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개요
서울특별시 광화문 앞 세종대로 한가운데에 들어선 광장.
서울역 광장, 서울광장, 청계광장 등과 함께 중요한 집회 장소 중 하나로 취급되었다. 청와대와 정부서울청사가 인접해 있어 이쪽을 공격하기(…) 좋은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이 광장으로 인해 앞으로 집회 장소가 되기는 힘들어질듯.
2 역사
1395년 정도전이 태조의 명을 받아 한양이라는 도시를 만들며 조선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 앞에 관아를 배치하고 큰 길을 낸 것이 현 광화문광장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육조거리이다. 이 때, 경복궁과 광화문의 축을 북한산과 관악산을 연결하는 축선과 일치하게 지었는데, 무학대사가 관악산은 '불의 산(火山)'이기 때문에 관악산과 북한산을 축으로 하면 도시가 화를 당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광화문 앞길 130m 구간만 경복궁과 같은 축선으로 배치하고, 그 다음부터 종로 입구까지는 도로의 중심이 동쪽으로 최대 39m 가량 틀어진 구조로 조성하였다.#
조선시대 당시에는 이 길에 경복궁과 달리 통일된 이름은 없었고 광화문 앞길, 관아거리, 육조거리, 육조 앞길, 궁궐 앞길 등이 혼용되어 불렸다. 임진왜란 이후에 경복궁과 광화문은 복구되지 못하였지만 육조와 한성부등의 주요 궐외각사는 여전히 이곳에 위치하였다.
도성도, 보물 제1560호, 18세기 후반#
18세기 후반에 작성된 한양의 도성도를 보면 당시 한양 도성의 도로 모습이 보인다. 오늘날의 지도와 달리 지도의 남북이 반대로 뒤집혀 있는데 이는 남면, 즉 왕이 궁궐의 어좌에 앉아 바라보는 관점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지도 한 가운데에 동서축으로 나있는 도로가 오늘날의 종로이고, 6시 방향에 땅모양이 뻐큐(..)처럼 생긴 정원같은 공간이 오늘날의 창덕궁과 창경궁, 그 오른쪽 5시 방향에 있는 네모난 정원같은 공간이 경복궁이다. 경복궁 가운데 광화문에서 종로까지 이어지는 붉은 선이 과거의 육조거리. 참고로 현재 세종대로에 해당하는 지점에 있는 도로들은 조선시대에는 주 도로가 아니었다. 서울시청 서편을 통과하는 세종대로 부분은 과거에는 덕수궁(경운궁) 궁궐 영역 안에 포함되어 있어 정식 도로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을지로가 숭례문에서 종로까지 이어지는 주도로였다. 괜히 종각이 그 위치에 놓여있는게 아니다. 당시에는 종각 자리가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었다.
조선총독부와 광화문통(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육조거리는 광화문통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3.1 운동 때 현재의 교보문고 앞(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각)에 사람들이 모인 기록이 남아 있다. 1926년에는 광화문을 헐고 조선총독부가 지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일제는 조선총독부 앞의 육조거리를 없애고 도로를 확장하였다.
제안된 안에 따른 광화문 광장(측면배치안)
현재 광화문 광장(중앙배치안)
그러다 노무현 정부 말기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광화문 복원을 하면서 동시에 세종대로에 광장을 만드는 안을 계획해서 서울특별시청에 전달하게 된다.[1] 최초의 안은 원래 있었던 육조거리에 맞춰 세종대로를 미국대사관/KT쪽으로 보내고 세종문화회관 앞을 막아서 광장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서울시에서는 여론조사를 실시하여 가장 많은 득표를 얻은 중앙에 광장을 배치하는 중앙배치안으로 계획을 바꾸었다. 그렇게 현재의 광화문 광장을 만들게 되는데….
2.1 육조거리 원형 논란
원래 아래 '역사성 무시' 항목에 육조거리가 관악산을 향하고 있다는 것과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가 의도적으로 육조거리#s-1의 축을 조선신궁을 향하도록 돌렸다고 서술되어 있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해를 막기 위해 별도 항목을 만들어 설명한다. 혹시 틀린 부분이 있거나 반론이 있다면 이 부분에 수정바람.
