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담(삼국지)

顧譚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로 고옹의 손자.[1] 는 자묵(子默).

손권의 장남 손등이 태자로 있을 때 제갈각, 장휴, 진표와 함께 태자를 모셔 일명 태자사우로 불렸다가 후에 보정도위가 된다.

고담이 처음에 관부에 나아갈 때, 진언할 일을 상소하니, 손권이 식사를 물리며 잘했다고 칭찬하고 서상에게 허물이 있다고 여겼다. 아름다움 성품은 높고도 밝으며, 득의한 마음을 내세우지 않으니,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는다. 손권은 그 재능을 보고 매우 융성하게 대접해 고담은 여러 차례 상사를 입고 손권이 그를 특별히 불러 청을 들어주는 경우도 있었다.

적오 연간에 제갈각을 대신해서 좌절도가 되었을 때 설종이 선조상서가 되자 설종은 "고담은 몸과 마음이 정밀하면서 도를 꿰뚫은 것이 미세한 데까지 통달했고, 재주는 인물들을 비춰주며, 덕은 중망(衆望)을 채우니 진실로 어리석은 이 신하가 넘어설 바가 아닙니다"라며 끝까지 고옹을 추천하니 결국 고옹이 그를 대신하게 된다.

고옹이 죽자 고담은 태상이 되었으며, 고옹을 대신해 평상서사가 되었다. 이 때 손권의 4남 노왕(魯王) 손패가 사랑을 받아 손권의 3남이자 태자였던 손화와 같은 대우를 받아 이궁의 변 사건이 일어난다.

고담은 상소를 올려 적자와 서자의 절도를 분명이 할 것을 말했으므로 손패와 사이가 벌어지게 된다. 거기다가 손패의 도당인 전기가 편협하고 간사했으므로 용납하지 못한 고담과의 관계는 그야말로 최악.

이후 고담의 아우 고승장휴는 북쪽으로 수춘을 정벌하러 갔고, 전종이 대도독으로서 왕릉과 싸웠다. 오군의 형세가 불리해 장군 진황의 군대가 괴멸되었는데, 고승과 장휴는 분투하면서 위나라의 공세를 막아내 위군의 공격이 멈추자 전기의 아버지 전종 일족의 아들 전서, 전단이 진격해 왕릉은 퇴각했다.

논공행상 때 적을 막은 고승과 장휴의 공을 적을 물러나게 한 전서와 전단의 공보다 크게 평가되어 고승과 장휴는 잡호장군, 전서와 전단은 비장군에 임명했다. 이로써 전기 부자는 더더욱 원망을 품고, 고담을 해할 계책을 짜고 모함해 마침내 고담은 교주로 유배당했다.[2]

유배지에서는 조용히 살면서 《신서》20편을 지었는데, 그 중 〈지난편〉은 자신의 처지를 슬퍼한 것이다. 유배된 지 2년 만에 42세로 교지(交趾)에서 죽었다.

육기고담을 위해 지은 전에서 평하길 "태자의 바른 위치를 동궁에 펴는 것은 천자가 바야흐로 훈도의 뜻을 높여서 준언한 자를 잘 골라 뽑아 좌우에 두어 강학한다. 이때 사방의 빼어난 인물들이 다 모여드니, 태부 제갈각 등 웅걸한 기재들이 무릇 많았는데, 고담은 청직하고 절륜한 것으로 혼자 중한 추대를 받았다. 태위 범신, 사경, 양휘의 무리들이 모두 그 빼어남으로 그의 명성을 칭송했으니, 모두들 고담의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일화 중 고옹이 살아있었을 때의 일이 하나 있는데 한 번은 손권의 조카 딸이 고옹의 조카에게 시집가 고옹과 고담을 초청해 술잔치를 벌인다. 그런데 여기서 고담이 술에 취해 세 번이나 일어서서 춤을 춰버린다(…). 이런 그의 행위에 고옹은 그를 타박하며 그를 등지고 벽을 향해 누워버리니 고담은 한참동안 서 있은 다음에야 물러설 수 있었다고 한다.

2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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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9,10,11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도 등장하며 능력치는 정치 특화의 평범한 문관.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33/21/69/79/75에 특기는 농업, 반목, 명사 3개이다.
  1. 코에이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아들으로 나오기때문에 고옹의 아들로 잘못알고있다.
  2. 손권은 그래도 자신이 총애하던 고담인지라 그에게 사죄하면 용서해주겠다고 말하나 고담은 간신들의 감언이설에 놀아나면 안된다고 꿋꿋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