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시 맥그레디

tracy-mcgrady_293996.jpg
매기형님 졸려보이신다...
플옵 1라운드의 [1]

이름Tracy Lamar McGrady, Jr
생년월일1979년 5월 24일
신장200cm[2]
체중101kg
포지션슈팅가드 [3], 스몰포워드
드래프트1997년 드래프트 1라운드 7순위
토론토 랩터스에 지명
역대 등번호1번, 3번
역대 소속팀토론토 랩터스(1997~2000)
올랜도 매직(2000~2004)
휴스턴 로켓츠(2004~2010)
뉴욕 닉스(2010)
디트로이트 피스톤스(2010~2011)
애틀란타 호크스(2011~2012)
칭다오 더블스타 이글스(2012~2013)
샌안토니오 스퍼스(2013)
수상내역기량발전상(2001)
All-NBA First Team 2회
All-NBA Second Team 3회
All-NBA Third Team 2회
2003년 NBA 올해의 득점왕
앨런 아이버슨트레이시 맥그레디트레이시 맥그레디
2004년 NBA 올해의 득점왕
트레이시 맥그레디트레이시 맥그레디앨런 아이버슨
2001년 NBA 올해의 기량발전상
제일런 로즈트레이시 맥그레디저메인 오닐

1 개 요

NBA선수. 한때 동티맥/서코비라 칭할 정도로 리그 탑 플레이어였으나, 지긋지긋한 부상으로 말미암아 그저그런 선수로 전락한 비운의 남자. 별명은 자신의 이름의 T와 성의 M.A.C를 조합한 T-Mac. 그 외 졸린듯한 눈때문에 The Big Sleep이라는 별명도 있다. 국내에서는 티매기 매기 등의 별칭으로 불리운다.

2 성장기

플로리다 발토 태생인 맥그레디는 원래는 야구선수가 꿈이었다. 집은 매우 가난했지만 그는 매일 공을 던지며, 가난과 배고픔의 설움을 달랬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우연히 TV에서 페니 하더웨이의 경기를 보며 농구선수로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오번데일 고등학교로 진학해서는 학교의 에이스로 활약했으나, 학교 교사와의 갈등으로 인해 마운트 지온 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다. 마운트 지온 고등학교에서 활약했을 당시 97년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뛰고 있는 고교선수중 최고라는 평을 받았고, 많은 대학에서 그를 탐냈지만, 가정의 생계를 위해서 맥그레디는 NBA 드래프트에 참가신청을 낸다.

3 NBA 커리어

3.1 토론토 랩터스

tmac_kings.jpg
정말 멋없는 토론토 랩터스 초창기 유니폼도 이렇게 잘 어울린다.

맥그레디는 97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9순위로 토론토에 지명을 받게 된다. 팬들과 전문가들은 당시 팀의 GM이었던 아이재이야 토마스의 선택에 관심을 드러냈는데, 토마스는 인터뷰에서 "아직 맥그레디는 모든것이 부족하지만 몇년후에는 엄청난 선수로 성장할 것."이라고 자신의 소견을 밝혔다.

하지만 루키시즌에 그는 많은 출전시간을 받지 못했다. 솔직히 아무리 고등학교에서 날라다니는 선수였다고 해도, 프로는 엄연히 무대가 달랐고, 당시 팀의 백코트 주전중 하나인 덕 크리스티가 잘해주었기 때문에 맥그레디를 굳이 종용할 이유는 없어보였다. 맥그레디는 뛰지 못한다는 생각에 오죽했으면, "농구가 재미없다."라고 발언했을 정도. 그러나 당시 팀 감독이었던 다렐 워커가 성적부진으로 해고되고 부치 카터가 부임하면서 맥그레디도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부치 카터는 맥그레디의 성장을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왔고, 맥그레디를 위해 자유투 코치와 인터뷰 카운슬러까지 붙여줄 정도였으니. 티맥 역시 부치 카터를 삼촌이라고 부르면서 많이 따랐다고 한다. 물론 부치 카터도 성적부진으로 해고되면서 둘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렇게 맥그레디는 조금씩 성장해 갔고, 99-00시즌 종료 2달전에는 붙박이 주전으로서 활약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3경기동안 두자리 수 득점을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했다. 하지만 당시 토론토는 누가 뭐래도 빈스 카터의 팀이였다. 사촌인 빈스 카터의 그늘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은 그는 3년간의 토론토 생활을 끝내고 올랜도 매직으로 이적한다.

