산으로 평가받기도 한다.[4]

2 플레이 스타일

높은 전술이해도, 패싱력, 수비력, 활동량, 피지컬, 공중볼 장악능력, 그리고 강력한 중거리 슈팅 능력까지 겸비했던 만능 미드필더.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후반까지 활약한 선수 가운데 파트리크 비에이라, 클라렌스 세도르프, 질베르투 실바, 제 호베르투 에메르손과 함께 전술이해도가 뛰어난 선수로 꼽힌다. 말 그대로 만능. 그리고 재능 뿐만 아니라 실적 면에서도 뛰어났다.

최고의 트레이드 마크는 역시 페널티박스 밖에서의 강력한 맞고 뒈져라 슛. 역대 최고의 중거리 슛터중 한명이라 해도 무방하다. 또한 동독 유스시스템의 유산답게 왼발로도 오른발만큼의 중거리가 나오는 ㅎㄷㄷ한 선수다. 그밖에도 강력한 피지컬을 이용한 헤딩골을 굉장히 많이 넣었다. 국가대표 커리어만 봐도 알겠지만, 98경기에 42골... 왠만한 월드클래스 공격수 뺨치는 기록이다. 포지션이 미드필더였음에도!!!

비에이라는 지네딘 지단이라는 걸출한 존재 때문에 공미를 맡은 적이 없으나 리즈시절 아스날과 프랑스의 핵심 멤버였고, 월드컵 무대에선 눈물을 삼켰으나 세 클럽에서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경험한 셰도르프, 그리고 발락은 대표팀과 클럽에서 늘 정상 언저리에 머물렀다. 잘해도 콩 못해도 콩 또한 이들보다 위상은 조금 떨어질지 몰라도 아스날 무패우승의 주역이자 2010 월드컵에서 불사조처럼 부활해 브라질 대표팀에서 뛴 질베르투 실바도 공격형 미드필더 롤은 잘 맡지 않았다. 이 시절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에서 전술 이해도로 비견할 만한 선수는 데쿠 정도. 요즘 선수 중에는 스페인과 바르셀로나의 중추 안드레스 이니에스타가 발락과 비슷한 자리에서 높은 전술이해도를 자랑하고 있다.

수비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윙 미드필더 등 모든 미드필더 위치에서 뛸 수 있는 선수. 전성기 때에는 대표팀이던 소속팀이던 그를 중심으로 전술이 짜여졌다.

발락의 강점은 일반 공격형 미드필더들의 기술적인 섬세함 보다는 힘과 경기 지배력에 있었다. 미드필더들이 갖춰야할 패싱력과 강력한 슈팅력, 단단한 피지컬과 많은 활동량, 경기의 흐름을 읽는 눈과 태클, 거기에 독일 선수 특유의 공중볼 지배력이 탁월해서 헤더 득점도 뛰어나 공격포인트가 높다. 전성기 시절에는 정말 약점을 찾아보기 힘든 선수라고 평가되었으며,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발락 혼자만 중원에 세워놔도 상대편 중원을 씹어삼킬 정도였다.

3 콩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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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뛰어난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뛰는 팀마다 준우승을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 콩락이라는 불명예스런 별명이 붙어있다(...). 특히 01-02 시즌 레버쿠젠이 분데스리가 준우승, DFB-포칼 준우승, UEFA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 독일의 2002 한일 월드컵 준우승으로 4관영의정 쿼드러플 러너업이라는 한 시즌 4회 준우승의 위업을 달성한 적이 있다. 요시 그란도 시즌

그 외에도 UEFA컵과 유로 등 굵직한 대회에서 모두 준우승을 차지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실로 대단한 콩라인. 이후 2008년에도 소속팀 첼시의 프리미어리그 준우승, 리그 컵 준우승, UEFA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 독일의 유로 2008 준우승으로 또다시 4관영의정준우승 쿼드러플을 달성하는 기이하고도 놀라운 업적(?)을 달성했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우승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이에른 뮌헨 시절 챔스를 제외하고 우승컵을 밥먹듯이 들어올렸고, 09-10시즌 첼시에서 뛰며 프리미어리그, FA컵의 더블을 달성하기도 했다. 그런데 2002년과 2008년의 준우승 임팩트가 워낙 셌고, 2000년대 독일 국대 성적이 너무 강해서...지못미

4 커리어

4.1 카이저슬라우테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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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카이저슬라우테른에 입단을 했으나 전반기 시즌은 2군에서 보냈고 99년 3월 레버쿠젠과의 리그경기를 통해 프로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그리고 데뷔시즌에 팀이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하면서[5] 프로에 데뷔하자마자 바로 우승커리어를 새기는 영광을 누린다. 다음 시즌 서서히 주전선수로 도약을 하고 98-99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출전하여 8강까지 갔으나 같은 리그소속인 바이에른 뮌헨에게 패하게 된다.

