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수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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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 Primatus Romani Pontificis
영어 : Papal Primacy
한자 : 敎皇首位權
한국어 : 교황수위권

1 개요

파일:D41o1Ng.jpg초대 교황인 사도 성 베드로

가톨릭정교의 모든 주교들 가운데에서 로마의 주교교황이 첫번째이며 주교들의 수장이라는 교리.

교황은 사도들의 으뜸인 성 베드로의 후계자이기에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단에서 으뜸이고, 로마는 사도 성 베드로와 사도 성 바오로순교로 축성된 성좌이기에 로마 교황좌가 교회의 수장좌라는 것.

1.1 가톨릭의 입장

로마의 주교를 제외한 다른 주교들은 그 사도적 권리에 평등하지만, 로마의 주교인 교황은 모든 주교들 중의 수장이고 그렇기에 그 수장 됨에서 다른 지역교회에도 간섭할 수 있다는 실질적인 권리가 있다. 대통령

1.2 정교회의 입장

로마의 주교를 포함한 주교들은 그 사도적 권리에 평등하고, 로마의 주교 또한 교회의 수장이되 수직적인 위치에서 높아서 수장이 아니라 수평적인 위치이기에 동등한 모든 주교들을 대표하기에 수장이다. 그렇기에 교황은 로마 총대주교구 외의 다른 지역교회에 간섭할 수 있는 실질적인 권리가 없는 명예직이다. 국회의장?

2 성경에서의 근거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16장 18-19절

가톨릭교회는 이것을 교황수위권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 말한다.[1]

3 전승에서의 근거들

이 항목은 로마 제국 공인을 기준으로 그 전과 그 후로 나눈다.[2]

3.1 로마 제국 공인 이전의 전승에서의 근거들

3.1.1클레멘스 1세 교황

기원후 96~98년 사이에 코린토 교회에 분열이 일어났을 때[3], 코린토 교회의 관계자들은 그 중재를 위해서 로마의 주교인 성 클레멘스 1세를 찾아갔다.

그 결과로 클레멘스 1세는 사도교부 문헌 중 중요한 두 작품 중 하나인 로마 주교 클레멘스 1세의 「코린토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써주었고, 그로 인해 코린토 교회의 분열은 중지되고, 그 서간은 2세기 내내 정경처럼 받들여져서 필사되고 소아시아 지역 교회 공동체 내에서 읽혀졌다.

이것은 2가지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1. 교황의 수위권을 보여주는 역사적 문서에 남아있는 최초의 사례이다.

2. 당시 에페소 교회에 성 사도 요한이 생존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4], 코린토 교회 신자들이 분열의 중재를 위해서 로마의 주교에게까지 찾아갔다는 것이다.

만약 로마 주교의 수위권이 없다고 생각하면 예수를 직접 보고, 예수로부터 직접 뽑혔으며, 예수와 함께 생활했으며, 예수의 직접적인 증인인 사도 요한이 당연히 더 큰 권위를 가지고, 그에게 중재를 청해야 했을 것이나 코린토 교회 신자들은 요한이 아니라 클레멘스에게 중재를 청했다.

이는 사도시대 때부터 로마의 주교가 교회의 수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그리고 자신이 베드로의 후계자로써 교회의 최고 중재자이며 권위자라는 의식을 갖고 있던 클레멘스는 자신의 서간에서 다음과 같이 명백하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며 위험한 일입니다. 나는 그러한 경우에 그 죄에 대하여 더 이상 아무런 책임을 갖지 않습니다.

-교황 클레멘스 1세, 「코린토 교회에 보내는 서간」, 59장 1-2절

3.1.2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104년 경에 로마로 압송되어 순교한 안티오키아의 주교인 이냐시오는 압송되는 되는 도중에 7개의 편지를 썼다.

그가 이해했던 그리스도의 교회는 로마 교회와의 친교 안에 있던 교회였고[5], 일곱 편지 중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는 이렇게 썼다.

테오포로라고 불리는 저 이냐시오는 지극히 높으신 성부와 그분의 유일한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장엄한 가운데 자비를 얻은 교회에 인사드립니다.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따라 존재하는 모든 만물을 원하신 그분의 뜻으로 인해 사랑받고 비추임받은 교회에 인사드립니다.
로마인들의 믿음을 대신해 주재하고 있는 교회, 하느님께 합당하며 명예와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교회, 애덕을 주재하기 위해 세워졌으며 성부의 이름을 지니는 그리스도의 법을 보관하는 교회에, 성부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거룩한 계명들 안에서 일치하는 신자들에게 인사드립니다.

