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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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정(惟政, 1544년~1610년)은 조선 중기의 고승, 승장(僧將)이다. 속성은 임(任), 속명은 응규(應奎), 는 이환(離幻), 호는 송운(松雲), 당호는 사명당(泗溟堂), 별호는 종봉(鍾峯), 본관은 풍천이며,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법명인 유정(惟政)보다 당호인 사명당(泗溟堂)으로 더 유명하고, 존경의 뜻을 담아 사명대사(泗溟大師)라고도 부른다.[1] 승려의 몸으로 국가의 위기에 몸소 뛰쳐나와 의승(義僧)을 이끌고 전공을 세웠으며 전후의 대일 강화조약 등 눈부신 활약은 후세 국민이 민족의식을 발현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2 생애

경상남도 밀양에서 임수성(任守成)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읜 사명당은 13세에 황여헌(黃汝獻)에게 사사(師事)하다가 황악산 직지사에 들어가 신묵화상(信默和尙)에게 선(禪)을 받아 승려가 되었고, 거기에서 불교의 오의(奧義)를 깨달았다. 1561년(명종 16) 선과(禪科)에 급제하고[2] 당시의 학자·대부·시인들이었던 사암(思菴) 박순(朴淳)·하곡(荷谷) 허봉(許篈)·백호(白湖) 임제(林悌) 등과 교제하였다.

1575년(선조 8년) 선종(禪宗)의 주지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에 들어가 휴정(서산대사)에게서 성종(成宗)을 강의 받고 크게 각성하였다.[3] 금강산 보덕사(報德寺)에서 3년을 지내고, 다시 팔공산·청량산·태백산 등을 유람했으며, 43세 때 옥천산(沃川山) 상동암(上東菴)에서 하룻밤 소나기에 뜰에 떨어진 꽃을 보고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문도들을 해산시킨 다음 오랫동안 참선하였으며, 46세에 오대산 영감란야(靈鑑蘭若)에 있다가 역옥에 죄 없이 걸렸으나 무죄 석방되어 금강산에서 3년 동안 지냈다.

2.1 의병 활동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의병을 모집하여 순안에 가서 휴정의 휘하에 활약하였고 휴정이 늙어서 물러난 뒤 승군(僧軍)을 통솔하고 체찰사 류성룡을 따라 명나라 장수들과 협력하여 평양을 회복하고 도원수 권율과 함께 경상도 의령에 내려가 전공을 많이 세워 당상(堂上)에 올랐다. 1594년에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劉綎)과 의논하고 가토 기요마사가 있는 울산 진중으로 세 번 방문하여 일본군의 동정을 살폈다.

가토 기요마사와의 문답이 희대의 명언으로 남았다. 자신의 진으로 몸소 찾아온 사명당에게 가토가 "조선의 보배가 무엇"이냐 묻자 사명당은 "조선의 보배는 조선 것이 아니라 일본의 것"이라고 했다. 의아해진 가토가 그 보배가 무엇이냐고 묻자 사명당은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당신의 머리를 보배로 생각한다"고 하였다.[4] 그러자 가토가 놀라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 명언은 일본에도 널리 퍼져 사명당이 포로 석방을 위해 일본에 갔을 때 일본인들이 "이 사람이 보배 이야기를 했던 그 화상인가?"라고 입을 모았다고. 당시 일본에서도 사명당의 이 문답이 널리 퍼졌던 모양이다. [5]

의 퇴속(退俗) 권유를 거부하고, 영남에 내려가 팔공(八公)·용기(龍起)·금오(金烏) 등의 산성을 쌓고 양식과 무기를 저축한 후 인신(印信, 도장이나 관인)을 되돌리고 산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를 따라 울산의 도산(島山)에 쳐들어갔으며, 이듬해 명나라 장수 유정을 따라 순천예교(順天曳橋)에 이르러 공을 세워 종2품 가선대부(架善大夫)[6]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7]에 올랐다.

다만 이 와중에 노쇠한 스승 대신 사명당이 전국 승려들의 우두머리(?) 비스무리하게 되자 이를 못마땅하게 본 이순신[8]이 그를 탄핵하기도 했다.

2.2 전후의 외교 활동 및 말년

1604년(선조 37년) 국서를 받들고 일본에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포로 3천 5백 명을 데리고 이듬해 돌아와 가의대부(嘉義大夫)의 직위와 어마(御馬, 임금이 타던 말)를 하사받았다.