4.2 바이어 04 레버쿠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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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락의 이름을 전 독일과 유럽에 널리 알리게 된 시기
본격적인 전성기가 열린 시절로 과거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선 수비적인 역할을 맡았다면 레버쿠젠에선 보다 더 공격적인 역할을 부여받으며 레버쿠젠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이 시기 레버쿠젠은 에메르손[6], 루시우, 디미타르 베르바토프, 베른트 슈나이더, 옌스 노보트니, 제 호베르투 등 2000년대 명성을 날린 선수진용을 꾸렸고 발락 역시 이 선수단의 전술의 중심이 되면서 레버쿠젠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활약의 백미는 2001-2002시즌. 레버쿠젠은 분데스리가와 DFB-포칼 그리고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상당한 상승세를 보였으나 막판 선수단의 줄 부상으로 결국 준우승으로 마무리하며 빈손으로 마무리 하게 된다. 이 당시 발락은 선수 시절 최전성기를 보내고 있었고 잘하면 트리플 크라운도 달성할 수 있었으나. 결국 노보트니등의 주축 선수들의 부상으로 트리플 러너업을 달성하게 된다. 이른바 콩락의 전설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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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네딘 지단의 챔피언스리그 역대급 골이 터지기 직전의 순간. 발락은 그저 지단의 뒷모습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4.3 바이에른 뮌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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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월드컵 이후 발락은 레버쿠젠을 떠나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레버쿠젠 시절보단 선수 개개인으로 볼때 최고의 폼을 자랑했지만 이 시기 바이에른 뮌헨을 떠나서 분데스리가 전체가 맛탱이가 간 상황이였다. 02-03시즌 바이언의 과도기로 UCL에서 광탈을 하게 되고 03-04 시즌엔 아예 무관으로 마무리 하게 된다. 04-05 시즌과 05-06 시즌엔 분데스리가 우승과 포칼 우승등 연속 더블 크라운을 달성하지만 UCL에서는 좀처럼 바이에른은 리그에서의 힘을 유럽 무대에서는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고, 결국 발락은 UCL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당시 신흥 강호로 떠오르는 첼시로 이적을 하게된다.

4.4 첼시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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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시 FC 역사에 남을 중원 하나.

2006년 8월 27일 블랙번 로버스 전에서 발락은 프리미어 리그에 데뷔하게 된다. 삭발까지 하면서 첼시에서의 새 출발을 각오하지만 시즌 초기에는 적응기에 애를 먹으며 바이에른 시절만큼의 포스를 보여주지 못한다. 이는 05-06시즌까지 4-3-3을 즐겨 사용하면서 역습무쌍을 선보인 첼시가 4-4-2, 그러니까 투톱으로 시스템을 바꾸면서 혼선을 빚었기 때문이다.[7] 이렇게 되면 이미 기존의 램파드, 마켈렐레, 에시앙 등 중앙 미들진이 많은 첼시에 발락까지 가세를 하는 상황이고 당시 발락을 포함한 네 선수들 중 나이가 있는 마켈렐레를 제외하면 백업으로 두기는 쉽지 않는 상황이었다.[8][9] 시즌 초중반에는 이 전까지 팀의 중추역할을 담당했던 발락은 팀의 실질적 에이스인 램파드를 보좌하는 역할을 수행하였고 전성기 만큼의 포스를 보여주지 못했다. 시즌 중후반부터는 살아난다 싶었는데 아쉽게도 뉴캐슬 원정에서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시즌을 마감했다(이 부상은 07-08 시즌 초반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07-08 시즌부터 부상 회복 후 아스톤 빌라와의 리그 홈 경기에서 부상당한 램파드를 대신해 투입된 이후로부터 램파드의 역할을 부여받고 팀의 중심이 되어 팀을 먹여살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주장 존 테리, 부주장 프랭크 램파드가 빠진 상황에서 캡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첼시에서의 50번째 경기였던 풀럼 원정 경기에서 결승골을 기록. 그리고 08년 4월 26일 리그 맨유전에서 결승 헤더골을 기록하고 맨 오브 더 매치에 선정되는 등 다음시즌에 대한 기대를 가지게 했다.