3.2 올랜도 매직

1208547286.jpg
올랜도 매직 시절. 르브론 제임스래리 버드가 와도 이보다 처절하게 농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본격적인 동티맥/서코비 시대의 개막

올랜도 매직은 99-00시즌에 팀 베스트5중 3명이 드래프트도 받지 못한 선수들로 이뤄진 그야말로 외인구단이었지만 덕 리버스 감독의 형님리더쉽과 뛰어난 지휘능력으로 5할승률을 기록해 작은 돌풍을 일으켰다. 올랜도는 과거 샤크-페니 시절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었는지, 트레이시 맥그레디와 그랜트 힐을 영입했다. 팬들은 이 둘이 펼칠 콤비플레이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그랜트 힐이 발목부상으로 시즌 아웃되는 상황도 있었다. 하지만 맥그레디는 그동안 참아왔던 것을 한꺼번에 폭발시키며, 올랜도를 플레이오프로 이끌었다. 그해 맥그레디는 기량발전상을 수상했다.

맥그레디는 02-03시즌에는 경기당 32득점에 PER 30.3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치를 기록하고 득점왕까지 차지하면서, 당시 기준 역대 최연소 득점왕 타이틀도 손에 넣었다. 그리고 그해 플레이오프에는 디트로이트를 3승1패로 탈락직전까지 몰고 갔으나 디트로이트가 천시 빌럽스를 중심으로 공격맞불을 놓는 바람에 후반부에 가서는 방전이라는 원맨팀의 한계를 드러내며 내리 3연패하여 탈락하고 말았다.

2003년 여름에는 FIBA 아메리카 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해서 미국팀의 금메달에 기여하기도 했다.

03-04시즌에는 커리어 최고득점인 62득점을 기록하면서 다시 득점왕에 올랐지만, 당시 팀의 상태는 장난이 아니었고, 개막전 승리 후 내리 19연패를 기록하는 매우 막장상태였다. 플레이오프는 당연히 남의 잔치. 이때 팀에게 서서히 애정이 식어가던 중 휴스턴과 올랜도의 트레이드로 맥그레디는 휴스턴 로켓츠로 이적하게 된다.

위 올랜도에서의 시기는 맥그레디의 최전성기 시절이었다. 동부최고의 스윙맨으로서 그때당시 포스는 장난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랜트 힐의 기약없는 부상결장 때문에 거의 팀에서 원맨쇼를 하다보니 온갖 잔부상을 많이 당해야했다.

3.3 휴스턴 로켓츠

tracy-mcgrady.jpg
휴스턴 로켓츠 시절.


휴스턴 로켓츠는 야오밍이 버티고 있는 팀이었다. 로켓츠는 맥그레디가 야오밍과 함께 호흡을 맞추며 그가 휴스턴의 옛영광을 재현해주기를 기대했다. 티맥과 3년연장계약도 맺음으로서 그에게 힘을 실어줬다. 04-05시즌에 맥그레디는 개인기록이 많이 줄었지만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센터와 호흡을 맞추면서 여러가지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시즌이 흐르면서 둘의 2대2 플레이는 빛을 내기 시작했고, 맥그레디 본인도 승부처에서 과감하게 슛을 던지는 등 새로운 해결사로써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2004년 12월 9일 샌안토니오를 상대로 보여준 35초동안 13점 넣기는 현재까지도 티맥하면 떠오르는 플레이 중 하나. [4]



이게 바로 그플레이. 사실 저 티맥타임이 펼쳐지기전까지 티맥의 스탯은 야투 8/25에 3점 1/8로 좋지 않은 상태였던게 아이러니. 또한 상대팀 샌안토니오는 수비도 최선을 다했고(중간에 던컨이 훼이크에 속아서 추가로 4점플레이를 내준건 아쉬울 수 있을지언정 아무도 큰 잘못이라고 생각을 안했고 안한다) 파울작전으로 얻은 자유투들을 데빈 브라운이 4개 모두 착실하게 성공시키면서 딱히 잘못한게 없었다. 막판 그 데빈 브라운의 결정적인 턴오버를 제외하곤...(그 실책만 없었더라도 평소에 식스맨으로 주로 나오다 이날 20점에 자유투 8개를 모두 성공시킨 데빈 브라운의 그날 활약은 던컨에 버금가는 활약이었다. 하지만 그 턴오버로 명경기의 희생양이자 역적이 되어버렸다)