그 뒤 휴정이 입적한 이듬해로 묘향산에 들어가서 스승의 영탑에 애하고 치악산으로 들어갔으며 선조의 부보를 듣고 한양으로 달려와 배곡한 후 병을 얻어 광해군이 국토 서쪽을 지키게 하려 하였으나 응하지 못하고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 입적했으며 그에게 약을 지어 보내는 등 그의 병세에 대해 걱정한 광해군은 그의 입적에 매우 슬퍼했다고 하니 조선시대 숭유억불이 일상인 가운데 왕에게 이렇게까지 대우 받았던 승려도 없었다.실록의 기사

해인사에 홍제존자비(弘濟尊者碑)가 있다. 이 비석은 불교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는데, 무려 2백년 만에 세워진 고승비이기 때문이다. 승려의 묘비라고 할 수 있는 고승비는 태조 연간에 세워진 것을 제외하고 15,16세기 동안 단 하나도 건립되지 못 하였는데, 사명당을 기점으로 우후죽순처럼 고승비가 세워져 19세기까지 고승비 170여개가 세워졌다.

저서로는 《사명당대사집》, 《분충서난록》이 있다.

2.3 야사

  • 그가 스님으로 활동한 데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그가 진사로 있었을 때 아들 하나를 낳고 본처가 세상을 떠나자 후처와 후처가 낳은 아들을 맞아들였을 때 후처는 전처에 자식이 있으면 자신이 낳은 아들에게 불리할 것 같아서 임진사 아들이 장가를 갈 때 종을 불러서 그 아들을 살해했다. 그 바람에 같이 자던 며느리는 신랑을 살해했다는 살해 누명을 받게 되었으며,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다가 어느 집에서 묵을 때 그 종이 후처의 명령으로 살해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중에 임진사 집으로 가서 모든 사실을 털어놓자 임진사는 종의 집으로 찾아와 아들을 죽인 증거를 찾아낸 다음 후처와 후처 소생들을 다 곳간에 가두어서 불태워 죽인 다음에 재산의 일부는 며느리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다 사용한 뒤 인생무상을 느껴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위에서 서술되어 있듯이 그는 13세에 스님이 되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그저 구전된 이야기일 확률이 높다.[9]
  • 외교활동 때는 그의 야사가 제법 많으며 사명당을 태워죽이려고 불을 잔뜩 지피고 죽었나 문을 열어봤더니 방 안에 고드름이 얼어있고 사명당은 "어 춥다. 불 안 지피냐?"라고 했다.[10][11] 그러자 이번엔 얼려죽이려고 방 주위에 얼음으로 둘러싸고 소금을 뿌려서 아주 차갑게 했더니 거꾸로 방 안은 찜질방 안이 돼있고 사명당은 "어 덥다. 냉방도 안 하냐?"라고 했다고 한다. 에어컨도 없던 시절에 일본처럼 기후가 온난한 나라에서 사람을 얼려죽일 만큼 냉방을 하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 알 수 없지만 넘어가자 731부대의 시발점? 사실 소설 임진록의 영향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위로 올라가면 최고운전의 흔적도 보이고. 소설, 심지어 근대 소설속 한 대목이 야사로 알려지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다.
  • 만나기 직전에 몇 리를 두고 양편에 병풍을 두어 말 그대로 "주마간산" 격으로 지나가게 한 다음, 왜왕(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의미함)이 그 글귀를 본 적이 있냐고 넌지시 물으니 죄다 줄줄 외워버려 데꿀멍헸다는 일화도 있고[12], 시뻘겋게 달아오른 철마 위에 앉아도 끄덕 없었다[13]는 말도 전한다.
  • 소설 임진록에서는 이런 놀라운 도력에 충격을 먹은 일본이 조선에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고까지 써 있으며 물론 자위성 소설이므로 내용은 과장됐다. 이외에도 서산대사에게 강의받던 시절에 그에게 불손하게 굴다 역관광당하고 감복하는 내용의 일화도 있는데, 앞의 야사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성정이 괄괄한 편이었던 듯하다.
  • 사명당이 절에 거주할 때, 왜군이 쳐들어와서는 행패를 부리는데, 장수와 필담을 나눴던 일화가 있다. 장수가 "죽고싶지 않거든 이 절의 보배를 가져오라."라고 했으나, 사명당이 "절에서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배를 채우는 승려들에게 무슨 보물이 있겠는가?"라고 한 후, "그대도 학식과 견해가 있을진대, 장수된 이로서 이쯤하고 물러가라."로 필담을 끝낸 후, 탄복한 장수가 절 앞 귀퉁이에 "이 절에는 고승이 계시니, 왜군은 굳이 올라가 절을 뒤지지 말 것."이라 적어 그 절은 안전하였다고 한다.

3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3.1 게임 임진록 2

게임 임진록에서는 지팡이에서 나오는 번개로 공격하는 장수로 낙뢰술과 기우제를 쓸 수 있다. 기우제와 지진술을 쓸 수 있는 사이쇼 죠타이와 쌍벽을 이루는 스님 장수. 조반에 와서는 미션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못했다. 등장했던 미션이 전혀 없는건 아닌데 워낙 적어서 (...)
거상에서는 레벨 90이 되면 자신의 스승인 서산대사로 전직한다.(...) 아예 사람이 바뀌다니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적어도 2차 전직시에 여체화 되는 누군가에 비하면 신세가 나은 편이다. 제자와 달리 서산대사의 뇌격진은 엄청난 범위 + 엄청난 데미지로 등장과 동시에 조선 데미지 딜러 역할을 바로 가져왔다.