08-09 시즌 초반에는 잘 해주었으나 중반부터는 팀의 부진과 함께 큰 몫을 못해주었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이 오자 팀에 완전히 적응하며 첼시 기계 축구의 중추가 된다.

특히 2009년 2월, 스콜라리 경질 후 거스 히딩크가 첼시에 오게되고, 히딩크는 에시앙-램파드-발락 으로 이루어진 전설의 3미드진을 보여준다. 사실 아브람 그랜트(07-08 시즌 무리뉴 대행)가 먼저 에시앙-램파드-발락 조합을 선보였으나 에시앙이 마케렐레의 역할을 보여주기엔 뭔가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히딩크 부임후 히딩크가 발락과 에시앙의 역할을 재조정하면서 드디어 호흡이 맞아들어간 것이다. 어쨌든 이 중원 조합은 압도적인 피지컬과 제공권으로 상대팀의 중원을 그야말로 압살시켰는데 그 절정이 08-09 시즌 챔피언스리그 바르샤와의 4강전. 그 시즌 내내 괴물같은 포스를 보였던 바르샤가 그 2경기 만큼은 힘을 못썼다. 판정문제가 많았던 경기였기 때문에 오브레보의 환상적인 판정만 아니었다면 첼시가 바르샤를 꺾었을거라고 봤던 사람들도 많았으며 어쨌든 이때 첼시 미들진의 단단함은 바르샤 마저도 힘겹게 만들었고 그 한 축에 발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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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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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이외에도 드록바의 3 PK 무시, 피케의 핸들링 반칙 또한 무시하는 등 이 경기는 챔피언스리그 역사에 길이남을 오심 퍼레이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빅 이어의 꿈을 이루고팠던 발락은 이렇게 4강에서 또 고배를 마시게 되었다.

09-10 시즌 안첼로티 체제에서도 3미들(정확히 말하면 다이아몬드 4-4-2)의 중추로써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중반에는 팀이 좀 부진했는데 같이 부진, 그렇지만 후반기에는 다소 수비적인 룰을 맡음에도 불구하고 램파드, 말루다와 같이 안정적인 중원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시즌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2010년 5월 15일 포츠머스 FC와의 FA컵 결승전에 선발 출전했던 발락은 전반 종료 직전 상대 선수인 케빈-프린스 보아텡[13]의 거친 태클에 무릎 부상을 입고 줄리아누 벨레티와 교체되어 경기장을 빠져나오는 아픔을 겪었다.

결국 이 부상으로 인해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출전은 무산되었고 팀에서는 주급을 깎아서라도 잔류하겠다는 의지에도 불구하고 결국 방출되어 그의 커리어는 서서히 황혼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4.5 다시 레버쿠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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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여름일자로 레버쿠젠으로 이적을 했다. 당시 레버쿠젠은 직전 시즌 롤패스와 아직 성장중이던 토니 크로스를 중심으로 미들진의 전술을 짜였고, 크로스의 바이에른 복귀로 인해 34세의 노장인 발락은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맡게된다. 그리고 하노버와의 2010/11 독일 분데스리가 경기에서 부상 복귀 이후 첫 번째 풀타임 활약을 펼쳤고 레버쿠젠을 리그 2위이쯤되면 대단하다로 올려놓으며 다음시즌 UCL 직행 티켓을 선물한다. 그리고 2011-2012시즌 UCL에서 발렌시아 전과 행크전에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으나 팀은(발락은 부상이라 출전을 못함) 16강에서 바르셀로나에게 복날 개 패듯 두들겨 맞으며 자신의 마지막 유럽 클럽 대항전 무대를 쓸쓸히 마감한다.