07-08시즌에는 팀의 22연승에 선봉장이었다. 이때 당시 휴스턴은 야오밍이 시즌아웃을 당한 상태였고, 티맥 역시 부상에서 자유로운 몸이 아니었던 탓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맥그레디는 팀의 22연승에 중심에 있으면서 맹활약했다. 저 연승기간동안 거의 혹사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시간을 뛰었고 어떤 경기에서는 아예 쉬지도 못하는 때도 있었다.

하지만 휴스턴에서도 맥그레디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 이상을 경험하지 못했다. 불운이라고 하면 또 불운. 여기에 자신이 시즌아웃 당한 08-09시즌에는 팀이 2라운드 진출에 성공한것도 본인에게는 그리 좋게만 보일일도 아닌 듯 보인다.

얼마나 무릎이 좋지 않았는지 그는 마이크로 프랙쳐 수술을 받기에 이른다. 이 수술은 무릎연골의 재생을 돕는 수술인데, 이 수술을 받은 사람으로는 페니 하더웨이가 있는데 하지만 하더웨이는 당시 이 수술을 받고도 기량을 회복하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아마레 스타더마이어의 경우 이 수술을 받고 지금도 훌륭한 기량을 선보이고 있다.

이 수술을 받고 재활을 통해 09-10시즌에 복귀를 했으나 당시 감독이었던 릭 아델만은 맥그레디의 건강에 의구심을 품고 그에게 많은 출전시간을 주지 않았다. 6경기동안 10본도 안되는 출전시간이었으니. 맥그레디는 팀에 불만을 느꼈고, 휴스턴 역시 맥그레디의 2천3백만 달러에 달하는 만기계약을 처분하고 싶어했다. 그때 뉴욕이 협상을 제의했고, 휴스턴은 맥그레디는 트레이드를 했다.

3.4 아주 잠깐 머문 뉴욕 닉스

GYI0060069176_crop_450x500.jpg
잠시 머물렀던 뉴욕 닉스 시절.

뉴욕 닉스 팬들은 오랜만에 슈퍼스타급의 선수가 온것을 환영했다. 맥그레디는 2010년 2월10일에 뉴욕 닉스 소속으로서 데뷔전을 치뤘다. 당시는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의 홈경기였는데, 관중들은 "We Want T-Mac"이라고 외치며 그를 환영해주었다. 이 경기에서 티맥은 32분간 뛰면서, 26득점 4리바운드 5어시스트를 기록하면서 오랜만에 전성기시절에 버금가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간혹 20득점을 올리기도 했지만 오랜기간 경기를 뛰지 않아서 실전감각이 무뎌졌는지 나머지 경기에서는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관중동원능력은 여전했으나, 뉴욕 닉스는 애초에 티맥을 오래붙들 마음도 없었다. 당시 뉴욕 닉스의 목적은 오로지 닥치고 르브론 제임스 모셔오기 뿐. 티맥은 그저 만기계약 카드일 뿐이었다.

시즌 종료후 FA가 되었지만 이미 예전의 기량을 보여줄수가 없게 된 티맥에 관심을 보이는 팀은 없었다. 시카고 불스에서 그에게 1년단기 계약에 백업 역할을 제안했을때 티맥을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아쉬울게 없다는 듯 시카고 불스는 협상을 종료했고, 그 후 어느팀도 티맥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급박했는지 맥그레디는 스스로 여러팀을 돌아다니며 워크아웃을 봐야하는 상황까지 몰렸다. 이 워크아웃이라는 것이 일반직장으로 얘기하면 면접시험과도 같은것인데, 맥그레디가 굴욕을 감수하고 이걸 했던것. 그래도 NBA구단측에서 별로 반응이 없다가 간신히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와 1년 계약을 맺게 된다.

