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에리 앙리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
티에리 다니엘 앙리
(Thierry Daniel Henry)
생년월일1977년 8월 17일
국적프랑스(France)
출생지레줄리(Les Ulis)
신체 조건188cm, 81kg
포지션스트라이커, 윙 포워드
등 번호14번(클럽)
12번(국가 대표팀) [1]
유소년 클럽
(1983~1994)
CO 레줄리 (1983~1989)
US 팔레조 (1989~1990)
ES 비리 샤티용 (1990~1992)
클레르퐁텐 (1992)
AS 모나코 (1992~1994)
프로 클럽
(1994~2014)
AS 모나코 (1994~1999)
유벤투스 FC (1999)
아스날 FC (1999~2007)
FC 바르셀로나 (2007~2010)
뉴욕 레드불스 (2010~2014)
아스날 FC (2012) (임대)
지도자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 (2016~)
국가 대표
(1997~2010)
123경기 51골[2]
별명킹(King)
2001 UEFA BEST 11
FW
다비드 트레제게
FW
티에리 앙리
MF
킬리 곤살레스
MF
지네딘 지단
MF
파트리크 비에이라
MF
데이비드 베컴
DF
비셴테 리사라수
DF
파트리크 안데르손
DF
사미 히피아
DF
코스민 콘트라
GK
산티아고 카니사레스
2002 UEFA BEST 11
FW
호나우두
FW
티에리 앙리
MF
데이미언 더프
MF
지네딘 지단
MF
미하엘 발락
MF
클라렌스 세도르프
DF
호베르투 카를로스
DF
크리스티안 키부
DF
알레산드로 네스타
DF
카를레스 푸욜
GK
리슈튀 레츠베르
2003 UEFA BEST 11
FW
뤼트 판 니스텔로이
FW
티에리 앙리
MF
파벨 네드베드
MF
지네딘 지단
MF
데이비드 베컴
MF
루이스 피구
DF
호베르투 카를로스
DF
파올로 말디니
DF
알레산드로 네스타
DF
파울루 페헤이라
GK
잔루이지 부폰
2004 UEFA BEST 11
FW
안드리 셰브첸코
FW
티에리 앙리
MF
파벨 네드베드
MF
호나우지뉴
MF
마니시
MF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DF
애쉴리 콜
DF
히카르두 카르발류
DF
알레산드로 네스타
DF
카푸
GK
잔루이지 부폰
2006 UEFA BEST 11
FW
사무엘 에투
FW
티에리 앙리
MF
호나우지뉴
MF
카카
MF
세스크 파브레가스
MF
스티븐 제라드
DF
필립 람
DF
카를레스 푸욜
DF
파비오 칸나바로
DF
잔루카 잠브로타
GK
잔루이지 부폰
2006 FIFPro World XI
FW
호나우지뉴
FW
티에리 앙리
FW
사무엘 에투
MF
카카
MF
지네딘 지단
MF
안드레아 피를로
DF
잔루카 참브로타
DF
존 테리
DF
파비오 칸나바로
DF
릴리앙 튀랑
GK
잔루이지 부폰
2003 FIFA 올해의 선수상
수상
지네딘 지단
2위
티에리 앙리
3위
호나우두
2003 Ballond'or
수상
파벨 네드베드
2위
티에리 앙리
3위
파올로 말디니
2006 Ballond'or
수상
파비오 칸나바로
2위
잔루이지 부폰
3위
티에리 앙리
2003-04 유러피언 골든슈
티에리 앙리
2004-05 유러피언 골든슈
티에리 앙리 / 디에고 포를란
아스날 FC 역대 주장
파트리크 비에이라
(2002~2005)
티에리 앙리
(2005~2007)
윌리엄 갈라스
(2007~2008)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릴리앙 튀랑
(2008)
티에리 앙리
(2008~2010)
파트리스 에브라
(2010)
"나는 사람들이 나의 이름을 기억하길 원한다"
KING HENRY

아스날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이자 프리미어 리그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

프리미어 리그 역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이자 가장 많은 득점왕을 차지한 전설적인 공격수.[3][4]

레블뢰 군단의 레전드이자 역대 최다 득점자

1 출생 및 어린 시절

1977년 8월 17일[5] 파리 근교 에손 주(L'Essonne)의 도시 레줄리(Les Ulis)에서 태어났다. 출생지가 빈민가 지역이라 환경이 좋지 않았다고 하며 앙리 역시 불량청소년들과 어울리면서 악명을 떨쳤다고 전해진다.[6]

앙리의 아버지도 축구 선수였기에 불량스런 생활을 청산하고자 축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어린 앙리도 축구에 관심을 보였지만, 타고난 신체의 유연성과 폭발적인 스피드를 유심히 지켜본 학교 체육선생의 권유로 육상 허들 선수를 하기로 한다. 이후 육상만 하다가 육상의 길을 접고 다시 축구선수가 되기로 한다. 그 계기는 바로 네덜란드의 축구선수 반 바스텐이었다. 프랑스 국가대표팀에서 백넘버 12번을 달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7]


2 클럽 경력

2.1 AS 모나코

AS 모나코 시절, 단짝 다비드 트레제게와 함께

1992년, 앙리는 클레르 퐁텐 축구 아카데미에 입단해서 두각을 나타냈고[8] 이듬해인 1993년 AS 모나코 유스팀에 들어갔다. 이때 모나코의 감독이 바로 그 유명한 아르센 벵거.[9]

앙리의 첫 프로 경기는 1994년 8월 31일 OGC 니스와의 경기. 다음달인 9월 17일에 벵거 감독이 해임되었지만 이후 감독들에게도 역시 신뢰를 받았다. 1996-97 시즌 모나코가 리그와 컵 더블을 하며 앙리 역시 커리어에서 첫 우승을 기록한다. 자국에서 열린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윙 포워드로 출전하여 팀 내 최다 득점을 기록, 프랑스의 월드컵 우승에 기여한다.

98년 월드컵의 우승 이후 1998-99 시즌 중반까지 다소 부진했고, 1999년 1월에 겨울 이적 시장에서 세리에 A의 명문 유벤투스로 향하게 된다.

앙리는 모나코에서 4시즌 반 동안 141경기에서 28골 37어시스트를 기록했다.