5 국가대표 커리어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이전에 전차군단의 중원을 책임진 선수

5.1 2000년대


유로 2000년 경에 서브멤버로 포르투갈과의 3차전에서 선발로 출전하였으나 팀은 0-3으로 깨지고 성적도 1무2패의 최악의 성적으로 대회를 마감한다. [14]
이 후 2002년 월드컵 지역예선 9조에서 독일은 잉글랜드와의 1위 다툼에서 그 전설의 1-5 참사를 당하면서 플레이오프로 밀려나게 된다. 바로 이 때 부터 발락의 진가가 발휘되는데 플레이오프 상대는 우크라이나로 발락은 1차전 0-1로 끌려가는 상황에서 동점골을 넣고 2차전 선제골, 추가골을 넣어 4-1 대승을 이끌며 독일을 탈락위기에서 구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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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팀과의 4강전에서 결승골을 넣고 포효하는 모습 한국에게 결승행 좌절을 선사한 골이기도 하다
그리고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미로슬라프 클로제, 올리버 칸과 함께 실질적으로 팀을 이끌다시피하여 결승까지 진출시킨 장본인이다.[15] 당시 독일은 그나마 희망이였던 세바스티안 다이슬러메멧 숄, 옌스 노보트니, 크리스티안 뵈른스의 부상, 카르스텐 얀커와 옌스 예레미스가 클럽에서 만큼 제역할을 하지 못한 상황이였고 특히 16강전부터 독일은 전술적의 고지식함을 들어내며 졸전을 펼쳤는데 바로 발락이 해결사 역할을 하면서 독일을 꾸역꾸역 결승까지 이끌었던 것. 그러나 결승전에서는 경고누적으로 출전하지 못했고 독일은 2:0으로 패했다. 그리고 콩락의 전설이 막을 올렸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에서의 기대이상의 성과를 올린 독일 대표팀은 이 때부터 다시 최악의 암흑기를 맞이하고 [16][17] 어찌보면 20대 후반 자신의 축구경력의 정점을 향해 올라가는 발락에게 있어선 이 나이에 2004년 홀로 망가진 독일축구를 짊어져야하는 안습한 상황이 오고 만다. 당시 대표팀 상황은 2000년대보다 더 최악에 가까웠다. 2000년도엔 늙었어도 나름 이름값 있는 선수들이라도 있었고 메멧 숄이나 다이슬러, 노보트니가 어느정도 폼이 좋았을 때였지 2004년도엔 앞의 세 선수의 폼이 완전히 하락한 상태였고 케빈 쿠라니,게랄드 아사모아,프랑코 바우만,파트릭 오모엘라,파비안 에른스트 등 누구세요? 수준의 눈물나는 스쿼드를 보였으며 클로제는 이 시기 슬럼프에 빠졌고 지금 최고의 선수로 불리는 필립 람이나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도 이 당시는 철저한 무명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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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땐 슈바이니도.... 그저 그런 선수였다.
유로2004에서도 졸전을 거듭했는데 특히 당시 신예 이자 지금은 발락보다 초월하는 슈퍼 클래스급 선수가 되어버린 필립 람을 제외하곤 거의 혼자서 독일 대표팀을 이끌었다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특히 3차전인 체코전에서 당시 감독인 루디 푈러 감독은 괴랄한 포지션을 사용했는데 프리드리히,뵈른스,노보트니의 쓰리백과 수비형 미드필더에 하만을 그리고 죄우에 프링스와 필립 람을 배치하고[18][19]공격형 미드필더에 발락을 배치.. 또 그 위에 슈바인슈타이거와 슈나이더를 윙으로 배치 그리고 최전방에 케빈 쿠라니를 배치하는 이른바 5-4-1 도 아니고, 3-4-3도 아닌 쓰리백에 죄우 윙을 두명 씩이나 두고 홀딩엔 기동성이 전혀 없는 디트마어 하만을 혼자 배치하는 초 괴랄엽기 포지션[20][21]을 선보였고 당연히 팀은 체코2진에게 2-1로 깨지면서 이번에도 광탈하게된다. 이는 과거 1999년 바이에른 뮌헨이 선보인 5-4-1포지션의 강력한 수비라인에 이은 위협적인 역습장면을 여러차례 만들어낸 전술을 재현하기 위해서인데 과거 에펜베르크의 역할을 발락이 어느정도 수행해냈으나 예레미스[22] 의 넓은 활동량을 하만이 보여줄리 만무했고 네드베드, 포보르스키가 없는 체코2진 미들진에게 처참히 털리게 된다. 비록 이 시기 국가대표팀은 완전 막장테크를 타고 있었으나 발락의 평가는 역으로 올라갔는데 아시다시피 당시 독일 대표팀은 어쩡정한 4-4-2 전술로 최약체 라트비아에게 비기질 않나 당시 구닥다리인 3-5-2를 끝까지 고집하질 않나 한마디로 전술적인 유연성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 발락은 그런 괴랄 표지션과 최약체의 독일 스쿼드를 가지고 홀로 고군분투를 하면서 어찌어찌 팀을 꾸역꾸역 이끌어 갔기 때문이다. 앞에 언급한대로 전술적 이해도가 매우 뛰어나 3-5-2든 4-4-2든 제 몫을 해준 선수는 대표팀 내에 발락이 유일하다시피 했으며 막장테크의 대표팀을 혼자 이끌면서 그래도 발락 덕분에 독일 대표팀은 소위 썩어도 준치라는 소릴 듣게 된 것이다. 약체들에게 쳐발리더라도 이 시기 최악의 시기를 달린 독일 대표팀이 어찌어찌 꾸역꾸역 메이저 대회에 출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발락의 존재가 있기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다.

