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환

1 독립운동가

金龍煥
1887-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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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다크 나이트
어둠에서 묵묵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

1.1 개요

자는 여현(汝見). 일제강점기때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군에게 독립자금을 모아서 전달했던 독립운동가.

경상북도 안동 일대에서 알아주는 명가였던 의성 김씨 학봉종가[1]의 장손[2]으로, 퇴계 이황의 대제자인 학봉 김성일의 13대손이며 역시 독립운동가로 의병활동을 했던 서산 김흥락의 손자이기도 했다.

1896년 의병활동을 벌이던 의성 김씨 일족인 김희락(김흥락과는 사촌지간)이 패전하여 학봉종가로 쫓겨와서 숨는 일이 있었다. 이에 일본군은 김희락을 잡아내고, 김흥락과 김흥락의 동생 김승락, 김진의, 김익모 등을 포박해서 마당에 꿇어 앉게 하고 집안의 물건을 가져가는 등의 일이 있었다. 김희락은 총살당했다. 김흥락은 안동 유림의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지역 유지였는데 이런 수모를 당하고는 가문과 전 제자들을 모두 총동원해서 의병활동을 벌였다. 김흥락의 제자가 700여명이었는데, 독립운동으로 훈장을 받은 사람만 60명이 나왔고[3], 의성 김씨 문중에서 훈장 받은 사람이 27명인데 이 중에서 학봉 직계에서만 11명이 훈장을 받았다. 잘못건드려도 한참 잘못 건드린 것이다.

김용환은 어릴적에 이 모습을 목격하고 독립운동을 돕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김흥락의 영향을 받아 1908년 이강년 의병 부대에 참가하였으며, 1911년에는 김상태 의병 부대에 참가하는 등 안동 지역의 의병 활동의 중심이었다[4]. 3.1운동 이후에는 만주 망명길에 올랐으나 신의주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안동으로 돌아왔으며, 1921년에는 만주 길림의 서로군정서[5]와 연결되어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단체인 의용단의 서기로 활약하였다. 다만 대다수의 부호들은 친일 또는 민족반역자들 이었기 때문에 큰 효과는 거두지 못했고, 결국 1922년, 일본 경찰에 3번째로 체포된다.

결국 김용환은 자금조달을 위해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데...

1.2 도박활동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기 시작한다. 세간의 인식은 의성 김씨 집안의 도박꾼이자 파락호.[6] 경북 안동 출신의 저술가로 <양반동네 소동기>, <나의 양반문화 답사기> 등의 저자인 윤학준 교수는 '조선 3대 파락호'로 흥선대원군 이하응, 1930년대 형평사 운동의 주역인 김남수와 함께 이 사람을 꼽았다.[7]

당시 안동 일대의 노름판에는 꼭 끼었다고 하며, 초저녁부터 노름을 하다가 새벽녘이 되면 판돈을 걸고 마지막 베팅을 하는 주특기(...)가 있었다고. 만약 베팅이 적중하여 돈을 따면 좋고, 그렇지 않고 베팅에 실패하면 "새벽 몽둥이야" 하고 큰소리로 외쳤는데, 이 소리가 나오면 도박장 주변에 잠복해 있던 그의 수하 20여명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 판돈을 자루에 쓸어담고선 유유히 사라졌다고 한다.(...) 현재 싯가로 200억원 상당의 재산과 전답을 도박으로 말아먹은 것도 바로 이 시기 벌어진 일.

그 꼬락서니를 보는 문중의 자손들은 "집안 말아먹을 종손이 나왔다"고 혀를 차면서도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서 집과 전답을 되사주곤 했다. 종가는 문중의 구심점이므로 종가가 망하면 문중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동딸이 시집갈 때 시가(媤家)에서 장롱을 마련하라고 준 돈 역시 도박으로 탕진, 결국 외동딸은 친정 할머니[8]가 쓰던 헌 장롱을 들고 울면서 시집을 갔다고 한다. 게다가 시가의 가세가 기울자 그 헌 장롱이 귀신들린 장롱이라고 해서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숴서는 불에 태우기까지 했다고. 이 정도니 문중 사람들이 엄청 욕했지만 김용환은 "집안에 '학봉(가문의 조상 김성일)'과 '난봉'이라는 두 봉황이 나왔으면 된 거 아니냐?"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그때는 놀림받았지만 알고보니 말그대로 휘황찬란한 봉황이었단 게 함정 혹은 주작이라고 볼수도...