2.2 유벤투스

앙리 커리어의 암흑기

델 피에로가 시즌 아웃을 당하며 리그에서 부진하던 유벤투스는 1250만 유로라는 거금을 들여 앙리를 데려왔는데 망했어요. 앙리의 장점은 탁월한 돌파와 스피드였는데 유벤투스에서는 앙리의 스피드와 돌파력만 가지고 윙에 쳐박은게 문제다. 모나코에서 데뷔할때부터 앙리는 스트라이커로 데뷔했다.

이 때 유벤투스의 감독으로 새로 부임한 인물이 카를로 안첼로티였는데 루치아노 모지에게 앙리가 스트라이커 롤을 소화 할 수 있냐고 물어보고 모지가 그냥 윙만 뛸줄 안다길래 판매에 찬성을 했다. 참고로 안첼로티가 가장 후회하는게 이때 앙리를 스트라이커로 써보지도 않고 팔아버린것이라고. 그리고 앙리를 팔라고 한 모지는 승부조작으로 유베를 제대로 말아먹는다

유벤투스에서 앙리는 반 시즌 동안 16경기 3골이라는 다소 초라한 성적을 기록했다. 팬들도 월드컵 거품이 껴있다고 비판을 가했고 앙리는 실의에 빠져있었다. 이 6개월이 앙리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최악의 시기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유베도 끝내 리그에서 6등을 기록한다.

위기에 빠진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인물은 프로 데뷔의 은사인 아르센 벵거였다. 레알 마드리드로 니콜라 아넬카를 보내며 2000만 파운드가 넘는 어마어마한 돈[10]을 거머쥐고 있던 그는 의외로 세리에 A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던 윙어에게 러브콜을 보낸다.


2.3 아스날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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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날의 왕

아스날의 감독은 자신을 데뷔시켜준 벵거였고 이미 비에이라나 프티같은 프랑스 국대 동료도 있어서 적응이 어렵지 않았다. 거기에 앙리를 가장 잘 서포트해줄 수 있는 데니스 베르캄프라는 테크니션도 있었다. 프리미어리그는 전세계에서 가장 스피디한 리그여서 앙리와 쿵짝이 잘 맞았다. 이러한 점들이 앙리의 성공 요소로 꼽힌다. 아스날에서 앙리는 4차례의 득점왕을 차지했고, 03/04, 04/05, 05/06시즌에는 3연속 득점왕을 차지하면서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 EPL 득점왕은 판 니스텔로이가 단 한번 페널티킥을 몰아차면서 25골로 간신히 득점왕을 한번 한 2002-2003 시즌 이외에는 모두 앙리가 차지했다.[11] 그나마 그 시즌도 득점왕 못했다고 못한 것도 아니고 PK골도 없이 24골, 23어시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만들어냈다. 아스날도 앙리의 활약 속에 이 기간동안 2번의 리그 우승에 성공했다. 전설적인 무패우승'도 바로 이 때. 2000년대 중반까지 말 그대로 아스날의 왕이자 EPL의 왕으로 군림했으며, 특히 아스날에서의 기록은 언터처블 그 자체. 앙리가 아스날에서 기록한 총합 226골은 아스날 클럽 역사상 최다골이었다. 그리고 2012년 1월 10일 임대 확정 후 리그에서 1골, FA컵에서 1골을 추가하며 자기가 자기 기록을 경신 하였다.

2.3.1 1999-2000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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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몇 경기에서는 굉장히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줬지만[12] 그냥 적응기였을 뿐이라고 말하기라도 하듯 9월 초 사우샘프턴과의 아스날 역사 첫골을 시작으로 첫 시즌부터 20골을 넘게 득점했다[13]. 벵거는 유벤투스에서 윙 포워드로 뛰던 앙리에게 스트라이커의 임무를 주고 본격적으로 활용했다. 아스날의 패싱 축구와 공간침투는 피지컬보다는 스피드에 의존하는 앙리에게 안성 맞춤이었다.
아스날에서 첫 시즌 프리미어리그에만 31경기 17골을 기록했으며 전체 성적은 47경기에서 26골 1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2.3.2 2000-2001시즌

유로 2000을 우승하고 개막된 아스날에서의 두 번째 시즌. 앙리와 함께 유로2000 우승의 주역인 윌토르와 피레스가 아스날에 합류하면서 팀워크가 한단계 좋아졌다. 거기에 기존에 있던 데니스 베르캄프와의 호흡도 갈수록 좋아지면서 앙리는 팀 내 최다골을 기록했고 프리미어리그 득점 3위에 랭크된다. 두 시즌 연속 리그에서 17골을 기록했다.
다만 첫시즌과 두 번째 시즌에 맨유의 기세가 너무 강할 때여서 아스날은 리그 우승 판도에서 잠시 밀려나있을 시기였기에 트로피와는 인연이 없었다.

2.3.3 2001-2002시즌

아스날의 주장인 토니 애덤스가 은퇴하고 토트넘의 주장인 솔 캠벨이 자유계약으로 아스날로 온 시즌. 캠벨이 수비적으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아스날 역시 더 강해졌고 때맞춰 로베르 피레스가 적응을 끝마치고 엄청난 활약[14]을 보이며 앙리와 완벽한 호흡을 맞추었고 이는 아스날의 프리미어리그와 FA컵 더블을 기록으로 이어졌다. 앙리는 24골로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

2.3.4 2002-2003시즌

리그에서 막판 뒷심으로 맨유에게 역전 우승을 당했고 앙리 본인도 반니에게 득점왕을 내주었다. 하지만 24골 2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전 시즌보다 더 좋은 모습을 보였다. 토트넘전에서 80미터를 단독으로 질주해 골을 넣은 시즌이 백미. 득점왕이 유력했으나 루드 반 니스텔루이가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페널티 킥으로 한 골을 추가하며 아쉽게 1골차로 득점 2위에 머물렀다.

2.3.5 2003-2004시즌

그 유명한 무패 우승 시즌. 30골로 다시 득점왕을 차지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앙리의 최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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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버리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넣은 골 장면.[15]

2.3.6 2004-2005시즌

25골로 2시즌 연속 득점왕. 이 시즌에도 대단한 활약을 했지만 주제 무리뉴가 감독으로 부임한 첼시가 무려 승점 95점[16]을 쓸어담는 바람에 아스날은 83점을 기록하고도 2위에 그쳤다. 맨유와의 FA컵 결승전에서는 부상으로 뛰지 못했다.