5.2 2006년 그리고 황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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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컨페더레이션스컵 4강전

2006년 독일 월드컵 발락 최고의 파트너였던 토어스텐 프링스(왼쪽)

2005년 자국에서 열린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어느정도 성과를 올렸고 이 당시 독일대표팀 역시 뒤늦게나마 4-4-2의 포지션을 확립하게 된다. 이 때 발락의 파트너로써는 토어스텐 프링스였고 이 둘을 최적의 호흡을 보이면서 유로 2008 때까지 파트너로 활약하게 된다.[23] 발락과 프링스는 넓은 활동량과 기동성을 자랑하였고 특히 8강전인 아르헨티나 전에서 아르헨티나 미들진의 점유율 축구를 기동성으로 뭉게버리는 포스를 보여준다...

이 시기는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필립 람과 슈바인슈타이거, 메르테자커, 포돌스키 등 소위 80년대생의 황금세대들이 포텐이 터진 시기인데 아이러니하게도 2006년 30줄에 접어든 발락은 예전만큼의 기량을 보여주질 못했고, 유로 2008 이후 자신의 절친인 프링스가 뢰브 감독과의 불화로 대표팀에서 사실상 은퇴하면서 서서히 국가대표팀에 대한 영향력도 약화되기 시작한다. 이 시기 뢰브 감독은 지몬 롤패스, 사미 케디라 등 20대 젊은 선수들을 주력선수로 사용하였고, 슈바인슈타이거의 중앙 미드필더 보직 변경으로 발락이 했던 역할을 이어받으면서 독일 대표팀도 당시 트랜드에 맞추어 4-2-3-1 포지션을 사용하던 시기였다. 그래도 발락의 경우 영향력은 약화되었어도 여전히 무게감은 건재하였으나 2010년 5월 FA컵 결승전에서 당한 부상으로 인해 2010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된다.[24] 이 부상으로 인해 그의 대표팀에서의 영향력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2011년 독일 축구 협회 측은 발락을 8월에 있을 A매치에 발탁한 다음 경기를 뛰게 하고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할 예정임을 밝혔으나 발락은 곧장 뢰브 감독을 디스하며 이 경기는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출전이 결정된 것이라며 A매치 소집을 거부, 98번의 A매치에 출전해 2경기 남겨 두고 센추리 클럽 가입이 무산되었다..--100번째도 못채우는 콩락은 명불허전이였다.

6 굿바이 발락!

현지시간 2012년 10월 2일 자로 현역은퇴를 선언했다. 독일 축구의 암흑기를 거의 홀로 지키다시피 했고 2010년 독일축구의 새로운 세대를 시작하는 초석을 다진 위대한 거인에게 박수를 보낸다.

7 기타

WWE 영국 투어 때 ECW를 구경간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는데, 소개도 못받은 사건이 있었다.(...)[25]


발락이 어디 있느냐고? 영상 24초 부분을 유심히 살펴보자.

7.1 여기가 차붐의 나라 입니까?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독일 대표팀의 일원으로서 토너먼트 16강전부터 준결승까지를 한국에서 경기했는데, 한국 입국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여기가 차붐의 나라입니까? 꼭 와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나의 우상입니다."라고 말했다.[26][27] 이 인터뷰를 통해 차범근의 위엄이 재확인되었고, 한편으로는 '여기가 XX의 나라입니까?'라는 드립의 시초가 되었다.

