怪由
(? ~ 23)
1 생애
21년(대무신왕 4년), 대무신왕이 직접 부여를 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가다가 비류수에 이르었을때 갑자기 나타나서는 스스로를 '북명(北溟) 사람인 괴유'라 소개하면서 대무신왕의 부하가 되어 직접 부여왕의 머리를 벨 것을 청하였다. 대무신왕은 이 청을 기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듬해인 22년 2월, 부여와 고구려의 군대가 부여의 남쪽땅에서 격돌하였는데, 이때 고구려의 군대는 잠시 진영을 차리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부여의 왕이었던 대소왕이 그 틈을 노리고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군을 기습하려다가 그만 진흙창에 발이 묶여 오도가도 못하게 돼버렸다.
이때 대무신왕의 명을 받은 괴유가 칼을 뽑아들고 선두에 서서 부여의 군대를 쳐부수었으며 대소왕의 목을 베는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왕의 죽음에 자극을 받은 부여인들이 더욱 거세게 덤비는 바람에 결국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 대무신왕이 야심차게 준비했던 부여 정벌은 끝내 실패하였다(...).[1]
이후에 괴유는 23년(대무신왕 5년)에 병에 걸려 죽었는데, 대무신왕은 괴유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2 평가
일단 기록을 보면 기본적으로 꽤 한 덩치하는 사람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직접 칼을 빼들고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 때 부여 군사들이 순식간에 무너졌다는 기록을 보면 꽤나 용맹한 무인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당시 고구려에게 최대의 적이었던 대소왕을 전사시켰으니 더이상 말이 필요 없을 정도(...).
사실 괴유가 고구려군에 들어가서 대무신왕과 함께 했던 시간은 겨우 1,2년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대무신왕이 괴유의 죽음을 무척 슬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왕에게서 상당히 총애를 받았던 듯 하다.
3 정체성 논란
일단 괴유는 스스로를 '북명인(北溟人)'이라 밝혔는데, 문제는 이 '북명'이라는 곳이 대체 어느 나라의 어느 동네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북명이 여러 번 언급되는데, 대체로 원산, 강릉시 쪽(즉 동예 계열)으로 추정되기는 한다. 그러나 신채호는 만주벌판 한복판 북부여로 추정했다.
그리고 뜬금없이 왕 앞에 튀어나와서는 곧바로 군인이 되었던 것을 보면 더욱 그 정체를 알기 힘들어진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괴유는 키가 9척이나 되는 거구인데다가 얼굴이 희며, 눈에서는 광채가 났다고 한다. 이때문에 사실 괴유가 서양인(?!)이라는 추측도 있다. 그 외에도 괴유가 사실은 본국에서 배신 당한 부여인이라든가, 또는 부여에게 압박을 받고 있던 읍루인이었다는 등 그 출신성분에 대한 견해가 다양하다.
대무신왕을 만나자 마자 대뜸 부여왕의 목을 베어 바치겠다고 맹세하는 삼국사기의 대목을 보면 괴유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부여나 부여의 왕에 대해 강한 증오심을 품고 있던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4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만화 바람의 나라에서는 신수인 백호를 부리는 인물로서, 부여의 귀족 집안인 은씨 일족의 유일한 생존자로 나온다. 은씨 일족은 부여의 유력 가문이면서도 친 고구려 성향을 띠고 그와 교류하였기에, 이를 불온하게 본 현무에 의해 일족이 몰살되었으나, 시체까지 다시 확인하는 와중에서 괴유와 그 누이 '가희'는 살아남았다.[2]
그 후 음지에서 무휼 일행을 도우며 암약하다 부여와의 전쟁에 임해 상장군에 임명되어 대소왕을 전사시키는 등 활약하지만, 후에 전투 중에 '용이'(무휼의 차비 '연'의 동생)에게 치명상을 입었고,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더는 삶에 연연하지 않고 다시 전장에 나선다. 그 후는 신수 주작을 잃는 것을 무릅쓰고서까지 그를 위기에서 구해낸 무휼의 누나 세류와 맺어진 후[3] 역사대로 부여 원정이 끝난 얼마 후에 숨을 거둔 것으로 나온다.
곽재식의 소설 역적전에서는 직접 등장하지는 않으나 큰 칼을 사용하는 무술을 만든 사람으로 나온다. 그 무술을 전수 받은 먼 후대의 고구려 사람이 칼 쓰는 방법이 수준이 높기는 하지만 너무 괴상해서 말하자면 발적화되어 있는 무술이라고 여기면서 주인공 출랑랑에게 전해준다. 그런데 출랑랑이 우연히 아주 큰 칼을 들고 그 무술을 쓰면서 괴유의 무술은 큰 칼에 최적화되어 있음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