해방 이후에는 관련 연구자들이 사라지고 다들 먹고 살기 바빠서 일제가 자행한 각종 왜곡들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이 때문에 왜색이면서도 인지하지 못하고 전통 요소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많았다. 일본식 언어 표현이나 도깨비와 오니가 혼동되는 것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다 점차 일제의 영향에서 벗어나자는 움직임이 생겨났고, 원형을 찾아야 한다는 움직임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원형이 원래 그랬던 것인데 일제가 왜곡시킨 것이라 오해한 경우도 생겨났다는 것이다. 육조거리도 이러한 사례중 하나다. 원래 육조거리는 일직선 형태가 아니라 살짝 동쪽으로 굽어진 형태였다.# 앞서 말한 대로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서 그렇게 만든 것이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육조거리 도면인 '경성부 지적원도'에도 이렇게 살짝 굽어진 형태의 육조거리 모습이 보인다.# 일제가 방향을 틀어다 놓은 것은 조선총독부 건물이지 육조거리가 아니다. 일제가 왜곡시킨 부분이 있다면 광화문을 이전시키고 조선총독부 건물을 경복궁 축선(육조거리 축선이 아니다!)과 어긋나게 바꿔놓은 것[2], 그리고 육조거리의 축선 끝자락이 되는 남산에 조선신궁을 만든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상당히 헷갈리기 쉬워서 연구자들 중에도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일제가 육조거리를 근대식으로 조성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당연히 방향 같은 것도 왜곡이 됐을거라 생각하기 쉬운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상식상 도로를 일부러 굽어지게 만들거라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3 현재의 광화문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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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입지
현재의 광화문광장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넓은 도로인 세종대로의 가운데 부분을 공원으로 만든 것인데, 대부분의 도시공학자들은 이 공원의 조성 목적 및 용도에 대해 부정적이다. 예를 들자면, 이왕 만들려면 제대로 만들어야 하는데 세종대로 정중앙에 만드는 바람에 동선과 시선축이 어그러져 버렸다는 것. 서현 교수는 차라리 이 공원이 세종문화회관 쪽의 인도에 접하도록 만들어야 육조거리의 의미 뿐만 아니라 동선축, 시선축에 부합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래서 광화문 광장은 서울시청 앞의 광장과 함께 정치적인 목적의 산물이라고 욕을 먹는 중이다.
참고로 서울 광장의 경우 국제 공모에서 서현 교수의 "빛의 광장" 설계안이 최종 당선되었고, 국내외적으로도 매우 큰 호평을 받았으나, 어른의 사정으로 인해 아무런 이유 없이 폐기되고, 현재의 잔디광장으로 대신 건설된 사례가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건축계와 서현 교수 측의 강한 반발이 있었으나… 이런 희대의 삽질로 인해 한때 해외 건축계에서는 "한국에서 진행되는 설계 공모전에 참가하지 말자"는 의견까지 나오기도 했다.
3.2 교통
이 광장 만드는 짓을 하느라 세종대로가 왕복 20차선에서 12차선으로 방법을 당하여 손발이 오그라진 관계로 교통정체만 극심하게 만들어놨다. 게다가 고양시나 파주시에서 오는 광역버스들이 이 광장 때문에 광화문정류소의 반대편인 KT정류소에서 승객을 태울 수 없는 사태가 벌어졌고 실제로 노선조정이 이루어져 이 버스들이 서울 시내에서 나갈 때는 의주로를 지나게 되었다. 그 외 분당, 용인, 하남, 의정부(종로1가로 노선 단축), 수지에서 오는 광역버스들 거의 남대문로 변경하는 사태가 발생해 종각역-을지로입구역-숭례문구간이 헬게이트로 교통지옥이 되었다. 1년여 동안 남대문로 정체로 몸살 앓은 남대문경찰서가 서울시가 요청해. 결국 하남, 일부 분당행 광역버스를 제외하고 점차적으로 본래 노선으로 환원하는 일이 발생했었다. 이 때문에 대중교통 종사자와 자가 운전자들 역시 모두 한 마디씩 하는 중. 광장을 조성하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만 그 광장이 모두가 만족하는 광장이 아닌 정치적 산물이라는 점이 문제.(세종대로 등은 규격상 광로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원래 광장의 기능을 포함한다. 단순교통의 의미가 아니라 집회기능이 있었던 것. 교통만 생각하면 도로가 그리 넓어야 할 이유가 없다.)
