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표 33인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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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와 독립통고서에 서명한 33명의 사람들.

손병희를 위시한 천도교계 인사들이 주축이 되었으며, 이들은 구 대한제국 고관들과도 접촉했으나 별 반응이 없자 개신교, 불교, 천주교, 유림 등의 종교계 인물들과 접촉하여 민족대표를 꾸리게 되었다. 그러나 천주교와 유림은 각 단체의 이해관계로 참여하지 않았고, 불교계는 일본 불교의 침투로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두 명만이 참가했다. 반면, 개신교는 개신교 내의 민족/독립운동을 탄압하는 105인 사건으로 일제에 대한 반감이 올라있던 상황이라 천도교의 제의에 적극적으로 가담. 결국 천도교 15인, 개신교 16인, 불교인 2인으로 33인의 민족 대표단이 결성되었다. 원래는 천도교 15인, 개신교 15인으로 30인을 구성하려 했으나 개신교 종파인 감리교장로교가 숫자를 놓고 다투다가 각각 8명을 내세우고 16명으로 개신교 대표를 늘리는 대신, 불교 2인도 포함시키면서 현재의 33인으로 구성되었다. 의외로 대종교 인사들은 여기에 관계하지 않았음을 유념할 것. 유교는 학파별로 참가 여부를 놓고 갈등이 심했는데 호남의 거물 유림인 간재 전우는 머리 깎은 자들의 복국 운동은 유림으로써 상종할 일이 되지 못한다라고 거부했으나 김창숙을 비롯한 유림들은 드디어 죽을 자리를 찾았다고 기뻐하면서 참가를 결정했다. 결국 일부 학파에서 김창숙을 비롯해서 유림대표 2인을 파견했는데 문제는 다 끝나고 늦게 도착해버렸다.(...) 이에 유림대표들이 길바닥에서 통곡하는데 한양 주민들이 몰려와서 너희들이 못나서 나라를 왜놈들에게 잃었는데 무엇이 잘났다고 우느냐?라고 면박을 주자 큰 충격을 받고 유림계의 최후의 함성이었던 파리장서사건을 기획하게 된다.

일부에서 한용운이 변절 또는 한용운 제외하고 대부분 변절 또는 민족대표 33인은 만세운동이 항일운동의 끝이 난거라고 폄하도 있는데, 개소리이다. 확실히 변절한 사람은 3명(최남선 포함하면 4명)밖에 안 되며 나머지 대표들은 3.1 운동 직후 또는 이후로도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감옥에서 옥사하거나, 살아남았더라도 일제를 피해 중국, 미국 등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이런 썩어 문드러진 떡밥에 낚이는 사람이 더는 없기를 바란다. 최근까지 여전히 유통되고 있는 이 떡밥에 대한 기사가 다시 한번 올라왔다. "3·1운동 이끈 민족대표 대부분 변절했다고?"

대표적인 변절자로 불린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를 기초했을 뿐 33인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2 명단

