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억추

金億秋(생몰년도 미상)[1]

조선 중기의 무신.

1 개요

본관은 청주이고 자 방로(邦老), 시호 현무이다. 전라남도 강진군 작천면 박산마을에서 출생하였다. 1577년(선조 10) 알성무과에 급제하였는데 무이만호가 되어 북변에서 전공을 세웠고 제주판관·사복시판관, 진산·순창 등의 현감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김억추를 방어사로 임명했으나 전투에 패하여 관직을 잃었다. 1594년 만포진첨절제사가 되고, 이어 진주목사·고령진첨절제사를 지냈다. 1597년 정3품에 올라 전라우도수군절도사가 되어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어란포해전과 명량해전에 참전하여 막장전투력을 보이며 추태 끝에 육지로 보직 변경을 신청하여 밀양부사를 거쳐, 1608년(광해군 즉위) 종2품에 올라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고 뒤에 제주목사를 지냈다.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강진군 박산마을로 낙향하여 여생을 보내다가 71세에 사망하였다.

2 현무공실기

김억추 장군의 후손들이 20세기 초반에 김억추 장군을 기려 행장기인 《현무공실기》를 쓰게된다. 후손들이 조상세탁

이 책은 크게 두 가지로 논란이 되었는데 첫째는 김억추 장군을 왜곡미화하였는데 후손들이 썼다는 것을 감안 하더라도 양판소판타지 소설 수준으로, 꿈에서 관우의 계시를 받고 쇠사슬을 완력으로 짊어지고 올돌목 양 쪽에 설치했다든가, 왜선에 단독으로 뛰어들어서 검풍으로 수백명을 죽였다는 등등이었다(…).
김억추 이누야샤 인터넷에 있을 정도이다.

또한 철쇄를 사용했다는 내용이 있어 이 부분도 논란거리가 되었다. 현대에 알려진 철쇄설은 사실상 현무공실기에 기반을 두고 있다. 물론 임진왜란 이후 수백년 후에 지어진 이 기록의 신뢰성은 위에 나왔듯이 제로.

3 난중일기상의 기록

9월 8일 (양력 10월 18일) <병신>(깜짝이야) 맑다.

적선이 오지 않았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우수사 김억추(金億秋)는 겨우 만호[2]감이나 맞을까 대장으로 쓰일 재목은 못되는데도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이 서로 친밀한 사이라고 해서 억지로 임명하여 보냈다. 이러고서야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뿐이다.

9월 16일 (양력 10월 26일. 명량 해전 당일) <갑진> 맑다.

(전략)
여러 장수들이 적은 군사로써 많은 적을 맞아 싸우는 형세임을 알고 돌아서 피할 궁리만 했다. 우수사 김억추(金億秋)가 탄 배는 물러나 아득히 먼 곳에 있었다. 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여 지자총통·현자총통 등 각 종 총통을 어지러이 쏘아대니, 마치 나가는 게 바람 같기도 하고 우레 같기도 하였다.

4 실록상의 기록

사헌부가 아뢰길,

(중략)
여주 목사(驪州牧使) 김억추(金億秋)는 어사(御史)의 장계대로 파출(罷黜)했어야 마땅한데 대신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여 잉임(仍任)시켰습니다. 대저 죄를 범해 파출하여야 할 수령들을 매번 적임자(適任者)가 없다고 하여 그대로 둔다면, 봉명(奉命)한 사람의 권한이 가벼워져서 탄압할 수 없게 되는 반면 죄를 범한 이는 습성이 되어 기탄할 것이 없게 되니, 그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김억추가 범한 것은 소문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어사가 혹은 추문하여 사실을 알아내고 혹은 현장을 잡아 알아낸지라, 의심할 것이 없으니 조금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김억추를 전에 아뢴 대로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성임의 일은 비변사에 물으라. 이일은 원수(元帥)이니 가벼이 논함은 부당하다. 김억추는 비변사에서 의계(議啓)하였으니, 이것 역시 따를 수 없다.”
-선조 27년 3월 7일

사헌부가 이성임(李聖任)을 체차(遞差)할 것과 김억추(金億秋)를 파직할 일을 누차 아뢰니, 상이 비변사에 하문하기를, “이성임과 김억추를 이처럼 논박하니 굳이 잉임(仍任)시킬 필요는 없는데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

(중략)
김억추는 이미 불법을 저지르다 잡혔고, 대간이 법을 지키려는 뜻이 매우 정당하니 신들은 감히 다른 논의를 할 수 없습니다.”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고 사헌부에 이르라.” 하였다.
-선조 27년 3월 12일

사간원이 아뢰기를, “만포 첨사 김억추(金億秋)는 사람됨이 탐오해서 전에 수령이 되었을 때 오로지 사욕을 채우기만을 일삼았습니다. 만포는 관방(關防)의 중한 곳일 뿐만 아니라 야인(野人)들이 왕래하며 통상하는 곳이어서 가려서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체차를 명하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선조 27년 8월 4일

고령 첨사(高嶺僉使) 김억추(金億秋)는 절박한 사정(私情)이 있더라도 이미 변장(邊將)이 되었으면 그밖의 것을 고려하지 않아야 할 것인데, 외람되게 상소하여 마침내 체면(遞免)되었습니다. 이러한 버릇은 징계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파직하도록 명하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선조 29년 5월 25일

5 창작물에서

김경진임진왜란과 격류에서는 동생 김응추와 함께 악역 개그 캐릭터로 나온다. 하는 짓은 미운데 둘이 하는 걸 보면 좀 웃기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자신을 신임 우수사라 소개하며 거제현령 안위, 미조항첨사 김응함 등과 함께 처음 등장한다. 복직한 통상 대감이 12척의 전선을 회수하러 육로를 통해 회령포로 가는 길에 합류하는 것으로 나오며, 판옥선 1척을 전력에 보탠다. 그렇지만 그 이후로 비중은 공기. 명량해전에서는 존재감조차 없기에 잘 된 고증(...) 같지만, 대신 철쇄의 비중은 엄청 크게 나와서 이순신의 전공이 퇴색되는 감이 있다.

영화 명량에서는 살인의 추억의 백광호 역으로 유명한 배우 박노식이 연기했으며, 여기서도 역사적으로도 가장 전투에 소극적이었던 것을 반영했는지, 다른 장수들이 뒤늦게나마 대장선에 합류하는 시점에서도 망설이는 표정으로 공기화되었다. 갑판의 군관, 사수, 포수, 수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판옥선 누각에서 망설이는 모습으로 완벽한 고증을 보이셨다 특히나 해전이 시작되기 전 배멀미로 드러누워 골골대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영화 상 묘사에 불만을 가진 후손들이 항의를 하고 소송도 검토중이라고 한다.(#) 이에 역덕후들의 반응은 "배설 후손이 항의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데 김억추는 뭥미?" 정도다.
  1. 일반적으로 생몰년도 미상으로 알려저 있으나 충주김씨종친회측의 설명으로는 1548년 10월 23일 출생하여 1618년(광해군 10년) 사망하였다고 한다.
  2. 일부 사람들을 이 표현을 보고 이순신이 김억추의 능력을 폄하했는지 아니면 그나마 좋게 평가한 것인지 의문시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순신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굉장히 엄격해서 후대에 전공을 높이 평가하는 사명당이나 곽재우를 각각 협잡꾼 & 평범한 인재로 평가할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