2.3.7 2005-2006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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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날의 옛 홈구장 하이버리에서의 마지막 시즌. 주장인 비에이라가 떠나면서 앙리가 새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이 시즌에 챔피언스리그 프라하 원정경기에서 역전골을 터트리며 이안 라이트를 제치고 아스날 역사상 최다득점자가 된다.

리그에서 27골로 3시즌 연속 득점왕을 차지했다. 팀은 전술의 중심인 비에이라가 이적하면서 많이 약해졌고 마지막 경기에서야 겨우 4위를 할 수 있었다. 하이버리 경기장에서의 마지막 경기인 프리미어리그 38라운드 위건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팀을 챔스권 진입에 안착시켰다. 마지막 PK골을 넣고 잔디에 키스하며 자신의 전성기와 함께한 하이버리 경기장과 영원히 작별을 고했다. 챔피언스 리그에서 유벤투스, 레알 마드리드의 강호들을 차례로 꺾으며 결승에 진출한다. 특히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원정에서 레알 마드리드의 수비진을 농락하며 기록한 골은 진정 끝판왕의 포스. FC 바르셀로나와의 결승에서는 솔 캠벨이 선취골을 기록하지만, 옌스 레만이 퇴장당하면서 수적 열세에 시달리다가 끝내 역전패를 당하며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빅 이어를 놓치고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메달을 받고 내려가는 앙리. 그리고 3년 후 앙리는...

2.3.8 2006-2007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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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날의 새로운 구장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에서의 첫 시즌. 그리고 앙리의 아스날 커리어 마지막 시즌.

앙리가 최고 선수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자 큰 힘이었던 동료들은 에미레이츠 이전 정책으로 구단이 긴축재정에 들어감에 따라 어쩔수 없이 하나둘 정리되고 있었다.
비에이라와 에두는 이미 떠났고 베르캄프는 하이버리 경기장과 함께 은퇴했고[17] 피레스는 비야레알로 갔다. 주전경쟁에서 밀려난 솔 캠벨은 포츠머스로, 애슐리 콜은 첼시로 떠났다. 기대를 많이 받던 호세 레예스도 프리미어리그에 끝내 적응하지 못하며 임대형식으로 스페인으로 떠난다. 프레드릭 륭베리는 예전같지 않았다. 팀은 세스크 파브레가스를 주축으로 미래를 기약하고 있었다.
베르캄프와 피레스등과 환상의 궁합을 보이던 앙리는 젊은 선수들과의 호흡에도 다소 문제를 보였다. 사실 호흡은 그럭저럭 맞았는데 문제는 베르캄프나 비에이라 같은 선수들과 너무 잘맞아서 상대적으로 안 맞아보였다는 것이다.

원래 본인이 워낙 벤치에 앉아있는걸 싫어하는 성격이라 크지 않은 부상을 입었을때는 출전을 강행했고 국가대표팀에서의 혹사 또한 이어졌다. 선수 본인도 최근 몇 년간 많은 경기를 뛰었고, 또 스피드와 활동량을 주무기로 하기에 신체적인 노쇠화가 점점 진행중인 상태였다. 게다가 월드컵에서 프랑스는 결승전까지 올랐으니 시즌 초반의 부진은 어느 정도 예상된 결과였다. 결국 시즌 중반 이후 부상으로 인해 시즌 아웃되어 전력에서 이탈했다. [18]

시즌이 끝나고 무한도전을 찍었다. 당시 개인 전용기로 밤에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했는데 한국의 아스날 팬사이트인 ‘하이버리’에서 버스를 빌려 30명정도가 앙리를 열렬히 환영하기도.. 당시만 해도 아스날 소속이었는데 얼마 후 앙리가 바르셀로나로 떠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오게 된다. 구너들은 당연히 결사 반대를 외치는 중.

하지만 앙리는 챔스 우승권의 팀중에 호나우지뉴, 메시, 에투가 있던 바르셀로나로 이적하게 된다. 벵거도 앙리의 피지컬이 떨어지고 있었고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대한 열망을 알고 있었기에 이름값에 비해 싼 가격인 2천 4백만 유로에 이적을 허락했다. 다음 시즌 구상하는 새로운 팀에 앙리가 적응을 못한다고 판단하며 그를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19] 프리미어리그, FA컵, 유럽선수권대회, 월드컵 등 거의 대부분의 우승컵을 들어올린 앙리에게 남은 것은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었다. 아스날은 그 전에 빅이어를 들어올릴 절호의 찬스를 놓쳤고 경기장 이전으로 인한 재정 긴축정책 때문에 당분간 팀전력이 불안정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앙리의 아스날 생활이 마무리 되었다. 369경기 226골. 이 기록은 몇 년 후에 임대생활을 통해서 업데이트된다.


2.4 FC 바르셀로나

2.4.1 이적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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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입단 이후 등번호는 기존의 14번을 그대로 달았다. 당시 메디컬 체크에서 바르셀로나 의료진에게 "이 몸으로 어떻게 축구했냐 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앙리의 몸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라는 이야기가 돌곤 하는데, 이런식의 이야기는 선수 이적시 선수 당사자의 사기진작(?), 언론 플레이 등의 이유로 나오는 이야기라 엄청나게 과장된 이야기라는걸 감안해야 한다. 아르연 로번의 경우를 예를 들면 그가 첼시에서 레알 마드리드, 레알 마드리드에서 바이에른 뮌헨으로 옮길때마다 새 소속팀의 의료진은 전 소속팀 의료진의 선수 관리 수준을 폭풍 디스 하였다. 노인에게 세계구급 의료진도 별 수 없다! 역시나 바르셀로나 이적 후 앙리는 그 엉망인 몸으로(?) 상대편 수비진을 피지컬로 압도하는 플레이를 자주 선보여줬다. 위 서술대로 축구를 못 할 몸이었으면 전혀 불가능할 일. 물론 부상을 안고 뛰면서 몸에 부하가 심하게 걸렸던건 맞다. 아스날에서의 마지막 시즌을 날리다시피한건 이 때문이다.

2.4.2 활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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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본인 역시 움직임 자체는 예전 전성기만 못했지만 골 결정력은 살아 있어서 바르셀로나의 왼쪽 윙포워드로 출전하면서 티에리 앙리-사무엘 에투-리오넬 메시의 공포의 H-E-M 삼각편대를 구성하면서 셋 다 엄청난 스탯놀이를 했다. 다만 앙리 팬들에게 아쉬운 점이라면, 왼쪽 윙포워드로 뛰던 점일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벤투스 때와는 달리 원숙해진 앙리는 윙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보였다는 점이다. [20] 결국 2008/09 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한풀이에 성공한다. 앙리는 시즌 26골을 기록하면서 바르셀로나의 트레블을 넘은 6관왕이란 대업에 기여한다.

