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독립선언서

己未獨立宣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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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1 운동 때 발표된, 우리나라의 독립을 세계 만방에 알리기 위해 작성된 장문의 선언서. 3.1독립선언서(三一獨立宣言書)라고도 한다. 배운 사람들에게는 "吾等(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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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조선)
獨立國(독립국)
임과 朝鮮人(조선인)
自主民(자주민)
임을 宣言(선언)
하노라"는 구절로 널리 알려져있다. 전문과 해석은 여기 참고. 미국 독립선언서는 국보중의 국보로 취급받는데 3.1독립선언서(기미독립선언서, 기미독립선언문)는 국보로 지정되지 않았다.

민족대표 33인의 공동명의로 발표되었으며, 초안을 쓴 사람은 최남선(이 사람은 민족대표 33인이 아니다), 대원칙을 세운 사람은 손병희라고 한다. 손병희가 독립선언서를 고쳐 쓰려고 했으나 시일이 얼마 안 남아 대원칙만 썼다고 한다.처음에는 여러 단체에서 서로 자기 단체의 이름을 먼저 올리겠다다고 격렬히 싸우자 기독교계통으로 참여한 남강 이승훈의 훈계로 결국 연장자이자 주최자인 손병희가 대표로 첫번째로 실렸다. 그리고 만해 한용운의 주장으로 뒷부분에 '공약 3장'이 추가되었다.

이후 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한[1] 민족대표 33인은 그 즉시 일본 경찰에 자수한다. 덕분에 탑골공원에 모여 있엇던 사람들은 머뭇거리다가 발표했다는 사실을 조금 뒤에 알게 된 뒤 운동을 개시했다.

적극적인 독립활동을 하지 않고 자수하는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비겁하다고 평가받기도 하나, 민족대표 33인은 이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손병희 등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도 있고, 이후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사한 사람도 많다. 당시 옥고를 치루는 것과 현재 교도소 생활하는 것은 처우가 천지차이이기에 옥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담으로 문어체로 적힌 이 기미독립선언서를 한국 한자음으로 읽으면 전혀 말이 안되지만 일본식으로 읽으면 그 뜻과 의미가 정확히 전달된다.

2 배경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천명한 민족자결주의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 제국의 해체로 자주독립 의지만 보이면 독립할 수 있다는 낙관론이 퍼져 있었던 것이 이런 "약한" 독립 선언서를 쓰게 된 주요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이나 이들의 생각을 모르고 우스갯거리로 치부하는 것은 무식의 소치일 뿐임을 명심하자. 그러나 그들의 행동이 당시까지도 외교론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대적 한계를 갖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33인 중 한용운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이 모두 변절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선언서를 쓴 최남선을 포함해서 4명뿐이다..[2]

3 문체

학교대사전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긴 독립선언서라고 한다.

당시 문어체로 그대로 글을 써서 한자를 빼고 나면 한글은 조사밖에 안 남는 걸로도 유명한 국한혼용체의 독립선언서.[* 사실 원문에서는 조사조차 한자로 대체해 쓰기도 했다. "이로써"를 "()
로써"로 쓴 것이 대표적.] 이오덕 선생은 3.1 독립싸움은 민중이 한 것인데 정작 독립선언서는 민중들이 도저히 알아보기 힘들 말로 썼다면서 비판하기도 했다.(비슷한 시기 쓰여진 무오독립선언서와 비교해봐도 정말 어렵다) 그러나 고등학교 국어책에 실려있으므로 어쨌거나 한번은 보고 넘어가야 한다. 특히 한국사 하는 학생이면 더더욱 유심히 봐야 한다. 실제로 이게 지문으로 나왔는데 뭔지 몰라서 6.10 만세운동하고 헷갈린 경우도 있다 카더라(...)

딸깍발이로 유명한 이희승 선생이 한글화한 바 있으나 다들 국한문 혼용을 주로 사용한다. 이유는 불명. 국어 교과서에서 굳이 고등학교 과정에 맞게 난이도를 올리려고 읽지도 못하는 한자 투성이글을 적어 놓고 옆에 해설을 적어놓은 게 큰 게 아닐까 싶다. 예전에는 이걸 아예 통째로 외웠다고(…). 그래도 요즘은 한자를 빼놓고 싣기도 한다.

4 오역 논란

영문학자들과 학원 원장의 지적에 따르면 영문번역이 아주 엉망진창이라고 한다.연합뉴스 링크 참고 그런데 경향신문 취재 결과 이 영역본은 1919년 당시 3.1 운동에 참여했던 대한국민회 소속 미주 한인 동포가 번역한 것으로 밝혀졌다.기사
  1. 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곳이 어디냐면 당대 가장 유명한 기생집 명월관의 분점인 태화관이다. 이 태화관도 아주 골치아픈 역사적 장소인데, 자세한 것은 요릿집 항목의 태화관 부분 참고.
  2. 하지만 최남선은 민족대표가 아니었으니 사실상 3명인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