사람들이 잘 눈치를 채지 못하는 부분인데, 소환시 대사가 "사명대사 대령했습니다."이다. 자칭 위대한 승려라니 본격 궁예

3.2 만화 아스피린

김은정만화 아스피린에서는 단군이 다스리는 조선의 수석 마법사이자 왕의 조언자로 등장한다. 사실상 실존했던 사명대사에게서 이름만 빌려온 전혀 다른 성격의 캐릭터이다.

단군, 사방신 등과 함께 이 만화의 흑막을 이루는 인물들 중 하나. 수석 마법사 답게 강력한 마력을 지니고 있으며 단군 처럼 성격은 대체로 능글맞고 교활한 성격. 단군처럼 이미 나이가 많은 노인이지만 스스로에게 마법을 걸어 아직 젊고 잘생긴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참고로 전 수석마법사는 사명당과 단군의 짜짜꿍에 의해 숙청당했다.

작중 내내 단군의 곁에 붙어다니며 그와 함께 정국을 논하거나 무엇인가 음모를 짜고 있는 듯.
  1. 사실 이쪽이 더 알려져있다.
  2. 조선시대의 승과라는 점에서는 특기할만한 일이다. 이건 문정왕후의 영향으로 아주 잠깐 불교가 숨을 돌리면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실제로 이 승과를 통해서 휴정과 유정 등 임진왜란 시기 승병을 이끈 지도자들이 대거 등장했다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이 승과 합격자들의 이후 활약만 봐도 문정왕후의 호불활동은 적어도 본전치기 이상은 된다.
  3. 이는 자기 재주를 과시하던 사명당이 서산 대사에게 관광당하고 진심으로 감복하여 그의 제자가 된다는 야사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4. 조선에게 최악의 적장(가토는 한양을 점령한 뒤 왕릉을 파헤치고 경복궁을 불태웠다. 게다가 조선의 왕자들을 포로로 잡기까지 했다)인 가토를 체포, 척살하면 거액의 상금과 높은 벼슬을 내릴 것임을 뜻한 말.
  5. 상식적으로, 적진에 들어가서 적장 면전에다 "니 머리를 잘라다 바치면 인생 횡재할 거다" 식의 말을 한다는 건 왠만한 멘탈갑 아니면 하기 힘들다. 사명당의 대범함이 잘 드러나는 말.
  6. 종2품 하계의 계급 이름.
  7. 중추부의 동지사 보직.
  8. 사명대사를 협잡꾼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이것은 사명당이 전국 승병들의 편제를 일원화하면서 기존에 이순신 휘하에 있던 승병들의 지휘권을 가져간 데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흠좀무. 참고로 충무공께서는 곽재우를 그저그런 장수로, 이일을 나쁘게 평가했다.반박하고 싶은데 그 유명한 통상대감인지라 반박할 수가 없다. 이일은 도주왕이니 좋게 볼 수 없긴하다...
  9. 이야기에 따라 며느리가 자결하거나, 며느리가 자결하려고 할 때 사명대사가 설득해서 며느리를 잘 돌려보냈다는 버전이 있다.
  10. 참고로 이 부분은 머털도사와 108요괴에서도 패러디되었다. 내기 요괴가 머털이를 오래 못 버티게 하려고 장작을 마구 쑤셔넣어서 온돌방을 데웠는데 문을 열어 보니까 방 안에 고드름이 얼어있고 머털이 曰, "으. 춥다. 문 닫아라."
  11. 그런데 당시 일본은 온돌로 난방을 하지 않기 때문에...애초에 설화에 참거짓을 논하는 것도 문제가 있고... 그래서 몇몇 이야기에서는 이걸 위해 특별히 무쇠로 만든 방을 준비했다고도 한다.
  12. 판본에 따라서는 줄줄 외우다가 딱 한 폭만 말하지 못하자 왜왕이 사명당을 의심했는데 그의 대답은 "보지 못한 것을 어찌 외우겠는가"였고, 사람을 보내 병풍의 상태를 살핀 결과 사명당이 외우지 못한 그 한 폭만 바람 때문에 접혀서 가려져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3. 판본에 따라선 여기서 사명당이 결국 폭발하여 팔만대장경을 외우자 일본 전역에 태풍이 불어 대홍수가 나버리고, 도쿠가와가 그제서야 잘못을 빌자 일본인의 대를 끊기 위해 매년 일본인 여자아이의 가죽 300장과 일본인 남자아이의 불말을 석 섬 서 말씩 조공으로 바치라 했을 때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간신히 모면했다고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