  • 손병희 : 천도교측 수장. 1921년 사망. 딸 다섯 중 셋째 딸 손용화는 소파 방정환의 아내.
  • 이승훈 : 기독교측 수장이자 교육자. 1906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었음. 30년 작고. 33인중 가장 늦게 풀려남.
  • 한용운 : 불교 대표. 공약 삼장 작성. 말년 가난과 중풍에 시달리며 몇 푼 안되는 원고료로 연명하다 광복을 불과 1년 앞둔 1944년 사망.
  • 권동진 : 1882년 일본 망명 후 1905년경(?) 천도교 입문. 3.1 운동후 신간회 부회장으로 광주 학생운동 참여. 증손 권혁방씨는 33인 유족회 회장.
  • 권병덕 : 1894년 손병희와 함께 동학농민운동에 참가, 천도교 입문. 3.1 운동 후 천도교 감사원장, 선도사 등을 역임. 1947년 타계.
  • 길선주 : 한국 최초의 목사. 3.1운동 때 서울에 늦게 도착. 총감부에 자수하였으나 무죄로 풀려남. 독립유공자에서 제외됐었으나 2009년 건국훈장 수여.
  • 김병조 : 33인 중 유일하게 체포되지 않았음. 상해에서 임시정부 상임이사, 사료편찬위원 등을 역임. 독립혈사 간행. 북에 머물렀단 이유로 유공자 포상이 안되다 1990년 3.1절이 되어서야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김완규 : 한일 합방 후 천도교 입문. 3.1 운동후 도사직을 맡고, 민중 계몽운동. 1949년 타계.
  • 김창준 : 기독교측 대표. 함경북도 만세 운동 주도. 해방 후 사회주의 기독교 운동. 남북연석회의가 열린 1948년경 월북. 독립유공자에서 제외.
  • 나용환 : 23세 때 동학 입문. 3.1 운동 후 천도교 포교 사업. 1936년 병사.
  • 나인협 : 19세 때 동학 입문. 3.1 운동 후 천도교 교사 활동. 1951년 병사.
  • 박동완 : 기독교측으로 3.1운동 경기지방의 시위 주도. 신간회 상임이사. 1923년 하와이로 망명. 41년 병사.
  • 백용성 : 불교 대표. 법명은 용성진종대사. 16세 때 출가하여 해인사 스님들의 봉기 주도. 불교 정화 및 대중화에 힘써 서울시내에 최초로 포교당 세움. 대각사 창건후 60여종의 불경어록과 저술을 남겼다.
  • 박준승 : 29세 때 천도교 입문. 3.1 운동 때 임실, 남원, 장성 등 호남지방 민중 봉기 주도. 1921년 옥사.
  • 신석구 : 기독교 대표. 3.1 운동 후 '38년 신사 참배 거부. '45년 전승 기원 예배 거부로 옥중에서 해방을 맞았다. 1949년 감리교 북한 지역 총 책임자로 기독교 민주당 결성. 같은 해 진남포 4.19 사건으로 북한 당국에 검거되어 50년에 처형.
  • 신홍식 : 기독교 대표. 평양 남산현 교회 목사로 있다 3.1 운동 참가. 신사 참배 거부. 1937년 사망.
  • 양전백 : 평양 신학교 졸업. 목사로 있다 3.1 운동참여. 목회사업에 전념. 105인 사건에 연루.
  • 양한묵 : 1898년 일본에서 손병희를 만나 동학에 입문. 1905년 헌정동지회를 만들고 구국운동. 19년 10월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문으로 순국.
  • 오세창 : 개화론자 오경석의 아들이자 천도교 신자. 한성순보 기자. 만세보, 대한민보 등의 사장. 해방후 매일신보, 서울신문 사장. 53년 사망.
  • 오화영 : 감리교 목사. 6.25 전쟁 때 서울에서 납북되어 1962년 병사. 북한의 평양 애국 열사릉에 안치. 89년 3.1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96년 11월 위패만 국립묘지에 안치.
  • 유여대 : 모사로 3.1운동 당시 의주에서 독립선언서를 뿌리다 오후 늦게 서울도착. 일경에 붙들렸다. 1937년 사망.
  • 이갑성 : 기독교 신자. 세브란스 병원에 근무. 31운동, 민립대학 설립운동, 신간회 운동, 흥업구락부 사건 주도 등에 일제와 타협하지 않은 인물 중 한 사람이었지만, 1980년대에 변절했다는 주장 뿐 아니라 일제의 밀정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런 거 없다. 2005년 삼일절 특집 SBS 뉴스추적에서 심층취재한 결과 오히려 요시찰인 인물인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매일신문에서 2010년에 이 떡밥에 낚여 친일파 언급했다가 정정기사를 냈다.# 매일신문은 역사속의 인물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고도 친일파로 매도된 억울한 '희생자'였다고 평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
  • 이명룡 : 기독교 대표. 105인 사건 연루. 3.1 운동 후 미국으로 망명. 1956년 병사.
  • 이종일 : 천도교 대표. 보성사 인쇄소 사장으로 선언서 인쇄. 1925년 작고.
  • 이종훈 : 천도교 대표. 1931년 만주에서 병사.
  • 이필주 : YMCA 초대 체육 교사로 일하다 목사가 되었음. 1942년 작고.
  • 임예환 : 동학혁명에 동참, 3.1 운동에 가담.
  • 최성모 : 감리교 목사. 이필주를 만나 3.1 운동에 가담. 황해도 시위 주도.
  • 홍기조 : 22세 때 천도교 입문, 손병희와 평안도 천도교 독립운동 주도. 3.1 운동 후 평안도 용강에서 독립운동. 1938년 병사.
  • 홍병기 : 천도교 대표. 고려 혁명위원회 조직.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신의주에서 체포. 1949년 작고.