2007년 첼시 미국 투어중 수원 삼성과의 친선전에서 차붐과 만난 장면

7.2 사건 사고

국내팬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나, 불륜남이다. 바이에른 시절 동료인 크리스티안 렐[28]의 그녀인 다니엘라 아우마이어와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 사건은 복잡한 게, 렐의 그녀는 원래 슈바인슈타이거의 여친이었지만 렐과 양다리를 걸치다 적발, 이후 렐의 그녀가 되었는데[29] 또 발락과 불륜을 저지른 것이다. 렐은 피해자로 보이지만 렐도 좀 웃기는 게 원래 여자 문제로 좋은 소리 들은 적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만삭 상태에서 내 여친의 배 속에 있는 게 누군지 모르겠다며 언론에 공표한 것이다. 발락과의 불륜은 1회성으로 알려졌으며 시기상 태아 친부 드립은 무리수였던 걸 생각하면, 굳이 만삭일 때, 그것도 언론에 대놓고 내 여자는 동료랑 자는 여자라고 떠벌린 게 잘 한 짓으로 보이진 않는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 발락은 부인[30]과 별거 상태에 들어갔으며[31] 결국 2012년 말엽 쯤에 이혼했다. 그러나 독일 외 팬덤에선 거의 알려지지 않고 기사도 몇 건 없는 것으로 보아 이혼과정에서 별다른 잡음은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팬덤 내에서 제2의 존 테리, 독일의 존 테리 등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팬덤 내에서는 그래도 발락이 형인데 존 테리가 잉글랜드의 발락으로 불려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이...

아무튼 현재는 화해했다고 한다. 렐도 헤어진지 오래... 하지만 어쨌든 발락 가정도 깨박살...승리자는 새로운 여친을 얻은 슈바인슈타이거

2016년 현재는 레바논계 영국인 여자친구가 새로 생겼다. 미모의 금융업계 종사자로 도이치방크를 거쳐 현재는 골드만삭스에서 일하는 듯.

8 경력

8.1 대회 우승

  • FC 카이저슬라우테른 (1997/98 - 1998/99)
    • 독일 분데스리가 (1) : 1997/98
  • FC 바이에른 뮌헨 (2002/03 - 2005/06)
    • 독일 분데스리가 (3) : 2002/03, 2004/05, 2005/06
    • DFB-포칼 (3) : 2002/03, 2004/05, 2005/06
    • DFB-리가포칼 (1) : 2004

8.2 대회 준우승

  • 바이어 04 레버쿠젠 (1999/00 - 2001/02)
    • 독일 분데스리가 준우승 (2) : 2001/02, 2010/11
    • DFB 포칼 준우승 (1) : 2001/02
    • UEFA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1) : 2001/02
  • 첼시 FC (2006/07 - 2010/11)
    •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준우승 (2) : 2006/07, 2007/08
    • UEFA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1) : 2007/08
    • 풋볼 리그 컵 준우승 (1) : 2007/08
    • FA 커뮤니티 실드 준우승 (1) : 2006

8.3 리그 기록

시즌클럽소속리그리그FA컵리그컵대륙대회
경기득점경기득점경기득점경기득점
1994/95켐니츠 FC 2독일 지역리그72------
1995/96켐니츠 FC 2독일 지역리그113------
1995/96켐니츠 FC독일 2.분데스리가15010----
1996/97켐니츠 FC독일 지역리그341010----
1997/98FC 카이저슬라우테른독일 분데스리가16020----
1998/99FC 카이저슬라우테른독일 분데스리가3410101060
1999/00바이어 04 레버쿠젠독일 분데스리가233000022
2000/01바이어 04 레버쿠젠독일 분데스리가277201052
2001/02바이어 04 레버쿠젠독일 분데스리가29174010166
2002/03FC 바이에른 뮌헨독일 분데스리가2610540071
2003/04FC 바이에른 뮌헨독일 분데스리가287321280
2004/05FC 바이에른 뮌헨독일 분데스리가2713432292
2005/06FC 바이에른 뮌헨독일 분데스리가2614510061
2006/07첼시 FC잉글랜드 프리미어2643160102
2007/08첼시 FC잉글랜드 프리미어187200092
2008/09첼시 FC잉글랜드 프리미어2916310100
2009/10첼시 FC잉글랜드 프리미어324412060
2010/11바이어 04 레버쿠젠독일 분데스리가17000--32
2011/12바이어 04 레버쿠젠독일 분데스리가18210--61