여름에는 분수를 가동하기도 하는데, 겨울에는 차도로 넘쳐흐른 분수물이 얼어 교통사고를 유발할 수 있다는 비판이 뒤늦게 제기되면서 늦가을부터는 전혀 가동시키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런 것도 생각 안하고 만들었단 말이냐
3.3 시위 금지?
또한 이 광장에서 시위를 금지한 것 때문에 까였다. 홍보용 공터로 용도를 한정해버렸다는 것. 실제 서울시 조례에도 각종 시위관련 행사는 금지되어 있으며 순전히 관제행사만 허용할 정도.
그런데 허용을 해도 시위가 힘든 게, 실제로 광장이라고 만들어놓은 게 상-하행 편도 2차선 도로 가운데 만들어놓아 차들이 달리는 가운데서 오가는 위험성이 존재하며, 실제로 택시가 광장 안쪽으로 돌진하는 사고도 종종 일어난다. 즉 어지간한 대규모 시위가 아닌 한 시위가 불가능하다.
서울시 조례상 문화재 인근 100미터 이내에서 행사를 진행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한다. 또한 법적으로 외교기관 100미터 이내에서 집회를 할 수 없다 라고 기술되어 있었는데 개정된 집시법 제11조 4의 가~다에 예외가 규정되어 있다.
집시법 제 11조 4의
가. 해당 외교기관 또는 외교사절의 숙소를 대상으로 하지 아니하는 경우
나. 대규모 집회 또는 시위로 확산될 우려가 없는 경우
다. 외교기관의 업무가 없는 휴일에 개최하는 경우
이 3가지 경우 중 하나에 해당할 경우 외교기관 100m 내에서도 집회가 가능하다.
서울시의 '조례' 상으로는 광화문 광장의 사용은 허가제인데, 상위법인 집시법과 헌법이 보장하는 신고제에 반하는 규정이기 때문에 논란이 된다.
비슷한 사례로 '서울 광장 조례'가 상위법에 반한다는 이유로 개정되어 현재 서울광장에서의 집회는 허가제가 아닌 신고제로 운영되고 있다.
3.4 역사성 무시
역사성을 무시한 대표 사례로 월대와 해치상 위치가 바뀐 점이 주로 꼽힌다. 광화문 앞에는 광장 역할을 하는 월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즉, 월대 또한 궁궐의 일부인 것. 중국 쪽의 천안문도 그렇고 동아시아의 궁궐 건축 정문 앞에는 궁궐의 격을 높이고 기타 행사를 위한 월대를 설치하는게 원칙이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 건물이 들어서고, 광복 이후에 콘크리트 광화문이 세워지면서 월대 복원은 더 묘원해졌다. 경복궁 완전 복원을 위해 문화재청을 포함한 유관 기관 모두가 총력을 기울이는 상황에서, 서울시에서도 기왕 서울 광장을 만든다면 월대 복원을 위해서 광화문에 이어서 만드는게 옳다고 보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서울 시청 광장도 시청사 앞에 바로 이어서 만들었으니 전례도 있었고 경복궁 앞으로 광장을 세우면 궁궐에 대한 접근성과 광장에 대한 접근성 모두 해결할 수 있는 묘책이기도 했으나, 사직로 문제도 있고 해서 그렇게 되지 못했다.