위에서 보다시피 이냐시오는 로마교회가 교회들 가운데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다 생각했다. 더 나아가, 이냐시오는 로마교회가 많은 것을 가르쳤지만 그 누구의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로마교회가 갖는 이런 우위성의 근거로 베드로와 바오로가 로마에 있었으며 거기에서 복음을 설교했다는 점을 든다.

3.1.3 리옹의 성 이레네오 주교

이레네오는 당시에 보이던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어떤 가르침이 참으로 사도적임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원 사도의 교회들 안에 보존된 가르침을 조사해야 한다고 보았다.[6]

하지만 이 작업은 상대적으로 곤란하고 어려운 방법이었고, 그는 이것 말고 훨씬 더 단순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말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로마교회의 가르침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이 교회(로마 교회)와 더불어 그리고 이 교회의 우위적인 권위에 힘입어 전체 교회, 즉 세상의 모든 신자들과 일치를 이룬다. 왜냐하면 이 교회 안에는 전 지역의 신자들을 통해 사도들로부터 아어오는 전승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3.1.4 정경과 부활절 날짜의 확정

신약성경의 책들을 수집하는 것이 전승의 업적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신학자들은 2세기 말경 사도성과 가톨릭성의 기준을 따르는 가운데 로마에서 신약정경이 확정되었음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기준이란 로마교회가 지닌 고유한 가치와 권위의 힘을 바탕으로 다른 교회들을 통해 지속되어 왔던 기준을 말한다. 다시 말해 사도전승, 더 구체적으로 말해 성경의 정경을 확립하기 위한 기준을 제시하는 로마교회의 전승이 있었다.

부활절 날짜의 확정에 관해서는 성 빅토리오 1세 교황의 역할이 중요했다. 그는 여기서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발휘했다. 그는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들에게 로마가 견지해온 부활절 날짜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 파문해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이게 어딜 봐서 평등한 권위를 지닌 주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 그리고 교황은 로마와의 친교가 파기될 뿐만 아니라, 보편교회의 친교로부터 명백히 제외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본 리옹의 주교 이레네오는 교황으로 하여금 좀 더 온화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했고, 소아시아의 교회들에게는 "로마 교회에게 개기다가는 진짜로 파문당해서 보편교회의 친교에서 제외 될 거니까 복종해라"라고 권했다.

이는 권위있는 행동일 뿐 아니라 분열된 교회들이 로마 교회의 규율에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3.1.5 카르타고의 성 치프리아노 주교

치프리아노는 자신의 저작 「교회의 일치에 대하여(De unitate ecclesiae)」 4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회는 하나인데 이는 베드로가 한 분이며 그 위에 교회가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설립했으며 그로 하여금 양떼를 돌보도록 위임하셨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머리 위에 일치의 기초가 설정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로마의 베드로좌와의 일치를 포기하는 이가 자신이 교회 안에 머물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위에서 보다시피 치프리아노는 로마교회가 으뜸가는, 즉 일치에 부패하지 않는 원천을 구성하는 수위권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치프리아노는 로마교회가 사도교회의 뿌리이자 모태라고 했다.

코르넬리오 교황이 자신이 교황에 선출되었음을 치프리아노에게 전했을 때, 치프리아노는 이 사실을 아프리카 교회의 주교들에게 서신으로 알림으로써 모두가 이 새 교황과의 친교를 유지하고 보편교회적 일치를 유지하도록 알렸음을 전하면서 교황에게 회산했다.

3.2 로마제국 공인 이후의 전승에서의 근거들

3.2.1 에페소 공의회

교황이 자신이 수위권을 갖고 있음을 의식하고 에페소 공의회에 개입하기도 했다.

422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임명된 네스토리우스는 당시 교황 첼레스티노로부터 자신의 이단설을 승인받기 위해 그에게 서신을 보냈다. 한편,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이자 네스토리우스를 대항해서 참된 그리스도론의 진리를 옹호했던 성 치릴로 역시 그가 이단임을 밝히기 위해 필요한 모든 문서를 동봉한 자신의 서신을 첨부해서 교황에게 서신을 보냈다.