8.4 개인 수상

  •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올스타 팀 : 2004, 2008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실버슈 : 2005
  • FIFA 월드컵 올스타 팀 : 2002, 2006
  • 2002년 FIFA 월드컵 맨 오브 더 매치 : vs. 대한민국 (준결승전)
  • UEFA 유로 2004 맨 오브 더 매치 : vs. 네덜란드, vs. 라트비아 (조별리그)
  • 2005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맨 오브 더 매치 : vs. 호주, vs. 튀니지 (이상 조별리그), vs. 멕시코 (3·4위전)
  • 2006년 FIFA 월드컵 맨 오브 더 매치 : vs. 에콰도르 (조별리그), vs. 아르헨티나 (8강전)
  • UEFA 유로 2008 맨 오브 더 매치 : vs. 오스트리아 (조별리그)
  1. 작센주의 도시. 여담으로는 발락이 태어났었을 당시에는 동독
  2.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득점 역대 8위
  3. 비록 외질이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으나, 팀의 무게중심과는 거리가 있다. 외질은 중원을 지배하는 선수로 평가받기보다는 직선적인 독일 축구에 창의성과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차기 주장감과도 거리가 있다.
  4. 그 특징중 가장 대표적인게 어렸을때부터 철저하게 교육받은 양발 사용 훈련이다. 덕분에 발락은 오른발 왼발 가리지 않고 대포알 슈팅을 보여줬다. 2002 한일월드컵 4강전 대한민국을 상대로 넣은 결승골도 올리버 뇌빌의 패스를 1차로는 오른발로, 이운재가 선방한 볼을 2차로는 왼발로 때려 득점에 성공했는데, 이를 현지에서는 발락의 양발 사용 덕택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5. 이 시기 카이저슬라우테른은 갓 1부리그로 승격한 상태에서 97-98 분데스리가에 우승까지 이루는 그야말로 식스센스급의 반전을 보여주면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6. 2000년 AS로마로 이적
  7. 아시다시피 당시 로만이 끔찍히 러브콜을 보냈던 셰브첸코도 이 시기 영입되면서 드록바와 투톱을 쓸 수 밖에 없었고 원톱을 울며 겨자먹기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
  8. 마켈렐레는 이 시기에도 나름 건재하였다.
  9. 그리고 현재 완전히 맛이 간 에시앙도 이 시기에는 어마어마한 활동량과 피지컬로 괴물포스를 뽐냈다.
  10. 이 조합은 04-05 시즌 마케렐레-구드욘센-램파드에 버금가는 첼시 FC 역대 최고의 중원이라 평가 받는다.
  11. 이 스쿼드는 4강전 스쿼드와는 약간 차이가 있다.
  12. 첼시의 마지막 공격기회, 그가 페널티 박스 내부에서 날린 슈팅을 사무엘 에투가 대놓고 손으로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경기를 진행시키는 오브레보 주심과 항의하는 발락.
  13. 공교롭게도 독일 출신이고 독일 청소년 국가대표로 활약했으나, 독일 국가대표에서 기회를 잡지 못하자 부친의 조국인 가나 국가대표를 선택, 월드컵에서 독일과 맞대결을 했다. 이복동생인 제롬 보아텡은 독일 국가대표를 선택했는데, 이 태클에 대해 비난을 해서 사이가 나빠졌는지 둘은 경기에서 서로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14. 이 대화에 독일은 마테우스,헤슬러,비어호프등 30대 노장선수들이 유난히 많았는데 90년대 독일축구의 마지막 전성기를 선보인 맴버들로 이 때부터 독일축구는 녹슨전차라고 비야냥을 들어야 했었다. 비유하자면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의 이탈리아 대표팀의 엔트리라 생각하면 된다.
  15. 바로 한국의 결승 진출을 좌절시킨 그 골을 넣은 선수가 이 선수이다. 발락에게 골을 내주고 가장 좌절했을 이운재는 후에 독일과의 평가전에서 패널티 키커로 나선 발락의 패널티킥을 선방해버림으로서 개인적으로는 복수를 이루었지만.. 골은 서울과 부산에서 모두 넣었지만 서울에서는 승리를, 부산에서는 패배를 맛봤다.
