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 중기의 무신이자 충무공 이순신의 부관
金浣. 1546~1607.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자는 언수(彦粹), 호는 사성당(思誠堂)이며 경상북도 영천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사도 첨사로 충무공 이순신 휘하에서 전공을 세운 인물.
난중일기에서 근무 태만으로 제일 먼저 이순신에게 벌을 받은 무장[1]으로, 그 외에도 제법 많이 개겨서 자주 처벌받았다.[2] 이순신의 성격을 생각하면 진즉에 목이 안 달아난 게 용할 지경이다.
그래도 임진왜란 때 이순신을 따라 출전하여 해전에서 적의 배를 탈취하거나 목을 베어[3] 오는 등 용맹을 떨치며 많은 공을 세웠으며, 또한 초기에 벌을 받아서 상관인 이순신에게 찍혔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친밀한 관계였는지(또는 능력이 아까워서 봐줬다가 나중에 호감을 가졌던가) 난중일기 곳곳에 이순신과 함께 술을 마시거나 활을 쏘는 등 함께 어울리는 모습이 자주 나타난다. 아닌게 아니라 김완이 한 행동이 문제된 수위가 일반적으로 보기에는 문제 없지만, 통상대감이 보기에는 군기 빠진다고 처벌된 것이라 해석이 가능하다.이순신: 색휘, 자꾸 뺀질거릴래? 명량해전에서 서술된 것을 살펴본다면, 통상대감 스스로도 자신이 설정한 기준이 어떠한지를 잘 알고 있으며, 이런 설정이 현장 지휘능력 유지라는 점에서 김완 역시도 이러한 처벌에 수긍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기록 때문에 밑에 나오는 불멸의 이순신에서 다운그레이드 대상자에 포함되어 제대로 피해를 입었다.
그 후 원균의 칠천량 해전 때 참전했다가 패하고 일본에 끌려갔으나 탈출했고, 그 후 패전의 원인을 두고 원균을 비난하다가 선조에게 찍혀 파직당해 왜란이 끝난 후에야 함안군수로 있다가 사망했다.
김경진과 안병도가 공저한 소설 임진왜란(김경진) 1~2권의 칠천량 해전 관련 장면 대부분이 김완의 후손들이 1918년에 정리한 행장기인 해소실기에 기반해서 작성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김억추의 행장기인 현무공실기(1908년)와 마찬가지로 행장기이며 너무 긴 시간이 지난 뒤에 간행되었기 때문에 신뢰하기 어려워 보임에도 불구하고, 실록에 남은 기록과 사실상 일치하며 개인의 공훈이나 유능함을 과장하는 경향 없이 담담하게 작성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전세계 공통적으로 (조상에 대한 미화 등으로 인해) 과장이 심한 행장기들 사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경우. 말 그대로 가전 문서류를 그대로 취합한 사료집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책이다. 이 때문에 해소실기를 유네스코 기록 문화 유산에 올려, 기존 등재된 조선왕조실록, 난중일기와 더불어 정유재란에 대한 객관적 시각을 가진 조상께 대한 예의를 표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박철민이 열연. 그야말로 개그 캐릭터로, 명대사는 "방포하라! 화약을 애끼지 마라! 왜놈들 대가리도 애끼지 마라! 문어대가리 놈들 머리통에 분노의 화살촉을 꽂아라!!" 경상도 사람인데 극중에서는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한다.[4] 또한 근무 태만으로 이순신에게 제일 먼저 벌을 받았기 때문인지 요령 피우는 스타일의 캐릭터로 각색되었다.
또한 '첨사매'를 부리는 모습 때문에 해리 포터를 따 '김완포터'라는 별명을 갖기도 했다. 첨사매와 연 등을 활용하고 야간에는 신기전을 이용하여 신호를 하는 방법을 처음으로 고안하는 등 통신/정보에 제법 능하며, 조류 등을 읽을 줄 아는 등 개그 캐릭터이지만 능력은 제법 있다. 두루두루 제법 친한 법인데, 그중 특히 녹도 만호 정운과 친밀한 사이로 나온다. 이순신과 다투고 씩씩대며 돌아가는 정운에게 다가가 "따라가고 싶지요? 님 말 다 맞다고 해주고 싶지요? ㅋㅋ"하며 갈구기도 하며, 정운이 부산포 해전에서 전사하고 장례를 치를 때 "가지 마소 정만호, 이렇게는 못 보내네..."라며 오열하는 장면은 제법 찡하다. 그리고 설정상 어영담이 과거에 상급자로 근무한 적이 있어[5] 친분이 있어서 어영담은 죽음을 앞두고는 김완에게 물길에 대한 자료를 넘겨주고 자신을 대신해 향도가 되라고 전한다. 어째 중간에 죽는 사람들 하고 친하다. 사망플래그?
2 조선 중기의 무신
金完. 1577~1635. 조선 중기의 무신. 위의 1의 내용과 혼동되기도 했지만 이 인물은 주로 광해군, 인조 때 활약했다. 자는 자구(子具)이며, 시호는 양무(襄武). 본관은 김해. 한산도 대첩 때 전사한 김극희의 조카.
정유재란 때부터 활약[6]했으며 이괄의 난 진압에도 공을 세웠다. 이 때의 공으로 진무3등공신(振武三等功臣)에 올라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다.
흔히 김완 장군 영정이라 하면 검색되는 위의 그림은 바로 이 김완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1과 혼동하지 말자.[7]
3 일본어 서적 번역가
김완(번역가) 문서로,- ↑ 임진년 2월 25일 / 3월 20일 기록. 정찰 임무를 게을리하는 편이었다.
- ↑ 어느 정도였냐면 자기 관할 지역을 한나절 만에 다 보고 돌아왔다고 허위보고를 했다!!! 더욱이 전라좌수영 관내에서 방어준비태세가 최하위 꼴찌였다.
- ↑ 당포해전에서 권준의 활을 맞은 도쿠이 미치유키를 군관 진무성과 함께 도선해서 목을 배었다는 기록이 있다.
- ↑ 다만 이는 배우인 박철민이 광주광역시 출신이기 때문에 각색한 것이다.
- ↑ 어영담은 한 때 여도 만호 직을 맡았다가 사직해서 어부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이는 김완의 책임이 일부 있었다. 떠돌이 어부들인 포작들을 전임 좌수사가 왜구로 몰아서 목을 베도록 했는데 어영담은 이를 반대한 반면 당시 휘하 권관인 김완은 좌수사의 강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명을 따랐던 것. 김완이 어영담을 찾아가 좌수영으로 들어오라고 설득할 때 이 사건을 언급한다.
- ↑ 무과에 급제했으나 보직을 받기 전에 정유재란이 터지면서 정규군에 합류하지 못한 채 유명한 의병장 조경남과 합류해서 그 휘하에서 활약했다. 이후 정규군에 편입되고서도 상당한 공을 세웠다.
- ↑ 심히 곤란하다고 했지만 1의 김완도 괜찮은 군공을 세운 인물이니 곤란할 것은 없다. 그냥 헷갈리지 말자 정도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