우승 이후 꿈에 그리던 빅 이어를 만지며 기뻐하는 앙리의 모습. 이길 수 없다면 합류하라

하지만 2009/10 시즌에는 폼이 너무 하락한데다[21] 페드로 로드리게스, 보얀 크르키치 등 아래서 치고 올라오는 신예들과 경쟁해야했고 결국 페드로에게 밀려났다.[22] 피지컬 하락에 따른 노쇠화의 진행과 신예들의 성장으로 자리를 잃은 앙리는 2010년 바르셀로나가 스페인 국가대표 공격수인 다비드 비야를 영입하면서 팀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앙리는 2010년 여름, FC 바르셀로나에서 미국 MLS의 뉴욕 레드불스로 이적한다.

2.5 뉴욕 레드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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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가 되었다

첫 시즌 활약은 만족스럽지 않았으나, 이후 18경기 동안 11골을 넣고 주장까지 하며 클래스는 영원하다라는 말을 증명했다. 미국에선 당연하게도 헨리라고 부르는 듯.(…) 호날두도 혹시나 미국가면 로날도 된다.

2.5.1 2012년 : 다시 아스날로

2012년 1월부터 아스날로 2개월간 단기 임대가 확정되었다. 이로서 5년 만에 자신의 최전성기를 누렸던 팀으로 복귀를 하게 되었다. 박주영 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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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0일 FA컵에서 리즈 유나이티드를 만나 자신의 '후계자' 시오 월콧과 나란히 교체 출전하였고 0:0으로 답답하던 상황에서 78분 경 [결승골]을 뽑아냈다. 스피드는 느려졌지만 오프사이드를 뚫는 순간적인 움직임과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슈팅으로 역시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말 그대로 왕의 귀환. 더불어 기록은 현재진행형 ㅎㄷㄷ... 샤막 체임벌린 박주영 베나윤 다 필요없고 앙리 데려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만 선수들과의 호흡 자체는 아직 완벽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앙리 본인 탓이라기보다도 팀 호흡 자체가 그리 잘 맞고 있지 않는 아스날이긴 하지만. 블랙번을 7-1로 폭격한 앙리의 마지막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경기에서 팀의 7번째 골을 기록했는데[23]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은 축제분위기였다고 한다. 그 직후 2월 12일에 열린 리그 25 라운드 선더랜드 AFC 원정에서 인저리 타임에 극적인 역전골을 작렬하여 2:1 승리에 기여했다. 이로써 자신의 프리미어리그 통산 득점 기록도 1골 더 올려놨다.[24] 아스날 통산 376경기 228골 92어시스트. 은퇴를 눈앞에 두고 있던 시점이라 선수로서 아스날에 올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고 이 기록이 사실상 아스날의 최종 기록이라고 보면 될 듯.

2.5.2 임대 이후

아스널 임대기간 동안의 활약에 고무됐는지 2012시즌엔 2011년보다 한층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준 편이다. 시즌 성적은 25경기 15골 12어시. 물론 아스널 리즈시절에 비하면 좀 아쉬운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팀의 플레이오프 진출에 큰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부인할수는 없다.

2014 시즌 이후 레드불스와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을 것이고 팀을 떠날 것이라고 한다. 2014 MLS 시즌 종료 이후 앙리는 선수생활 연장 대신 현역에서 은퇴하기로 결정하였다.[기사]

3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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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청소년 대표로 유럽 청소년선수권대회 우승 트로피를 안긴다. 1997년 세계 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맹활약하며 세계적으로도 유망한 선수로 인식된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티에리는 96년 프랑스 풋볼에서 선정한 올해의 유망주상, 97년 프랑스 프로축구협회에서 선정한 올해의 유망주상을 수상하면서 프랑스 최고의 유망주임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이후 뽑힌 국가대표에서의 활약도 준수한 편으로, 프랑스가 세계최강이라 부르짖던 때 98년 월드컵 및 유로2000을 쓸어담았으며 2006 독일월드컵은 준우승을 기록하였다. 98월드컵에서는 대단한 활약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공격수 중 최다 득점자/최장 시간 출장자가 앙리.[25][26]트레제게와의 조합은 이론상 완벽했지만[27] 현실은 시궁창으로 트레제게는 앙리에게 밀려 로테이션으로 활약했으며, 투톱으로 나오는 경기에서는 둘다 부진하는 등 궁합이 좋지 못했으나, 이상하게 비에이라-마케렐레의 중앙라인처럼 뛰어난 조합인 듯 평가 받았다.[28]7경기 0골 기바르쉬가 있는데 저 정도면

센추리클럽 멤버이며, 2007년에는 플라티니가 가지고 있던 국가대표 최다골 타이틀을 경신해버렸다. 123경기 51골.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유럽대륙 플레이오프 아일랜드와의 경기에서 프랑스의 [결승골을 만드는 과정에서 핸들링을 했는데] 심판이 이걸 골로 인정하면서 구설수에 올랐다. 프랑스는 이렇게 본선에 올라가놓고서도 우루과이와 비겼을 뿐 나머지 두 팀에게 연달아 패배하면서 탈락했다. 이에 아일랜드 언론은 일제히 "프랑스 탈락은 쌤통이다."라며 대서특필했다. 쌤통 항목에 이 문단의 글귀가 그대로 적혀 있다.

