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삼국지)

위서 「왕관구제갈등종전(王毌丘諸葛鄧鍾傳)」
왕릉관구검제갈탄등애종회

王凌
(172 ~ 251)[1]

1 개요

후한 말, 삼국시대나라의 인물. 는 언운(彦雲)으로 의 사도 왕윤의 조카다.

192년, 왕윤이 이각 등에게 살해되고 일족 10여 명이 처형당할 때 형 왕신(王晨)과 성벽을 넘어 탈출해 잠적했다가 조조의 부름을 받아 등용되었다. 그런데 조조 밑에서는 이렇다할 활약을 한 것 같지는 않고 본격적으로 활약한 것은 조비 시절부터였다. 와의 싸움에서도 공을 세웠고 특히 석정전투에서 주방의 계책에 빠진 조휴를 죽을 각오를 하고 적의 포위를 뚫고 구출하여 구해낸 것으로 이름이 높아졌다. 양주자사, 예주자사 등을 역임했다. 정치 수완이 있었는지 임지에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231년에 만총이 말림에도 불구하고 손포의 거짓항복에 넘어가 온갖 설레발은 다 치다가 병사를 잃는다. 다만 다행인 점은 만총이 미리 명을 내려 군사를 못 끌고가게 했기 때문에 끌고간 병력이 독장 한 명에 병사 700에 불과했다는 것. 240년에는 오나라 전종의 침입을 격퇴했고 남향후로 승진했으며 이후 사공이 되고 사마의 등에 의해 조상이 처형되자 태위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249년, 조카 영호우와 함께 당시 황제 조방을 폐하고 초왕 조표를 옹립하고자 했다. 이를 장남인 왕광이 강력하게 반대했고 계획 도중 영호우가 병사해 버렸지만 계속 진행했다.

251년에 오군이 여수를 막는 것을 기회로 궐기를 꾀했지만 부하인 황화와 양홍이 이를 밀고하여 사마의에게 이 소식이 전해지는 바람에 사마의는 왕릉 토벌군을 결성했고 왕릉은 스스로 사마의에게 출두하고자 도성으로 갔는데 그 도중 독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다. 곧 사마의는 직접 수춘으로 내려가 사건을 규명하고 조표에게 죽음을 내리고 왕릉의 삼족을 멸했으며 왕릉과 영호우의 시신을 시장에 내걸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사마의도 왕릉이 죽은 그 해에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왕릉은 사마랑, 가규와 절친한 사이였다. 자연히 사마랑의 동생인 사마의와도 오랜 교분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탓인지 왕릉의 일족을 멸한지 반년도 못가 왕릉과 가규가 나오는 악몽을 꾸고 세상을 떠났다.

왕릉전 주석에 의하면 왕릉의 여동생은 곽회의 부인이었다고 한다. 왕릉의 일 때문에 왕릉 집안의 삼족이 멸족되게 되자 곽회의 부인도 그 죄를 받게 되었다. 이에 곽회의 아들들이 눈물을 흘리고 이마를 땅바닥에 찧어가며 어머니를 구해줄 것을 아버지 곽회에게 빌었다. 곽회도 마음이 움직여 사마의에게 "제 자식놈들이 어머니를 사랑하여 어머니에게 죽음을 내리면 자식들도 어미를 따라 죽겠지요. 이들이 죽으면 저도 제 아들들을 따라갈 겁니다"라고 탄원하여 곽회의 부인, 즉 왕릉의 여동생만은 유일하게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2 미디어 믹스

삼국지 12,13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모든 능력치가 60-70대를 오가는 밸런스형 무장에 정치력이 80대 초반이다. 삼국지 8부터 등장하며 인재가 드문 후반부 시나리오에서는 괜찮은 인재에 속하나 특기나 적성이 좋지 않은 경우기 많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70/61/72/83. 분전, 돌파, 혼란, 덫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73/61/71/84/75에 특기는 기술, 치안, 명사등 7개. 정치가 가장 높지만 막상 정치 의존 특기가 하나도 없는 것은 좀 아쉽다. 여담으로 일러스트는 무슨 무관처럼 나와서 능력치랑 괴리가 있다.

삼국지 11에서는 무특기.

삼국지 12에서도 역시 전법인 쓰레기인 속공.

젊었을 때는 크게 활약이 없고 노년에 활약을 한 인물인데 일러스트가 지나치게 젊게 나왔다. 물론 230년에 만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설레발치러 나가는 모습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개성있는 일러스트는 아닌 셈.

진삼국무쌍6에서 시리즈 처음으로 '왕릉의 난'이 구현되었다. 위에도 써있듯 정사에만 나오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전용 전투 테마까지 있는 의외의 사례. 물론 그래봐자 클론 무장이다.
  1. 생몰년도를 보면 알겠지만 사마의보다 나이가 많으며, 이 시대에 산 사람 치고는 장수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