해치 위치도 사실 원래보다 앞으로 나와야 한다. 과거 사진들을 보면 해치 위치가 지금보다 수십미터 앞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직로로 나뉘어 있어서 광화문 광장에서 광화문으로 걸어들어갈 수 없게 만들어 놓은 것도 비판받고 있다.
3.5 허접한 전시시설들
황금색 세종대왕상 뒤편으로 가보면 동상의 좌대 뒤편에 문이 달려있고, 화장실 같은(...) 공간으로 사람들이 드나드는 걸 볼 수 있는데 내부로 들어가보면 당연히 화장실은 아니고, 지하로 계단이 연결되어 있는데 내려가보면 '세종이야기'와 '충무공이야기'라는 전시관이 지하에 조성되어 있다. 이 전시관은 세종문화회관에서 KT빌딩에 이르는 크고 아름다운 지하 공간에 조성되어 있는데, 광화문 광장 조성 전 존재하던 지하U턴 차로를 재활용하여 만들어졌다. 광화문 광장을 자주 가본 사람들도 잘 모르고 있다가 '어 이런 곳에 이렇게 큰 전시관이 있었어?'하며 놀라는 곳. 당연히 세종문화회관이나 KT빌딩 쪽에서도 접근 가능하다.
이 전시시설에 호불호가 상당히 갈린다. 전시관 내부에 놓여있는 전시물이래봐야 어린애들이 왜군들 쏴 죽이는 오락기를 가져다 놓은 수준이기 때문이다. 세종대왕과 충무공 이순신의 위업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허접하게 다루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름에 '~이야기'라는 이름을 붙여서 전시시설을 만드는 것 자체가 유치하다는 의견도 있다.
4 수정 가능성
현재로서는 낮다고 봐야 한다. 일단 일반인들의 인식이 턱없이 부족하다. 과거 조선시대 육조거리와 현재의 세종대로 및 광화문 광장이 어떻게 다른지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어떻게 복원하는 것이 맞는지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설령 복원 인식이 널리 퍼진다 해도 교통 및 비용 문제가 발목을 잡을 것이 뻔하다. 그리고 일단은 어쨌든 여론조사를 통한 일반인들의 선택이 중앙 배치였으니 이제 와서 과거 역사성을 명분으로 내세워 또다시 수백억 원을 투입하는게 먹혀 들런지는...
일단 광장을 수정할 경우 1) 월대를 복원해 광화문과 광장을 잇는 것. 2) 광장을 세종문화회관 쪽 측면으로 붙이는 것 이 두 가지가 관건이다. 1번은 보행자들이 남북으로 경복궁까지 걸어들어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골자고, 2번은 보행자들이 동서로 세종문화회관 주변 골목을 드나들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골자다.
1번 안대로 하려면 광화문 앞으로 동서를 가로지르는 사직로 문제가 발목을 잡는다. 월대 복원시 사직로의 기능 상실이 불가피하다. 장기적으로 사직로 차도를 지하화하고 지상의 차량 통행을 통제하는 완전 광장화가 거론되고 있긴 하지만, 사직로 밑에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의 노선이 지나고 있어 여러 모로 월대의 복원은 힘든 상황.
2번 안의 취지는 도로 한가운데 섬처럼 되어버린 광화문 광장을 보행이 자유롭게 만들어 광장의 본래 목적을 살리는 것이다.# 취지는 좋으나 이렇게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광장을 붙여버린다면 당장 이순신 장군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을 옮겨야 한다. 여기에 서울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환승 통로 등을 다 부수고 묻어버리는 등 관련 시설 정비에 교통 시스템 수정 등의 문제까지 합치면 수백억 이상의 비용이 들 것이다. 정부 입장에서 보면 복원보다는 현재 모습대로 놔두는 것이 정치적으로는 더 이득이기도 하다. 시위 통제 등의 측면에서 보면 광장이 섬식 승강장처럼 되어 있는 것이 편측으로 붙어있는 것보다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두 안 다 돈과 교통 문제를 고려하면 그냥 이대로 놔두자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1번과 2번 안 외에도 한때 국가적으로 광화문 광장을 시작으로 서울 시청을 지나 서울역, 나아가 한강대교까지 국가상징거리로 조성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국가상징거리 조성 사업은 폐기된 상태이다.