3.5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Tracy+McGrady+Detroit+Pistons+v+Los+Angeles+1R6yriuEfoHl.jpg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유니폼을 입은 티맥. 갈수록 후덕해진다.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서의 티맥은 과거 동부지구를 개발살냈던 포스의 그 티맥이 아니었다. 하지만 짬밥을 콧구멍으로 먹은것은 아니었는지, 그 특유의 농구센스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주로 백업 포인트 가드 및 주전 슈팅 가드로 뛰면서 게임 리딩과 볼 배급을 맡으면서 디트로이트의 공격을 이끌었다. 그리고 몇몇경기에서는 덩크슛도 성공시키면서 어느정도 예전의 향수를 불러일으킬만한 활약을 하긴했다.

하지만 여전히 부상의 여파는 남았는지 디트로이트 시절에도 10게임 정도를 결장했고, 당시 디트로이트의 상황은 티맥이 그래도 어느정도 뛸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이 팀의 백코트가 부상병동으로서 그야말로 제대로 돌아간 적이 거의 없었다. 올해 디트로이트와의 계약이 종료되었는데, 과연 그가 다른팀의 부름을 받을수 있을지 팬들이 주목하고 있다.

3.6 애틀란타 호크스

한동안 조용하다가 애틀란타 호크스와 1년 계약을 맺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

136381684_extra_large.jpg
애틀란타 호크스 시절.

디트로이트 시절과 비슷한 역할이었으나 호크스에서 그의 역할은 벤치 멤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고 결국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저조한 성적을 남겼다. 자유계약선수가 되었으나 전과 마찬가지로 어느팀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결국 티맥은 방향을 틀어 중국프로리그팀인 칭다오 더블스타 이글스와 1년계약을 맺게 되었다.

3.7 중국에서의 커리어

tracy-mcgrady-china-rt-float.jpg
칭다오 더블스타 이글스에서의 티맥

2012-2013시즌에 31.6분이라는 그리 길지않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32경기(1경기는 출장정지)평균 25점. 7.2 리바운드, 5.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건재한 모습을 어느정도는 보여주었지만 소속팀 칭다오는 해당시즌에 8승 24패로 최하위에 머무르고 말았다.본인의 소속팀 악연은 머나먼 대륙에서도 변함이 없다. 더군다나 그의 개인기록도 현재 CBA의 개인기록 상위랭커들은 전부 전직 NBA리거들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기 때문에 딱히 큰 의미는 없다고 봐도 무방.

3.8 샌안토니오 스퍼스

nba_g_mcgrady_576.jpg
그리고 2월 17일 이후에도 무적선수로 있다가 샌안토니오 스퍼스와 계약했다는 소식이 발표되면서 1년만에 NBA에 복귀하게 되었다. 규정상 3월 1일까지 NBA와 계약한 적이 없는 외국리그 선수는 플레이오프 출전이 가능하기 때문에 카와이 레너드의 백업 스몰포워드로 플레이오프 출전하게 되었는데, 가비지 타임에나 나와서 득점 없이 시간만 때우는 신세. 그래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1라운드는 돌파했고, 팀은 계속 승승장구하여 드디어 커리어 처음으로 가비지 멤버로나마 파이널에 오르게 되었다.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스퍼스는 마이애미 히트에 패하며 준우승. 그리고 티맥은 8월에 은퇴를 선언하면서 결국 무관의 제왕으로 NBA를 떠났다. 그리고 샌안은 바로 1년 후 파이널에서 마이애미에게 설욕에 성공한다.끝까지 복도 없지

4 이것저것

어린 시절을 주로 할머니의 손에 의해 키워졌다. 근데 이것이 때로 티맥을 비난하는 요소로 잘 쓰였다. 03-04시즌에 올랜도가 거의 막장으로 치달았을때 티맥이 은퇴발언까지 한적이 있었는데, 이때 미국내에서는 "할머니 손에서 자라더니만 사내놈이 아주 시끄럽게 징징댄다."라고 까였다.

실제로 토론토에서 뛴 루키시즌에도 출전시간을 받지 못하자 "농구가 재미없다."고 발언하기도 하는 등 좀 성숙하지 못한 언행을 하기도 했다. 급기야는 출전시간 달라고 때를 쓰다가 팀내 배테랑에게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 짜샤!!"라고 갈굼만 받기도.