하지만 조선의 다크 나이트 어둠에서 묵묵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란 별칭이 이런 행적만으로 붙기는 힘들것이다.조선묵시록 김용환

사실 그의 재산은 만주의 독립군에게 보내졌다. 도박판에서 돈을 날리는 모습은 재산의 행방을 묻는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위장이었던 것.

윤학준 씨는 <양반 동네 소동기>에서 아래와 같은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그 그 전년 여름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나는 친한 친구인 K로부터 김용환 씨를 '독립 유공자'로 추서하기 위해 지금 자료를 모으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무리 참봉 할배(김용환 씨를 말함)가 주색잡기에 빠졌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 막대한 재산을 탕진했을 리가 없어. 참봉 할배의 기행, 난행은 특고의 눈을 속이기 위한 것이었고, 사실은 독립 운동을 위한 군자금을 보내고 있었음에 틀림없어."

확증이 있느냐는 나의 질문에 아직 확실하다고 말할 수 없으나 그럴 듯한 흔적은 몇 개 있다고 했다.

사실 저렇게 "이기면 내것 져도 내것" 식으로 도박을 했는데 재산을 탕진했다면 이상하긴 할것이다.

이전 서술에서는 "일제의 눈을 속여 군자금으로 몽땅 보냈다는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제시된 부분이지만, 해당 주장의 근거로서는 부족한 면이 너무 많다. 일단 해당 문단이 근거가 없다고 활용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료를 모으고 있지만 아직 확실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저 이야기의 시점이 아무리 짧게 잡아도 1990~1991년 정도이기 때문이다. <양반 동네 소동기>의 원전인 <나의 양반 문화 탐방기>의 출간이 1995년 3월인데, 이 책은 일본에서 일본어로 출간된 <온돌야화>와, <역사에 얼룩진 한국-한국양반기행>을 하나로 합쳐 한국어로 다시 번역한 것으로 두 책의 출간은 1983년과 1993년이다. 집필 기간까지 고려하면 아무리 늦어도 1992년에 저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인데, '그 그 전년 여름'이라는 서술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1~2년 전인 1990~1991년 사이로 추정된다. 독립 유공자 추서는 1995년으로, 아무리 시간대를 좁혀 잡아도 4~5년의 시간차가 있다. 그 정도 시간이라면 추가적인 자료를 모아서 제출할 수 있는 시간이다. 낡은 정보가 개정증보판을 내면서도 업데이트가 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혼란을 주는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1.3 이분의 평가

1946년, 임종을 할 무렵에 이 사실을 알고있던 독립군 동지가 머리맡에서 "이제는 만주에 돈 보낸 사실을 이야기 해도 되지 않겠나?"고 하자 "선비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이야기 할 필요없다"고 하면서 눈을 감았다고 한다.

막대한 재산, 명문가 장손이라는 명예도 버리고, 일가친척들을 포함해서 주변 사람들에게는 파락호라고 경멸받고, 심지어 하나뿐인 외동딸에게마저 원망과 미움을 받으면서도, 죽는 순간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 진정 노블리스 오블리제라 하겠다.

김용환 선생의 외동딸 김후웅 여사는 1995년 아버지 김용환의 공로로 건국훈장을 추서 받는다. 훈장을 받는 그 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회한을 '우리 아배[9] 참봉 나으리'라는 글로 발표한다.

그럭저럭 나이 차서 16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 서씨 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 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가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서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 어매 쓰던 헌 농 신행 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 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 뿐인 외동딸 시가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바쳤구나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내 생각한대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 아닐진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여담이지만, 그의 장인인 이중업은 1914년 안동과 봉화 장터에 격문을 돌리고, 1919년 베르사유 회담에 보낼 청원서에 넣을 강원도, 경상북도 지역의 유지들의 서명을 받고 중국으로 가던 도중 사망했다. 그의 장모인 김락은 예안면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56세의 나이에 고문을 당하다 실명했다. 처남을 비롯한 그의 처가 역시 독립운동에 매진했다[10].