앙리 본인은 경기 후에 핸들링임을 인정하긴 했지만 해결책은 재경기밖에 없다라 말하면서 자신의 잘못에 대해 얼렁뚱땅 넘어가는 듯한 태도를 보여 전세계적으로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한동안 아일랜드에서는 앙리를 죽입시다 앙리는 나의 원수 후덜덜한 분위기가 계속되었으며 급기야 수상까지 프랑스 대통령에게 재경기를 요청하는 사태까지 가고 말았다.
지단 이후의 프랑스를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팀은 팀대로 막장의 끝을 보여주면서 예선 무승 탈락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가지고 귀국했다. 그나마도 앙리가 활약할 수 있는 기회조차 별반 주어지지 않았다. 아니, 워낙 막장으로 굴러가는 와중에 아오안 취급을 받고 있었다.지단은 박치기라도 했지 그리고 이어진 국가대표 은퇴 선언.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로서는 여러모로 안습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4 은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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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잘알의 대명사

친정 팀 아스날에서 아르센 벵거 감독의 지도 아래 코치 연수를 받을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으나, 일단 영국 스카이스포츠에서 개리 네빌제이미 캐러거와 함께 축구 방송 중계를 한다고 밝혔다. 해설판의 맨유vs리버풀vs아스날 스카이스포츠와 코치직 겸직을 가능한 계약을 맺었기에 웨일즈 축구협회에서 지도자 라이센스를 취득하기 위한 연수를 받기 시작했고, 2015년 2월 20일 부로 아스날의 U-16팀 코치에 부임했다.

월드컵 기간에 BBC에 분석가로 출연했지만, 스카이스포츠가 워낙 거액을 베팅해서 스카이로 가게 되었다. 기존 스타 분석가인 개리 네빌이나 제이미 캐러거보다 두배가 넘는 연봉을 받는다.

해설가를 맡은 이후 문제가 될 만한 발언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킨 적이 몇 번 있다. 치차리토가 극적인 골을 넣고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세리머니를 하자 도움을 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챙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는데, 별 문제 없지 않느냐는 의견이 우세했다. 최근엔 첼시가 최근에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한 팀들중 최고 수준이 아니었다고 비꼬았다.이건 15-16 시즌 증명되었다[29] 친정 팀인 아스날의 스트라이커인 올리비에 지루에 대해서는 영입으로 대체가 필요하다고 해 구너들의 갑론을박을 불러일으켰다.그리고 맨유에서 복귀전을 치뤘다.어쩌다 보니 2015년 후반기에 들어서 거의 맞는 말로 판명이 되었다(...) 물론 첫 사건인 치차리토와 호날두사이는 여전히 그냥 상관없다는 의견이 대다수이나 첼시가 진짜 몰락했고 지루도 탄식형 스트라이커로 각성하면서 뒤의 두 사건은 어느정도 맞는 말임이 증명되어 버렸다. 축잘알 행인가?

이후 아스날의 U-18 팀 코치 제의를 받았으나 방송 활동에 제한을 건다는 이유로 거절한 후, 2016년 8월 26일 로베르토 마르티네스가 새로운 사령탑으로 부임한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의 수석코치로 부임하게 [됐다].

한편 스카이스포츠의 해설위원도 겸직하고 있는 앙리는, 9월 19일 프리미어리그 5라운드 토트넘 핫스퍼선덜랜드 AFC의 경기를 보고 [손흥민이 토트넘에서 활약할 만한 선수임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5 지도자 경력

5.1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 시절

수석코치로 처음으로 맞는 2016년 9월 2일 3시 45분(한국시간)에 보두앵 국왕 경기장 (King Baudouin Stadium)에서 열린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A매치 평가전에서 벨기에 대표팀은 다비드 실바에게 멀티골을 내주며 0:2로 패했다.


6 플레이 스타일

무지막지 하게 빠른 스피드 & 파워를 겸비한 돌파와 공간침투 . 그에 이은 골 결정력도 탁월해서 수 차례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으며 어시스트 능력도 있어서 20-20 클럽에 가입하기도 했다. 특히 골대 측면에서 시도하는 오른발 감아차기는 소위 앙리슛이라고 불릴 만큼 명품 슈팅. 부드럽고 정확한 슛으로 유명하다. 다만 전성기에도 세트피스에서 헤딩 능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었으나, 그가 전성기를 보낸 아스날과 바르셀로나 모두 헤딩을 요구하는 팀이 아니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프리킥도 굉장히 잘 찼다.

그리고 베르캄프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원래부터 테크닉이 ㄷㄷ 해서 자연스럽게 된 것인지 몰라도 플레이메이킹에도 상당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아스날이 베르캄프 & 앙리 시절부터 ~ 페르시 & 아데바요르시절까지 442를 구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다재다능한 공격수의 존재가 컷는데 그 시발점이 된 선수이기도 하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좌우 윙어들과 콤비네이션이다. 피레스나 융베리가 어그로를 끌면서 그 공간에 앙리가 침투해서 득점을 한다거나, 그 역의 상황이 나오던가 하는 방식으로 득점을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현재 433 이건 4231에서 주로 보여주는 2선 윙포워드의 원형이라고 봐도 될 플레이를 한게 바로 과거의 아스날이었다.그리고 그 중심에는 앙리와 베르캄프가 있었다.

참고로, 과거에는 이 롤을 베르캄프가 홀로 담당하였다. 이안 라이트나 아넬카도 EPL 탑클래스의 선수이지만, 앙리처럼 경기 자체를 조율한다기 보다는 적극적인 침투로 득점에 강한 선수들이였다. 실제로, 베르캄프는 자신의 파트너로 앙리보다 아넬카가 더 직선적이어서 좋았다고 말한 적도 있다.

현존하는 스트라이커들 중에서는 오바메양과 레반도프스키 ( 꿀벌 시절 )가 이와 유사한 모습을 보여준다 폭발적인 스피드와 공간침투를 오바메양이 닮았다고 한다면, 전체적인 플레이 스타일이나 다양한 지점에서 득점을 할 수 있는 능력은 레반도프스키가 많이 닮고 있다..

7 앙리에 대한 말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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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는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입니다. 티에리는 스트라이커에게 필요한 모든 자질을 겸비하고 있습니다. 스피드, 파워, 그리고 골센스. 그와는 통하는 게 있어서 어디에 패스를 넣으면 좋을지 100% 이해하고 있습니다."

- 앙리의 영원한 단짝 데니스 베르캄프[30]
"티에리 앙리는 내가 지금까지 봐 온 선수 중 최고의 성장속도와 골 감각을 가지고 있다. 앙리는 프랑스 역대 최고의 골 감각을 갖춘 선수다."

- 미셸 플라티니
"티에리 앙리는 상대편 수비수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이다. 지능적이고, 팀이 원할 때 언제든 골을 터뜨려 주는 선수이다."

