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형우

南亨祐

1875~1943

1 개요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 겸 교육가. 보성전문 법과 교수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무총장을 역임했으며, 끝까지 일제에 타협하지 않고 한국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생을 마감했다.

2 생애

2.1 국내에서의 독립운동

1875년(고종 12년) 경상북도 고령에서 태어났다. 호는 수석(瘦石).

1908년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다음 해인 1909년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에 가입, 고향에서 지하운동을 하였다.

1911년 서른 일곱의 나이로 보성전문학교 법률학 교수 겸 보성전문학교 교감이 되었다. 그 후 1917년, 마흔 셋의 나이가 될 때까지 보전에서 법학교수로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일제 초기 신민회대동청년단 등에서 중요인사로 활약하였다. 그러다가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고향으로 내려가 1915년 2월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안일암(安逸庵)에서 윤상태, 서상일 등 동지들과 함께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朝鮮國權恢復團中央總部)라는 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회복에 신명을 바칠 것을 결의하고 활동하였다. 1915년 3월에는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奬勵契)를 조직, 민족의식을 알리고 실력을 키우는 데 전력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경남 창원(昌原) 등지에서 시위를 적극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7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해삼위 신한촌(海蔘威 新韓村)에서는 한족회(韓族會)를 근간으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가 설립되었고,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하는 등 각료를 선출하였는데, 여기서 산업총장(産業總長)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2.2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의 활동

1919년 4월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와 군자금 5천원을 지참하고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를 대표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4월 13일 여운형, 신채호, 조소앙,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주도하고, 법무차장에 선임되었다. 1919년 4월 25일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된 뒤 의원자격심사위원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919년 5월 10일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에 선임되어 활약하였으며, 1920년 11월에는 교통총장에 보임되어 교통국 등을 운영하였다. 그 후 1921년 4월 사임할 때까지 임정 법무총장과 교통총장으로 일하였다.

1921년 북경의 군사통일회와 간도의 액목현(額穆縣)회의 등에서 의견 차이로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국민대표회의를 계획하게 되자, 상해와 북경 사이를 왕래하며 절충하려 노력하였다. 1921년 6월 6일에는 국민대표회의의 주비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국민대표회의에서는 '창조파'의 대표적 인물로 활약하였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없애고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 본격적인 무장투쟁으로 나아가자고 주장한 것.

이와 병행해서 1922년 4월에는 배천택(裵天澤) 서동일(徐東日) 등과 북경성 마사묘(麻四廟)에서 무언실행(無言實行)을 행동 지침으로 일제 앞잡이를 처단하는 "다물단(團)"을 조직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도 하였다.[1] 그 후 다물단은 실제로 수많은 친일파와 일제 밀정들을 암살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서북협성학교 교감이자 김활란의 형부였던 김달하를 들 수 있다.[2]

1922년 5월에는 국민대표회의 문제로 임시정부가 혼란에 빠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과거의 분규와 착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의 완전 확실한 방침을 수립하여 독립운동이 통일적 조직적으로 진행할 것"을 선언하는 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2년 7월에는 안창호, 최창식, 신익희, 차이석, 신 숙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이를 수습하려 하였으나 별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1923년 1월 서동일(徐東日)을 국내에 잠입시켜 경상북도 청도·경산 등지에서 군자금 1,400여 원을 모집하여 송금하게 하였으며, 1924년 5월 30일 재입국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다 붙잡혔다. 1928년 동삼성 하얼빈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하여 흑룡강에서 사설 학교를 경영하였다.

2.3 쓸쓸한 말년

1930년 한국인 의사 부인이 밀고하여 공산주의자 혐의를 받고 공안부(公安部)에 잡혔다가 주민들의 진정으로 석방되었다. 1931년 수토병(水土病)으로 귀국, 고향에서 요양을 하였다.

1943년 3월 13일 혹독한 일제의 감시와 위협을 참을 수 없어 음독자살하였다. 1983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1. 이회영의 조카 이규준, 이회영의 장남 이규학 등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2. 김달하는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의친왕 이강의 부스승이기도 하였다. 서우학회와 서북학회에서 활동하며 이승훈, 안창호, 이상재 등과 친하게 지내다가 경술국치 이후 중국으로 옮겨 베이징에서 거주하면서 중국 북양군벌 단기서 정부의 시종관부 부관으로 일하면서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정보를 일본에 제공하였다. 1925년 3월말 다물단의 이인흥, 이기환 등에 의해 처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