MBC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12년 5월 6일자 방송분에서 이 내용을 다룬 바가 있다. EBS 역사채널 e에서도 다룬 바 있다.#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정치인, 기업인들만 줄줄이 나오고 그의 이름은 맨 마지막에 나온다. 에잇 퉤 2013년 8월 확인결과 맨 위에 나오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만세! 하지만 2014년 3월 확인결과 맨 위에 나오지 않고 있다. 이건 네이버 뿐만 아니라 다음도 마찬가지다. 에잇 퉤 반면 2016년 2월 4일 현재 구글의 경우 검색결과 1위는 나무위키의 현재 항목이다. 근데 구글은 원래 자기가 많이 들어가는 사이트를 1위로 표현한다(...)2위는 위키백과의 독립운동가 김용환 항목, 3위는 위키백과의 김용환 항목이 검색되었다. 검색결과 최상단에는 김용환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라는 설명과 생전 사진이 올라와 있다. 외산 검색엔진이 독립운동가 검색결과를 우대해 주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2015년 6월 21일자 팟캐스트 방송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에서 145회로 파락호 김용환 특집을 다루었다. 김용환 선생의 행적과 파락호로의 위장과정, 그리고 김용환 선생의 처가 이야기가 같이 다루어졌다.

2 한국의 관료, 정치인

2.1 1900년생

金容煥
1900년 04월 15일 ~ 1969년 04월 25일

1900년 전라남도 광주군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광주농업학교(현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광주지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광주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2 1932년생

김용환(1932) 문서로.

3 한국의 만화가

김용환(만화가) 항목으로.

4 만화가 마늘오리의 본명

자세한 건 마늘오리 항목 참조.

5 축구 선수 김용환

김용환(축구선수) 참조

  1. 학봉 김성일의 후손으로, 김성일의 호를 당호로 삼았기 때문에 학봉종가라고 부른다.
  2. 완전 직계는 아니고, 집안에서 양자로 이어진 것이다. 김용환 역시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역시 집안인 김시인을 양자로 들여서 종통을 이었다.
  3.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이고, 국민대표회의 의장 김동삼, 만주 독립군 활동을 한 이승희, 김대락, 김원식 등이 뒤를 잇는다.
  4. 이 때 같이 활동한 인물이 역시 이쪽 집안인 김현동이다. 김현동 역시 대통령표창,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집안 전체가 독립운동가.
  5. 안동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은 서로군정서와 연결된 인물이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원식과 김찬규.
  6. 양반가문을 직접적으로 몰락시킨, 또는 몰락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을 경멸조로 부르는 말.
  7. 정작 이 세사람모두 난봉꾼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일을 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다만 큰일을 하다보니 가세가 기운 탓은 있지만.
  8. 친정 할머니께서 시집올 때 가져오신 오동나무 장롱이다. 아래 김용환 선생의 따님이 쓰신 시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를 보면 큰 어매가 쓰던 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안동 지방에서 큰 어매는 친 할머니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그런데 안동 출신의 이동형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이이제이에서는 큰어머니(?)가 쓰던 장롱이라고 했다. 하지만 김용환 선생이 종손(종갓집의 큰아들)이기 때문에 큰어머니가 있을 리가 없을 테니 오류로 보인다. 그 외 친정어머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9. 아버지의 경북 북부지방 방언
  10. 안동 인근은 퇴계의 학맥이 통혼 등을 통해서 엮여 있었는데, 김용환의 장인이 예안의 의병장인 이만도의 아들 이중업이고 이중업의 동서가 고성이씨 이상룡이다. 김용환의 딸 김후웅 역시 청송 의병의 주역인 마평 서씨 서효원의 손자 며느리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대규모 종가들이 친일로 기운 사례가 많은데 비해서 안동 인근은 신통할 정도로 인맥이 독립운동으로 기울었다. 김흥락의 제자중 독립운동으로 훈장을 받은 이가 60명이라는데, 안동과 주변 시군에서 독립운동으로 포창 및 훈장을 받은 이들을 통털으면 약 7,800여명이 나온다. 아직 인정받지 못한 독립운동가까지 합친다면 만명 단위가 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