- 요한 크루이프
"전세계 모든 선수들을 둘러봤지만 티에리 앙리야말로 바르셀로나의 스타일에 가장 적합한 선수다. 바르셀로나가 앙리를 데려올 수만 있다면 당장 그렇게 해야 한다."
"나에게 있어 앙리가 바르셀로나의 유니폼을 입고 함께 공격을 이끄는 것은 정말로 꿈만 같은 일이다. 앙리의 리듬과 스피드, 기술은 그를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할 수 있게끔 만든다."
"나는 그들의 열렬한 팬이며 플레이를 보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인간적으로도 앙리를 존경한다. 축구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그의 모습은 내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 호나우지뉴
"만약 나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세계 최고의 선수인 티에리 앙리와 함께 뛸 수 있는 아스날을 선택할 것"

- 토마스 로시츠키[31] , 아스날 이적설이 나돌때, 앙리와 함께 하고싶다며[32]

8 여담

현재 EPL에는 시즌 MVP가 4개 있다. 선수단이 뽑는 PPY, 기자단이 뽑는 FWA, 팬들이 뽑는 FPY, EPL의 스폰서인 바클레이에서 주는 Barclays Player of the Year. 이 네 개의 상을 한 시즌 동안 독식한 것은 03-04의 앙리와 06-07/07-08의 호날두 둘 뿐이었으며, 최근에 13-14 시즌 루이스 수아레스가 MVP 4개를 석권하면서 겨우 3명으로 늘어났다.[33][34] 더불어 앙리는 00-01시즌부터 05-06시즌에 이르기까지 6시즌 연속으로 프리미어리그 올해의 팀에 선정되기도 했다. 팀에서 획득한 트로피 같은 것은 몰라도 순수하게 개인으로서 행사한 리그 지배력을 놓고 보면 EPL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프로축구 역사를 통틀어도 손꼽힐 수준.

영국의 모델인 니콜 메리와 결혼해서 딸을 낳았으나 곧 이혼했다.
딸의 이름은 Tea. 앙리는 엄청난 딸바보라고 전해진다.

무한도전피해자 중 한 명(...). 출연 후 이혼당하고 자신은 전성기에 비해 폼이 하락했다. 하지만 바르셀로나로 건너가 트레블을 달성. 다만 무한도전 덕분에 한국 내에서 호감형 선수로 주가가 올라갔다. 게다가 2007년에 출연한 지 6년이 지난 2013년에는 무한도전에 출연한 것을 매우 즐거운 추억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무한도전 멤버들과 했던 약속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라고[밝혔다].이제 약속했던 영국 한번 가봐야지.

아스날 시절 페널티 킥 키커 1순위였으나 본인이 얻어낸 PK를 본인이 차지않는 징크스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PK를 얻어내면 2순위 키커였던 로렌이 차거나 3순위였던 로베르 피레스가 PK를 찼다. 만약 그런 징크스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기록보다 더 많은 골을 넣었을 것이다.

최근에는 수염을 일부러(...) 기르는 듯한데 아랍인이 따로 없다 무한도전에 나왔던 그 앙리 맞나 싶을 정도.

축덕후가 많은 축구선수들 중에서도 최고의 축덕력을 자랑한다. 큰 경기는 물론 2~3부리그 경기까지 시청하는데, 심지어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후 처음으로 가진 심층 인터뷰에서는 영국 2부리그 축구경기를 틀어놓고 인터뷰를 할 정도.[35][36]

2016년 아스날과 바르셀로나의 챔피언스리그 2차전을 앞두고 두 팀사이에 앙리를 둔 [신경전이 펼쳐졌다]. 서로 자신의 팀에 있을 때의 앙리의 활약상을 경쟁적으로 올린 것. 앙리 의문의 1승

그리고 상복이 지지리도 없는 선수로 유명하다. 발롱도르에서 2위, 3위를 잇달아 기록하며 단 한 차례도 수상하지 못했다. 콩까지마 아스날을 더블로 이끌고 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2002년에는 월드컵의 부진으로 인해 호나우두에게 밀려 수상에 실패한다. 당시 발롱도르는 월드컵 활약도로 투표가 갈렸는데, 요한 크루이프는 아무리 월드컵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리그 활약도를 무시하고 투표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라며 앙리가 수상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납득할만한 결과라며 비판했다. 20-20을 기록한 2002/2003 시즌은 프랑스의 월드컵 광탈 충격의 여파와 아스날의 챔피언스 리그 부진으로 인해 2위에 그쳤으며, 아스날의 무패 우승을 이끌며 유러피언 골든슈, 프리미어 리그 골든부츠를 독식하고 모든 최우수 선수상을 싹쓸이한 2003/2004 시즌에는 수상이 유력했지만 아쉽게 실패한다. 마지막으로 상을 탈 기회였던 2006년에는 프랑스의 월드컵 결승을 이끌며 수상이 점쳐졌지만, 승부차기끝에 준우승에 그치면서 다시금 실패한다. 발롱도르가 없다는 점이 아스날 역사상 최다득점자, 바르셀로나의 트레블 주역, 프랑스에서 월드컵, 유로컵, 컨페더레이션스 컵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하며 국대 탑 스코어러로 등극한 앙리의 무시무시한 커리어에서의 유일한 흠이다.

인종차별 반대로도 유명해서, 인종차별반대 홍보대사도 하고는 했다. 그런 앙리가 오히려 인종차별을 했다고 한국내에서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2005년 1월 설기현이 소속된 울버햄튼 FC와의 FA컵 경기에서 날개짓 흉내를 낸 것이 인종차별이란 것이었다. 하지만 이 제스처는 'poule mouillee'[37]로 당시 2부 리그 소속이던 울버햄튼이 속칭 10백을 구사하는 것에 대해서 겁쟁이라고 가볍게 놀린 표현으로 [밝혀졌다]. 앙리가 유럽 축구의 인종차별반대 홍보대사이기도 했기 때문에 해외에서는 웃기지도 않는다는 반응이었고, 앙리 본인의 해명도 있어서 빨리 마감이 된 사건이었는데, 이후 인종차별 드립이 나올 때마다 가져다 붙이는 바람에 이미지가 이상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2006년 월드컵에서의 매너있는 모습으로 이미지회복을 다소 했고, 2007년 무한도전 출연으로 확실히 변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 이슈가 나오면 다시 은근슬쩍 꺼내서 쓰이기도 하는데, 인종차별 논란은 뒤늦게라도 알게되는 경우가 많은 반면에 해명과정은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 파리 변두리에서 인종차별을 받으며 성장했기에 인종차별 반대 홍보대사로 십수년째 활약중인 앙리를 생각해 보면 지금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없는 황당한 루머다.그럼 수아레즈는... 허나 사실 인종차별이라기보단 비매너적인 행위긴 하지만, 따져보자니 그렇다는 거지 축구 내의 관행으로 생각해 보면 별 거 아니다. 애초에 인종차별이랑 비매너는 완전 다른 문제이기도 하고...