치릴로는 여기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교회의 오랜 관습에 따라 저는 성하께 다음과 같은 사안들을 알려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략)
그(네스토리우스)와 더불어 친교를 유지하거나 아니면 그 누구도 그러한 신념을 가진 이와는 절대로 친교를 유지하지 말아야 하는지 하는 견해 가운데 성하의 견해를 제가 간히 알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 사안에 대한 성하의 판단이 마케도니아와 동방교회의 모든 주교들에게 드러나야 합니다.

이에 챌레스티노는 430년에 로마에서 시노드를 소집하고,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단죄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는 당시 황제였던 테오도시오스 2세의 지지를 얻었으며, 이 황제는 431년 성령강림절에 에페소에서 세계 공의회를 소집하기에 이른다. 교황은 이 공의회에 세 명의 사절을 파견했는데, 이 사절들의 도착이 지연되자 치릴로는 자신의 견해가 교황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신념 아래 자신의 주재하에 공의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공의회는 마침내 네스토리우스의 저작들을 검토하고 "거룩한 정경과 로마교회의 주교인 챌레스티노 교황 성하의 서신과 권위로" 네스토리우스를 파문했다.

교황 사절들은 공의회에 도착한 후 교황의 의지에 따라 교황의 승인과 더불어 첫 회기의 의사록을 재가하기 위해 이 의사록에 대한 검토를 요청했다. 교황 사절 가운데 한 사람인 필리포스는 전체 교회와 모든 사도들의 머리에서 거룩한 회원들이 일치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던 기쁨을 표현했다.

실제로 이 사절들은 공의회에서 결정된 규정들을 공식적으로 낭독하도록 요청했으며, 필리포스는 다음과 같은 담화로 끝맺었다.

그 누구도 모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모든 이들은 예로부터 거룩하고 복된 베드로, 사도들의 머리이자 수장이요 믿음의 기둥이며 공번된 교회의 초석인 베드로가 인류의 구세주요 구원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았으며, 그에게 묶고 푸는 권한이 주어졌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의 계승자이신 복된 교황 챌레스티노는 당신을 대신하기 위해 우리를 이 공의회에 보내셨습니다.

3.2.2 성 대 레오 교황

레오 교황은 로마의 주교가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이유로 보편적인 수위권을 지닌다는 개념을 분명히 드러냈다. 로마 주교는 베드로의 후계자이기에 베드로가 다른 사도들에 대해 지녔던 유비적인 권위를 다른 주교들에게 요구할 수 있다.

레오 교황에게 지극히 복되신 사도 성 베드로는 당신의 성좌에서 주재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레오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 믿음의 견고함은 영원하다. 그리스도는 이 믿음 때문에 사도들 가운데 첫째 가는 이를 칭찬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믿었던 것은 언제나 존속한다. 같은 식으로 베드로의 인격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임명하신 것은 언제나 존속한다.
(중략)
성 베드로는 자신에게 부여된 반석의 견고함을 언제나 보존하면서 교회 안에서 자신게게 주어진 키를 놓지 않았다.
(중략)
그래서 우리가 선한 행위를 하고 올바르게 결정하며 일상의 청원 기도들과 더불어 하느님의 자비에 감동한다면, 이 모든 것은 아직 자신의 성좌에서 권능을 갖고 살아있으며 권위 또한 계속 돋보이는 이가 하는 일과 공로 덕분이다.
(중략)
베드로는 모든 교회에 매일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 이렇게 고백하는 모든 언어는 이 말씀의 가르침을 통해 생기를 얻는다.

로마좌의 이러한 권리 요청은 칼체돈 공의회(451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실상 보편적인 의식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칼체돈 공의회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수도원장인 에우티케스는 레오 교황에게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를 네스토리우스파 이단으로 고소했다. 그러나 이는 에우티케스 자신이 총대주교인 플라비아누스 앞에서 이단으로 고소 당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무슨 상황이지? 그래서 이 둘은 레오 교황에게 도움을 호소했다. 이에 교황은 449년 6월 14일에 플라비아누스에게 그 유명한 서간 「플라비아누스에게 보내는 교의 교서(Tomus ad Flavianum)」를 쓰게 되는데, 여기서 교황은 그리스도론적인 신앙에 관한 용어들을 명백히 표현하고 있다.

당시 교황은 칼체돈 공의회에 자신의 사절들을 파견했는데, 그들은 630명의 주교들 앞에서 이 공의회를 주재했다. 이 사절 가운데 첫번째 인물은 파스카리누스 주교로서, 그는 "모든 교회의 머리"인 로마 주교의 훈령에 따라 디오스코로가 공의회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2번째 회기에서 플라비아누스에 대한 레오 교황의 서간이 낭독되었으며, 이에 대해 주교들은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

이것이 교부들의 신앙이며 이것이 사도들의 신앙이다. 베드로가 레오의 입을 통해서 말했다.