5 관련 사건 사고 혹은 시위
5.1 스노보드 트랙
2009년 12월 세종대왕 동상 뒤쪽에 7억을 들여 스노보드 트랙을 만들었다. 꼭 굳이 서울에서만 해야 하나.. 외곽의 스키장 빌려서 할 수 있지만 이게 참 문제인게 화단을 밀고 거기에 만들었다(…). 당연히 세금낭비라고 까였다. 그리고 광장 북쪽에 스노보드 트랙을 만든 터라 광화문을 가리는 사태까지 일어나서 더 까였다.
'서울을 외국인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일'이라는 반론도 있는 듯 하다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지는 의문. 인공 스노보드 트랙과 고궁 중 어느 쪽이 더 이국적인 풍경을 보고 싶어하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어필할 수 있을지 3초만 생각하고 넘어가자. 아니 그거 만들려면 다른데 만들지 왜 아까운 화단은 밀어버린 거야?
2015년 6월 16일 평창 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 곽영진 부위원장에 의하면 평창 올림픽에 신규 등록된 종목인 '빅에어'를 광화문 광장에서 개최하는 것도 검토 중이라고 한다. 기사
5.2 드라마 아이리스 촬영
2009년 11월에는 드라마 아이리스를 촬영한다고 주말에 광화문 광장을 통째로 빌려줬는데, 이 작품에 꼭 '광화문 총격신'이 들어가야 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실제로 촬영 당시 심각한 정체가 일어났기 때문에 당시 그 주변 운전자들이나 대중교통 관련 종사자들은 이를 심하게 깐 바 있다.그렇게 찍은 광화문씬이 정작 얼마 나오지도 않아서 상당히 허탈했다카더라
5.3 호우 피해
2010년 9월 21일 추석 연휴에 호우로 광화문 광장 일대가 침수되었다. 이때 충무공 동상 앞에 차량들이 마치 판옥선처럼 나열되어 있는 모습을 선보이기도 했다. 호우 피해의 원인으로 중앙분리대의 가로수를 뽑아낸 광화문 광장의 콘크리트화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일각의 의견도 있으나 광장을 조성하면서 세종대로 일대 지표의 투수성은 오히려 증가하였다. 이유를 살펴보면, 애초에 중앙분리대의 가로수는 뽑아서 내다버린 것이 아니고 길가로 옮겨 심었다.[3] 게다가 광화문 광장을 조성하면서 광장 뿐만 아니라 일대의 찻길도 아스콘 포장을 걷어내고 화강암 박석으로 재포장하였다. 조각조각 나뉘어진 화강암 박석 포장이 아스콘 포장보다는 투수성이 좋은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플라워 카펫이라는 쓸데없이 이상한 이름이 붙여진 대형 꽃밭이 조성되었기 때문에, 세종대로 일대의 토양 면적도 증가하였다.
그런 점을 전부 차치하더라도, 애초에 그 정도의 폭우에는 지하로 흡수되는 물의 양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서울 도심의 건물들을 전부 철거하고 흙바닥으로 만들었더라도 세종대로 일대에서는 비슷한 광경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폭우 사태에서 광화문 광장과 관련한 서울시의 책임을 굳이 추궁하자면, 기후변화에 발맞추어 지하의 하수관로 확장이나 조례개정을 서두르지 못한 것 정도이다…라고 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 요컨데 변명과 달리 광장의 설계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것이다. 투수성이 왜 부족해졌는지 다수 기사에서 설명하고 있다. 기후변화에 대한 막연한 핑계 또한 설득력이 없이 이미 광화문은 더 큰 비에도 견딘 바 있다. 진짜 100년빈도 폭우라고 해도 지점을 한정했을 때 이야기이지. 한반도 전체를 기준으로 하자면 매년 어느 곳은 그 정도 수치가 나온다.