여담으로 프랑스어 발음을 한국어로 옮기자면 띠에히 엉히에 가깝다. 프랑스인이랑 축구얘기 하다가 앙리얘기 꺼낼때 앙리라 그러면 못 알아먹는다.[38]

참고로, 국내에서는 루메니게등 역대급 레전드보다는 밑에 위치한 선수이지 않느냐 하는데... 최근에 유로 2016을 앞두고, 선수들이나 유럽팬들이 뽑은 역대 유로 베스트에서 스트라이커 포지션뿐만 아니라, 전 포지션을 보더라도 가장 높은 빈도로 뽑히기도 하였다.

9 기록

9.1 대회 실적

  • AS 모나코 (1994/95 - 1998/99)
    • 리그앙 : 1996/97
    • Trophée des Champions: 1997

9.2 득점 기록

시즌클럽소속리그리그FA컵대륙대회
경기득점경기득점경기득점
1994/95AS 모나코리그앙830000
1995/96AS 모나코리그앙1833010
1996/97AS 모나코리그앙3693091
1997/98AS 모나코리그앙3045097
1998/99AS 모나코리그앙1311050
1998/99유벤투스세리에 A1633000
1999/00아스날 FC프리미어 리그311751118
2000/01아스날 FC프리미어 리그351741114
2001/02아스날 FC프리미어 리그332451117
2002/03아스날 FC프리미어 리그372461127
2003/04아스날 FC프리미어 리그373044105
2004/05아스날 FC프리미어 리그32252085
2005/06아스날 FC프리미어 리그322721115
2006/07아스날 FC프리미어 리그17103171
2007/08FC 바르셀로나프리메라 리가301274103
2008/09FC 바르셀로나프리메라 리가291911126
2009/10FC 바르셀로나프리메라 리가2143080
2010뉴욕 레드 불스메이저리그 사커1121000
2011뉴욕 레드 불스메이저리그 사커26143100
2011/12아스날 FC프리미어 리그412110
2012뉴욕 레드 불스메이저리그 사커25152000
2013뉴욕 레드 불스메이저리그 사커30102000
2014뉴욕 레드 불스메이저리그 사커30105000
  1. 앙리는 마르코 판 바스턴요한 크라위프를 존경해 클럽에서는 크라위프의 14번을, 국가대표에서는 판 바스턴의 12번을 달고 뛰었다.
  2.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자, 2위는 41골의 미셸 플라티니
  3. 앙리는 01-02시즌부터 05-06시즌까지 총 4번의 득점왕을 차지했는데, 유일하게 02-03시즌만 루드 반 니스텔루이가 불과 1골 차이로 득점왕을 가져갔다. 만약 이 시즌 반니가 아니라 앙리가 득점왕을 차지했다면 앙리는 5년 연속 득점왕이라는 ㅎㄷㄷ한 기록을 세웠을 것이다.
  4. 대신 02/03시즌 앙리는 24골 23어시스트로 20-20이라는 또 하나의 대기록을 달성했다.
  5. 프랑스 축구 선수 윌리엄 갈라스와 생일이 똑같다. 1992년에는 클레르퐁텐 유스팀에서 잠시 같이 있었다. 이 둘은 나중에 아스날에서 재회한다.
  6. TiTi는 이때 붙은 별명으로 ‘불량소년‘이라는 뜻.
  7. 하지만 무한도전에서 직접 밝힌바 육상선수는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의 삼촌이 육상선수였다고.
  8. 클레르 퐁텐 출신에는 니콜라 아넬카, 윌리엄 갈라스, 루이 사하, 아부 디아비, 하템 벤 아르파등이 있다.
  9. 벵거는 1987년 여름부터 모나코의 감독이었다.
  10. 1997년 PSG에서 단돈 50만 파운드에 사왔는데 2시즌 쓰고 2250만 파운드에 레알로 팔았다. 이적료 차이가 40배가 넘는다.
  11. 다만 이런 기록을 바탕으로 몇몇 팬들은 앙리 > 호나우두, 반니, 쉐브첸코, 그 외 기타등등이란 공식을 남용하는데 꼭 이렇진 않다. 반니가 epl에선 앙리에게 뒤졌다지만 챔스에선 반 니스텔루이가 앙리를 압도하는 활약을 보였다. 단순히 경기당 골기록만 봐도 앙리가 0.44골이고 반 니스텔루이가 0.74골을 기록했으며 앙리는 한 번도 득점왕을 차지하지 못했으나 반 니스텔루이는 3차례나 득점왕을 차지했다.
  12. 이적 직후 공격수로 뛰라는 벵거의 지시에 '네? 저는 윙인데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후일 앙리가 은퇴할 즈음에 벵거는 앙리가 스스로 '봐요. 전 골을 못 넣잖아요.' 라고 밝혔다면서 골도 못 넣는 공격수 치고는 꽤 잘했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잠만 니가 못하면 우리는 병신이냐
  13. 스트라이커 롤에 자신감이 없었던 앙리에게 아스날의 레전드 [마틴 키언]이 아스날 선수였던 어느 선수의 득점 영상을 보여주며 '너보다 발도 느리고 키도 작은 선수였지만 아스날에서 100골을 넣었다.'는 말을 해주었고 이것으로 앙리의 마인드가 바뀌었다는 얘기가 있다. 앙리보다 키도 작고 발도 느렸던 그 선수는 바로 이안 라이트.
  14. 로베르 피레스는 2001/2002 시즌 어시스트왕과 PFA 올해의 상 그리고 FWA 올해의 상을 휩쓸었다.
  15. 처음에 넘어진 선수가 독일의 디트마어 하만이고 골 넣기 직전에 훼이크에 속은 선수가 제이미 캐러거이다.
  16. EPL 역대 최다승점
  17. 다만 은퇴 경기는 에미레이츠 개장 기념 경기였다. 2006년 7월 22일 베르캄프의 전 소속팀인 아약스와의 경기. 60세가 넘은 요한 크루이프도 베르캄프 기념경기에 와서 뛰었다.
  18. 2006/07시즌 초반 아스날은 월드컵까지 풀로 뛴 앙리를 보호하기 위해 가능한 한 앙리를 벤치에 앉혔지만 프랑스 국가대표팀 감독인 도메네크는 그런거 없이 친선경기에도 앙리를 풀타임 소화시켰다