참고로 빈스 카터와 사촌이다. 카터가 세계를 경악하게 했던 2000년 슬램덩크 대회에서 같이 경쟁했고 나름대로도 흠좀무한 덩크를 보여줬지만 카터의 임팩트가 정말 무지막지했기 때문에 누구도 티맥의 덩크를 기억하지는 못한다. 안습. 그래도 카터와 함께 길이길이 남...긴 했다. 카터가 팀원과 함께 하는 덩크 과제에서 티맥 뛰어넘기를 한 덕분에(...)

위에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근육질이긴 하지만 약간 마른몸매 덕분인지 유니폼빨이 정말 잘 받는 선수중 한명이다. 당시 최악의 유니폼중 하나로 손꼽히는 토론토 랩터스의 초창기 유니폼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 어울리는편.

우리나라에는 2006년 8월달에 방문해, 농구클리닉을 통해 국내 유망주들을 지도해주기도 했다.

정말 잘 나가던 시절에는 아디다스의 대표인물이었으나, 지금 아디다스의 대표모델은 닥치고 데릭 로즈 & 드와이트 하워드. 케빈 가넷은 계약 해지 크리. 길버트 아레나스는 총기사고 크리. 티맥은 부상크리...안습...[5], 조쉬 스미스도 11-12시즌 부상. 아디다스의 저주?데릭 로즈는 이니셜만 따면 DR(의사)인데 은근한 정도가 아닌 유리몸이다

은퇴 뒤 독립리그에 도전하고 있다. 농구말고 야구!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스카우트와 훈련 중이며, 로저 클레멘스도 그의 훈련을 도와줬다고 한다. 구속은 85~86마일(136~8km/h 가량) 정도 나오고 슬라이더가 좋다고 한다. 클레멘스의 평에 따르면 제구도 나름 괜찮은 편이지만 타자를 세워 놓고 해봐야 견적이 나올 것 같다고. 그리고 독립리그 구단인 슈가랜드 스키터스에 입단했으나 결국 독립리그에서도 썩 좋은 성적을 내지 못 하였다. 그러나 인기 덕분에 독립리그 올스타전에도 출전했고, 결국 2014년 7월 17일에 짧았던 독립 리그 선수 생활을 마치고 야구계에서도 은퇴했다. 통산 기록은 4차례 선발등판에 0승 2패 6.2이닝(...) 10볼넷 0삼진(...). 조던은 더블 A이기라도 했지 [6]