조례 통과나 하수관로 확장을 이야기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대형 저류조나 펌프장등 거대한 토목공사를 벌이기에는 시간과 예산이 요구되는데 정말 그것이 필요한지는 토론이 필요하다. 실재로 대책 내놓고 1년 동안 이루어진 게 없었다. 정작 저류조나 펌프장을 증설한다 해도 해당 시설이 침수된 광화문과 떨어져있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광장만이 아니라 광장 주변의 도로에까지 문제가 발생했다.# 유럽의 거리를 모방해 아스팔트 대신 화강암 판석을 깔고 콘크리트로 마감했다가 비가 오면 틈새로 스며들어 균열이 발생해 돌이 흔들리거나 들뜨게 된 것. 그리고 설계 잘못으로 인해 도로 곳곳이 내려앉거나 파손됐다는 감사원의 지적도 나왔다.#
5.4 최악의 건물 선정
2013년에는 마침내 동아일보와 SPACE가 선정한 해방이후 최악의 건물들에 등재되는 기염을 토했다. 랭크는 20위 중 14위로 다소 낮으나, 문제는 같은 서울시 건축으로 1위, 4위, 5위, 8위가 선정되어 20개 중 5개나 선정됐다는 것.
5.5 2014년 광화문 폭식농성
해당 문서를 참조.
5.6 2015년 11월 민중총궐기
해당 문서를 참조.
5.7 광화문광장 태극기 설치대 무산
국가보훈처는 광복 70년을 맞아 서울 광화문광장에 태극기 게양대를 설치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서울시 반대로 무산되었다. 지난 10월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87%가 찬성하고 서울시와 보훈처가 업무협약까지 맺은 사안에 대해, 광화문광장 허가권을 갖고 있는 서울시가 태극기 게양대 설치 불가를 통보한 것이다.
보훈처와 서울시는 지난 6월 업무협약을 맺고, 각각 추천한 전문가로 구성된 공동자문위원회 회의를 통해 디자인과 높이 등을 정하는 등 게양대 설치를 추진해 왔다. 그러나 서울시는 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가 대형 태극기 게양대가 권위적이고 전근대적이며 보행에 불편을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또한 계양대의 높이가 15층 건물 높이인 것도 도시 경관상 쉽게 결정하기 어렵다는 점도 있다. 또한 이 항목에 나와있는대로 광장의 복원을 위해 공사해야 할 수도 있는데, 그때 가서 세운 걸 다시 허문다? 도시개발에서 높은 구조물은 충동적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 홍콩 같은 선진국에서는 고층 건물을 세울 때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 않거나, 교통에 악영향을 준다면 정부에서 건축을 금지시킨다. 참고로 서울시에서도 임시로 먼저 설치하는 걸 제안했지만 정부로부터 묵살당했다.
단, 태극기 설치를 반대하면서 든 이유 중 하나가 권위적이고 전근대적이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네티즌들 사이에서 논란이 있기도 했다.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정착된 서유럽이나 미국 등에서도 광장에 자국의 국기를 게양하는 것은 드물지 않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것을 권위주의적이라거나 전근대적으로 인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일각에서는 박원순 현 서울시장의 김일성 만세 및 공산주의 활동 허용 발언등과 엮어 광장에서 김일성 만세 외칠 자유는 있고 태극기 게양할 자유는 없냐는 비판도 나왔다.
이에 반발한 몇몇 시민, 일베 유저들이 12월 19일, 20일 광화문 2광장에서 태극기를 들고 1인 시위를 펼치는 퍼포먼스를 보였다. 자세한 사항은 일베저장소/사건 및 사고를 참조.- ↑ 당시 문화재청장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소상히 기록되어있다.
- ↑ 나중에 다시 돌아온 광화문은 이 조선총독부 건물에 맞춰져 세워졌고, 결국 다시 수정되었다.
- ↑ 그런데 양쪽 인도 쪽으로 옮겨 심은 나무들은 생육 문제 때문에 영양제를 맞고 있다. 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