  19. 이때 아스날팬뿐만 아니라 많은 축구팬들이 앙리의 빈자리를 걱정했다. 대체자라고 영입한건 크로아티아리그의 에두아르도 다 실바에 뜬금없이 오른쪽 풀백 바카리 사냐를 영입한게 전부. 그런데 막상 새 시즌이 시작되더니 아데바요르가 갓데발이 되면서 1위를 질주했다. 물론 시즌 후반 이후에 부상신의 강림으로 팀전력이 흔들리면서 DTD하여 우승엔 실패했지만 적어도 시즌 전체로 볼때 앙리의 공백은 느껴지지않았다.
  20. 앙리의 전성기 시절이라도 에투와 센터포워드 대결에서 과연 누가 우위를 점할지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인데, 앙리는 하락세였고 윙포워드 소화능력은 앙리가 훨씬 뛰어났다. 그리고 바르샤의 윙포워드 자리에서 앙리만큼 해준 선수는 그다지 없었다. 페드로가 메시 비야 페드로 라인의 일원으로 활약했지만 앙리보다 앞섰는가를 묻자면 섣불리 대답하기 어렵다. 산체스는 바르셀로나에서는 기복이 좀 심한편이었고 비야 역시 활약상이 만족할 수준은 아니었다. 허나 네이마르가 충공깽스러운 활약상을 선보이며 윙포워드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21.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유일한 이유였던 챔피언스리그 우승이 이뤄지면서 바르셀로나에서의 동기부여 자체가 없어진 상황이었다. 게다가 고질적인 등부상이 악화되어 신체능력이 급감하였다.
  22. 앙리가 결정적으로 신예 페드로에게 밀려난 원인은 수비 가담 문제였다. 바르셀로나의 수비시 전방압박에서 메시와 앙리는 최전방을 압박하는 에투의 뒤를 받쳐 주면서 패스 루트를 측면으로 한정시키거나 직접적인 가로채기를 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본래 센터포워드인 앙리는 측면에 너무 많은 공간을 내 주는 경향이 있었다. 공격 스탯이야 나무랄데 없었지만 말이다.
  23. 이후에 자책골로 변경되었다.
  24. 이 시즌 아스날은 승점 1점 차이로 토튼햄을 제치고 3위를 차지했는데 만일 이 골이 터지지 못했으면 아스날이 챔스를 못갈 뻔 했다.
  25. 하지만 98 월드컵의 국대 주전은 조르카예프, 뒤가리, 기바르쉬였으며 트레제게, 앙리는 후보 선수였다. 유로 2000에서는 주전 원톱으로 출장.
  26. 앙리가 1998 월드컵에서 에메 자케 감독의 최초 계획에는 로테이션 정도로 평가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대회에서는 많은 경기를 선발로 출전했다. 그 이유는 주전 스트라이커 기바르쉬가 매우 부진했기 때문이며 앙리의 컨디션이 좋았기에 주로 왼쪽 윙포워드로 출전해 특유의 스피드를 바탕으로 좋은 활약을 펼쳤다. 괜히 1998 월드컵 프랑스 대표팀 공격수 최다 출전시간 및 최다 득점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실질적으로 앙리는 1998 월드컵에서 주전이었다고 평가해도 무방하다. [매치 리포트]
  27. 폭발적인 스피드와 돌파 그리고 완벽한 마무리를 보여주는 앙리, 피지컬과 헤딩 경합이 우수하며 골 냄새를 잘 맡는 트레제게의 조합은 이론적으로는 완벽한 빅 앤 스몰 콤비다. 앙리가 188cm인건 함정
  28. 트레제게의 영혼의 파트너로 꼽는 공격수는 유벤투스의 파트너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였으며, 둘의 찰떡궁합은 역대 최고의 투톱을 뽑을 때 거론될 정도이다. 참고로 앙리와 정말 영혼의 파트너였던 선수는 베르캄프다. 비에이라-마케렐레 라인은 그야말로 현시창으로 2006 독일 월드컵을 제외하면 이름값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사람들은 도메네크의 유일한 업적이 마케렐레-비에이라 라인의 완성이라 말한다.
  29. 물론 이건 첼시 팬들도 동의하는 바였다. 괜히 첼시의 챔스 우승이 기적이라고 평가받겠는가?
  30. 앙리를 논함에 있어 벵거와 함께 결코 빠져서는 안될 인물. 앙리의 폭발적인 스피드와 왕성한 활동량 그리고 베르캄프의 넓은 시야와 정확한 패스는 그야말로 프리미어리그를 넘어 축구 역사에 남을 완벽한 투톱조합이었다. 서로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파트너였던 셈. 하지만 많은 이들이 잘 모르는 것인데 베르캄프와 앙리는 경기장 안에서만 그랬고(...), 경기장 밖에서는 지극히 사무적인 사이라고 한다.
  31. 로시츠키는 사실 앙리가 아스날에 오기 이전부터인 1997-1998시즌 더블을 할 당시에도 베르캄프의 플레이를 좋아했던 체코의 구너였다.
  32. 로시츠키가 06-07시즌에 아스날로 오면서 앙리의 마지막 시즌을 함께 보내게 되었다.
  33. 그런데 수아레스는 둘과는 다르게 이 시즌에 리그 우승을 못했다...지못미.
  34. 물론 FPY나 바클레이 상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상이긴 하다.
  35. 그렇지만 이건 선수들 취향에 따른 문제로, 축구 별로 안 보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앙리처럼 지독하게 보는 선수도 많다. 예를 들면 에투는 경기의 흐름을 관찰하기 위해 시간 나면 그냥 축구 나오는 아무 채널이나 틀어서 세계 어떤 리그나 시청한다고 한다.
  36. 반면 직업으로 축구선수를 하지만 여가시간에는 축구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37. 직역하자면 물에 젖은 닭
  38. 실제 프랑스어의 r은 굳이 우리말로 치면 ㅎ에 가까운 발음인데, 약간 코웃음치는 듯한 작고 가벼운 ㅎ발음이 난다. 우리가 흔히 봉주르라고 읽는 프랑스 인사도 실제로는 봉주~(ㅎ) 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