교황에 대한 이러한 승인은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이 레오 교황에게 보낸 서간에서 추인되었으며 그들은 여기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당신은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당신은 모든 이를 위한 베드로의 목소리의 해설자셨습니다. (중략) 당신은 대리자들을 통해서 모든 교부들의 회중을 이끌고 명하셨으며 당신 지체들의 머리로서 교의에 참된 의미를 가르치고 명하셨습니다.

이를 보고 루트비히(L. Ludwig)는 이렇게 말하였다.

교황권은 1870년이 아니라 이미 450년에 그 정점에 이르렀다.

3.2.3 그 이후

그 이후에도 성 아우구스티노와 더불어 신앙을 확고히 하기 위한 수위권에 대한 의식은 보다 분명해졌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펠라기우스의 추종자들을 거슬러 싸우는데 열의를 갖고 로마의 승인을 얻으려 했다. 왜냐하면 오직 이 사도좌(Sedes Apostolica)의 의견 표명과 더불어 아프리카 주교들의 결정에 대해 참으로 함께 서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드 뤼박(De Lubac)이 언급하는 것처럼, 당시 어떤 규율이나 가르침에 관한 중요한 사안의 최종적인 해결 방법은 사도좌에 호소해야 한다는 것을 모든 이들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아프리카 교회에서 이단적인 가르침을 거슬러 싸워야 했다. 그래서 그는 친히 카르타고 공의회(418년)와 밀레비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는 대다수의 주교들과 함께 인노첸시오 교황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 서간은 밀도 있는 장문의 소송 사건을 다룬 청원서였다. 이는 무엇보다도 교황의 승인을 얻기 위함이었다.

이에 대해 드 뤼박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신의 공동체적 의무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아우구스티노는 로마의 개입이 이 위태로운 담판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분명히 보았다. 로마가 자신의 판단을 주지 않는 동안, 문제는 계속 미해결인 상태로 남아 있었다. (중략) 그러나 성 아우구스티노는 로마가 아니라면 이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후대에도 교황권은 여러 기회에 동방의 문제에 개입되었다. 교황 호르미다스(Hormidas)의 신앙고백은 250명의 동방주교들의 수용과 함께 아카치아누스 이교(484-519)를 끝맺었다. 그리고 868-879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참석한 이들 모두는 호르미다스의 양식과 아주 유사한 "libellus satisfactionis"에 서명해야 했다. 우리는 단의론 위기 당시 예루살렘의 성 소프로니오와 고백자 성 막시모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인 요한이 교황의 수위권을 위해 증언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기에 교황권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로마의 주교인 교황은 베드로의 권위와 유사한 권위를 갖는 그의 계승자라는 의식이 보다 분명하게 발전되어 갔다. 사실 대 레오 교황의 입장은 이를 명백히 입증한다. 그리고 이미 초대교회 때부터 로마교회가 제시하는 기준은 중대한 문제들에 대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7]

덧붙여서, 세계 공의회는 교황의 승인이 있을 때만 유효하다는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었다.

4 관련 항목

  1. 이것은 교부 테르툴리아노(약 155년~약 230년)가 가장 먼저 교황의 권위에 대해 말하며 인용했다. 교황 중에서 가장 먼저 이 부분을 언급하며 자신의 수위권을 말한 사람은 성 스테파노 1세(재위: 254년 5월 12일 ~ 257년 8월 2일)
  2. 이는 교황권이 로마 제국 국교화 이후에 생겼다는 오해에 대해 반박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3. 이 분열의 원인은 사도들로부터 적법하게 서품받은 신부들을 코린토 신자들이 멋대로 쫓아내려는 문제 때문에 일어났다
  4. 애초에 코린토~로마 간의 거리는 코린토~에페소 간의 거리의 5배이다
  5. 그리고 그는 지역교회의 신자들이 자기 지역의 주교들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역 주교는 로마의 주교와 일치를 이룬다는 것이다.
  6.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영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교리가 사도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자신들의 스승을 통해 전수된 비밀스러운 교리에 대해 말하고 유혹했기 때문이다.
  7. 상술했다시피 빅토리오 교황은 파문까지도 하겠다는 내용과 함께 소아시아 교회를 위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