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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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玉吉
1921년 4월 17일 ~ 1990년 8월 25일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교육자, 관료, 정치인이다. 김동길 연세대학교 명예교수의 누나이기도 하다. 종교개신교이다.

2 생애

1921년 평안남도 맹산군에서 태어났다. 1943년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근무하다 미국 오하이오의 웨슬리언 대학교로 유학갔다. 여기서 기독교문학을, 템플대학 대학원에서 교육행정을 공부한다. 1952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조교수, 부교수, 문과 학무과장을 역임하였다. 1961년 40세의 젊은 나이로 이화여자대학교 제8대 총장에 취임하였고, 동 대학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면서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하였다.

1979년 12월 박찬현의 뒤를 이어 문교부(현 교육부)장관에 임명되었다. 1980년 5.17 내란 때 무장 군인들이 중앙청의 전화선을 끊어버리고 중앙청을 포위하는 상황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주영복 국방장관이 밀어부쳐서 해당 반대는 무산되었다. 이후 문교부장관직에서 경질되었다.


유신반대 시위 때도 학생들의 맨 앞에서 시위대를 보호하였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 더불어 이때 총학생회장이 숨을 곳이 없자 김옥길 총장이 나서서 숨겨주었는데, 그에 감동받았던 총학생회장은 후에 이화여자대학교의 총장이 된다! 이 총학생회장이 바로 제14대 김선욱 총장.

대강당 채플이 끝나자 4,500여 학생들이 "유신 결사반대!!" "구속 학우 석방!!"을 외치며 교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 초겨울임에도 엄청나게 추운 날씨였다. (…) 김 총장은 시위 행렬의 맨 앞에 서서 학생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 전해 10월 대규모 시위에서도 그는 정문을 뚫고 나가려는 학생들에게 "나가려거든 먼저 나를 밟고 나가라!!"고 소리쳤었다. 이화사(史)에 '남기고 싶은 말'로 기록된 이 한마디는, 학교 밖으로 맹진하려던 행렬의 속도를 일시에 중단시켰었다. 그러나 올해는 달랐다. 민주화를 쟁취하는 일은 민족 감정의 분출이었고, 이를 이룩하려는 학생들의 각오는 목숨을 건 사투였다. 시위 행렬은 순식간에 이화교[1]를 벗어나 버스가 다니는 큰길까지 내달렸다. 학생들이 기승을 부릴수록 경찰은 난폭하게 최루탄과 곤봉을 휘둘러대었다. (…) 총장은 경찰의 진압을 온몸으로 막으면서 벌써 5시간째 학생들의 아우성과 격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밤이 깊어지자 "이제 대강당으로 가서 철야기도를 하자."고 학생들을 달랬다. 그리고 밤 9시가 넘어서야 지칠 대로 지친 긴 대열을 이끌고 학교로 돌아왔다. '철야기도'를 내세운 총장의 순발력은 벼랑 끝에 서 있던 학생들에게 돌파구를 찾아준 것이었다.
선술했듯이 김동길 前 연세대 교수의 누나.
  1. 정문 앞에 있었던 다리. 지금은 복개되어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