3 33인중 변절자들

  • 박희도
33인 중 최연소. 3.1 운동 후 잡지 『생활사』 창간. 이후 여제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 당시 신문 가십란의 단골 스타가 되었으며[1] 결국 친일 성향의 월간 잡지 『동(양지)광』의 창립인, 주간으로 있으면서 친일로 완전히 변절했다. 1948년 반민특위에 회부되었다가 51년 사망.
천도교. 선언문 초안 작성. 1934년 중추원 참의, 37년 총독부 조선어판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 39년 임전 보국단장을 역임하는 등 친일에 앞장섰다. 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을 때 다른 이들과 달리 그나마 눈물로 참회하는 진술을 하였다. 이때 옆에서 계속 변명해대는 이광수에게 닥치라고 했다. 6.25 때 납북.
3.1 운동 당시 감리교 목사로 함경남도 원산에서 만세 운동 지도. 1934년 흥업 구락부 사건으로 고문당했다. 신사 참배 및 창씨개명 행위로 변절자로 간주되나 위의 사람들에 비해 적극적인 친일 행적은 없다. 아마 자발적으로 한 이들과 다르게 못 버텨서 굴복한 듯. 독립 유공자에서 제외, 51년 사망. 청주시우암산에 조성된 삼일 공원에도 이 사람을 포함한 충청북도 출신의 민족 대표 6인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으나 1996년에 시민들이 철거해서 지금은 5개다.

4 민족대표 48인?

sam4.jpg손병희최린권동진오세창임예환권병덕이종일나인협
홍기조김완규나용환이종훈홍병기박준승이승훈박희도
최성모신흥식양전백이명룡김선주이갑성김창준이필주
오화영박동완정춘수신석구한용운백용성안시환임규
김지환최남선함태영송진우정노식현상윤이경섭한병익
김홍규김도래박인호노헌용김세환강기덕김원벽유여대

배경은 일본 법정에서 3.1운동 관련으로 재판을 받은 것이고, 이들의 사진이 당시 동아일보를 통해서 알려지면서 48명이라는 숫자가 남았다. 이들은 33인의 민족대표 가운데 31인[2]에 3.1운동 관련으로 잡혀서 같이 재판을 받은 17인을 더한 것이다. 물론 이 명단 자체는 인지도도 낮거니와, 김병조와 특히 옥고로 사망한 양한묵을 제외하는 것이 말도 안된다는 이유로 온갖 형태의 바리에이션이 존재한다[3]. 민족대표, 민족지도자, 3.1운동 지도자 등에 숫자도 48, 49, 50이 모두 존재한다.

  1. 여제자와 키스 내기 화투를 했다는 것이 알려져 엄청 시끄러웠다. 이를 처음 보도한 신문은 조선 중앙 일보였다고. 이 사건으로 박희도가 여자와 곱사춤을 잘 추는 명인이라고 소개되는 합성 드립까지 나왔다.
  2. 국외로 망명하여 체포되지 않은 김병조, 체포되어 옥고로 사망한 양한묵은 제외
  3. 석호필을 집어넣거나, 심지어 이승만이 여기에 포함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