5 플레이스타일

한 마디로 말하자면 간지 스윙맨의 결정체

착화신장 6 ft 8에 윙스팬또한 길어 2-3번 포지션 대비 우월한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다. 또한 커리어 평균 경기당 턴오버가 3개가 되지 않을 정도의 볼핸들링과 매 경기 5-6 개 정도의 어시스트를 적립할 정도의 리딩 능력도 지니고 있었다. 패싱 센스또한 뛰어나서 역대 스윙맨 최고의 패서중 한 명이었고, 하여튼 2미터 넘는 스윙맨이 어지간한 포인트가드들보다 공을 훨씬 잘 다뤘다. 젊었을 시절에는 여기에 어마어마한 가속능력과 역대최고로 평가받는 퍼스트스텝(그의 긴 다리길이에 기인한다)을 바탕으로 3점라인 근처에서부터 상대 수비를 한순간에 찢고 들어가 덩크나 레이업으로 마무리했다.(드리블시 자세가 키에 비해 매우 낮다) 이런 신체능력에 더해 그를 NBA 2회 득점왕으로 만들어주었던 것은 바로 점프 슛이었다. 돌파시 최고의 무기를 갖췄음에도 그는 커리어 내내 점프 슛을 우선하는 선수였는데, 수준급의 점프력에 길쭉한 키와 팔을 이용해 쏘는 어마어마한 타점의 점프 슛은 미드레인지와 3점라인 바깥 모두에서 상대의 림을 폭격했으며, 여기에 특유의 퍼스트스텝이 더해지자 조던 이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 풀업점퍼가 완성되었다. 상대 입장에서는 떨어지면 페이크후 백스텝 풀업점퍼를 쏘고, 붙으면 바로 돌파하고 들어가니 미칠 노릇이었다. 동시대의 코비가 특유의 유연성과 볼핸들링을 바탕으로 온갖 드리블 스킬을 마스터해 상대를 농락했다면, 그는 보다 더 시원시원하고 직선적인 플레이를 즐겼다고 볼 수 있다. 간지는 덤. 그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는 농구키드들이 모두 그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다만 전성기에도 프레임이 전반적으로 얇은 편이었기 때문에 림어택의 비중이나 성공률이 S급까지는 아니었다. 거기에 올랜도 - 휴스턴 시절 혹사를 통해 온갖 잔부상이 축적되었고 결국 그의 등과 무릎은 그의 퍼스트스텝과 키에 비해 유독 낮았던 드리블 자세, 순간의 민첩한 움직임들을 감당해내지 못했다. 03-04 이후로 야투율이 현격히 떨어졌던 것도 바로 이런 부상으로 인한 운동능력 악화에 있다. 그리고 자기관리가 다른 6성 슈가들에 비해 완벽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빨리 져버리는 원인이 되었다..
  1. 참고로 무임승차로 샌안토니오 소속으로 파이널을 가본적이 있다 그리고 샌안토니오는 우승을 실패했다. 재밌는게 이 "1라운드의 신" 드립이 따지고 보면 일리가 있는 것이, 매번 1라운드에서 탈락했지만 1라운드 활약만큼은 정말 엄청났다. 2003년에는 동부 최강 중 하나인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를 탈락 직전까지 몰고 갔으며, 2005년에는 226cm의 숀 브래들리를 상대로 지금도 회자되는 엄청난 인유어페이스 덩크를 포함해 30.7점으로 펄펄 날았다. 그가 본격적으로 에이스로 활약했던 2001년부터 2008년까지의 플옵 기록을 보면 평균 29.5점에 달하는데, 이는 같은 기간 코비 브라이언트의 득점기록보다도(28.4점) 높은 것이다. 물론 티맥은 2005년 전까지 원맨팀인반면 코비는 샤킬 오닐/파우가솔과 같이 뛴 기간이 길다는 것, 티맥은 매번 1라운드 광탈이라 경기수가 극히 적다는 걸 감안해야 하지만, 티맥이 1라운드에서 리그 최고 수준의 활약을 펼쳤다는 건 분명하다. 참고로 6번의 시리즈 동안 네번이나 평균 30점을 넘겼다.
  2. 1997년 드래프트 측정 결과 맨발 신장 6' 7" = 200.66cm
  3. 위키백과 영문판에서는 그를 슈팅가드로 기재하고 있다. 디트로이트 시절에는 백업 포인트 가드를 담당하기도 했다.
  4. 참고로 이경기에서는 35초를 남겨두고 스퍼스가 거의 10점정도 앞서고 있었다.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플레이오프라면 몰라도 정규시즌 게임에서 이 정도 점수차면 사실상 거의 끝난경기라 해설자인 마브 알버트와 스티브 커(시카고 왕조의 3점 스페셜리스트인 그 커 맞다)는 마무리멘트를 하고 있었고 관중들도 절반 정도 경기장을 떠난 상황이었다.(경기장을 자주 가는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수천, 수만명이 한꺼번에 퇴장하면 장난아니게 혼잡하기 때문에 사실상 승부가 끝난 시합에서는 관중들이 일찍 퇴장한다) 그런데 갑작스레 벌어진 이 사태(?) 때문에 지루해죽던(그전까지 로켓츠는 졸전을 펼치고 있었다) 관중들이 흥분하고 나가던 사람들은 들어와서 서서 구경하고 있고, 해설자까지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커는 "미리 나가신 그 많은 분들은 지금 차안에서 (중계를 들으며) '우리가 무슨 짓을 한거지??'라도 하실 겁니다"라며 미리 퇴장한 팬들의 마음에 비수를(?) 꽂았다.
  5. 정작 저 대표모델 둘도 11-12 시즌을 부상으로 마감했다. 마가 끼었나?
  6. 실제로 조던이 보여준 기량은 평범한 마이너리거의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야구로 밥벌어먹고 살만한 더블A 선수급은 되었다. 조던의 스포츠 재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리고 프로선수가 다른 스포츠에 도전하는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수 있다. 다만 조던은 운동능력이 아직 빵빵하던 30세였고 티맥은 35세에 가까운데다가 부상으로 운동능력을 많이 잃었다는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