  16. 2000년도 보다도 더 최악이였다. 그 때는 그래도 분데스리가 클럽팀들이 유럽클럽대항전에서 어느정도 좋은 모습이라도 보였지 2004년도에는 그 분데스리가의 마지막 희망인 바이에른조자 유럽클럽대항전에서 신나러 털린다. 즉 이 시기는 국가대표로나 분데스리가 모두 최악의 시기를 달린 셈.
  17. 심지어 2004년엔 순수 국내파로 나온 한국에게 발락의 PK실축과 더불어3:1로 쳐발릴 정도의 눈물나는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18. 당시 프링스는 주로 라이트백에 많이 포진되었었다. 본격적으로 수비형 미드필더를 본 건 클린스만 감독이 독일 대표팀을 맏으면서 4-4-2포지션을 사용할 때부터였다.
  19. 게다가 당시 람은 지금의 명성과는 차원이 다른 무명의 신예였고 그렇기에 지금과 같이 중앙을 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한 마디로 중앙을 하만 혼자서 버티는 슈퍼울트라메가톤괴랄 포지션이 탄생된 것이다.
  20. 물론 하만의 경우 주 포지션이 홀딩 미드필더이나. 이번 포지션의 경우 중원에 달랑 하만을 혼자 배치시켰다.
  21. 하만을 깎아내리기엔 무리가 있는 것이 분명 하만의 전성기 시절엔 유럽 최고의 수준의 강력하고 정확한 킥능력을 소유한 선수였고 이 것이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2004년 독일의 예능수준의 스쿼드를 보면 하만의 이런 뛰어난 능력이 거의 계륵수준이 되어버린다.
  22. 공격력이 딸리긴 해도 예레미스의 넓은 활동량으로 인해 과거 바이에른은 윙들이 자주 오버래핑에 나설 수 있었고 어느정도 예레미스가 커버를 잘 해내었는데 하만은 이게 전혀 되질 않았다.
  23. 프링스는 발락만큼은 아니지만 중앙미들진의 교과서다운 플레이를 선보였고 올라운드 플레이여였다. 그리고 발락 못지않는 호쾌한 중거리 포도 자랑했는데 2006년 독일월드컵 코스타리카전에 보여준 중거리포가 대표적이다.
  24. 그리고 이는 오히려 신의 한수가 되면서 유망주였던 메주트 외질이 단숨에 슈퍼스타 반열에 오르고 케디라-슈바인슈타이거의 중원은 이후 독일 중원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이 기점으로 독일은 기존의 조직적이지만 둔탁한 축구에서 완전히 탈피. 기술적이고 유연성 있는 축구를 구사하게 된다.
  25. 참고로 주제 무리뉴는 가족들과 RAW를 보러갔다가 쉐인 맥마흔이랑 세그먼트까지 했다. 다만 지역이 아스날 팬이 많은 지역이라 야유를 좀 받았다는듯.
  26. 독일에서 우상이란 뜻의 단어 (das) Idol은 우리나라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맹목적인 의미의 뜻은 아니다. 좋아하는 선수, 존경하는 선수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하다. 그러나 레버쿠젠 라커룸 내부에 차범근의 사진이 걸려 있는 등, 그가 아직도 많은 독일 선수들에게 추앙받는 선수임은 명백하다.
  27. 참고로 발락은 동독 출신인데 서로의 방송을 절대 보지 못하게 하는 남북한과는 달리 동독에서는 서독 TV를 볼수 있었다. 영토 한복판인 서베를린에서 방송이 송출되는지라 동독 정부가 막는게 불가능했기 때문.
  28. 뭐야 이 듣보잡은,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한 때 바이에른에서 윙백 유망주로 밀어주려고 했던 선수로 바이에른 방출 후유증으로 2부 리그까지 떨어졌지만 지금은 준수한 수준의 분데스 윙백. 헤르타 베를린에서의 활약으로 인해 국대 재승선 논의까지 오갔다.
  29. 슈바인슈타이거와 공식적으로 결별했음을 공표한 시기는 2007년 2월이다. 렐이 말하는 발락과의 스캔들 시점은 2006년이므로 이 때 이미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는 뜻이다.
  30. 아들 3명을 낳을때까지 동거 관계였으나 2008년 7월 유로 준우승 이후 동거녀와 결혼을 했다.
  31. 정확히 이 사건이 별거의 발단이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레버쿠젠에서 활동하다 스캔들이 밝혀진 시기에 아들 3명을 데리고 부인 지모네 발락은 뮌헨에 따로 거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